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史記 8회》
☆형제우애가 남달리 깊었던 주공☆
周나라 문왕에게는 10여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큰아들 <백읍고>는 商나라 紂王에게 죽었고, 둘째 아들이 무왕이며 섯째 아들이 주공 단(旦)입니다.
주공은 효성이 지극하고 자애심이 매우 깊어서 아버지 문왕이 생존시부터 다른 형제들에 비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부왕(父王) 문왕과 신하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둘째형이 무왕으로 즉위한 뒤부터는 형을 보좌하여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을 잘 처리습니다.
특히 商나라 紂王을 응징할 때는 전투장비와 물자를 조달하는 책임자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무왕이 종주국 천자(天子)가 되는데 한몫을 하였습니다.
주공이 빛난 것은 형 무왕이 죽은 뒤부터입니다.
무왕은 어린 아들에게 보위를 넘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공은 어린 조카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게되었는데 다른 동생들과 商나라 紂王의 아들이 공모하여 주공이 조카 성왕의 권좌를 넘본다고 비난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반란이 삼감의 난(三監의 亂)이다.
이 난은 주공의 동생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商나라 주왕(紂王)의 자식 무경(武庚)이 짜고 주공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난 반란입니다.
그러나 그 반란은 주공에게 간단히 진압 당하고 관숙과 무경은 죽임을 당하고 채숙은 변방으로 쫓겨났습니다.
삼감의 난을 진압한 주공은 조카 성왕이 성년이 되었으므로 섭정을 끝내고 조카가 직접 정치를 하도록 하고 물러나 본래의 신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周나라가 종주국이 된지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전국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많았으나 주공은 조카 성왕(成王)을 보호하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데 있어서 태공망(강태공)과 함께 죽을 때까지 신하로서, 삼촌으로서 도리를 다하고 병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는 임종을 지켜보는 자식들에게 "내 시체는 반드시 성주(수도)에 묻어다오. 나는 성왕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주공은 죽어서도 조카 성왕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식들은 주공의 영지인 노(魯)나라로 부친의 시신을 모시려 하였으나, 유언에 따라 성주의 문왕 곁에 묻혔습니다.
이 주공은 우리 조선의 수양대군(세조)와 자주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지만, 주공은 조카 성왕을 지키기 위해 죽어서도 성왕 곁에 있겠다고 하는 마음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수양대군은 임금이되기는 했지만, 엄청난 피바람을 몰아왔고, 그 자신도 죄를 받았는지, 악성 피부병에 걸려 죽었고 장남 의경세자도 일찍 죽었고 예종도 즉위 1년만인 19세에 사망하는 불운이 연속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