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시루
김영근
우리 집에서 기른 콩나물은 흰 솜털 같은 잔뿌리가 아주 많았다. 어른들은 영양가가 많다고 좋아하였다. 어린 우리는 질긴 것 같고 잔털이 슝슝 나 있는 것이 보기에 흉하며 이빨에 끼이고 꼭꼭 씹히지 않아 싫어했다. 시장에서 사 온 콩나물은 끝이 뭉뚝하고 잔뿌리가 없었다. 빨리 기르기 위해서 물만 주지 않고 다른 것을 준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밑에 구멍이 뚫린 항아리다. 콩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김발 같은 볏짚 채반을 펴서 그 위에 콩을 길렀다. 작은 콩을 1~2일 불려서 싹이 2~3cm 정도 자라면 콩나물시루에 옮겨 놓았다.
싹이 빨리 자라라고 두꺼운 옷이나 작은 이불로 시루를 싸매어 전체의 온도를 높여 준다. 틈이 날 때마다 시루에 물을 주는데 어쩌다 잊고 안 준 때도 있었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을 주려고 덮은 보자기를 젖히는 순간 콩나물 싹이 오그라드는 것 같이 보였다. 내가 목이 마르고 마음이 타들어 갔다. 물을 한꺼번에 빨리 주면 콩이 구멍 아래로 빠져나가기에 물을 흩뿌리듯 조심스럽게 조금씩 주면 쏴 소리만 내었다. 계속 주면 실컷 잘 먹고 있다는 듯 목마름이 가시고 있다는 듯이 조금씩 물을 아래로 내려보내는 소리가 약하게 들린다.
콩나물시루를 따뜻한 방의 아랫목에 두었다. 바깥 날씨가 추우면 우리 형제는 서로 아랫목을 차지하고 따뜻한 곳에 앉으려 자리다툼을 하였다. 우리는 겨울철 내내 아랫목을 독차지하는 콩나물시루를 시샘하였다. 어떤 때는 콩나물시루를 넘어뜨려 온 방 안을 물바다를 만들었다. 서서 자라던 콩나물이 방바닥에 깔려 떠다니면서 쫓겨나서 서럽다는 표정인 것 같았다. 부모님께 야단맞을까 봐 머리 부분을 잡고 하나하나 간추려 시루에 담았다. 처음 있던 아기자기한 모습이 아니고 콩나물이 서로 내 머리가 크다고 키 자랑을 하였다. 헝클어진 모양이 한눈에 표시가 났다. 어머니께서 들쭉날쭉한 콩나물을 보시고 자리바꿈을 시켜주었구나? 다른 곳에서 힘도 올렸으니 맛이 더 나겠네 하셨다. 따끔한 꾸중보다 독려의 말이 빳빳하게 머리를 쳐들고 있는 콩나물에 고개가 숙어졌다. 얼굴을 콩나물 머리 사이로 숨기고 싶었으나 촘촘히 박힌 머리 사이에 들어갈 틈이 없었다.
콩나물이 햇빛을 받으면 콩 머리가 녹색으로 변했다. 삶아도 단단해서 잘 씹히지 않고 질기고 맛이 없어 먹지를 못한다. 부드러운 콩나물을 기르려고 햇볕이 안 드는 방문과 멀리 떨어진 곳에 두고 보자기를 덮었다. 문을 빨리 여닫아 바깥의 더운 기운이 방안으로 스며 들어가지 않도록 하였다.
설이 다가오면 콩나물을 길러 이웃집과 나누어 먹었다. 어떤 해는 콩나물을 이웃이나 시장에 내다 팔았다. 우리 집에서 기른 것은 시장에서 사는 것보다 입맛에 맞는다고 모두 잘 사가서 인기가 있었다. 콩나물을 길러 파는 것은 용돈을 얻을 기회가 되었다. 콩나물에 물주기는 서로 맡아서 하려고 하였다.
콩나물은 물을 받으면 아래로 내 보냈다. 우리 형제는 비가 오거나 어려움이 닥치면 우산 속으로 모여들었다. 집안 살림에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을 하여도 부모님은 모르는 척 너그럽게 대하여 주었다. 그 덕에 형제는 비가 내린 때에도 우산 하나를 받쳐 들고 비를 같이 피했다. 모든 것을 자연의 이치에 맞기고 부모님이 베풀어 주시는 대로 큰 우산 속에서 비 가림을 해 가면서 자랐다.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콩나물은 작은 시루에서 주는 물을 흘려 내리는 척하면서 모두 받아먹었다. 어머니께서는 빨리 자란 것부터 반찬을 만들었다. 키가 작을 때는 빨리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먼저 뽑혀 밥상에 오를 때는 고마운 마음과 웃자람의 애처로움도 들었다. 무엇을 할 때 키가 큰 순서대로 뽑을 때 자신이 없으면 서 있는 줄의 맨 뒤로 가서 무릎을 굽히고 섰다. 작은 척하며 시간을 벌고 다음 기회를 얻어 위기를 모면하는데 콩나물은 그런 요령도 없다. 어쩌면 우리 집 살림을 위해 빨리 자라려고 자신이 앞장서 주니 고마울 뿐이다.
콩나물이 작은 시루에서 머리를 맞대고 자라지만 우리 형제는 좁은 방을 대궐로 생각하였다. 부족한 것이 많아도 불편함을 모르고 생활하였다. 콩나물이 주는 물을 모두 먹지 않고 남기듯 우리 형제도 서로 많이 가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몫도 서로 양보하였다.
우리가 비뚤어진 행동을 할 낌새가 보이면 부모님이 먼저 쓰다듬고 껴안았다. 콩나물이 잘 자라게 관리하듯 아무도 모르게 불러 타일러서 형제애를 깊게 갖도록 토닥여 주었다. 콩나물이 새로운 물을 받아먹고 빨리 자라듯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 속에 서로 위로하고 용기를 나눠 주었다. 동기간에 끼를 키워주어 더 잘하게 도와주는 일에 마음을 모았다.
버릇없는 콩나물은 누워서 자라 다른 콩나물이 자라는 것을 방해된다고 했지만 어떤 일을 하든지 형제는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행동이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사랑으로 대하여 함께 어울리도록 정성을 다하였다.
이제 시루 밖으로 나왔는데 다시 콩나물이 되어 시루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우리는 끼니마다 어머니께서 콩나물로 몇 가지 반찬을 만들어 주시는 것을 최고로 여기고 잘 먹었다. 때로는 콩나물 줄기가 서로 엉켜 하나를 잡는다고 잡아도 여러 개가 뭉쳐 달라붙어 같이 올라왔다. 형제가 인정 있게 서로가 똘똘 뭉치라는 것과 같았다. 이어진 것이 있는 모습은 형제의 정을 이은 것 같았다. 길게 뻗쳐진 것을 잘라서 먹기 좋게 도와주는 일에는 항시 맏형이 앞장섰다.
올겨울에도 튼튼한 싹을 틔울 콩을 안방의 콩나물시루에 안치고 싶다. 옛날의 철부지로 안방 아랫목에서 자리다툼을 하던 때가 그립다. [끝]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잔털이 슝슝' 이라는 문구의 '슝슝'은 어떤 뜻인지요? 한글 사전에 나오지 않는데..
감사합니다.
순박한 형제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편안하게 잘 읽히고 정이 묻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