사랑과 계명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장)
예수가 부재하는 세상의 그리스도인들
예수의 임박한 죽음(11:53)과 그 예고(12:7, 24, 33)는 제자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제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신다는 예수의 말씀(13:36)은, 예수께서 계시지 않는 세상에 제자들은 고아처럼 방치된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18절). 고아가 된다는 것은 부모의 상실, 다시 말해 부모 자녀 관계의 단절입니다. 단절이야말로 죽음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에서, 아무도 비껴갈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예수의 떠나심(죽음, 부활, 승천)으로 인한 예수 부재의 상황에서 제자들이 느낀 단절의 두려움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경험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의 고별담론(14-16장)은 이 경험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는 고아처럼 버려지는가”의 이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세 가지 약속입니다. 보혜사(성령)를 보내신다는 약속(16-17절), 예수 자신이 제자들에게 다시 오신다(부활?)는 약속(18-20절), 제자들이 아버지와 예수와 함께 거하리라는 약속(21, 23절)이 제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이 약속들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약속들을 반드시 지키실 것인데,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 약속들을 완성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셨고(20:19), 성령을 수여하셨습니다(20:22).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 (21절)
사랑하는 이들에게 유언이 남겨지듯, 고별 담론에서 “너희”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예수를) 사랑하는 이들”입니다(15절). 예수의 고별사는 예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들이 이 말씀 속에 있는 약속을 상속받습니다. 사랑은 예수와 하나님 관계의 본질이고, 예수와 제자 관계의 바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맺어지지 않습니다(요1:13). 하나님과 그 자녀의 관계는 사랑에 의해 생겨나고 유지됩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영접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이 사랑에 의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1:12-13; 3:3).
자칫, “나(예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말씀이,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오해를 일으킬 여지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번째 선언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3:16). 그 사랑이 독생자인 예수를 보내셨고, 그러므로 예수는 모든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통해 주어진 사랑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사랑이신 예수를 거절함으로써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사랑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이며, 예수를 사랑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함이니, 곧 하나님 사랑을 못 받음과 같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계명을 지킨다(15, 21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계명을 지킨다”(15절)는 첫 구절은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이라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21절)라는 마지막 구절과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이룹니다.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읽을 때, 흔쾌히 동의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습니다. 누구의 명령(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꼭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채찍도 당근도 얼마든지 복종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심판을 받지 않으려는 두려움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다른 이들은 상을 받으려는 욕망을 따라 주님의 말씀에 복종합니다. 두려움이나 욕망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동기라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계명을 지킴과 주님을 사랑함은 어떻게 서로 필요충분조건이 된다는 얘긴가요?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계명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합니다. 계명이라는 말에서, 대부분은 모세가 이스라엘에 전한 “율법”을 떠올립니다. 사실상, 성서에서도, ‘계명은 율법’이라는 공식이 대체로 성립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 계명” 역시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예수께 끌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8:5)라고 예수의 뜻을 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모세의 계명(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음으로써, 예수의 계명은 율법이 아님을 보이셨습니다.
대신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후의 대화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계명이 무엇인지 밝히셨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계명은 사랑하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고별 담론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라는 말씀으로 다시 확인됩니다.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의 계명이고 보면, 예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함 외에 다른 방법으로 그분의 계명을 지킬 방도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충성스럽게 주님께 복종하더라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계명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5절)는 말씀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서로) 사랑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계명을 지키라”는 예수의 말씀은 맹목적으로 복종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명령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예수를) 사랑하면’이라는 조건과 묶여 있습니다. 예수의 계명은 두려움 때문에 의무적으로, 마지 못 해 지킬 계명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 복종한다는 것은, 사랑의 복종이요, 사랑에 의한 복종이며, 사랑에로의 복종입니다. 사랑함을 떠나서는 예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보혜사를 보내신다 (17절)
두려움이나 욕망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에너지입니다. 에너지는 어떤 일을 하도록 하는 힘입니다. 심판을 두려워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두려움의 일입니다.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사랑의 일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게 하는 그 힘(에너지)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요한 사도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요일4:7-8). 그 사랑의 영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전하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영(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다고 예수께서는 약속하십니다(16절). 그 영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하도록 북돋아 주는 능력 즉 보혜사입니다. 보혜사(Paraclete)의 일차적 의미는 “도우미(helper)”입니다. 도우미이신 보혜사는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영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세상을 사랑하셨으며, 제자들은 그 영을 받아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합니다. 따라서 성령(보혜사)을 받는다는 것은 사랑을 받음(21절), 즉 사랑의 에너지로 충만하게 됨과 같습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구원된다는 것이 복음의 진리이기에, 이를 알게 하시는 보혜사는 진리의 영입니다.
세상은 볼 수 없다, 알 수 없다 (17, 19절)
사랑하는 자들만이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사랑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랑이 무엇이고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를 진정으로 알 수 없습니다. 사랑함은 사랑 안에 거거함이요,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이 사랑을 압니다. 사랑을 안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그분 안에 거함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성령(보혜사)을 보내십니다.
누구나 성령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사랑을 아는 것처럼,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성령을 알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17절).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밖에서는 알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20절) 세상이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을 세상이 알 턱이 없습니다. 다만 성령의 사람이 성령의 일을 할 때, 세상은 그 사람 안에 성령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킬 때, 세상은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생명을 지닌 나무가 꽃을 피울 때, 사람들이 그 나무 속에 있는 생명력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마5:44)에서의 사랑함은 원수를 갚지 않는 행동, 오른쪽 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쪽 뺨을 돌려대는 행위의 차원에 주목합니다. 원수를 마음으로 사랑하지는 않지만, 보복 대신 왼쪽 뺨을 돌려대어 주는 사랑의 결단은 가능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으나 사랑의 행동을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입니다.
이에 비해, 물이기 때문에 흘러가는 것처럼, 사과나무인 까닭에 사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사랑인 까닭에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사랑이신 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되었으니 사랑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지요. 햇볕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따뜻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은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하면서도 미워하고 증오하고 분열하고 분쟁합니다. 사랑은 사람 스스로 통제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주머니에 있는 물건처럼, 사람이 사랑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을 소유합니다. 사랑을 가진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잡힌 사람이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저절로 사랑입니다. 전기에 사로잡힌 전구가 저절로 켜지듯,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사랑의 빛으로 밝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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