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1950~ )의 작품인 <슬픔이 기쁨에게>는 우리가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도 ‘슬픔’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우리 사회의 소외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감정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살아가면서 우리가 간혹 잊고 사는 슬픔의 면모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기쁨은 단지 슬픔의 또 다른 한 형태일 뿐이라고 가르쳐 준다.
절절한 슬픔을 경험한 사람에게 진정으로 기쁨의 의미를 더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주위에서 누군가가 무슨 일을 성취하여 크게 기뻐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때로는 그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은 항상 자신을 뒤돌아보며 반성하게 한다.
그리하여 단지 내가 불행한 처지에 빠지지 않았다고 다행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을 겪는 사람의 심정이 되어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정호승은 우리가 잊기 쉬운 이웃에 존재하는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