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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5괘 水天需수천수
卦象괘상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수 유부 광형 정길 이섭대천
彖傳단전
需 須也 飲食待之而不亂
수 수야 음식대지이불란
有孚光亨 貞吉 位乎天位 以正中也
유부광형 정길 위호천위 이정중야
利涉大川 忍凶也
이섭대천 인흉
需有孚 忍之可也
수유부 인지가야
象傳 상전
雲上於天 需 君子以 飮食宴樂
운상어천 수 군자이 음식연락
爻辭효사
初九:需於郊 利用恆 無咎
초구:수어교 이용항 무구
九二:需於沙 小有言 終吉
구이:수어사 소유언 종길
九三:需於泥 致寇至
구삼:수어니 치구지
六四:需於血 出自穴
육사:수어혈 출자혈
九五:需於酒食 貞吉
구오:수어주식 정길
上六:入於穴 有不速之客 三人來 敬之終吉
상육:입어혈 유불속지객 삼인래 경지종길
수(水)괘는 ‘기다림’이라는 의미의 괘를 붙였다.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기대하며 바라보는 시간이다.
수천수는 상전에 ‘운상어천’ 이라 했으니 하늘에 구름이 물을 머금고 있는 형상이다.
예를 들어, 농사를 짓는 사람이 가뭄을 만났다면 그는 하늘을 우러르며 비를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기다림에는 절실함과 간절함이 담겨 있다.
’군자는음식연락‘이라 애타는 마음이 있겠지만 군자는 음식을 즐기듯이 느긋해야 한다.
치술령 망부석의 전설을 보라.
남편이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자, 부인은 그가 돌아오길 바랐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리다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사람들은 그 돌을 망부석이라 불렀는데 간절한 기다림이 그대로 형체가 된 셈이다.
생각해보라. 여러분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는가?
대부분 사람들은 행복과 성공을 기다릴 것이다.
지금은 행복하고 성공해서 없더라도, 과거엔 있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기다릴 일은 생길 수 있다.
주역 수괘는 말한다.
기다림이란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
큰 강을 건너야 이롭지만, 지금은 건널 수 없다.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강의 흐름에도 잔잔해지는 때가 있고, 그 강을 건너려면 건널 수 있는 실력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될 때까지, 기다림은 이어진다.
그것이 헛된 것이 아니라, 길을 위한 기다림, 때를 위한 준비이다.
반야심경에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薩婆訶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함께 피안으로 건너가자, 깨달음이여, 이루어지이다.”
고통과 집착의 세계를 떠나 깨달음과 자유의 경지, 즉 ‘彼岸피안’으로 건너가자는 선언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먼저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라고 하였다. 그들 중에는 전직 어부들도 있었으나, 바람이 심하게 불고 배는 요동치며 날이 어두워지자 이들은 두려웠다. 이때 예수는 바다 같은 호수 위를 걸었는데, “내니 두려워 말라” 하자 베드로는 자기도 물 위로 걷게 해달라 하며 용감히 걸었으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지고 말았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자 폭풍도 멈추고, 배는 무사히 언덕에 안전하게 닿을 수 있었다.
수천수(水天需)의 형상을 보면, 물이 위에 있고 하늘이 그 아래에 있다.
마치 물이 하늘을 품듯, 온전히 담고 있는 모습이다.
밤이 되면 호수를 들여다보라.
잔잔한 물 위에 달이 떠 있고, 수많은 별들이 호수 속에 반짝인다.
하늘이 물 위에 내려앉은 듯하다.
이런 광경을 두고 불교에서는 ‘海印庭해인정’이라 불렀다.
바다 위에 하늘의 별들이 도장을 찍듯 그대로 들어가 있다.
有孚 光亨 貞吉
이섭대천, 큰강을 건너는 것이 이로운데
무엇으로 건너가냐하면 유부와 광형과 정길로 건너간다.
여기서 “有孚유부”의 孚부는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모습에서 왔다.
누가 깨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어나는 생명력과 진실함이 담겨 있다.
이 말은 곧, 우리 안에 진실이 있다는 뜻이다.
내 마음 안에 부처가 있고, 내 안에 하늘로부터 받은 영혼이 깃들어 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마치 하늘이 그대로 물속으로 스며들 듯,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하나님이 있다.
그 연결은 바깥이 아닌, 내면에서 깨어나는 ‘유부’, 그 진실한 믿음으로 시작된다.
光亨, 빛처럼 형통해야 한다.
깨달았다고 해서, 믿음이 생겼다고 해서 곧바로 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깨우쳐졌을 뿐이다.
진정한 변화는, 하늘의 별들이, 하늘의 법들이 내 안에 들어오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비로소 시작된다.
석가의 이마에서, 치아에서, 손과 발에서 빛이 나왔다고 한다.
예수를 그릴 때도 후광을 반드시 그려 넣는다.
유명한 사람이나 탁월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에게서 후광이 나오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빛 그 자체라기보다, 그 사람이 도달한 상태에 대한 우리 마음속의 기대와 투영일 뿐이다.
‘물이 하늘을 담는다’는 말은, 하늘과 나 사이가 닿아 있으면서도 멀리 있다는 뜻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광형이 되기까지, 스스로를 갈고닦으며 그릇을 만들어가야 한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 말은 곧, 진리가 생각에만 머무르지 않고 살이 되고 피가 되었다는 뜻이다.
공자는 칠십에 이르러 “종심소욕 불유구”라 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법도를 넘지 않게 되는 경지.
그것은 욕망을 억누른 상태가 아니라, 욕망조차 도의 흐름과 하나가 된 상태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고,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삶.
그 삶을 이루기까지는 말과 행동,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는 오랜 기다림과 노력이 필요하다.
육신이 정신의 뜻을 따르기까지,
정신이 육체의 습을 다스리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언행일치의 사람, 빛처럼 형통한 사람이 되어간다.
貞吉정길.
有孚유부는 내면의 진실한 태도, 믿음과 성실함에서 시작되며,
이는 곧 하나님의 형상, 하늘의 뜻을 담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 믿음은 光亨광형,
즉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빛처럼 퍼져 나가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통하게 하고, 삶의 길을 열어 준다.
그러나 이 모든 흐름이 吉(길함)으로 귀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貞정, 즉 중심을 지키는 굳건함이 있어야 한다.
흔들림 없는 도덕적 중심, 바른 태도, 끝까지 지켜내는 자세가 바로 ‘정’이다.
우리에게는 운명과 천명이 있다.
운명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
예컨대 태어남과 늙음, 병듦과 죽음처럼
자연의 흐름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없기에,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천명은 다르다.
천명은 하늘이 내게 맡긴 사명이며,
내가 마음만 먹으면 반드시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과학을 탐구하고, 철학을 사유하고, 예술을 표현하며, 종교를 통해 하늘을 향해 산다.
이 네 가지는 인간의 본성이며, 반드시 실현하고 노력해야 할 천명의 일부다.
내가 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주저앉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천명 앞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삶, 그것이 참된 길(貞吉)의 삶이다.
하늘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중심을 잡아 준다면, 나는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설 수 있다.
그 중심에서 바른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삶 자체가 바로 빛처럼 형통하고, 스스로 만족하며, 세상에 이로운 삶이 된다.
그리고 그 삶은 결국,
스스로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복이 되는 길, ‘貞吉정길’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벌벌 떨며 점이나 치지 말고, 할 수 있는 천명에 전심전력을 다하면 될 일이다.
爻辭효사에는
효사는 강을 건너는 기다림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需於郊 需於沙 需於泥 需於血 需於酒食
강을 건너기 전,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교, 강가에서 기다리는 시간이다.
강을 건너려면 먼저 물가에 멈춰 서야 한다.
흐름을 살피고, 깊이를 헤아리며, 언제 건널지 그 시기를 숙고해야 한다.
사, 모래밭에서 기다리는 시간이다.
모래는 발을 붙잡는다.
움직이려 해도 자꾸 미끄러지고, 방향도 흔들린다. 모래는 조급한 걸음을 막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니, 진흙 속에서 기다리는 시간이다.
진흙은 단단한 땅이 아니다.
한 발을 빼면 다른 발이 빠지고, 몸은 점점 더 깊이 잠긴다.
그 순간이 한여름의 정오라면, 지치는 마음까지 더해진다.
혈, 피 흘림 속에서 기다리는 시간이다.
강을 건너는 일은 때로 생명을 건 도전이다.
피를 흘리고, 마음을 잃고, 고통 속에서 나아가야 할 때도 있다.
예수는 사랑의 강을 건너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손과 발, 옆구리에서 피를 쏟으셨다.
마침내 술과 음식이 있는 곳에서 기다린다.
모든 고난과 시련을 지나온 자에게 평화가 주어진다.
그는 피안의 언덕에 이르고, 고된 여정 끝에서 안식을 누린다.
上六 入於穴 有不速之客 三人來 敬之終吉
入於穴입어혈, 그 깊은 자리에 도달했을 때
주역 상육의 말은 이렇다.
“입어혈 유불속지객 삼인래 경지종길.”
굴속에 들어가니, 뜻하지 않은 손님 셋이 찾아오고, 그들을 공경하면 끝내 길하다.
굴속에 들어감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일을 떠올리게 한다.
사흘 뒤, 예수는 부활하셨고, 먼저 무덤을 찾은 마리아와 믿음의 여인들은 그 부활의 현장을 직접 보게 된다.
뒤늦게 달려온 베드로와 요한은, 이미 비어 있는 무덤에서 예수의 시신 대신 세마포만을 발견했다.
또한 상육은 삶의 한 장면, 혹은 배움의 여정으로 비유하면 조금 가까워진다.
가야금의 강을 건넌다는 것.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하는 날, 먼저 우리는 악기의 생김새와 구조를 살핀다.
소리가 나는 원리, 손의 위치, 줄의 떨림을 이해하려 애쓴다.
그저 강가에서 흐름을 바라보는 것처럼, 시작은 관찰과 질문이다.
이윽고 악보를 펴고, 선생님의 손짓을 따라 한 줄 한 줄 소리를 낸다.
음 하나 제대로 내기까지 수없이 틀리고 다시 맞춘다.
악보 하나를 넘기면 그다음 악보가 기다리고 있고, 그 끝은 멀고도 아득하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뜯다 보면
손끝이 피가나고 굳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피나는 노력’이라 했던가.
그 과정이 바로 血혈, 피 흘림의 단계다.
그렇게 시간을 지나 어느 날, 서툴기만 하던 손끝에서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흐른다.
이것이 光亨광형, 빛이 퍼지고 길이 열리는 순간이다.
그리고 마침내 무대에 오른다.
세 사람의 뜻밖의 손님처럼, 공연장에 관객이 찾아온다. 이들을 위해 소리를 내고, 마음을 다해 연주한다.
그 소리는 단지 음악이 아니다.
공경하는 마음, 온 힘을 다해 길러온 정성이 담긴 소리다.
그렇게 연주자와 청중이 하나 되는 순간,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에게 힘이 된다.
바로 敬之終吉경지종길, 즉, 공경함으로 길하게 끝나는 순간이다.
삶의 여정도 이와 같다.
처음은 관찰, 다음은 시행착오, 그리고 피 흘림 같은 수고의 시간.
그 모든 과정을 지나야만 진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
뜻밖의 손님은 결국 내 삶의 청중이다.
그들을 진심으로 맞이하고, 내 삶의 소리로 응답할 수 있다면, 결국 기쁨과 보람이 찾아올 것이다.
하늘의 법이 온전히 내안에 자리잡혀 정도의 길을 걷는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첫댓글 유부 광형 정길 로써 이섭대천할수있는 귀쫑인이 되어볼까 합니다
좋은 글로 끌어주고 밀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