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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낭자 누님께
춘천 형님께 시집을 받은 지 세 주가 지났고, 누님께 다시 시집을 받은 지는 두 주가 지났습니다.
다른 우리 조약돌 식구들처럼 저 역시 ‘치자꽃..’과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뒹굴었습니다.
미리 고백 드리자면 저는 시에 관한 한 문외한입니다.
그래서 ‘시를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를 말라’ 라는 말을 들이대면 저는 언제고 맥없이 돌아설 수 밖에 없는 위인입니다.
이 나이 먹도록 단 한편의 시도 써 보질 않았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물론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쓴 적은 있지만 그런 것을 누가 詩라 하겠으며 그나마 기록으로든 기억 속에든 단 한편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제게는 영문학을 하던 형이 있었습니다.
다섯 분의 형님들 중 막내형이었고 제가 가장 좋아했던 형이었습니다.
후에 ‘토니오 크뢰거’를 읽으면서 그 형을 만난 듯 착각에 빠졌던 그런 형이었습니다.
언젠가 책상 위의 노트에서 당시 대학생이던 형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형은 어디서 구했는지 고대 그리이스의 여류 시인이었던 사포(Sappo)의 시를 읽으면서 그녀를 탐닉했습니다.
그 글은 그녀에게 바친 편지였습니다.
물론 내용은 한 줄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춘기 나이에 읽었던 그 글은 가히 충격이었습니다.
한 줄 한 줄이 보석처럼 아름다웠고, 산문으로 된 글들은 시처럼 영롱했습니다.
문장의 어휘들은 살아서 날아다녔고, 우리말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형의 그 글은 제게 엉뚱한 영향을 주고 말았습니다.
‘아! 글이란 이렇게 쓰는 거구나. 이건 시(詩) 자체구나. 나같은 범인(凡人)들은 아예 접근을 말아야 될 분야구나‘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산문(散文)은 어쩔 수 없이 써야했지만 시세계 만큼은 성역(聖域)으로 간주되어 진작에 포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문학을 원했으면서도 그것과 절연(絶緣)하고 이제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 낯선 땅에서 사업을 하는 그 형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형은 93년 L.A로 이주해서 10년 동안 고작 서너차례 봤을 뿐입니다. 카피 녀석을 생각하면 늘 형생각이 납니다. 형도 카피처럼 키가 컸고, 언제나 깊은 그리움을 드리우고 있었고, 또 대학시절 내내 흑석동 어디에선가 술에 절어있었을 카피처럼, 형을 찾으려면 신촌로타리에서 마포로 이어지는 길의 주점(酒店)들을 찾아보면 언제든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오늘 모니터 앞에 앉았습니다.
지난 번 향이에게 쓸 때처럼,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안 쓰면 간단한 일을, 제 속의 음성을 못 들은 척 하자니 그건 더 괴로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늘 무모한 일에 대들어 힘을 낭비합니다.
그래서 오르지 못 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말라고 합니다.
오늘 시인에게 얘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결론도 없고 득도 되어드리지 못하는 일이란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하지 않는 것이 경제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무 것도 될 일이 없습니다.
오르지 못 할 나무라도 쳐다는 봐야하고 엉거주춤이나마 나무를 끌어안아 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포기해야 할 나무인지 오를만한 나무인지 알 수 있고, 그래야 미련도 없어지는 법입니다.
‘시든 음악이든 독자나 청중의 수용 상태에 따라 작품은 달라진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저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이미 541번 글 ‘한 음악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 관점은 지극히 주관적이므로 객관을 놓치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특히 감상할 작품이 지인(知人)의 것일 때는 이미 차갑고 예리한 눈은 닫혀지고 다만 ‘감동’이라는 색깔의 썬그라스를 쓰고 보게되는 것입니다.
제게 ‘치자꽃...’은 그런 작품이 되었고, 거기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이미 비평학적으로는 생명을 잃은 넋두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누님의 시를 읽으면서 왜 마사 그레이엄이 생각났을까요?
지난 91년, 97세의 나이로 그녀가 타계했을 때 세계무용계는 한 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더랬습니다. 그녀는 죽는 날까지 현역으로 남아 작품을 구상하고, 무대 위에서 공연하고, 후배들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전설이 된 까닭은, 그녀의 왕성한 활동력이나 완벽을 향해 가는 예술성 때문이 아니라, 또한 다음 세대에 대한 뜨거운 애정 때문이 아니라, 35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왔던 고전발레의 틀을 깨어버린 데 있습니다.
자신이 본 진실을 말하기에 고전 발레의 틀은 너무 좁았던 것입니다.
시를 읽자마자 처음으로 전해진 의문은 왜 ‘치자꽃...’에는 줄바꾸기나 띄워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왜 시의 진짜의미는 수면 아래로 꽁꽁 숨겨버렸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역시 요즘의 조류(潮流)라는 안내를 받았긴 해도, 아무 생각없이 시인이 그렇게 했을리는 만무했습니다.
시를 모르는 제게 그것은 파격(破格)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일정의 틀을 깨지 않으면 안될 누님의 그 절박한 연유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그것을 염탐하기 위해 적쟎은 공을 들였지만 이 순간까지도 “어두운 유리를 통해 볼 뿐” “어두운 구멍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의 이런 의문과 시를 대하는 태도는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풀피리 누님의 조언은 “시는 이미지로 느끼라”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든 소설이든 음악이든, 되새김을 하면 어렴풋하게나마 영상으로 떠오르는 법입니다.
저의 바램은 ‘치자꽃...’ 역시 내 앞에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영상으로 뜨되, 면이 아닌 선으로 떠 올랐습니다.
여러 상(像)들이 모자이크를 이뤄 조화를 이루어야 할 공간은 사선과 곡선과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배경으로 알듯말듯한 그림들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만약 그 모습이 ‘이미지’이고 그 정도의 느낌으로 끝내야되는 게 ‘치자꽃...’ 이라면 그 동안 기울인 누님의 인고(忍苦)는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그렇게밖에 담을 수 없는 제 그릇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그레이엄이 아버지가 보여 준 수정처럼 맑은 물을 현미경으로 다시 보는 순간, 균들이 우글거리는 것을 봤습니다. 너무나 놀라와하는 그녀에게 아버지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레이엄! 언제나 표면 아래 있는 진실을 보도록 하렴!”
이미지로만 느끼기에는 누님에게 너무 미안한 일입니다.
저도 진실을 보도록, 그래서 시인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싶어 나선 것입니다.
‘치자꽃..’은 다독을 할 게 아니라 정독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수 차례 읽어 보았습니다.그 다음엔 다독을 하고, 그 다음엔 운율에 따라 낭송을 해 보았습니다.
실외(室外)에서 보면 달라질 것 같아 전차를 타고 다니면서 읽고, 도나우 강가에서, 쉔부룬 궁전에서, 슈테판 성당 앞에서도 읽었습니다.
음악적 분위기에서는 어떨까 해서 브라암스의 4번 심포니를 들으면서 읽고, 베토벤 산책로를 따라 읽기도 하고, 슈베르트와 베토벤, 모짜르트, 브라암스가 나란히 묻혀있는 음악가 묘지에서도 누님의 ‘치자꽃...’은 제게 읽혀졌습니다. (어쩌면 제가 읊조리는 누님의 시를 듣고 지하에서 슈베르트가 그것을 Lied로 만들어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누님의 자서(自序)와 시집 뒤편에 있는 평론가의 글까지 모두 회람(回覽)했습니다.
하지만 시야는 여전히 가려져 희미하게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수십 년 간 시를 대해보지 않은 공백의 결과는 이렇게 참담했습니다.
‘치자꽃...’에 어느 만큼 접근했나 싶으면 그는 어느 새 저 멀리로 달아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즈음에 어이없게도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에서의 한 대사가 떠 올랐습니다.
경황없는 중에 본 영화라 다른 건 생각나는 게 없고 다만 유오성의 대사 한 마디 “나는 패면 한 놈만 패!!” 그 말이 떠 올랐습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그것은 일을 푸는 한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성의 초원에서 조폭(組暴)의 보쓰가 한 말을 끌어들여야 하다니요!
어차피 다 알 수 없고, 다 감상이 되지 않을 바에야는 저도 “한 놈만 패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타이틀이 된 <치자꽃 심장을 그대에게 주었네>가 그 주인공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시를 끌어안기에 제 몸은 너무 작았습니다.
하지만 시집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제목에서 느끼는 그 비장함은 얼마나 저를 숙연하게 했는지요.
곧 이어 ‘심장’이란 말이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기는 짜라가 카피에게 보낸 편지 겉봉의 글 “내 심장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친구에게” 이후로 삼십 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시인이 어떤 원칙에 따라 시를 배열했는지 모르지만, 연대순이든 발표순이든 <오목렌즈>는 분명히 초기의 시는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거기엔 자기 인생의 거울 앞에 원숙한 모습으로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 분노라는 것을 시인은 일찍이 간파했습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도 분노를 위장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그 뿌리는 깊고 완강하게 얽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져야 할 그 놈은, 염원과 달리 갈수록 자라서 “눈동자 안 쪽에 박힌 깨진 유리조각”처럼 괴롭히고 “갈비뼈 밑에 앙금짙게 깔린 상처”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심연(深淵)엔 딱딱하게 굳어진 분노가 자생(自生)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거기서 진저리치고 구원의 길을 찾습니다.
그리로 향해 달리다가 혼절하고 깨어나고 달리다가 또 혼절합니다.
그런 시인의 분노가 “둥글게 말리면서 흰 웃음을 가지런히 내 보이”게 된 시점은 언제부터일까요?
오랜 세월, 시인은 자신이 내는 신음소리마저도 듣지 못할 만큼 심하게 앓고있다가, 어느날 부스스 일어납니다. 그리고 추스르고 화해합니다. 인생에, 자연에, 사물에게까지도.
그리고 자기의 상처로 다른 상처를 치료하고 그것은 곧 부메랑으로 시인에게 되돌아왔습니다.
“시퍼렇게 날 선 칼날”을 둥글게 한 “돗수 0.1의 안경”은 무엇일지요?
그것을 “통과한 빛으로 서로를 받아내”게 한 ‘오목렌즈’의 실체는 무엇인지요?
오래 세계를 떠돌던 한 여행가에게 여행의 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그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했습니다. 여행의 진짜 묘미는 돌아갈 집이 있는 것이라고.
시인은 성긴 투망으로 인생을 건져올리는 싸움을 벌이다가 돌아갈 자아가 있다는 것에 저으기 안도합니다.
“잔뜩 고인 얇고 달콤한, 안위(安慰)한 죽은 것들 손 흔들고 싶”을 만큼, 그동안 시인에게 ‘안일(安逸)’은 거듭 탄핵(彈劾)되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의 그리움은 “둥근 것”-실체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을 만들고 시인을 자아에게 돌아오도록 합니다. 거기서 시인은 자아와 극적인 화해를 합니다.
시인은 스스로를 휘몰아치면서도 “둥근 것을 만지”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을 살포시 잡게 됩니다.
시인은 지혜로왔습니다.
시인은 삶의 문제와 주제를 하나로 묶어버렸습니다.
문제를 음각(陰刻)시키고 주제를 양각(陽刻)시켜서, 둘 다 뚜렷이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각(彫刻)의 도구는 관념이나 형이상학이 아닌, 음악과 언어를 하나로 묶어버린 ‘시(詩)’였던 것입니다.
시인에게 삶의 목표와 도구는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에겐 도달해야 할 자기세계와 시(詩)가 함수(函數)관계로 놓여있는 것입니다. 삶이 추워질수록 시라는 연료는 더 때야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시인의 천형(天刑)이자 숙명이고 아울러 선물입니다.
아아! 시인은 이제야 긴장의 시위를 늦추고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시인의 상처는 “치자 꽃잎을 시냇물에 흔들었을 때 꽃잎물이 투명한 물에 번지듯 풀풀 풀어”지고, 그 ‘둥근 것’은 타자에게까지 전이(轉移)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물들이며 씻어주기도 하는 그런” 관계로 폭발합니다.
시인의 눈은 더 정밀해집니다.
처음엔 눈으로, 그 다음엔 망원경으로, 그 다음은 현미경으로 볼 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칩니다.
“이것 좀 봐. 딱딱한 각질처럼 각진 곳에 갇혀있던 생각들이 돌멩이를 들추네.”
작고 나직한 그 소리는 아리도록 짜릿한 전율(戰慄)입니다.
그러자 시인의 온기(溫氣)는 “둥근 돌멩이 그늘 밑 삶을 꼼지락거리는 것들”에게까지 이릅니다. 그래서 “잠자리유충, 어린 가재, 미생물들...” 그런 것들의 “실핏줄 같은 눈들”까지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갇혀 있던 생각”들은 그렇게 화려하게 부활한 것입니다.
나에서 타자에게로, 타자에서 생물로, 생물에서 다시 나에게로....
<오목렌즈>의 얘기는 아쉽게도 이게 다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다 마는 것이 제 능력의 한계였습니다.
하지만 한 단면을 잘라 전체를 보려는 제 전략은 어느정도 성과를 거둔 듯 싶습니다.
지금 제 앞에는 누님의 똑같은 시집 “치자꽃...” 두 권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왼 쪽엔 <오목렌즈>가 펼쳐져 있고, 오른 쪽엔 조금 전까지 <얼음구름에 갇혔네>였다가 지금은 <나는 평면 뒤에 남겨졌다>고 잠시 후엔 <호두나무>가 될지 <파가니니의 연못>이 될지 모릅니다.
<오목렌즈>는 다른 시에 의해서도 주석(註釋)되었습니다.
물론 전체를 다 보았다는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치자꽃...’에 침잠(沈潛)할수록 선(線)과 이상한 도형(圖形)은 서서히 사라지고 배경이 되었던 흐릿한 그림은 점점 그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누님의 ‘쉰 다섯의 자식’들은 점점 둥근 띠로 말려 내 앞에 모습을 들어낸 것입니다.
바로 누님의 나이테였습니다.
그것이 누님을 “서로를 다르게 받아내는” 거장(巨匠)으로 우뚝 세운 것입니다.
“박하향”이 번지는 냄새에 취해 저는 지금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시를 감상하면서 눈물이 흐르기는 처음입니다.
자신만 따뜻하려고 시인이 지핀 군불의 온기(溫氣)는 제게로까지 전해져왔습니다.
그 따뜻함과 넉넉함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온 것입니까?
나이테는 감추어진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각기 다른 폐곡선을 따라가다 보면 거기엔 그 나무의 역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무를 사랑하고 공부하는 사람에게만 그 나이테는 자신을 보여 줍니다.
이제 누님의 나이테를 찾았으니 보는 눈을 키우는 것은 저의 숙제입니다.
평론가의 말대로 여운 속에서 시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제 몫으로 남게 되었고,
처음에 느꼈던 의문들 역시 이제는 말줄임표 속에 다 던져 넣었습니다.
‘치자꽃...’에서 얻을 실속은 다 차린 셈입니다.
누님께서 시와 한 몸체로 생각했던 음악에 대해서는 얘기를 생략했습니다.
어쩌면 시의 씨앗이 되고 언어보다 더 부피가 클지도 모르는 누님의 음악은 생략돼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얘기는 또 하나의 나이테를 볼 수 있을 때까지 미루겠습니다.
다만 변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누님의 음악적 자장은 앞으로도 누님의 詩 은행(銀行)의 잔고(殘高)를 넉넉하게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詩를 쓸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시를 사랑하게는 되었으니 행복합니다.
‘치자꽃...’과 함께 보낸 시간은 즐거운 연애의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을 것입니다.
아울러 누님께 시(詩)로 진 빚을 조금 갚은 것 같아 마음이 가볍습니다.
막내 형이 생각납니다.
언젠가는 자기에게 온 편지글을 보여주고 느낌을 말하라 해서 말을 했더니, 그날 밤 형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영식은 OO 에게 온 편지를 읽고 순백(純白)의 극치라고 했다. 아! 통탄할 통찰력이여!”
시를 모르는 제가 누님께 드린 이 글에도 그 “통탄할 통찰력”이 작용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이 저의 한계임을.
이제 누님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군요.
거듭 시인 유수연의 숨김-드러나지 않음-이 아름답습니다.
화려함은 수수함으로 두른 휘장을 걷을 때 그 극치를 이룹니다.
그만한 어휘와 해박과 연륜으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式의 기성(旣成)의 시를 썼더라면 시인의 길은 훨씬 덜 고단했을 것입니다.
“물결이 햇빛의 각도를 다르게 받아내듯”의 의미를 알기까지 시인은 불면의 밤과 통증(痛症)의 새벽을 관통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렌즈를 통과한 빛으로 서로를 다르게 받아내는“ 때에 이르러서 시인은 달콤한 기지개를 켰을 것입니다.
언제나 작은 원을 그리고 그것마저 감출 줄 아는 시인의 최후미덕은 겸허함입니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씀으로서, 다만 산고 끝에 내 놓은 자식을 보고 스스로 대견해 할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신비의 동굴인 시인 유수연의 세계를 들락거릴 것입니다.
늘 산책로 옆에 있었던 동굴...
암흑 때문에 엄두도 못냈던 탐험을 떨림으로 시작합니다.
처음엔 몇 발자국 뗀 후 동굴을 나오겠지만, 다음 날은 조금 더 깊어질 겁니다.
그 다음날은 거기서 몇 발자국 더 가고, 그러다가 그 어둠에 익숙해지고...
어느 날엔가 감춰졌던 신비는 반드시 빛으로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이제야 치자꽃에서 놓임을 받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외출을 해야겠습니다
찬 바람을 안고 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걸어야겠습니다.
어쩌면 내게도 시가 나올지 모를 일입니다.
시를 가슴에 안고 읽고 자고 알고 사랑하게 하신 누님께 감사드립니다.
새벽이 오고 있습니다.
첫댓글 아.선생님..이젠 시를 못쓰겠네요..ㅠㅠㅠ
낙옆을 밟으며 한없이 걸어보세요. 멋진 詩상이 떠오를때까지...
선생님의 아름다운 詩 를 기다리겠습니다.
선생님! 치자꽃 심장을 저에게도 좀 알려 주시면 안될까요?
괭장히 그 시가 궁금합니다
선생님! 그렇게도 치자꽃에 숨겨진 그리움을?
지금쯤 우리들에게 들려 줄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요_?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