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철기문화와 여러 나라의 성장
Ⅰ. 철기의 사용
1. 철기시대(鐵器時代)
철기는 BC 5세기경 중국에서 압록강 중류, 청천강 상류를 거쳐 대동강으로 철기문화가 유입되었다. 청동기는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었지만 철기는 전국에서 사용되었다.
2. 유물
가. 중국과의 교류 흔적
명도전(燕, 齊나라 화폐), 반량전(秦나라 화폐), 오수전(漢나라 화폐)과 및 붓 출토로 중국과의 교류를 알 수 있다. 특히 경남 창원 다호리(茶戶里) 널구멍(土壙木槨墓)에서 철제농구, 청동검, 칠기고배(漆器高杯), 붓 등이 발견되었는데 붓은 한자가 사용되었음을 증명한다.
나. 청동기 문화
종래 중국식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거친무늬거울(多鈕粗文鏡)은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잔무늬거울(多鈕細文鏡)로 바뀌었고 거푸집(鎔范, 鎔笵)이 만들어 졌다.
다. 농기, 무기
철제 무기와 농기가 제작되었으며 철제농기구의 이용으로 생산량이 급증했다.
3. 주거지와 무덤장식
주거는 배산임수의 전통적인 취락형태를 보이고 무덤은 청동기 말에 나타난 널무덤(木棺墓), 독무덤(甕棺墓)이 만들어 졌다.
초기철기시대
한국고고학에서 사용되는 시대구분 용어로 여러 논란이 있지만 기원전 4세기대에서 한군현(漢郡縣) 설치이후 한(漢)의 발달된 철기문화(철제무기류, 단조철부 등)가 본격적으로 남한지역에 파급되는 시기인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三韓時代) 이전인 기원전 2세기까지 약 300년간의 기간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한국식동검(세형동검), 세문경(잔무늬거울), 청동제 의기 및 무기, 철제 농공구 등이 출토된다.
* 세형동검(細形銅劍)
세형동검은 초기철기시대의 대표적 유물로 좁고 긴 형태를 이루며, 청천강 이남의 한반도지역에서 발견되어 한국식동검이라고도 부른다. 청동기시대 후기에 출토되는 칼날(劍身)이 비파 모양인 비파형동검(요령식동검)과 대비된다. 세형동검은 대부분 석곽묘와 토광묘에서 주로 출토된다.
* 검파두식(劍把頭飾)
세형동검 손잡이(劍把) 끝에 장착하여 칼날(劍身)과 칼손잡이(劍把)의 무게 균형을 잡아 검으로 찌를 때의 효과를 더하기 위한 손잡이 끝 장식이다.
* 검초하부 연결금구(劍鞘下部 連結金具)
세형동검 칼집은 세부분(상부-결입부-하부)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 하부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금속제 부속구이다.
* 철사(鐵鉇)
오늘날의 조각도와 같은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로 만든 공구류의 일종이다. 끝이 뾰족하고 칼과는 달리 횡단면이 납작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동과(銅戈)
동과는 중국 殷∙周代부터 사용되던 무기다. 과는 전차전에서 기병들이 사용하던 무기로 긴 병부에 날이 아래로 가게 착장해 멀리서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이다. 한반도에 유입되면서는 근거리에서 보병들이 내리찍는 무기로 사용됐다.
* 주조철부(鑄造鐵斧)
주조철부는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떠 낸 도끼로 임시로 두드려서 제작하는 단조철부와 구분된다. 주조철부는 농공구로서의 의미가 크지만, 무기로도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 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
표면에 흑연 등의 광물질을 발라 마연(磨硏)하여 흑색의 광택을 띠는 목이 좁고 긴 항아리다. 형태는 목이 긴 형태가 주류를 이루며, 단면 원형의 점토대토기와 함께 초기철기시대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토기다.
Ⅱ. 여러나라의 성장
1. 부여
가. 지형과 경제
⑴ 위치: 만주 송화강 유역의 평야지대(農安)에 위치하여 농경에 유리했다.
⑵ 농경목축 : 관리들의 명칭을 가축에서 따온 것도 목축이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⑶ 경제 : 말, 주옥, 모피 등이 특산물로 유명하다.
나. 전개
⑴ 이미 1세기 초에 왕호 사용, 중국과 외교 관계
⑵ 3세기 말 선비족의 침략으로 쇠퇴하고 결국 고구려 문자왕때 편입(494)
다. 정치
⑴ 왕 아래 馬加, 牛加, 狗加, 豬加의 사출도가 있었고 그 외 使者 등의 관리 존재
⑵ 가(加)들은 四出道를 다스림
⑶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족 연맹 형성
⑷ 오곡이 익지 않으면 왕에게 책임을 물었다.
라. 사회
⑴ 법률이 매우 엄하였다.
①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②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를 배상하게 했다(一責十二法).
③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④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고 그 시체를 산 위에 버려 썩게 한다(가부장적 가족제도 성립)
⑵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었다.
지배층 | 가(加) |
호민(豪民) |
피지배층 | 하호(下戶) |
노비(奴婢) |
⑶ 제천행사 : 원시시대 수렵사회의 전통인 영고(迎鼓, 12월)(농경사회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
⑷ 점복유행 :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牛蹄占法)
⑸ 장례풍습 : 순장(旬葬)
마. 의의 :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고구려, 백제의 원형이 됨
2. 고구려(高句麗)
가. 지형과 경제
⑴ 위치
동가강 유역의 졸본(卒本, 桓因, 환인)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⑵ 지형
산악지대이므로 토지가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서 식량이 모자랐다. 활발한 정복과 약탈(掠奪)을 전개했다(전투가 생산활동).
⑶ 경제
토지가 척박하여 초기부터 평야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고(掠奪經濟) 부경(桴京)이 있었다.
나. 건국
BC 37년 주몽(朱蒙)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 대립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서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다. 정치
⑴ 5부족 연맹 : 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 연노부),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절노부(絶奴部)
⑵ 활발한 정복전쟁 : 요동 진출, 옥저 정복
⑶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어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독립된 세력 유지하였다.
⑷ 제가회의(諸加會議) :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하고,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라. 사회
⑴ 부여와 비슷한 사회계급 구성
⑵ 제천행사 : 국동행사로서 동맹(東盟, 10월)이 있었다.
⑶ 조상신숭배 : 주몽(朱蒙), 류화부인(柳花婦人)
⑷ 데릴사위제(婿屋制, 서옥제)
⑸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levirate)
⑹ 혼수품에 수의(壽衣, 繸衣) 포함
⑺ 점복의 풍습
3. 옥저(沃沮)
가. 지형
함경도 지역의 동해안에 위치했다.
나. 경제
⑴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다.
⑵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했다.
⑶ 고구려에 포목, 어물, 염을 공납하였다.
다. 정치
⑴ 선진문화의 수용이 늦었고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박과 수탈로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⑵ 읍군(邑君)이나 삼로(三老)라는 군장이 다스렸다.
라. 사회
⑴ 부여족의 한 갈래이다.
⑵ 민며느리제(豫婦制)
⑶ 사후세계를 인정했으며 사람이 죽으면 뼈를 추려서 가족공동무덤인 목곽에 안치했다(骨葬制, 家族共同墓制).
4. 동예(東濊)
가. 지형
강원도 북부, 동해안 지방(원산지역)에 위치했다.
나. 경제
⑴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했다.
⑵ 단궁(檀弓), 과하마(果下馬), 반어피(班魚皮)를 생산했으며 명주, 삼베 등의 방직기술이 발달했다.
한 대(漢代) | 옹어(鰅魚) |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 | 반어(班魚) |
수당이후(隋唐以後) | 해표(海豹) |
다. 정치
읍군(邑君)이나 삼로(三老)라는 군장이 다스렸다고 고구려 태조왕 무렵에 고구려에 복속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라. 사회
⑴ 제천행사 : 무천(舞天)
⑵ 족외혼(族外婚, exogamy)
⑶ 책화(責禍) : 다른 부족의 경계를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 등으로 배상해야 했다.
5. 삼한
가. 지형 및 경제
⑴ 한강 이남에 위치하여 농업이 발달했다.
⑵ 수리시설이나 벼농사를 위한 저수지를 축조했다.
김제 벽고(碧骨堤), 밀양 수산제)(水山堤, 제천 의림지(義林池), 상주 공거恭儉池), 의성 대제지(大堤池)
⑶ 마한지역은 꼬리긴닭(長尾鷄)이 유명했고 변한지역에는 철 생산이 활발했고 철을 낙랑과 왜에 수출했고 철을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했다.
나. 정치
⑴ 융합문화
고조선 유이민의 남하로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하면서 마한, 진한, 변한의 연맹체 형성했다(BC 194년 준왕(準王) 진국에 와서 진왕(한왕)이 되었으며 위만조선말기 조선상 역계경(歷谿卿)이 20000명을 거느리고 진국이주).
⑵ 진왕(辰王)
목지국(目支國)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辰王)으로 추대되어 삼한을 통치했다.
다. 제정분리사회(祭政分離社會).
⑴ 정치적 지배자로 거수(渠帥, 渠率),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穢), 살해(殺奚), 불예(不例), 견지(遣支), 읍차(邑借) 등의 군장이 있었다.
⑵ 제사장(祭司長)으로서 천군이 신성지역인 소도(蘇塗)를 다스렸다.
라. 사회
⑴ 5월 수릿날의 기풍제(祈豊祭), 10월 계절제(十月祭)를 통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⑵ 무덤양식으로 주구묘(周溝墓), 움무덤(土壙墓), 돌널무덤(石棺墓) 등이 있었다.
맥국(貊國)
맥족(貊族, 貉族)은 랴오둥 반도(遼東半島, Liaotung Peninsula)애서 한반도(韓半島. Korean Peninsula)에 걸쳐 살던 부족의 이름이며 맥국(貊國)은 지금 강원도 춘천 지방에 있었는데 문헌상의 기록은 거의 없어 그 실체를 파악하기에 어렵지만 고인돌과 도읍으로 보이는 유적을 통해서 맥국의 존재를 유추해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건국한 뒤 맥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백제 9대왕 책계왕(責稽王)이 동쪽에서 쳐들어온 맥인을 막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통해 맥국의 세력이 다른 부족 연맹체 국가에 비해 약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