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불빛
이승희
불빛에 기대고 싶어지는 날,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불빛 속에 손을 넣어 둥근 반찬통을 꺼내다 말고 저 불빛들, 다 길이다. 중얼거린다. 저녁이 산을 가만히 지우는 동안 나는 아무 소리 없이 밥을 먹었다. 불빛에 기대면 그늘이 된다, 어둠이 된다. 여긴 마치 물속의 방 같아서 애초 바닥 따윈 없는지도 몰라.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두려움 따위는 집어쳤던 시절, 몸에 긴 칼자국을 그리던 겨울. 깜박거리던 불빛 같은 핏방울로 달빛조차 붉어보이던. 창문으로 달이 지난 지 오래. 아무 것도 소곤거리지 않는 참으로 편안했던 불안.
불빛에 부풀려진 영혼은 밤새 공중을 떠다니고
달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던 어느 날 붉고 동그랗던 불빛을 기억한다.
그 불빛들
나무들의 손가락 사이에서
물방울처럼 흘러내렸고
아직도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앉은 시절
남은 반찬을 냉장고 속에 넣고, 불을 켠다. 깨알 같은 글자들로 가득한, 채송화 꽃씨보다 작고 작은 글자들이 무료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비춘다. 한 시절이 가서 다시 오지 않았다.
첫댓글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불빛은 다 길이다. ' '불빛에 기대면 그늘이 된다'는 시구가 가슴에 박힙니다. 좋은 시 감사합니다.
외람되지만, 최신의 시를 읽고 싶습니다. 한 편이라도 올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