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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이황(李滉, 1501~1570) | 이이(李珥, 1536~1583) | 서경덕(서경덕, 徐敬德, 1489~ 1546) |
배경 | 훈척투쟁기 | 사림집권기 | 이기논쟁기 |
대표적 표현 | 이존기비(理尊基卑) | 이통기국(理通氣局) | |
이기관계(理氣關係) | 이(理) 강조=주리론(主理論) | 기(氣) 강조=주기론(主氣論)) | 태허지기(太虛之氣)의 유기론(唯氣論) |
특징 | 근본주의적・이상주의적 성격이 강함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 | 현실적이며 개방적인 성격이 강함 | 무형•유형간에 기의 취산(聚散)이 있을 뿐 기의 증멸(增滅)은 없다 |
붕당 | 남인 | 서인 | 동인(북인) |
저술 | 주자서절요, 성학십도(聖學十圖), 송계원명이학통론, 도산12곡, 심경후론, 역학계몽전의, 학인심방, 예안향약, 자성록,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동호문답, 성학집요, 소학집주, 만언봉사, 격몽요결, 기자실기, 고산구곡가 | 화담집(花潭集) |
영향 | 영남학파 형성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기여 | 기호학파 형성 조선후기 집권세력과 연계 사회개혁론(수미법) | 개화사상 철학적 바탕 |
발전 | 김성일, 류성룡, 이현일, 이재, 이상정, 류치명→19세기 김흥락, 이우너조, 이진상, 곽종석 이일원론(理一元論) | 송시열, 호론(湖論), 낙론(洛論), 이일원론(理一元論) : 기정지느 이항로 | 18세기 임성주(任聖周), 철종~고종때 최한기(崔漢綺) |
라. 호락논쟁
18세기 노론 학계 사이에 인간과 사물의 본성에 대한 호락논쟁이 벌어졌다. 권상하(權尙夏, 遂菴)의 제자 가운데 한원진(韓元震, 南塘)이론을 주장하고 이간(李柬, 巍巖)은 동론을 주장하였는데 이간의 동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서울 지방에 많아 낙론(洛論)이라 하고 한원진의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호서(湖西) 지역에 많아 호론(湖論)이라 하였다.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하는 충청도 노론(湖論)과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고 하는 서울, 경기 노론(洛論)사이에서 시작하여 소론은 절충적 성격을 지닌 성혼의 사상을 계승하고 양명학과 노장사상 수용하여 성리학 이해에 대한 유연한 입장을 보였다.
이론 | 호론(湖論) | 낙론(洛論) |
지역적 기반 | 충청도 | 서울・기호지방 |
주장 |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
강조 | 기(氣)의 중요성 강조 | 이(理)의 중요성 강조 |
학자 | 한원진, 윤봉구 | 이간, 김창협, 어유봉, 이재. 박주필, 김원행 |
영향 | 위정척사 운동 | 북학파 및 개화파, 위정척사운동 |
2. 양명학의 수용
가. 양명학의 전래
양명학은 명나라 왕양명(王陽明, 본명 王守仁, 1472~1529)이 남송의 육구연(陸九淵, 陸象山)을 계승하여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주장한 것으로 주관적이며 실천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였다.
나. 양명학의 수용
정권에서 소외된 경기지역 소론을 중심으로 성리학의 절대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하는 양명학을 수용하였다.
다. 양명학의 발달
정몽주의 11대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에 의해서 체계화하여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정제두는 주자로부터 손을 끊고 강화(서울, 안산 41·6, 강화 61~87)에 옮겨 살며 반관적(半官的)인 일민(逸民)으로서 살며 일반민을 도덕 실천 주체로 인정하고 양반 신분제 폐지 주장하며 강화 학파 형성하고 실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정제두의 대표적인 저서는 존언(存言)에서 양명학 체계를 나타내 주고 있고 하곡집(霞谷集)이 있다.
라. 계승
집안의 후손과 인척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강화학파를 형성하고 이후 역사학, 국어학, 서화, 문학 등 새로운 경지 개척하고 실학자들과 영향을 주었으며 일제시대 박은식, 정인보 등이 계승하여 국학운동을 일으켰다.
3. 실학의 발달
가. 실학의 등장
양란 이후 혼란 속에서 사회 각 분야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했다. 사상적으로는 주자성리학, 경제적으로는 지주전호제, 사회적으로는 신분제를 비판하고 성리학자들이 윤리적인 문제에 국한하여 연구한 반면 실하자들은 사회・자연 등 모든 현상에 대해 탐구했다. 실학은 17~18세기 사회, 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 모순 해결책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한 학문이다.
나. 중농학파(경세치용학파)
정치에 소외된 가호지방 남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위해 토지제도의 개혁에 관심이 두었다.
류형원(柳馨遠) | ▪ 효종・현종때의 학자로 일생을 농촌에 살면서 체험하며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 반계수록(磻溪隧錄, 헌종 11년 1670) : 전제(田制)・교선(敎選)・임관(任官)・직관(職官)・녹제(祿制)・병제(兵制)에 관하여 역사와 현실에 대하여 상세히 검토하고 비판하였다. ▪ 공전제(公田制) : 정전제 정신을 살려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정전제(丁田制, 公田制)와 노예폐지를 주장했다, |
이익(李瀷) | ▪ 숙종・영조때의 학자로 깊이와 넓이를 더하여 경세치용의 학문을 하나의 학파로 이루었다, ▪ 성호사설(星湖僿說, 영조 37년 1761) : 천지(天地)・만물(萬物)・인사(人事)・경사(經史)・시문(詩文)의 5개 부문으로 나누어 넓은 식견과 명확한 고증으로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 곽우록(藿憂錄) : 개혁 사상이 요령있게 정해 놓은 것으로 국가 제도 전반에 대해 의견이 서술되어 있다. ▪ 6가지 폐단 : 노비, 과거, 양반문벌, 사치와 미신, 승려, 게으름 폐지 주장 ▪ 균전제(均田制) : 토지의 최저선인 영업전을 설정(限田論)하여 매매하지 못하게 하고 제안하고 노비의 관직 참여를 주장했다. |
정약용(丁若鏞) | ▪ 정조・순조 때 경세치용의 학문을 집대성한 학자 ▪ 순조 원년 1801년 신유사옥으로 18년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조선사회의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과 비판을 가하였다. ▪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탕론(湯論), 전론(田論), 강역고(疆域考)에서 사회 개혁사상을 발표하거나 국학연구를 하였다. ▪ 여전제와 정전제 :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공동 경작하여 공동 분배할 것을 제안하고(閭田論) 후기에는 토지를 정자(井) 처럼 9등분을 하여서 각각 한곳을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땅은 공동 경작하여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는 정전론(井田論)을 주장했다. |
서유구(徐有榘) | ▪ 국가 주도의 국영농장제(屯田制)를 제안했다.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종저보(種藷譜) |
박세당(朴世堂) | ▪지주전호제를 비판하고 채소, 과수, 화초 등의 재배기술을 소개했다. ▪ 색경(穡經) |
다. 중상학파(용후생학파)
인물성동론(洛論)을 중심으로 성립하여 상공업 진흥과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수용핡서을 주장하였다.
조헌(朝憲) | ▪ 동환봉사(東還封事, 선조 7년 1574)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이 1574년 신종의 성절사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연경)에 다녀와서 보고 듣고 조사한 바를 토대로 하여 조선에서 개선해야할 문제를 8조목으로 정리하여 올린 상소(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와 써놓기는 했지만 결국 올리지 못한 16조목의 상소(擬上十六條疏)를 모아 놓은 책이다(切事務者八條 關於根本者十六條). |
류수원(柳壽垣) | ▪ 영조때의 학자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직업에 따라 구분하자고 하였다. ▪ 우서(迂書, 영조 5년 ~13년 1729~1737)는 문답의 형식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개혁안이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
박지원(朴趾源) | ▪ 영조・정조 때의 학자로서 수레, 선박, 화폐의 이용을 강조했다. ▪ 열하일기(熱河日記, 정조 4년 1780) : 청에 가는 사신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했을 때 여행기.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김신선전(金神仙傳),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9편(일하지 않는 양반 유학자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소설) ▪ 연암집(燕巖集)의 연간각선본(煙湘閣選本) :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明田議), 안설(按說) |
홍대용(洪大容) | ▪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할 것과 지전설을 주장했다. ▪ 담헌서(湛軒書) : 임하경륜(林下經綸),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燕記), 의산문답(毉山問答, 실옹(實翁)과 허자(虛子)의 문답 형식으로 우주와 인간의 문제를 논한 책), 주해설용(籌解雪用) : 천문, 역학, 수학 |
박제가(朴齊家) | ▪ 승지 박평(朴坪)의 서자로 태어나 중국을 통한 국제통상, 신분차별 타파, 배와 수레의 이용. 벽돌 이용을 주장하고 검약보다는 소비를 강조했다 ▪ 북학의(北學議),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집(貞不集), 정유시고(貞不詩稿) |
이덕무(李德懋) | ▪ 연기(燕記) |
라. 국학 연구
⑴ 역사 연구
실학사상의 발달과 함께 민족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 고조로 역사연구는 문헌고증학적 방법을 심회시킨 역사서술이 나타나서 우리 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고 우리 역사 무대를 한반도와 만주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수광(李晬光) | ▪ 지봉유설(芝峯類說, 광해군 6년 1614) : 백과사전적 저서를 지어 천문, 지리, 유교, 식물 등에 관한 것과 함께 한국 옛 사회의 정치나 사회에 대한 해석을 피력하였다. |
오운(吳澐) | ▪ 동사찬요(東史簒要) : 임진왜란때 경상 의병의 참가 경험을 바탕으로 역대 명장의 활동과 기자 이후 유교 문화의 전통 자랑 |
조정(趙挺) | ▪ 동사보유(東史補遺) : 단군에서 고려말가지 삼국유사에서 무시되었던 산화, 전설을 수록하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 |
유계(兪棨) | ▪ 여사제강(麗史提綱, 현종 8년 1667) : 고려기 자치자강에 힘쓰면서 북방민족에 강력히 항전한 것과 재상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 강조 |
허목(許穆) | ▪ 동사(東史, 현종 8년 1667) : 북벌운동과 붕당정치를 비판하면서 단군, 기자, 신라를 이상시대로 묘사 |
홍만종(洪萬宗) | ▪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 숙종 31년 1705) : 단군을 정통구가로 시작하여 기자, 마한, 통일신라로 이어지고 삼국은 정통이 없는 시대이고 고려와 조선은 왕실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
임상덕(林象德) | ▪ 동사회강(東史會綱, 숙종 37년 1711) : 여사제강을 계승하면서 고대 강역과 단군・기자에 관한 고증 첨가 |
홍여하(洪汝河) | ▪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영조 38년 1762), 휘찬여사(彙纂麗史, 1639년경) |
이익(李瀷) | ▪ 성호사설(星湖僿說, 영조 37년 1761)에 한국사에 관한 부분이 많으며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역사서술을 제시하고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탈피하고자 했다. |
안정복(安鼎福) | ▪ 동사강목(東史綱目, 정조 2년 1778) : 이익의 제자로사 고조선에서 고려말까지 우리 역사를 치밀한 고증에 입각하여 통사로 서술하였다. ▪ 열조통기(列朝統紀 영조 43년 1767) : 조선시대를 다룬 역사책. ▪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 : 천주교 비판 |
한치윤(韓致奫) | ▪ 해동역사(海東歷史, 1814, 1823) : 중국의 사서를 비롯한 외국의 사서 500여권을 두루 섭렵하여 한국의 역사에 관한 기록을 뽑아 기전체로 엮은 책 |
이긍익(李肯翊) |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정조 21년 1797) : 조선 태조부터 숙종대까지의 야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사본말체의 역사책 |
이종휘(李種徽) | ▪ 동사(東史) : 단군과 고구려에 비중 |
류득공(柳得恭) | ▪ 발해고(渤海考, 정조 8년 1784년) : 신라의 통일이 불오나전하며 발해와 더불어 남북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
홍양호(洪良浩) | ▪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정조 18년 1794) : 왹구의 침략에 대항해서 싸운 명장들의 전기 |
김정희(金正喜) | ▪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철종 3년 1852) :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임을 고증하였다. |
⑵ 지리 연구
역사지리 | 한백겸(韓百謙) | ▪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광해군 7년 1615) |
신경준(申景濬) | ▪ 강계고(疆界考, 영조 32년 1756) | |
정약용(丁若鏞) | ▪ 강역고(疆域考, 순조 11년 1811) | |
한진서(韓鎭書) | ▪ 해동역사지리고(海東歷史地理考, 순조 23년 1823) | |
인문지리 | 이중환(李重煥) | ▪ 택리지(擇里志, 영조 27년 1751) : 사람이 살만한 곳의 관점에서 정치, 경제, 풍속, 인심 등을 적은 책 |
신경준(申景濬) | ▪ 도로고(道路考), 산수고(山水考) | |
작가미상 | ▪ 산경표(山經表) | |
지도 | 이이명(李頤命) | ▪ 요계관방도(遼薊關防圖, 숙종 32년 1706) |
정상기(鄭尙驥) | ▪ 동국지도(東國地圖, 1770년경) : 100리를 1척 | |
김정호(金正浩) | ▪ 청구도(靑丘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 : 10리미다 눈금 표시 |
⑶ 국어 연구
음운연구서 | 최석정(崔錫鼎) | ▪ 경세정운(經世正韻. 1678) |
신경준(申景濬) | ▪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1750) | |
류희(柳僖) | ▪ 언문지(諺文志, 1824) | |
화윤석(黃胤錫) | ▪ 자모변(字母辯) | |
어휘집 | 권문해(權文海) | ▪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1589) |
이의봉(李義鳳) | ▪ 고금석림(古今釋林) : 우리 방언과 해외 언어 정리 | |
정약용(丁若鏞) | ▪ 아언각비(雅言覺非) | |
류희(柳僖) | ▪ 물명고(物名考, 1820) |
⑷ 백과사전
이수광(李晬光) | ▪ 지봉유설(芝峯類說, 광해군 6년 1614) : 백과사전적 저서를 지어 천문, 지리, 유교, 식물 등에 관한 것과 함께 한국 옛 사회의 정치나 사회에 대한 해석을 피력하였다. |
이익(李瀷) | ▪ 성호사설(星湖僿說, 영조 37년 1761) : 천지(천지)・만물(만물)・인사(인사)・경사(경사)・시문(시문)의 5개 부문으로 나누어 넓은 식견과 명확한 고증으로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
이덕무(李德懋) |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서유구(徐有榘) |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이규경(李圭景) |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홍봉한(洪鳳漢) 외 | ▪ 동군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
Ⅱ. 과학기술의 발달
1. 서양문물의 수용
가. 전래 과정
17세기 선조말에 명에 간 사신(유럽지도), 인조 9년 1631년 정두원(화포, 천리경, 자명종, 만국지도, 천문서 서양풍기 등), 청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과학서적 등), 홍대용, 박지원 등이 서양문물을 접하고 이에 대한 이해 폭을 넓혔다. 인조 8년 1628년 Weltevree(朴淵, 朴燕, 박연)과 효종 4년 1653년 Hamel 등 표류자를 통하여 전래되기도 하고 이익의 제자 및 북학파를 중심으로 수용하였다.
이익(남인) | 우파 | 안정복, 신경준, 윤동규, 정상기 |
좌파 |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
나. 내용
유럽지도, 포, 천리경, 자명종, 만국지도, 천문서 서양풍속, 과학서적
2. 천문학과 지도 제적 기술의 발달
가. 천문학
서양과학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했다.
지동설(地動說) | 김석문(金錫文), 이익(李瀷), 홍대용(洪大容)이 주장하여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다. |
무한우주론 | 홍대용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
시헌력(時憲曆)・천세력(千歲曆) | 효종 4년 1653년 김상범(金尙範)은 김육(金堉)의 도움을 받아 Adam Schall(湯若望)의 저서를 보고 시헌력(時憲曆)을 만들고 새로운 역법이 연구되고 천세력(千歲曆)이 만들어 졌다. |
혼천의(渾天儀) | 홍대용 제작 |
시헌기요(時憲紀要) | 헌종 때 남병길(南秉吉)이 정리한 역산서 |
나, 지리학
중국 선교사들이 제작한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 곤여전도가 전래되어 조선인들의 세계관을 확대시켰다.
3. 의학, 농학과 기술의 발달
가. 의학
허준(許浚) | 동의보감(東醫寶鑑, 광해군 2년 1610), 벽역신방(辟疫新方, 1613),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 1613) |
허임(許任) |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인조 22년 1644) |
이석간(李碩幹) |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인조 22년 1644) : 李纘, 蔡得己, 朴濂, 許任 4인의 경험방 |
동의문견방(東醫文見方, 인조 말기~효종) | |
류상(柳相) | 고금경험유방(古今經驗幼方) : 박진희(朴震禧)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 현종 4년 1663)의 대부분 인용한 천연두(天然痘)에 관한 책 |
이헌길(李獻吉) | 마진방(痲疹方), 마진기방(痲疹奇方) |
정약용(丁若鏞) | ▪ 마과회통(麻科會通, 정조 22년 1798) : 이헌길(李獻吉, 자 蒙叟) 마진기방(麻疹奇方)과 마진방(痲疹方), 허준 벽역신방(辟疫神方), 조정준(趙廷俊) 급유방(及幼方), 이경화(李景華) 광제비급(廣濟秘笈), 임서봉(任瑞鳳) 임신방(任申方)을 중심으로 중국의 많은 마진전문서를 참고하여 저술 ▪ 의령(醫零), 촌병혹치(村病或治, 1802) ▪ 박제가와 함께 조선에서 종두법을 처음 실험했다. |
황필수(黃泌秀) | 방약합편(邦藥合編, 고종 21년 1884) : 청(淸)나라 왕인암(汪訒庵)의 본초비요(本草備要), 의방집해(醫方集解), 의방활투(醫方活套), 손익본초(損益本草)를 합편하고, 용약강령(用藥綱領)·구급(救急)·금기(禁忌) 등 십수 종을 합쳐서 편집, 간행한 것이다. |
이제마(李濟馬) |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고종 31년 1894, 광무 5년 1901) : 사상의학(四象醫學, 太陽, 少陰, 少陽, 太陰)을 발전시키고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등으로 체질을 구분하여 치료했다. |
나. 농학
신속(申洬) | 농가집성(農家集成, 효종 6년 1655) : 농사직설(農事直說, 정초)+금양잡록(衿陽雜錄, 강희맹)+자신의 견해. 쌀 중심의 벼농사 중심의 농법 소개하고 이앙법(移秧法) 보급에 공헌. 洬 비올 속 |
박세당(朴世堂) | 색경(穡經, 숙종 2년 1676) : 석천동(의정부 장암)에서 10년간 은거하면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경험을 과수・축산・원예・수리・기후 등에 중점을 두고 서술한 농서 |
홍만선(洪萬選) | 산림경제(山林經濟, 숙종 41년 1715) : 농업・임업・축산・양잠・식품가공・저장 등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알아 두어야 할 사항들을 기록한 것 |
박지원(朴趾源) | 과농소초(課農小抄, 정조 22년 1798) : 면천 군수 시절 편찬한 농서 |
서호수(徐浩修) | 해동농서(海東農書, 정조 23년 1799) : 왕명으로 편찬한 한국의 농학을 종합하여 새로운 체계화를 도모한 종합 농서 |
서유구(徐有榘)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순조 27년 1827) : 임원십육지. 정조의 구농서윤음(求農書綸音)을 받들어 박세당의 산림경제와 중국의 900권을 참조하여 편찬한 응지진(応旨進)의 농서로서 당대 최고의 백과사전적 농서 綸音(윤음) : 조칙(詔勅). 조서(詔書). 윤언(綸言). 윤지(綸旨). 윤명(綸命). 윤발(綸綍). 윤불(綸紼), 윤조(綸詔) |
구황식물(救荒植物)
강필리(姜必履) | 감저보(甘藷譜, 영조 42년 1766) |
김장순(金長淳) | 감저신보(甘藷新譜, 순조 13년 1813) |
서유구(徐有榘) | 종저보(種藷譜, 군조 34년 1834) |
한국의 3대 어보(魚譜)
1. 자산어보(玆山魚譜)
조선 시대 순조 15년 1815년 정약전(丁若銓)이 지은 어류학서
정약전(丁若銓, 1758년~1816)이 1801년 신유사옥 때 흑산도에 유배되어 생활하면서 1814년에 편찬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수산물 관련 서적으로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필사본만 남아 있다.
흑산도 근해의 어류와 수중 식물을 인류(鱗類 , 비늘 있는 물고기) 42종, 무린류(無鱗類, 비늘 없는 물고기), 잡류(雜類, 물고기는 아니지만 물에 사는 생물) 46종 및 개류(介類, 조개 게 등) 69종 기타 해조류 46종 등 227종의 생물이 소개되어 있다.
2.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1803년 김유가 유배지인 진해에서 저술한 어보로서는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저술된 기록 중 최초로 진해에 당시 잡히던 어패류의 분포와 종류, 형태와 생태, 채포와 이용법 등을 기술한 문헌이다.
진해에서 귀양살이 하면서 무료하여 붓 가는대로 기록하였다고 하나, 어부들과 평소에 흉금 없이 친하게 어울렸으며 자연스럽게 물고기과 조개들과 익숙하게 잡히면서 어패류 72종와 유이종 30여 종의 방대한 양이 수록되어 있고, 그 말미에 그 유족을 주제로 한 우산잡곡이라는 한시 39수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그 시에는 남도의 그 당시의 풍물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생동하는 어촌마을 진해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 전어지(佃漁志)
풍석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만년에 저술한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의 일곱 번째 부문으로서 목축과 사냥, 고기잡이에 관한 내용들이 책 4권(권 제 37-권 제 40)으로 나누어 서술되어 있다.
1권(제37)과 2권(제38)에는 목양(牧養. 말 소 노루 양 돼지 개 고양이 닭 기러기 물고기 꿀벌)에 관련된 것이고, 3권(제39)에는 익렵(弋獵)과 어조(漁釣) 기술을 담고 있으며, 4권(제40)에는 어명고(魚名攷. 江魚 海魚 雜簒)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다. 과학기술
이수광(李晬光) | 지봉유설(芝峯類說, 광해군 6년 1614) : 일식, 월식, 벼락, 조수 간만에 관해 소개하였다. |
정약용(丁若鏞) | 정조가 청으로부터 구입한 5000여권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 실린 장 테렝즈(Jean Terenz, 鄧玉菡)의 기기도설을 참조하여 기중기를 고안하여 수원 화성을 축조(1784~1786)에 이용하고 한강 배다리(舟橋)를 설계하였다. |
최석정(崔錫鼎) | 구수략(九數略) : 수학책 |
홍대용(洪大容) | 주해수용(籌解需用) : 수학책 |
Ⅲ. 문학과 예술의 경향
1. 조선 후기 문학의 성격
가. 서민문화의 발달 배경
조선 후기 상공업, 농업생산력의 발달은 서민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나. 특징
양반 중심의 문화가 세속화되고 서민 중심의 문화로 대체되어 가는 경향이 강했고 양반 중심의 문화에 대해서 비판적인 성격을 가졌다.
2. 판소리와 탈놀이
가. 판소리
⑴ 의의
판소리는 상민이나 광대(廣大, clown)를 통해 보급된 종합예술로서 소릿꾼이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긴 서시시적 이야기를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 발림)을 섞어가며 엮어가는 것을 말하며
⑵ 유래
판소리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영조 30년(1754)에 유진한이 지은 춘향가의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숙종(재위 1674∼1720) 이전에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고, 조선 전기 문헌에 보이는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가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⑶ 장단 구성
판소리는 느린 진양조, 중모리, 보통 빠른 중중모리, 휘모리 등 극적 내용에 따라 느리고 빠른 장단으로 구성된다.
⑷ 추임새
고수의 반주는 소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면서 “얼씨구”, “좋다”, “으이”, “그렇지” 등의 감탄사를 내는데, 이를 추임새라고 한다.
⑸ 발전과 명창
판소리는 순조(재위 1800∼1834) 무렵부터 판소리 8명창이라 하여 권삼득(權三得. 전북 익산), 송흥록(宋興祿, 전북 남원 운봉), 염계달(廉季達, 경기 여주), 모흥갑(牟興甲, 경기 평택 진위), 신만엽(申萬葉, 전북 익산 여산), 고수관(高壽寬, 충남 서산 해미), 박유전(朴裕全, 전북 순창), 김제철(金濟哲, 충북 괴산)등이 유명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장단과 곡조가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였고, 동편제(전라도 동북지역), 서편제(전라도 서남지역), 중고제(경기도·충청도) 등 지역에 따라 나뉜다.
⑹ 정리
판소리는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변강쇠타령·배비장타령·옹고집타령·강릉매화타령·무숙이타령(왈자타령)장끼타령·가짜신선타령( 또는 숙영낭자전) 등 12마당이었으나 신재효(申在孝)에 의해서 6마다으로 정리되었고 현재는 춘향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흥보가 5마당만이 전한다.
나. 탈춤(가면극)과 산대놀이
⑴ 탈춤
지배층의 위선(僞善)을 풍자(諷刺)하고 부정과 비리를 고발하는 등 사회적 모순을 풍자했다. 탈춤은 춤, 노래와 사설이 섞여 진행되며 향리 집단의 주도하에 읍(邑)의 제의(祭儀)를 배경으로 발전하였고 대개 비작업적인 연예인들에 의해서 전승되었으나 남사당(南寺黨)이라는 직업적 유랑 연예인에 의해 전승되기도 하였다. 남사당은 탈춤 외에 농악, 꼭두각시놀음, 줄타기, 땅재주, 접시돌리기 등의 놀음을 하기도 하였다.
⑵ 산대놀이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을 줄인 말로 탈을 쓴 광대가 산대에서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재담을 하는 가면극으로 산대도감놀이・산디도감・산대놀이・산디놀이・산두나례도감・산두・나례도감이리고도 한다. 산대놀이는 조선조 전기에 산대나례(山臺儺禮)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나례도감(儺禮都監)이나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1930년에 채록한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 극본에는 산대도감극이라고 표제를 달았다. 오늘날 산대극이라고 하면 경기지방에 전해오는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松坡山臺)를 가리키는 것이나 그 놀이의 내용으로 보아 산대도감계통극으로 묶을 수 있는 가면극으로 그 대사가 채록된 것을 들어보면 앞에서 든 경기지방의 두개의 놀이와 황해도의 봉산(鳳山)·강령(康翎)·은율(殷栗)탈춤이 있고, 영남지방의 통영·고성·가산(駕山)·진주의 오광대(五廣大)와 수영과 동래의 야류(野遊) 등이 있다. 서울 변두리의 애오개(阿峴)와 녹번 등지의 본산대(本山臺)가 있었으나, 지금은 다 없어져서 알 길이 없으며, 본산대를 본받아 만들었다고 하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3. 한글 소설과 사설시조
가. 문학의 새로운 경향
한글소설과 사설시조가 등장하는 등 문학의 장르가 다양해졌다. 기존 양반 외에 중인, 서얼, 상인 등이 창작의 주체로서 등장했고 19세기는 서민문학의 전성기로서 평민들 사이에 풍자가 넘치는 잡가가 유행했다.
나. 한글 소설의 등장
사회비판소설 | 허균(許筠)의 홍길동전(洪吉童傳) |
권선징악 소설 | 장화홍련전, 창선감의록, 콩쥐팥쥐전, 심청전, 흥부전 |
남녀간의 애정 소설 | 옥루몽, 숙향전, 춘향전 |
군담소설 | 임진록, 임경업전 |
다. 사설시조(辭說時調)의 등장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사설시조가 유행해서 몰락 양반이나 서리, 기생들이 주로 지었다. 영조 4년 1728년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靑丘永言), 영조 39년 1763년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海東歌謠)의 시조집이 편찬되었다.
라. 한문학의 변화
실학의 유행으로 꾸밈없는 문체를 사용해서 양반들을 신랄하게 풍자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9편)], 연암집(燕巖集)의 연간각선본(煙湘閣選本)(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이다. 단편소설로는 동패락송(東稗洛誦), 청구야담(靑邱野談)이 있다.
마. 시사(詩社)의 조식
서얼, 중인, 서리를 중심으로 동호인들이 모여 문학 창작 활동을 하였고 시를 모아 시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숙종 38년 1712년 서리 출신 홍세태(洪世泰)의 해동유주(海東遺珠), 영조 13년 1737년 역관 출신 고시언의(高時彦)의 소대풍요(昭代風謠), 정조 21년 1797년 역관 출신 천수경(千壽慶)의 풍요속선(風謠續選), 철종 8년 1857년 서리 출신 유재건(劉在建)의 풍요삼선(風謠三選)이 편찬되었다. 풍요(風謠)란 양반사대부의 문학인 아(雅)에 대조되는 하급신분층의 시라는 의미이며 시사로는 천수경(千壽慶) 등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玉溪詩社)가 있었다.
바. 위항문학(委巷文學)
규사(葵史) | 철종 10년 1859년. 서얼의 역사 |
연조귀감(掾曹龜鑑) | 헌종 12년 이진흥(李震興).향리의 역사 |
호산외기(壺山外記) | 헌종 10년 1844년 조희룡(趙熙龍). 중인 출신 |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 철종 13년 1862년 유재건(劉在建). 서리 출신 |
희조일사(熙朝軼事) | 고종 3년 1866년 이경민(李慶民). 가난한 중인 출신 |
사. 야담 잡기류
차천로(車天輅) | 17세기 초 오산집(五山集) |
류몽인(柳夢寅) | 광해군 13년 1621년 어우야담(於于野談) |
17세기 중엽 대동야승(大東野乘) : 방대한 야사 전집 | |
태평광기(太平廣記) 언해 : 太平興國 3년 978년에 이방(李昉) 등이 칙령에 따라 편찬한 중국 설화집 |
4. 조선 후기의 회화 및 서예
가. 진경산수화 발달
숙종~정조(1675~1800)까지 중국 화풍을 모사하던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 자연을 그리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발달했다.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 계상정거(溪上靜居圖), 함흥본궁송도(咸興本宮松圖), 연광정도(練光亭圖), 일출송학도(日出松鶴圖), 초당춘수도(草堂春睡圖), 풍우기려도(風雨騎驢圖), 행단고슬도(杏壇鼓瑟圖), 화표주도(華表柱圖)김홍도의 총석정도(叢石亭圖), 금강산명경대(金剛山明鏡臺), 월하취생(月下吹笙)가 유명하다.
나, 풍속화 유행
일상생활 모습을 생동감있게 표현했으며 유교적인 양반사회에 대한 반항을 그려냈다.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 3대 풍속화가가 유명하다.
김홍도(金弘道) | ▪ 산수화, 인문화, 불화, 풍속화에 모두 능했으나 특히 풍속화로 유명했다. ▪ 명암, 원근감 활용 등 서양화법을 도입했다. ▪ 도화서 소속 화원으로서 서민사회의 생활모습을 주된 주제로 삼았다. ▪ 단원 풍속화첩 : 밭가는(논갈이) 광경, 추수하는모습, 대장간의 풍경, 무악, 씨름 |
신윤복(申潤福) | ▪ 주로 양반과 부녀자의 풍류생활을 그렸다 ▪ 남녀 사이의 애정을 감각적이고 해학적으로 그려냈다. ▪ 미인도(여인도), 풍속화첩,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단오풍정(端午風情). 월야밀회(月夜密會) |
김득신(金得臣) | ▪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반상도(班常圖, 노상현알), 성하직구(盛夏織屨), 달보고 짖는 개 |
그밖에 18세기에 심사정(沈師正), 변상벽(卞相璧), 윤덕희(尹德熙), 김두량(金斗樑), 최북(崔北) 등 개성있는 화가들이었으며 이인상과 강세황은 뛰어난 문인화가였다.
다. 서양 화풍
강세황(姜世晃)이 시・서・화의 삼절로 유명하며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여 사물을 그려냈다. 영통동구도
라. 19세기 화풍
보고화풍이 유행하여 사군자, 산수화, 인물화 등이 다시 등장했다.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장승업의 군마도(軍馬圖) 등이 유명했다.
마. 민화 유행
민화(民畵)는 한 민족의 삶·신앙·멋을 담고 있는 서민적인 그림이다. 생활공간 장식을 위해 해, 달, 나무, 꽃, 동물 등을 그려서 서민들의 소망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미술을 인식하면서 작품창작을 위주로 하는 정통화의 권위의식이 생겨나기 수천 년 전 그림은 인간의 삶을 위해 인간본연의 소박한 신앙의 조형적 표현으로 만들어졌고, 만인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멋의 대상으로 대접을 받았으며, 그것은 곧 삶·얼·멋 3위일체의 결정체였다. 이러한 복합성을 지닌 그림들을 동·서양에서 모두 넓은 뜻으로 민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국문화사에서 이러한 그림들은 속화(俗畵)라고 불리면서 정통화단의 천대를 받았으나 1965년경부터 민화에 대한 재인식이 싹트고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연구가 시작되어 민화의 문화사적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결과 한국민화는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양이 방대하고, 질에 있어서도 기왕의 일반적 민화 수준을 넘어서 기상천외의 독창적인 작품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민화라는 용어는 학문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야생어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혼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민화는 민속화·민족화·민중화·민체화·민간상징화의 성격을 종합한 폭넓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을 인식하면서 작품창작을 위주로 하는 정통화의 권위의식이 생겨나기 수천 년 전 그림은 인간의 삶을 위해 인간본연의 소박한 신앙의 조형적 표현으로 만들어졌고, 만인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멋의 대상으로 대접을 받았으며, 그것은 곧 삶·얼·멋 3위일체의 결정체대동법. 이러한 복합성을 지닌 그림들을 동·서양에서 모두 넓은 뜻으로 민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국문화사에서 이러한 그림들은 속화(俗畵)라고 불리면서 정통화단의 천대를 받았으나 1965년경부터 민화에 대한 재인식이 싹트고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연구가 시작되어 민화의 문화사적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결과 한국민화는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양이 방대하고, 질에 있어서도 기왕의 일반적 민화 수준을 넘어서 기상천외의 독창적인 작품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민화라는 용어는 학문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야생어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혼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민화는 민속화·민족화·민중화·민체화·민간상징화의 성격을 종합한 폭넓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바. 서예
이광사(李匡師)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창안하고 김정희는 추사체(秋史體)라는 독창적인 글자체를 창안했다.
5. 공예기술
가. 자기공예
흰 바탕에 푸른 유약을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가 발전하고 안료로 사용되는 회회청(回回靑)이 정조때부터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민간에 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나. 옹기
음식 저장용 그릇으로서 서민들이 주로 사용했다.
다. 목공예
의자, 장롱, 책상 등 생활 및 문방구로서 크게 발전했다.
라. 화각공예
쐬뿔(牛角)을 쪼개어 무늬를 표현했다.
6. 음악
가. 양반음악
종래 가곡, 시조를 애창했다.
나. 음악 향유층의 확대
서민들은 민요를 즐겨 불렀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직업적인 광대, 기생의 판소리, 산조와 잡가 등이 발전했다.
7. 건축
가. 17세기
불교사원 중심으로 대규모 다층건물이 유행하였다.
나. 18세기
부농과 상인의 지원을 받은 장식성 강한 서원들이 건립되었고 전통적인 성곽 축조기술에 서양 건축 기술을 접목시킨 수원 화성이 축조되었다.
다. 19세기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때 소실한 경복궁을 재건(1865~1867)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