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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고구려 | 백제 | 신라 |
고대국가형성 | 6대 태조왕 2C | 8대 고이왕 3C | 17대 내물왕 4C |
부자상속 | 9대 고국천왕 | 13대 근초고왕 | 19대 눌지왕 |
불교공인 | 17대 소수림왕 372년 | 15대 침류왕 384년 | 23대 법흥왕 535년 |
율령반포 | 17대 소수림왕 373년 | 8대 고이왕 | 법흥왕 |
역사편찬 | 국초에 유기(留記), 26대 영양왕 11년 660년 이문진(李文眞) 신집(新集) 5권 | 13대 근초고왕 30년 375년 고흥(高興) 서기(書記) | 24대 진흥왕 6년 545년 거칠부)居柒夫) 국사(國史) |
전성기 | 19대광개토왕 20대장수왕 5C | 13대 근초고왕 4C | 24대 진흥왕 6C |
2. 삼국의 성립
가. 고구려
B.C. 37년 5월 주몽(朱蒙, 본명 鄒牟(추모. 추모란 부여말로 활의명군인데 몽고에서는 지금도 궁수를 주무라고 데 주무가 이두문으로 주몽으로 읽혀져 고주몽(高朱蒙)이 되었다))은 부여 유이민과 압록강 유역 토착민 집단의 결합으로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및 부분노(扶芬奴), 부위압(扶尉壓), 극재사(克在思)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건국했고 연호를 다물(多勿, 옛 영토를 회복한다)이라고 했다. 고구려는 B.C. 36년 3월 15일 수도를 눌현(訥見; 今 西豊縣, 지금의 常春(상춘:吉林省(길림성)의 長春(장춘))에서 朱家城(주가성))으로 이전한다.
나. 백제
B.C.18년 온조(溫祚)는 북방 유이민과 한강 유역 토착민 집단의 결합으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을 중심으로 백제를 세웠다. 召西奴(소서노)는 졸본인(卒本人) 연타발(延陀勃)의 딸로서 처음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와 혼인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다. 백제는 마한의 소국에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고 다시 마한을 대신하는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하북남위례성(河北慰禮城)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위례'의 어원에 관해서는 3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우리(울타리, 담장)에서 기원했다는 견해로서 우리는 성을 의미한다. 둘째, 백제왕에 대한 호칭인 어라하(於羅河)에서 비롯된 '왕성'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어라하의 '어라'가 '대'(大)의 뜻을, '하'가 존장자 또는 수장의 뜻이 있으므로 곧 '대수장'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주서(周書)에 따르면, 백제 왕을 지배층은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고 백성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르고 고구려의 왕은 개차(皆次)라고 불렀다. ‘길지’란 신라의 길사(吉士), 길지지(吉之智) 등 제14관등의 명칭과 통하는 용어로서 아마도 진한과 마한 등 한(韓) 계통의 언어에서 ‘높은 사람’을 지칭한 말이었을 것이다. ‘건’(큰)길지라면 마한 언어로 ‘임금’이었던 셈인데, 이는 마한 소국들을 정복 내지 포섭해 백제를 세운 부여 계통 귀족들의 언어와 달랐다는 것이다. 셋째, 한강의 옛 이름인 아리수(阿利水)·욱리하(郁利河)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 욱리하의 '욱리', 아리수의 '아리'가 모두 '대(大)'의 뜻을 지니고 있는 대성(大城)임을 생각할 때, 어라·욱리·아리와 연결되는 '위례' 또한 '대'의 뜻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위례성은 '대성'을 가리킨다. 백제 왕성은 그 전시기에 걸쳐 대성의 뜻으로 불렸다. 또한 만주어로 강성의 뜻인 '우라'의 전음(轉音)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는 처음에 한강 이북에 도읍을 정했으나(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온조왕 13년에 한강 이남지역으로 도읍을 옮겼다(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백제 최초의 왕성인 하북위례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각산 동록(東麓), 세검정 계곡 일대, 중량천 일대 등으로 비정되고 있으나 뚜렷한 근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3가지 소재설 가운데 중량천 일대가 가장 적합할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대구 달성이나 경주 반월성 같은 초기 왕성들이 하천을 끼고 있는 구릉지에 축조된 입지조건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한편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소재한 몽촌토성으로 비정한다. 그 이유는 몽촌토성이 삼한 소국의 중심거점인 구릉지 토성이라는 점과 그 인근에 고분군(古墳群)이 조영(造營)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몽촌토성은 한성 말기의 백제 왕성이 토축성(土築城)이라는 기록과 부합되는 면이 있다.
위례성을 한강을 기준으로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나누기도 하고 별개의 도성이 아닌 하나의 도성(都城)으로 보기도 한다.
다. 신라
신라는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하여 박,석,김의 세부족 연맹을 거쳐 6부족 연맹체로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경주를 중심으로 건국하였다. 신라는 토착 세력이 강하여 유이민 집단을 흡수, 동화하였다.
6촌
방향 | 마을 | 촌장 |
동쪽 | 양산마을 | 알평 |
남족 | 고허마을 | 소벌도리 |
서쪽 | 대수마을 | 구례마 |
동남쪽 | 진지마을 | 지백호 |
동북쪽 | 가리마을 | 지타 |
더 동북쪽 | 고야마을 | 호진 |
라. 가야의 성립
⑴ 가야 연맹의 성립 : 2, 3세기경 김해의 구양국은 김수로를 주축으로 건국(42)하여 본가야로 발전
⑵ 본가야(금관가야) 연맹 : 3세기경 전기가야연맹의 맹주로서 영토 확장, 통치 조직 정비 →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 진출로 세력 약화 → 신라에 병합(532년, 법흥왕)
⑶ 대가야 연맹 : 5세기후반 후기가야연맹의 맹주로서 미오야마국은 이진아시를 시조로 5세기 이후 고령 중심의 연맹 세력권 재편→ 중국 남조에 사신 파견, 신라,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 → 멸망(562, 진흥왕)
⑷ 한계 :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 →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 하지 못함
⑸ 경제적 번영 : 농경문화, 철생산과 중계 역(한 군현, 왜)
⑹ 문화
①유적 : 고령 지산동 고분, 부산 복천동 고분, 김해 대성동 고분
②유물 : 금동관, 철제 무기, 갑옷, 토기(일본 스에키에 영향)
이름 | 지방 | 기타 |
금관가야(金官伽倻.本伽倻) | 김해 | 김수로(金首露)가 구야국(狗倻國)에서 발전하여 532년 신랑에 망함 |
대가야(大伽倻) | 고령 | 이진아시(伊珍阿豉)가 미오야마국(彌烏耶馬國)에서 발전하여 562년 신라에 망함 |
성산가야(星山伽倻. 碧珍伽倻) | 성주(경산) | |
아라伽倻(阿羅伽倻. 안락국) | 함안 | |
고령가야(古寧伽倻) | 진주 | |
소가야(小伽倻) | 고성 |
Ⅱ. 삼국의 성장 발전과 통치체제
1. 삼국의 정치발전
가. 고구려
⑴ 수도이전
2대 유리왕때 졸본에서 통구(국내성)로 천도하였다.
⑵ 6대 태조왕(53~146)
① 대외 팽창 : 옥저 정복, 만주 지방으로 세력 확대, 낙랑 압력
② 중앙 집권 체제로의 진전 : 계루부 고씨에 의한 형제왕위계승권 확립
⑶ 9대 고국천왕(179~197) : 왕권의 강화와 통치체제의 중앙집권화 진전
① 5족을 5부(동서남북중)로 개편
② 왕위계승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
③ 연나부(掾那部, 絶奴部) 명림씨(明臨氏)에서 왕비를 맞는 관례
⑤ 진대법(賑貸法) 시행 :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여 진대법(糶糴法, 조적법) 시행
⑷ 11대 동천왕(227~248)
압록강 입구 서안평을 공격하여 중국과 낙랑을 차단하려하다가 244년 관구검(毌丘儉)과 245년 왕기(王頎)가 침입하여 수도가 함락되었다.
⑸ 15대 미천왕(300∼331)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하며 을불(乙弗), 을불리(乙弗利) 또는 우불(憂弗)로서 서천왕의 손자이며, 고추가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봉상왕 2년 293년 반역 혐의로 죽은후 어릴 때 수실촌의 호민 음모(陰牟)의 집에서 용작하였으며 미천왕 14년 313년 낙랑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대동강유역 차지하였다.
⑹ 16대 고국원왕(331~371)
342년 전연의 모용황(慕容皝)이 침입하여 수도를 함락하고 왕의 보물, 왕모(10년후 귀환), 왕비(불귀환), 포로 5만명을 사로 잡아 갔고 371년 백제를 침공하여 평양성전투에서 전사했다.
⑺ 17대 소수림왕(371~384)
보편적인 372년 종교로서 전진(前秦)의 순도(順道)로부터 불교를 수용하고 국립대학격인 대학(太學)을 설립하고 373년 율령을 반포하였다.
나. 백제
⑴ 8대 고이왕(234~286)
① 대외 팽창 : 중국의 한 군현과 항쟁.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弓遵) 전사시킴
②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 마련 : 27년(260년) 6좌평 및 16관등 관제정비, 관리의 복색 제정, 29년(262년) 율령 반포
⑵ 13대 근초고왕(346~375)
① 정복군주로서 24년 마한 대부분을 차지하고 26년 371년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구려 16대왕 고국원왕 전사케 하였다.
② 현재의 경기, 충청 및 전라의 전부와 강원・황해의 일부 차지, 중국 서진 남쪽 왜와 통교
③ 부자상속 왕위계승 확립, 진씨왕비 시대 시작
④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국사 「書記」 편찬 시킴
⑶ 침류왕 원년(384년)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새로운 관념체계를 수립하였다. .
다. 신라
⑴ 17대 내물마립간(356~402)
① 대외 팽창 :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 확장
② 중앙 집권 국가로의 발전: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 확립, 마립간 왕호 사용
③ 왜구 격퇴 : 광개토대왕 도움(호우명 그릇)→ 고구려 간섭→ 배제 노력
⑵ 19대 눌지마립간(417~458)
왕위 부자상속이 확립되었으며 왕 17년 433년 백제 20대 비유왕(毘有王)과 나제동맹을 맺었다. 이 무렵 고구려의 아도(阿道) 또는 묵호자(墨胡子)에 의하여 불교가 전래되었다.
⑶ 21대 소지마립간(479~500)
수도에 시장(市肆)을 설치하고 우역도 설치했다. 그리고 15년 493년 3월 이벌찬 비지의 달과 백제 동성왕과 혼인으로 제2차 나제동맹을 맺었다.
⑷ 22대 지증왕(500~514)
신로, 사라, 서라, 서벌로 불리는 것을 신라(新羅)라고 하고 마립간(麻立干)을 중국식 왕(王)으로 바꾸고 우경(牛耕)을 시작하고 동시전(東市廛)을 설치하고 순장(旬葬)을 금하였다. 512년에는 이사부(異斯夫)를 시켜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했다.
⑸ 23대 법흥왕(514~540)
병부를 설치하여 왕이 군권을 장악하고 상대등을 설치하여 재상의 지위를 부여하고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했다. 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535년 불교를 공인하고 532년 금관가야를 정복하고 536년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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