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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의 정신 원문보기 글쓴이: 시와사람
민속문화와 생태학적 상상력
강경호
(시인, 문학평론가)
1. 인간의 욕망과 지구의 위기
오늘날 물질문명은 차고 넘쳐 부족함이 없다. 길거리에는 휘황찬란한 불빛이 반짝이고 백화점엔 온갖 물건이 잔뜩 쌓여있다. 밤이면 술집에 수많은 사람이 흥청거리고 집안의 냉장고엔 먹거리가 가득하다. 인류의 역사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수천 년의 가난을 청산하자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우리나라도 소득 2만 불을 넘어 3만 불 시대로 달려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인류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가고 있다. 올해엔 남극하늘의 오존층 파괴가 배로 늘어났다는 소식과 북극의 만년설이 몇 년 후면 모두 사라진다는 어두운 전망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워 많은 식물이 동해를 입어 얼어 죽고 올 여름엔 엄청난 비가 내렸지만 9월이 다 가도록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한국전력에서 단전을 실시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되었다고 미디어들이 연일 보도한다.
삼한사온이 사라진지 오래, 여름과 겨울만이 뚜렷한 아열대성 기후로 변하고 있는 한반도엔 언제 쓰나미가 밀려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비만 오면 산사태와 홍수로 인해 해마다 인명과 재산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비가 그친 뒤 금수강산은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다. 강이나 바다에 밀려든 쓰레기는 대부분 사람이 쓰거나 먹고 버린 것들로 바닷가나 섬주민들은 쓰레기를 치우느라고 허리가 휘어진다. 태평양 가운데에는 쓰레기들이 모여 섬을 이루었다. 이로 인해 바다생물들에게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한다.
그동안 우리 땅에서는 우리가 산신령이라고 불렀던 호랑이가 사라지고 쥐를 잡는다고 쥐약을 놓아 여우를 멸종시켰다. 바다에서는 고기가 잡히지 않고 수많은 종들이 천연기념물이나 멸종위기 보호종으로 지정되고 있다. 이렇듯 우울한 시대에 어느 스님은 도롱뇽을 지키겠다고 싸우다가 지쳐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그린피스는 영광원전 앞바다에 와 시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거대한 문명의 공룡 포클레인으로 4대강 바닥을 긁어내어 수생생물들의 삶의 터를 송두리째 헤집어 댐을 만들고 있다. 아니 운하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산을 허물어 공장을 짓고 아파트를 올리고 있다. 아스팔트 바닥이 그대로 그 인간의 욕망의 덫에 치인 족제비와 짐승들의 무덤이 되고 있는 시대이다.
가을이 되어도 들판이 고즈넉하다. 메뚜기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메뚜기를 잡아 구워먹던 이야기는 곤충도감 속의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어도 벌나비가 날아오지 않는 들녘 또한 조용하다. 농약 살포와 이상기후 때문이다. 과수원의 농부는 일일이 과수나무의 꽃에 인공수정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인공수정을 해도 열매가 제대로 열리지 않고, 익지 않는 불임의 지구는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가.
르네상스 이후 인간은 신 중심 사회에서 인간 중심 사회로 전환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발견하였다. 인간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인류가 대견하다. 그러기까지 인류의 많은 노력과 희생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문명을 발전시킨 인류의 욕망은 기계를 발명하여 대량생산을 하게 되면서 사람을 일터에서 소외시키기 시작하였다. 더 많은 물질과 자본을 얻기 위해 제국주의가 인간의 잔혹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핵무기를 만든 인류는 언제부턴가 석유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도 기름값은 고공행진하고 우리는 주유소 앞을 서성이고 있다.
모든 것이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한 탓이다. 다시 말해 석유로 상징하는 자본에 대한 인간의 욕망 때문에 오존층이 사라지고, 메뚜기가 사라지고, 호랑이가 사라지고, 벌나비가 사라지고, 봄이 되어도 나무가 꽃이 피우지 않는 것이다. 도롱뇽이 사라지고 제비가 사라지고 가을이 되어도 들녘이 고즈넉해 지구가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불임이 되어도 인류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2. 대안문화로서의 민속문화
지구는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그러기에 우주에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초록별로 빛난다. 하지만 온몸에 화상을 입으면 살기 힘든 것처럼 지구도 상처가 깊으면 살지 못한다. 그래서 생명의 숨결이 꺼진 차디찬 별이 되고 만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지구별은 온갖 상처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고속도로가 산기슭을 할퀴며 지나가고 시멘트 광산이 산머리를 벌겋게 파헤치고 있다. 열대우림에서는 거대한 나무가 톱날에 쓰러지고 아마존 숲에서는 지구의 허파가 터지고 있다. 이제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시계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생태적인 형태는 인간중심적 생활양식 때문이다. 인간중심적 생활양식은 과학과 기술문명에서 기인한다. 자연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자연현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는데, 오만방자한 인간은 과학기술로 자연환경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가시적인 현상과 물질적 근거를 과신하는 과학주의적 편견은 미신타파를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 또한 하나의 미신일 뿐이다. 그것은 과학이든 미신이든 효용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어떤 것이 우월한지 입증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이나 미신 모두 생명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문화로써의 효용성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과학인가, 또는 미신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태학적 적응성을 지닌 문화인가 아닌가를 따져야 할 것이다. 즉 과학적이고 문명적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문화라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생명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문화라면 그것이 과학이라도 반생명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생명을 살리려는 미신보다 미신인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과 함께 어울려 조화로운 삶을 살아왔다. ‘만물유생(萬物有生)’이라는 의인법적인 삶을 살았다. 모든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있다는 생각은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뜨거운 물조차 아무데나 버리지 않았다. 뜨거운 물에 뭇 생명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지 않았다. 이미 나무가 아니라 영물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자본주의식 경제개발을 하면서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미신인가를 따지는 서구의 이성주의적 인식과 합리주의적 근대성이 몸과 마음에 배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신작로를 낼 때 당산나무를 피해갔던 길이 이제는 피해가지 않는다. 새로 내는 길에 걸리는 것이면 그것이 문화재든지 오래된 나무든지, 또는 강이건 산이건 따지지 않고 여지없이 짓밟으며 무찔러가는 것이다. 이문이 남고 인간에게 편한 것이라면 그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모순의 반생태적인 것의 끝은 인류와 모든 생명의 공멸뿐이다. 그러므로 지구와 인류, 그리고 모든 생명이 함께 공생할 수 있는 지구별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것이 과학이든 또는 미신이든지 지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유용하고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대안을 바로 우리 선조들의 삶의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때 낡고 고루한 것으로 치부했던 우리의 전통과 민속에서 오늘날 생명모순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민속문화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보다 어쩌면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공존의 방식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3. 민속문화의 세계관
우리 선조들은 마당놀이와 품앗이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공동체사회를 기반으로 생활했다. 이는 생활의 바탕에 농경문화를 영위했기 때문인데, 생명을 기르고 가꾸기 위해서는 토지신과 하늘신에게 무사태평을 기도하게 하였다. 한마디로 기계문명이나 상업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아니기에 자연의 힘을 필요로 한 까닭이다. 즉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을 정복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었다. 땅의 기운을 느끼며 땅이 살아야 농사를 짓고 농사가 잘 되어야 살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비가 안 오면 기우제를 지내고 소원을 큰 바위나 당산나무, 또는 영물에게 기도하는 토템이나 애니미즘 등 민속신앙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굿은 대표적인 민속신앙이다. 그러므로 마을마다 무당이 있고 당집이 있었다. 굿은 자연물과 같은 대상을 위하고 대상을 섬김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여 화해에 이르고자 하는 의식이다. 나 혼자 잘 살겠다는 목적으로 굿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나, 신과 인간, 자연과 사회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생적 세계관 속에서 굿이 출현하였고 행해졌던 것이다.
굿에서는 나무나 바위, 물과 산, 하늘과 땅 모두가 섬김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테면 산신굿, 영등굿, 샘굿, 지신굿, 당굿, 용왕굿 등 굿의 현장을 알 수 있는 다양한 굿이 있다. 바닷가의 우리 마을에서는 해마다 용왕굿을 실시했다. 배를 띄워 고기잡이를 나가는 어부들이 풍어를 기원하며 바다에 제사지내는 의식이었다. 심청전에서 인당수 물길의 노여움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청이를 바쳤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물을 섬기는 의식을 굿이라는 형식으로 펼쳤던 것이다. 그래서 섬이나 바닷가 마을에는 유난히도 당집이 많은 것은 이처럼 물을 섬기는 제의가 성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당산나무에 제사를 올리고, 미륵바위에 기도를 하고, 심지어는 집안에 깃들어 있는 구렁이나 족제비까지도 업신(業神)으로 섬겼다. 미물뿐만 아니라 땅을 지모신으로, 산을 산신령으로 섬겨 큰 나무나 바위도 함부로 훼손하면 안 되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람과 물은 물론 불을 신으로 섬겼다. 한 예로 화순군 동복면 가수리에는 지금도 물새가 솟대 끝에서 날아가고 있다. 마을에 자주 화재가 나므로 물에서 사는 물새의 물을 이용해 화재를 진압하거나 예방하려는 처방인 것이다. 이처럼 굿과 민간신앙의 제의는 나무와 바위와 소와 말, 가축과 메뚜기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의 생명성을 존중하고 인간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소망하는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들은 굿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미신으로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서구의 실증주의와 기독교의 영향이 큰 까닭이다. 서구의 기독교와는 달리 우리의 무교는 인간을 전 우주 속의 한 부분으로 인식할 뿐이다. 그러므로 굿에서 인간과 함께 잡귀잡신은 물론, 온갖 세계의 신들이 두루 초빙되어 섬김의 대상이 된다. 한마디로 굿판이야말로 우주만물이 하나로 만나 서로 섬기며 화해하는 현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굿을 순전히 주술적 제의로 묶어둔 과학주의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굿 문화의 생태학적 건강성을 숨죽이는 반동적 굿의 이해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굿이 지닌 공생적 세계관과 자연친화적 문화의 본질을 훼손하고 말 것이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민속문화나 민속예술도 생태학적 상상력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모두가 함께 잘사는 공생적 세계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농사지을 때 부르는 비나리, 메나리 등의 농요는 혼자 부를 수 없다. 두 패가 노래 사설을 주고받으면서 부르기도 하고, 논매기 때 앞소리꾼의 선창을 후창으로 따라 부르기도 한다. 일의 능률을 올리고 일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 노래 부르기도 하지만 농작물이 노래를 듣고 잘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역할까지 감당한다. 오늘날 양계장이나 국화밭에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고 동식물이 음악을 즐기도록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농요는 일하는 사람과 땅에서 자라는 농작물이 함께 공유하는 노래라는 점에서 공생적 성격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탈춤에서도 공생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탈춤을 추는 사람과 관객 사이에 구별이 없다. 광대들이 사건을 전개시키면서 끊임없이 구경꾼들에게 말을 건다. 때로는 구경꾼이 탈춤판에 끼어들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구경꾼들이 추임새를 넣어 탈춤의 흥을 돋우기도 한다. 마당놀이도 마찬가지이다. 광대와 구경꾼이 한데 어울려 신명풀이를 한다. 다시 말해 너와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더불어 어울리는 공생적인 관계에서 놀이가 전개되는 것이다.
4. 민속문화의 생태학적 인식
계급중심주의나 민족중심주의의 문제를 우리는 잘 인식하고 있다. 근대 이전의 중세사회에서 군주와 노예의 차등이 있어 공생적이지 못한 불평등 사회를 이루었다. 민족중심주의도 자신의 민족만이 우월하고 잘 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서 인간중심주의가 자본주의 체제 또는 사회주의 체제와 만나면서 생명모순이 조성되었다. 인간중심주의를 토대로 한 이 두 체제의 경쟁은 욕망추구나 이윤추구를 위해 과학기술을 수단으로 자연을 경쟁적으로 훼손해왔다. 자연을 하나의 물질적 가치, 즉 자본으로 인식한 까닭이다. 이러한 반생명주의 바탕에는 자연이 자연을 정복할 능력을 부여했고, 과학기술이 자연을 정복한 결과 자본주의 체제가 승리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은 인간에게 몇 배의 보복으로 공격하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오존층의 파괴, 쓰나미, 라니뇨 현상, 폭설과 무더위, 그리고 지독한 가뭄으로 인한 사막화 현상 등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상처에 자연이 인간에게 내리는 보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명모순과 지구 종말을 대처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지속가능한 삶의 문화를 꾸려나가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생명본성을 자제하고 자연은 생태학적 조화를 통해 그 생명력을 되살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나무를 한그루 더 심고, 반면에 종이를 아껴쓰고, 세제를 덜 쓰고, 산림 파괴를 막고, 농약을 덜 쓰고, 자연파괴를 억제하는 농경기술을 개발하고, 인구증가와 소비수준의 향상을 억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화석연료를 적게 쓰고, 프레온 가스 사용을 억제하고, 생물종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구에 살 수 없을 때를 대비해 다른 별로 이사 갈 궁리보다도 그 에너지를 아껴 생명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생태학적 상상력을 펼쳐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민속문화의 전통인 생극론적인 삶의 실천방식을 깊이 살펴보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생극론이란 생성이 극복이며 극복이 생성이라는 생태학적 이치를 말하는데 생극론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순환, 또는 공생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오래 전부터 고수레라는 것을 해왔다. 들밥을 먹을 때 동서남북으로 음식을 뿌리는 풍속인데, 고수레를 해야 농사가 잘 된다든가 밥 먹은 후 뒤탈이 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첫숟갈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뒤탈이 나면 먹어도 먹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한 숟가락을 버림으로 나머지 밥을 온전하게 소화할 수 있다면 버리는 것이 온전히 먹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수레를 통해 들판에 사는 쥐나 생물들에게 밥을 주는 일이기도 하니 생물의 종 다양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까치밥을 남겨두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까치밥은 감나무나 사과나무의 맨 꼭대기에 달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에 무리하게 따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까치나 짐승들에게 요긴한 식사가 되어 사람과 까치가 한 밥상을 나눠먹는 공생의 관계가 되게 하였다. 사람과 까치가 공생할 수 있는 배려인 것이다.
이 외에도 선조들은 배설물인 똥·오줌을 모아두었다가 감나무나 호박, 또는 밭에 뿌렸다. 버리지만 결코 손실이 아니라 이득으로 돌아오고 자연과 사람이 공생하는 순환론적인 이치를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집짓는 일에서도 생태학적 생극론에 입각해 지었다. 인공적인 재료가 아닌 나무와 흙·짚·돌 등 자연재료로 집을 지었다. 그러므로 이들 재료가 자연에서 온 것들이므로 오늘날처럼 자연을 훼손하지 않았다. 또한 집이 오래되어 허물어진다 해도 모두 자연으로 고스란히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은 대부분 콘크리트 등 인공적 재료를 쓰기 때문에 엄청나게 자연을 훼손시킨다. 뿐만 아니라 새 집에 입주했을 때 입주자는 피부병은 물론 인체에 해로운 병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 수 있는 흙집과 전통한옥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5. 민속문화의 생태학적 계승
오늘날 온통 ‘웰빙’이 화두로 들끓고 있다. 가게이름은 물론 상품 이름에도 ‘웰빙’이라는 이름이 많이 붙여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유기농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이 늘게 되었다. 웰빙이 상품이 되는 시대인 것이다. 웰빙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끄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환경이 오염되고 먹거리가 건강하지 못함을 반증한다. 이러한 사회풍조에는 자본주의라는 이념이 자리하고 있다.
근대 이후 자연조차 재화적 가치로 바라보며 인간이 자연이기를 거부한 데에서부터 오늘의 비극이 싹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논리로는 인간의 진정한 웰빙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과제일 뿐이다. 돈벌이를 위해 농산물에 농약을 치고 먹거리에 중금속을 넣는 일이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썩은 뼈다귀탕을 먹어야 하고 공업용 설렁탕을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웰빙시대를 맞이하려면 근본적으로 생명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려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 대안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민속문화에서 찾아야 할 줄로 안다. 민속문화가 본질적으로 지향했던 것이 생명성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불임부부가 늘고 있다. 7쌍 부부 중에 1쌍 정도가 불임이라니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세계 최초의 출산률을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는 갈수록 인구가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환경호르몬에 의해 남성의 정자수가 감소되는 추세는 갈수록 심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환경호르몬이 태아유산, 성장장애, 기형아 출산 등 생식능력에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다. 오염물질에 노출된 동물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상품가치와 편의성 때문에 인간은 물론 모든 생명의 생식체계가 심각한 교란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인류가 멸종할지도 모른다. 인간 뿐만 아니라 다른 종들도 점차 멸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인류는 통렬하게 성찰해야 한다. 사람보다, 또는 자연보다 집과 가구를 경배하고, 사람을 보기 전에 그가 탄 차와 재산, 그리고 사회적 위치와 권력으로 그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가치를 물질로 환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생명적 가치로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무엇과도 교환할 수 없는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 스스로의 통찰과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그림을 그릴 때 자연을 그리고 그 자연 속에 사람을 아주 작게 그려 넣었듯이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과학문명으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오만방자한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져야 한다.
이제 어느 정도 인간의 생존권과 경제적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므로 자연과 인간의 공생적 세계관을 회복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까치밥’과 ‘고수레’에 깃든, 우리 민속문화에 깃든 공생과 순환적 세계관만이 지구멸종으로 치닫고 있는 시한폭탄처럼 째깍이는 시계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공감하는 글 잘 읽고 나갑니다. 오늘 하루, 제가 실천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야겠습니다. 자연속의 나로 사는 법. 열심히 불을 지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