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1. 용서의 정의
1) 김주환 : 앞으로 주는 것이다. : 과거 집착을 버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저 다 괜찮아...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에 대해 다시 의미 부여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는 항상 지금 여기에 나자신을 던져 넣는 것이다 => 과거 경험에 얽매이지 말고....지금 현재 나의 신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의 정의)
2) 심리학적으로 : 만성적인 적대감이나 부정적이고 강박적인 반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인지적이고도 감정적인 과정
3)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것은 상대방이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지속적으로 벌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의 어리석음을, 나의 나약함을....드러내기 싫어서 일수도 있다.
4) 기독교적관점의 용서 :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기에 나도 용서하는 결단적인 표현이다. 백다리온을 탕감 받은 자로서 1다리온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안된 것이다. 그것은 의무요 책무이다.
[김주환교수 내면소통]
1. 용서의 정의 ?
긍정적 내면소통의 첫걸음은 용서다. 용서하기는 무엇인가를 앞으로 주는 것이다. 뒤돌아 보아 과거에 집착하거나 얽매이기보다는 앞을 내다보고 미래를 향해 나가면서 다 내어주는 것이 용서다. 뒤 돌아보아 앙갚음하고 빼앗는 것이 복수라면, 앞을 보고 내어주는 것이 용서다. 내가 나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앞으로 내어주어 늘 지금 여기에 현존할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용서란 만성적인 적대감이나 부정적이고 강박적인 반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인지적이고 감정적인 과정이다. 용서의 핵심은 다 그저 괜찮아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일에 대해 다시 의미부여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항상 지금 여기에 나 자신을 던저 넣는 것이 용서다. 증오나 복수님은 반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겅 일에 매달리고 나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이다. 삶의 지평을 멀리 내다보고 나를 얽매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지금 여기에 존재할수 있게 하는 것이 용서다.
분노를 지낸 채 살아가는 삶은 괴롭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지닌 증오심과 복수심 때문에 괴로워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내가 나를 아프게 하고 병들고 늙게 한다. 면역력을 엄청나게 떨어뜨리고 텔로미어 길이는 짧아진다. 분노를 지니고 사는 것은 불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분노는 내 속을 태운다. 괴롭다. 그것이 화병이다. 화병은 용서하지 못하고 타인의 잘못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병이다.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것은 잘못은 상대방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지속적으로 벌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사울 왕이 생각남....
용서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결단적용서와 감정적 용서
하나는 스스로 결단을 내려서 나의 행동을 통제하는 경단적 용서이고 다른 하나는 상황에 대한 인지 동기 감정 상태등을 바꿔나가는 감정적 용서다. 효과 측면에서는 감정적 용서가 더 좋지만 실제로 용서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결단적 용서로 시작하는 것이 더 쉽다.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거나 양해를 얻거나 정서적 지지를 추구하면서 조건이나 단서를 다는 용서보다는 스스로 결단을 내려서 과거에 얽매인 나의 집착을 단번에 끊어내는 것이 보다 쉽게 용서할수 있는 방법이다. 용서는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달라질 필요는 없다.
=> 다윗 왕이 생각남.. 나단 선지자.. 결단적 회개
용서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용서할수 없다는 생각을 줄이는 것과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다.
용서의 대상에는 자기 용서와 타인 용서가 있다. 자기 용서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스스로 비난하고 자기혐오와 죄책감에 빠지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며, 타인용서란 다른 사람이 내게 끼친 해약에 대해 용서하고 너그러움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한편 용서 성향과 용서상태를 구분하기도 한다. 용서 성향은 너그럽고 아량이 넓은 성격적인 성향에 가까운 것이고, 용서 상태는 현재 용서를 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진화 심리학의 관점에서도 용서에 대한 많은 이론화 작업이 있었다. 상대방이 내게 지금 위해를 가한다면 이에 대해 적절한 응징을 하는 것이 미래의 안정적인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할수도 있다. 그런데 응징에는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비용이 많이 든다. 반면 용서를 함으로써 훨씬 더 적은 비용을 ㅗ더 많은 것을 얻을 수 도 있다. 그렇기에 인간의 뇌는 상황에 따라 대로는 복수를 때로는 용서를 적절히 균현을 맞춰서 하룻 있도록 발전했다는 것이 진화 심리학의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용서를 인간관계를 갈등에 갈등에 대처하는 하나의 도구적 수단으로 파악하는것이다.
2. 왜 용서를 못하게 되었을까
1) 분노를 숭배하는 문화 (잘못은 반드시 응징받아야한다.)
2) 부모 사회의 잘못된 교육
3) 용서에 대한 교육 부재 (용서에 대한 개념, 의학적 개념, 정신적 개념 부제)
4) 내가 약하다. 용서라는 마음 근력(뉴런체계)이 없다.
=> 초자아로 포장한 것은 있다...... 또다른 억압....
5) 잘못된 가치관...(분노는 멋있는데....용서는 찌질해 보인다)
용서를 주제로 하는 강의를 할때 "분노의 복수심이나 응징의 마음이 에너지를 줄 때도 있지 않느냐" 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게다가 상대방이 잘못했으니 정의와 공정의 이름으로 분노하고 응징하는 것은 오히려 책임감이 있는 행동이 아니랴는 의문도 제기한다.
나는 이러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 못되었음을 깨우쳐주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용서를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감과 사명감 때문이다. 분노를 숭배하는 문화는 우리 모두를 병들게 하기에 반드시 바꿔야만 한다.
상대방이 내게 잘못하면 우선 용서의 마음부터 들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것이 건강한 마음 상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상대방의 자그만한 잘못에도 분노하면서 응징이나 복수를 떠올린다.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반응한다. 사회 전반에서 이러한 성향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불안장애와 우울증 환자는 갈수록 넘쳐난다. 감정조절장애 환자의 가장 보편적 특징은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따라서 남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그마한 잘못에 대해서도 격력하게 반응한다. 타인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조차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처벌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용서의 능력을 회복해야 마음근력이 강해지고 다시 건강해 질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용서를 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왜 용서의 능력을 잃어버렸는가? 왜 용서를 폄훼하는 문화를 지니게 되었는가? 왜 용서에 대해 가르치려고도 배우려고도 하지 않게 되었는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마음 근력이 약해지게 되었는가?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며 이야기를 통해 살아간다. 스토리텔러인 의식은 끊임업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이야기는 단지"들려지는 이야기 일분만아니라" 살아지는 이야기 이기도 한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온 이야기 구조는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의 기본방향을 결정한다.
어린 시절 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 들어온 이야기는 강한 악당과 그에 맞서 싸우는(지구를 구하고 정의를 지키는) 용감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약간의 변형은 있어도 주인공은 대체로 약학고 악당은 늘 강하다. 주인공이 해야 할일은 강한 적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악당을 용서해서는 결코 안된다. 그것은 나약한 모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불굴의 의지로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정의의 이름으로 악당에게 통쾌하게 복수한다. 나약했던 주인공을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대게 복수심이나 증오심이다. 분노의 힘으로 주인공은 악당을 쳐부순다. 도저히 용서할수 없는 악당을 정의의 이름으로 차단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만화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 이러한 내러티브를 소비하면서 "나"를 주인공에 감정이입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인공의 관점에서 세상을 살아간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나 영화나 뉴스 스토리나 정치 이야기기 모두 선악의 대립 구도를 가진다. 어떤 이야기를 접하든 누가 "나쁜 놈"이고 "악당"인가 부터 파악하려 한다. 물론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늘 주인공이기에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다.
온라인 공간에서 난무하는 악플을 보자..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은 옳고 도덕적이며 선하고 현명한데, 악플의 대상은 악하고 부도덕하며 나쁘고 멍청하다. 이러한 근거 없는 자기 확신이 과연 어디서 왔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라. 누구나 "내가 주인공"이라는 환상속에 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다가 혹시라도 어떤 어려움을 맞닥뜨리면 그 어려움의 원인을 제동하는 존재는 당연히 악당으로 간주된다.
사실은 내가 상대방에게 악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할 여유조차 없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모두 적이다. 나의 적이라기 보다는 이 세상의 적이다. 나의 적이라기 보다는 이 세상의 적이다. 만약 그 사람이 나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권력이 세거나 돈이 많다면 악당임이 더욱 더 확실하다. 악당은 모두 강하기에 강자라면 모두 부도덕한 악당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악에 맞서는 것은 정의로운 주인공인 내가 할일이다. 주인공인 나는 적을 처대해야한다. 단호하게 응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증오하고 분노해야한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 팽배한 분노의 이데올로기이다.
선한 주인공 대 나쁜 악당은 대립 구조로 이 세상을 바라보도록 세뇌된 현대인에게 "용서"라는 개념이 들어서 자리는 없다. 용서는 낯설고 어색한 개념인 반면에, 복수 응징 처단 등은 매우 익숙할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악당을 쳐 부수는 만화 주인공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남성이고 복수를 하는 것도 주로 남성이다. 여성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남성의 복수 성향이 더 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싱어 교수팀은 경제 게임을 하는 남녀 피험자들을 상대로 공감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공정한 플레이를 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남성과 여성 피험자 모두 비슷하게 공감을 했다. 그러나 부당한 행위를 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특히 남성 피험자들이 공감하지 못했다. 대신 복수심과 관련된 뇌 부위가 활성화되었으며, 부당한 행위를 한 상대방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볼때는 보상체계 관련 부위가 활성화 되어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남성이 여성과 비교해 응징을 더 좋아하고 용서에 인색한 뇌를 갖고 있으며 복수를 통해 더 큰 쾌감을 얻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용서에 있어서 남녀 차이가 있는가에 대한 53편의 연구논문에 대한 메타 분석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보다 공감을 더 잘하고 용서도 더 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만화책이나 영화, 드라마는 분노와 적개심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악당에게 분노를 느끼고 복수심에 불탈수록 주인공은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분노가 인간을 형편없이 나약하게 만든다는 것은 과학적인 사실이다. 분노는 두려움의 한 표현 양식이다.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인 행동은 모두 두려움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두려움에 떠는 작은 강아지가 더 크게 짖고 공격적인 법이다. 두려움이 없는 큰 개는 짖지 않는다. 조용하고 차분하다.
용서는 강한사람만이 할수 있는 용기있는 행동이다. 분노를 바탕으로 한 복수심은 정신과 신체 건강에 매우 해롭다. 증오심은 오래 지니고 있을수록 몸과 마음을 황폐하고 나약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