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無(도독, 공해, 뱀), 5多(물, 미인, 돌, 바람, 향나무)의 울릉도 섬 한구석 언덕배기에 울안도 없는 아담한 작은 집이 있다. 계단 양쪽에는 옥수수, 고추, 방울토마토, 상치, 파, 미나리, 들깨, 호박이 고만고만하게 자라고 있다. 그 틈새로 명이나물, 부지갱이나물, 미역취나물, 바위취, 섬백리향, 맨드라미, 땅채송화, 섬기린초, 금송화가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작은 텃밭에 여러 종류의 채소와 꽃이 심어져 있으니, 오고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여덟 개의 계단에 올라서서 세 발자국만 걸으면 현관문이 있다. 현관문 오른쪽 벽에 문패가 붙어 있다. 울릉도 문패는 부부 이름을 나란히 적어 놓았다.
현관문을열면 2평 정도의 거실이 나온다. 방문을 열면 컴퓨터와 텔레비전이 놓여 있는 단출한 안방이다. 170센티인 내가 드러누우면 사방 30센티 정도의 공간밖에 남지 않는 아주 작은 방이다. 방이 하도 작아서 다른 세간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부자리 펴기도 힘들고 펴 놓으면 문 열기가 불편하다.평지가 부족한 울릉도의 옛날 집은 대부분 작다. 이렇다 보니 꼭 필요한 세간만 갖다놓고 살림을 하니까 소꿉놀이하는 기분이 든다. 방보다 창문이 넓어서 바닥은 따뜻한데 코끝은 선득선득하다. 잠을 잘 때 발은 따뜻하게 머리는 서늘하게 두어 잠을 자야만,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처음이 집에 이사 왔을 때는 좁고 불편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요즘엔 이렇게 몸을 뉘일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섬 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있다. 세월이흐르면 부부간의 거리가 자꾸 넓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작은 방에서는 부부간의 거리를 더 넓히려고 해도 넓힐 공간이 없다. 덕분에 아내의 숨소리와 얼굴을 가까이에서 듣고 볼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을 나이 들어 호사를 누리고 있다. 울릉도의 비바람이 세차게 창문을 두들기면, 부부의 거리는 더 가까워지고 보름 달빛이 창가로 스며들 때는 새삼 신혼 생활이 떠오른다.
또한,다섯 걸음도 채 되지 않을 작은 뒤란에 무화과나무, 무궁화나무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無花果(무과화), 한자 표기로 봐서는 꽃이 없는 나무다. 꽃을 보지 못했는데 어느 날에 보니까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열매가열렸다. 꽃이 없으면 열매가 열리지 않을 땐데,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면 분명 꽃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무화과나무는 육지에서는 그리 흔한 나무가 아니어서 나무와 열매를 울릉도에서 처음 보았다. 이곳에서 무화과 열매가 두 번 자란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았다. 어느 날 보니 무화과 열매가 갓난아기 주먹만 하게 자라는 그 옆에는 밤톨 같은 열매가 또 자라고 있었다. 일찍 열린 열매는 초여름에 따서 먹고 늦게 달린 열매는 가을에 따서 먹는다. 무화과가 익으면 이름도 모르는 부리가 긴 새가 잘 익은 열매만 골라서 파먹는다. 새가 파먹다가 남긴 열매를 먹어 보면 더 달고 맛이 있다. 새의 미각이 사람보다 낫다. 옆집 할머니가 비닐로 열매를 싸 놓으면 새가 파먹지 않는다고 한다. 나 먹자고 새를 못 먹게 만드는 일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나도 먹고 새도 먹기로 했다. 잘 익은 무화과 열매를 따서 먹으면 달짝지근한 맛에 취하여 새삼 내가 울릉도에 들어와 있구나 하는 느긋한 마음이 든다.
무화과옆의 무궁화나무도 어느새 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무궁화가 언제부터 우리나라 국화가 되었는지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고 한다. 다만 구한말부터 우리나라 국화로 되었다는데 국가가 정한 것이 아니라 국민 대다수에 의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가 쓴 풍류 한국에 '프랑스, 영국, 중국 등, 세계의 모든 나라꽃이 그들의 황실이나, 귀족의 상징이 국민의 꽃으로 만들어졌으나, 무궁화만은 유일하게도 황실의 꽃인 이화가 아닌 백성의 꽃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졌고 무궁화는 평민의 꽃이며 민주 전통의 부분'이라고 쓰여 있다. 백성의 꽃인 무궁화는 일 년 내내 진딧물이 끼어, 지저분하다는 선입관만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무궁화나무를 볼 때마다, 외세의 침략에 시달림을 많이 받은 우리 민족을 너무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무궁화나무에 애착이 가지 않았다. 울릉도는 바람이 세게 불기 때문에 무궁화나무에 진딧물이 잘 끼지 않는다. 한여름인 7월 중순부터 가을까지 100여 일 동안 날마다 예쁜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 댄다.
무궁화꽃은 여느 꽃과 달리 피고 짐에 독특함이 있다. 꽃봉오리가 단단하게 여며져 있다가, 이른 새벽 활짝 꽃을 피운다. 해가 질 무렵 꽃이 옹골지게 여민 후 꼭지가 꽃송이 채로 빠진다. 이처럼 무궁화는 꽃이 필 때와 질 때의 모습이 거의 비슷하다. 그리고 무궁화 꽃이 질 때 꼭지 채로 빠지는 모양은 뒤가 어지럽지 않고 깨끗한 끝맺음을 하는 군자의 풍모를 갖추었다. 꽃의 피고 짐도 아름답지만, 그 꽃 또한 독특한 매력이 있다. 꽃이 결코 화려하거나 요염하지도 않으면서 짙은 향기도 없다. 은근하고, 수줍음을 띠면서 겸손하고 순결한 영혼을 연상케 하는 꽃이다. 꽃말은 일편단심, 섬세한 아름다움, 지조 있는 여인의 넋이다. 전설도 꽃말과 같이 일편단심으로 지아비를 사랑하다가 정절을 지키며 죽는 애틋한 여인의 사랑과 죽어서도 지아비를 위하는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여인의 마음이 전설의 내용이다.
처음이사를 오자마자, 이 무궁화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아내의 만류로 그냥 두었다. 아내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 떡이 생긴다는 생각에 아내 의견을 따랐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결정이었다. 만약 내 고집대로 무궁화나무를 잘라 버렸으면, 이 아름다운 꽃을 감상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무궁화나무에 대한 나쁜 기억만 가지고 있었을 뿐 했다. 무궁화 꽃은 단아한 여인을 닮았다. 매일 아침 창문을 열고 단아한 여인의 자태를 감상하는 기분이 제법 쏠쏠하다. 꽃을 보면 볼수록 은근한 색깔에 빠져든다. 꽃을 보고 있으면 느긋하게 마음먹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에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창가에서 흔들린다. 행여 무화과 과일이나 무궁화 꽃봉오리가 떨어질까 걱정을 하면서 방에 몸을 뉘이면, 포근하고 아늑한 게 작음 방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감에 젖는다. 밤새 몸살을 앓은 이파리 사이로 연연(娟娟)한 햇살이 비집고 나와 창가를 비추면, 방안의 어둠도 서서히 걷히고 밝아 온다.
이름도모르는 새가 나무 가지에 앉아 청아하면서 고운 목소리로 지저귄다. 지저귐 소리에 맞춰 하루를 시작하는 스트레칭 체조로 굳은 몸을 깨운다.
좀 더 편하게 살고자 치열하게 다투는 현대인의 삶. 하지만 기꺼이 삶의 편함을 포기하고 이 낙도에서 불편하게 살면서 배우게 되는 게 있다면 이러한 삶의 여유로운 시선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