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을 사랑함에 " ......... 추억! 달빛을 봐요 / 추억이 당신을 이끌어요. / 마음을 열고 들어가세요. / 행복의 의미를 찾게 된다면 / 그때는 새 삶이 시작될 거예요 .......... "
화사한 주일 한 낮, 예술의 전당 오폐라 하우스에서 뮤지컬 "캣츠"를 보았지요. 달콤하면서도 우수에 젖은 "메모리"가 모처럼 극장을 찾은 제 가슴에 오래 남아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아니 오폐라 하우스 뒤편 연못을 둘러보는 내내 제 귓가를 맴돌아 행복했습니다. 눈이 소복이 쌓인 연못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데 얼음이 녹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정말예요, 가만히 귀 기울여보세요. 눈이 녹는 소리, 봄이 어느쯔음에서 오는가 귀를 쫑긋 세우고 기둘려보세요. *********************************************
땅 아래 지하무덤에서 미사를 드리고 올라온 길이라 어리둥절했어요. 이 평화로운 농원이 실감나지 않아서요. 살래시오회 수사님이 관람 시간이 끝난 카타콤베의 고요한 정원 벤치에서 한가로이 성서를 읽고 있네요. 순교자들의 치열했던 신앙생활의 현장 바로 위에는 이렇게 평화롭다니, 극단적인 대비에 순간 혼란스러웠나 봐요.
포도나무덩쿨 사이로 뛰어다니는 강아지하며, 순례자들의 요청에 함께 사진을 찍어주던 멋진 구렛나루 수사님의 빙그래 한입 베어물은 미소가 한없이 정겨운 카타콤베의 저녁 풍경에 넋을 잃고 서 있습니다. 이곳 카타콤베는 살레시오 수도원에서 관리한다지요.
낮잠이라도 금세 쏟아질 것만 같은 이 평화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멀리 있는 그대에게 저녁 인사를 드립니다. "샬 롬!"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
로마로 통하는 길 중에서 남동쪽으로 통하는 길을 아피아 가도(via appia)라고 하지요. 기원 전 312 년 이 길을 닦은 아피우스 클라디우스 장군의 이름을 딴 거랍니다. 312년에서 지금 2천년대까지 무려 2300년에 이르도록 풍상을 겪어왔던 이 가도는 로마군단의 개선 행렬이 통과하여 로마에 입성하던 길이지요. 남쪽의 어느 전장터에서 승리한 로마 군대의 왁자지껄한 개선행렬, 피비린내를 확 풍기던 끔찍한 광경이 떠오르지 않나요?
로마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게 도로랍니다. 아직도 유럽에는 로마시대에 닦은 도로 위로 차가 다닐 정도로 쌩쌩합니다. 사도행전에 바오로 사도가 선교여행을 다닌 이야기가 참 많잖아요. 로마에서 이집트로 뻗어간 도로와 구약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따라서 터키를 거쳐서 페르시아까지 뻗쳐나가는 도로의 총길이가 얼마더라? 포장도로가 8만 킬로미터, 비포장도로가 40만 킬로, 비포장도로만 약 10만리나 됩니다. 어마어마한 도로지요. 로마의 식민지 정복과 통치를 위해서 닦았던 길이 오히려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그 길 위로 그리스도교가 불꽃처럼 퍼져나갔다는 역설을, 다 주님의 역사하심이겠지요.
다시 아피아 가도로 돌아갑지요. 로마에서 제일 먼저 포장을 한 도로가 바로 이 아피우스 도로라합니다. 아직도 당시의 도로 포장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 접합면이 딱 들어맞는 마름돌이 깔려 있는 로마의 포장도로가 장장 563 km에 걸친 이 도로 양 편에는 옛 로마 귀족의 묘소와 키가 큰 소나무들과 사이프러스가 무성합니다. 이 역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래스패기의 교향시 "로마의 소나무" 중 마지막 곡인 "아피아 가도(街道)의 소나무"는 행진곡의 템포로 되어 있는데, 이 길을 통하여 입성하는 로마군단의 개선 행렬을 연상하게 하지요. 한번 들어보세요. 로마 군인들의 은빛으로 빛나는 투구와 붉은 술, 햇빛에 번득이는 창검, 보무도 당당한 군인들의 군화 소리와 팩시밀리움 꼭대기에 솟아오를 듯 비상하는 독수리 상, 그리고 좌우에 늘어선 로마 시민들의 환호소리를...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카타콤베에서 로마 쪽으로 아피아 가도를 따라 조금 가다가보면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이 길옆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네로의 기독교신자 박해(로마의 대 화재를 기독교신자들에게 누명을 씌우고 무자비한 탄압을 가함) 당시 베드로 사도가 탄압을 피해 로마 성문을 빠져나와 아피아 가도를 따라 도망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로마로 들어가고 있는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베드로가 "Domine,quo vadis?(주여,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간다." 답하고는 사라지셨답니다. 이 만남으로 베드로 사도는 크게 뉘우치고 로마로 되돌아갑니다. 스스로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를 만난 예수님의 발자국이 아피아 가도의 돌 위에 남아 있었답니다. 그 돌은 아피아 가도 가까이에 있는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지요.
'그분'의 발자취와 치열한 삶을 살았던 베드로 사도의 믿음의 현장에서, 부족하고 죄 많은 저를 불러 주신 ‘그분’께 말씀 여쭙니다. "주님! 이처럼 크고도 깊은 당신의 사랑을 제가 어찌 감당하오리까?“
그 먼 옛날의 베드로 사도, 성녀 체칠리아, 남몰래 숨어서 미사를 봉헌하던 초대교회 신자들과 동방에서 길 떠난 순례자가 세월의 멀고 가까움을 느끼지 못한 채 한데 어울립니다. ‘그분’의 숨소리, 따뜻한 미소, 체온을 느끼며 먼 길을 돌아온 어린아이의 행복한 미소를 한웅큼 베어물고 있었소이다. 그 고요한 카타콤베에서...
바티칸 이야기가 빠졌다고요? 로마 순례의 가장 중요한 곳이라 한들 감히 뭐라고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것, 아름다움을 제대로 바라보고 느낄 수 있을 만큼 제가 성숙하지도, 거룩하지 못한 세속의 더러움만 확인하고 돌아옵니다,
감히 한 말씀만 드린다면 "최후의 심판" 미캘란젤로의 벽화가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섰을 때, 검은 대리석의 예수님 좌상이었지요? 머리에 쓰신 가시관이 순간 내 가슴을 찔러 얼마나 아프던지 눈물을 글썽일 수밖에, 뾰족한 바늘로 콕콕 찔러 일찍이 이렇게 심한 통증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겪으셨던 이 고통, 내 마음 알아주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들한테서 받는 배신감, 극심한 외로움 속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못을 박던 로마 군인들과 어리석은 예루살렘 군중을 위해 "저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용서를 청하시던 ‘그분’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내내 아려오는 내 가슴, 이 애달파 오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랑 받을 자격도 없는 저의 부끄러움 때문일까요 송구해선가요?
저녁 어둠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콜로세움 뒤로 나즈막한 언덕을 오르며 살핍니다. 이쯤에 자리했다는 네로가 살았던 저택 터를 눈어림으로 짐작하며,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또 하나의 허무를 실감합니다. 완전함, 거룩함과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덕인 헌신을 모욕하고 핍박했던 네로라는 인간을. 네로가 대변하는 끝없는 탐욕과 순결한 영혼에 대한 두려움과 질투로 자기를 파멸로 이끌던 끝 모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생각해봅니다. 네로의 허망한 집터에서 인간의 어찌 할 수 없는 한계를 우울하게 곱씹으며 내 키보다 더 긴 그림자를 밟고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검투사의 비명과 잔인한 로마시민들의 피에 굶주린 고함 소리를 떨쳐버리며 오드리 햅번의 해맑은 미소와 천진스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려고 "트레비 분수"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로마에 오는 관광객들이 꼭 들린다는 곳, 트레비 샘(Fontana di Trevi)-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궁전을 교묘하게 배경으로 집어넣고 바다의 신 넵튠과 트리톤이 힘차게 약동하는 자세로 만들어진 이 트래비 분수는 교황 주최의 분수 콩쿠르에서 우승한 작품이라지요. 트레비! 왠지 멋스러운 이름이다 하시지만 그 뜻은 '삼거리'라는 말이거든요. '삼거리 샘' 번역하면 뭐 이렇게 되나요? 좀 촌스럽다구요? 이 샘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에 올 수 있다는 전설이 퍽이나 낭만적이지 않은가요? 트레비 분수는 1762년에 만들어졌다. 1954년 로마에 온 세 여인이 동전 세 개를 던져 소원을 이룬다는 영화 "애천(愛泉)"이 개봉한 이후 동전을 한 개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올 수 있고, 두 개를 던지면 평생 함께할 연인을 만나고, 세 개를 던지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속설이 퍼지면서 전 세계 관광객들이 동전을 분수에 던져 넣고 있네요. '그깟 동전' 할지 모르지만 하루 약 4000유로(약 515만원)정도다. 1년이면 150만 유로(약19억원)에 달해 '티끌모아 태산' 수준이다. 황재한다고요? 이 돈은 가톨릭 자선재단인 카리타스가 수거해서 노숙자 등을 돕는 데 사용해 왔으니 아깝다 하지마시고 속설 따라 동전을 던져보자고요. 주의, 두 개 던지면 절대 안 돼요. 다정한 옆지기가 있는데 또 무슨 연인 타령합니까. 60년대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로마의 휴일'에 보면 트레비 분수 앞에서 공주님인 헵번이 본젤라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깔깔 웃는 천진스러운 연기가 나오지요. 기억하시나요? 헵번이 펼친 해맑은 웃음소리와 잘 생긴 그레고리 팩이 열연한 탓에 역사적 유물이 즐비한 로마에서도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었다 합니다.
벌써 10여년이 되었나, 가족들과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했을 때, 아내와 저는 트레비 분수 앞에서 뒤로 돌아서 동전을 던졌지요. '꼭 다시 로마에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십사' 고... 그대는 트레비 분수의 아름다운 전설을 믿고 있나요? 그 덕분에 우리 내외가 다시 로마에 돌아와 이렇게 트래비 분수의 시원한 물줄기 앞에 서 있으니, 그 전설은 맞다고 해야겠지요. 분수 옆 골목길에서 재빨리 본젤라또 아이스크림을 사서 맛있게 핥고 있는 제 아내야말로 정말 오드리 헵번 뺨치게 닮았네요.(우리끼리 얘긴데 헵번보다 더 이쁘다 그러더라고요) 그럼 전....., 음~ 그레고리 팩이라 하면 욕먹을까요?(개인적인 댓글 사양합니다)
재미난 전설과 색색의 조명으로 동화처럼 피어오르는 분수에 서서 1유로 동전을 던지면서 아이처럼 그 전설이 제게 또한번 이루게 해주십사고 기도했답니다, 제가 너무 욕심이 지나치다고요?
전혀 겨울답지 않은 로마의 로맨틱한 밤, 색색으로 빛나는 조명, 품어 오르는 분수의 시원한 물줄기, 트레비 분수 어디에선가 오드리 햅번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이 아름다운 동화 속의 분수에서 잠시 마음도 가볍게 꿈을 꾸었나 봅니다.
그리운 그대에게 띄우는, 길 떠난 순례자가 드리는 밤 인사를 트레비 분수에서 정갈하고 청량한 물소리를 들으며 이 맑음, 이 가벼움,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그대에게 전합니다.
"샬 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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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해가 뜨기를 기다려야 해요 / 새로운 삶을 생각해야 하죠. / 포기하지 않겠어요./ 새벽이 오면 오늘밤도 추억으로 남겠죠. / 그리고 새 날이 시작되요............."
감미로운 메모리를 흥얼거리며 로마의 추억을 끄집어내 보았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꿈을 포기하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고양이?)들에 의해 펼쳐지는 축복이라고.... 오드리 헵번의 까르르 맑은 웃음과 트레비의 정갈한 물소리, 켓츠의 메모리가 함께 떠올라 제가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모릅니다.
트레비를 생각하면서 가지는 짤막한 아이디어, 뭐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문화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팩이 주연한 로마의 휴일 때문에 트레비 분수가 관광객들이 꼭 들려야 할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 유적의 60%가 넘는다는 엄청난 관광자원이 있는 로마에서도 트레비는 압권이랍니다. 트레비 분수에 떨어트리는 동전은 얼마나 될까요? 트레비 분수 옆에 있는 본젤라또 아이스크림 집은 손님들로 엄청 복잡해요. 또 분수 앞에는 지상 3층에서 지하 3층 까지 베네똥 옷가게가 장사가 잘 된데요. 요즈음, 베네똥이 시원찮지만 당시에는 성업 중이었답니다.
영화 하나가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할 줄이야. 이상한 것은 로마의 휴일 한 번 보지도 못했을 신세대 사람들도 꼭 들려서 오드리 헵번 흉내를 낸다는군요.
하기사, 요즈음 욘사마 때문에 춘천과 남이섬에는 일본에서 온 여인들로 붐빈다지요. 영화든 소설이든 좋은 작품을 만든다면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로 몰려올거예요. 작품의 현장에 오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던가요.
아마 프랑스 파리가 그럴거예요. 장 꼭도가 보들레르가 싸르트르와 까뮈가 숨을 쉬고 커피를 마시던 파리의 카페에 가 보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 때문에 파리가 세계에서 제일 관광객들이 들르는 도시가 되었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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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아가도에 관해 몇가지 설명을 덧붙여야할까봐요. 아피아가도는 대규모 노예 봉기였던 스파르타쿠스 전쟁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노예검투사로 약 2년 동안 반로마공화정 항쟁을 이끌었던 스파르타쿠스군은 마침내 전쟁에서 지고말지요. 로마는 6천 명에 이르는 노예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아피아 가도에 세웁니다. 로마에 대적하면 이꼴을 면하지 못 한다고 경고를 한 셈이지요.
당시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에 대적하여 로마가 전쟁을 벌입니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지역은 그리스의 식민지에 세워진 도시였습니다. 로마에서 동남쪽으로 죽 내려가면 카푸아에서 장화모양을 한 이탈리아반도의 뒷꿈치에 있던 브란디시까지 이어진 아피아 가도는 신흥 로마가 그리스를 무찌르고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 큰 원인의 하나입니다. 그리스군에 연전연패 해도 로마는 자기 땅이니까 병력의 충원이 가능하지만 그리스군은 사상자가 나오면 충원 할 수 없어 끝내 밀려날 수밖에 없지요. 또한 아피아가도처럼 잘 닦여진 도로를 통해 군수물자와 병력이 금새 충원되니까 전쟁의 향배는 도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항복할 것만 같은 로마군을 일깨운 것은 바로 이 도로를 건설한 아피우스 클라디우스 입니다. 신흥 로마는 이 전쟁으로 그리스를 물리치고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룩합니다.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던 남부지방을 장악하며 지중해로 나아가는 아피아 가도의 끝 브란디시 항구를 거점으로 지중해의 패자가 됩니다. 거대한 로마제국의 시작이 바로 이 아피아 가도에서 시작했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아피아 가도를 미롯하여 로마의 잘 닦여진 도로는 나중에 이민족의 로마침공을 도운 셈이니 역사의 향배는 끝까지 두고볼 밖에. 아참, 박해하던 그리스도교의 전파는 이 가도를 따라 불길처럼 유럽으로 뻗어갑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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