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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을지문덕 연개소문 계백 장보고
Ⅰ. 을지문덕(乙支文德. ?~?)
개요
을지문덕은 고구려 26대 영양왕(嬰陽王. 590~618) 때의 수나라 양제(煬帝)의 침략으로부터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고구려를 지켜낸 명장이다.
살수(薩水) : 청천강(淸川江). 평안북도 희천군석립산(石立山) 북서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평안북도의 남부를 남서로 흘러 황해로 흘러드는 강.
2. 출신
가. 정체
출생년도는 물론이고 생몰년도도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은 고려 시대 김부식(金富軾) 삼국사기(三國史記), 조선 시대 안정복(安鼎福) 동사강목(東史綱目), 홍양호(洪良浩)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안정복(安鼎福) 동사강목(東史綱目),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등에 남아 있는데 중국의 역사서인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수서(隋書)에 기록된 내용을 옮겨 요약한 것으로 내용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조상이 누구인지 집안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그의 성격은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략이 뛰어나고 글을 지을 줄 알았다. - 《삼국사기》
수서(隋書)는 636년,장손무기(長孫無忌)와위징(魏徵) 등이 완성한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과 656년. 우지녕(于志寧) 등이 완성한 다섯 왕조의 지(志) 30권 총 8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서는 을지문덕이 평양 석다산(石多山)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 이름
⑴ 을지문덕(乙支文德) : 성 을지(乙支) + 이름 문덕(文德)
⑵ 을지(乙支) : 고구려 관등명의 하나인 우태(于台)처럼 연장자 혹은 가부장을 뜻한다는 설
⑶ 을(乙) : 성 지(支) : 존대의 접미사라는 설
⑷ 을지(乙支) : 선비족 계통에서 유래한 성씨 ‘울지(尉遲)’로 보고 그를 귀화인으로 추정하는설. 자치통감에는 을지문덕을 위지문덕(울지문덕. 尉支文德)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3. 여수전쟁에서의 활약상
가. 수(隋)의 중국통일(581년)
수(隋) : 581~618 수도 장안(長安)
왕 | 재위 | 내용 |
1대 文帝(楊堅) | 581~604 | 북주(北周.557~581)의 정제(靜帝)로부터 선위를 받고 진(陳. 557년 ~ 589년) 멸하여 중국을 통일. 598년 30만명의 천자군을 이끌고 고구려 침입 |
2대 煬帝(梁廣) | 604~617 | 文帝(楊堅)의 2째 아들. 아버지와 형(梁勇)을 죽이고 호화궁정 축조(100만명 동원), 유주 양자강 3천리 대운하(200만명 동원). 612년과 613년 고구려 침입. 宇文化及에게 시살(弑殺) |
3대 恭帝(梁侑) | 617~618 | 이연(李淵, 唐 高祖)에게 옹립되어 1년만에 폐위됨 |
나. 십자형 외교 : 고구려-돌궐-백제-왜 : 수-당
다. 여수전쟁
⑴ 수의 1차칩입(고구려의 선제공격) : 영양왕 9년(598년) 고구려는 요하를 넘어 3만명의 기병(대장군 姜以式, 부장 乙支文德)으로 요서(북천성) 공격하자 수문제가 30만 천자군을 이끌고 침략했으나 중도에서 퇴각
⑵ 수의 2차 칩입 : 영양왕 23년(612년) 수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침입(좌우위 우문술(宇文述)・우익위 대장군 우중문(于仲文), 수군 : 내호아(來護兒) 수군(水軍) 좌익위대장군, 주법상(周法尙) 부총관)하여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고 설세웅은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하고 왕인공이 일시적으로 고구려군을 격퇴했지만 제대로 부대를 추스려오지는 못했고 30만 5천명의 별동부대로 수도 평양을 치러와서 살수(薩水, 淸川江)에서 乙支文德에게 패배함(압록강에 다다른 병사는 겨우 2700명 생존)
안정복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살수대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살수에 이르러 수군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수의 후군을 추격하니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군사들이 다 괴멸되어 수습할 수 없었다. 장사들은 도망쳐 하룻낮 하룻밤 만에 압록수에 이르니, 450리 길을 간 셈이다. 장군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고구려군을 반격해 물리쳤다. 고구려군이 백암산(白巖山)에서 설세웅(薛世雄)을 포위하니, 세웅이 분격해 물리쳤다. 내호아(來護兒)는 문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고, 오직 위문승(衛文昇) 1군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구군(九軍)이 요(遼)에 이르렀을 때에는 30만 5천이었는데 돌아갈 때 요동성에 이른 것은 2천 700인이었다. - 《동사강목》 제3 상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적진으로 침투하여 형세를 정탐하고 위무사(慰撫使) 유사룡(劉士龍)의 만류로 풀려나 후퇴 작전으로 적군을 교란시킨 전술로 유명하다. 을지문덕은 고구려군의 거짓 항복에 후퇴하는 수나라군을 살수에서 기습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거짓 항복 적진 방문
후퇴 후 반격
살수에서 섬멸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수의 장수 우중문에게 준 것인데 북방의 강건한 기개가 돋보이는 명작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삼국사기》 권 44, 〈열전〉 권 4
귀신같은꾀는 천문을 구명하고 신묘한 셈은 지리에 통달했네.
전쟁에 이긴 공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았으면 그치기를 바라오
Divine strategies exhaust the heavens,
Exquisite calculations probe the earth.
Battle won, your honor is already high,
Be content now and desist.
영역은 밀러(Michael J. Miller)가 한 것인데, <<Korean Poetry in Classical Chinese>> (Somyong Publishing, 1999)에서 인용했다. 위에 언급한 고구려의 큰 한 사람인 을지문덕의 5언고시는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에서 제목이 <유우중문(遺于仲文)>으로 되어 실려 있다.
⑶ 수의 3차 칩입 : 영양왕 24년(613년) 1월 100만대군 동원 실패
⑷ 수의 4차칩입 : 영양왕 25년(614년) 2월 수륙 양면에 걸친 공격을 감행했다.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평양성으로 향하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함으로써 철수했다.
비사성(卑沙城) : 동진 서기 410년에 지어진 중국 랴오둥(遼東) 반도 남단의 다롄 만(大連灣) 북안(北岸) 다허상 산(大和尙山)에 있었던 고구려의 성.
4. 전후 생활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자 을지문덕은 신라로 설인귀는 거란으로 망명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으나 신빙성이 낮고 연개소문의 쿠데타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그나마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된다.
5. 평가
가. 김부식의 평가
양제의 요동 전쟁은 출동 병력에서 전례가 없을 만큼 컸다. 고구려는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이를 방어하고 스스로를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섬멸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춘추 좌전》에서,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리오?"라고 했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 《삼국사기》 〈열전〉 권 4, 을지문덕
나. 신채호의 평가
민족자존(民族自存)과독립정신(獨立精神)의 표상이었고,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합리화하려고 내세운 한국인들의 타율적(他律的) 종속성(從屬性) 이론을 논파하는데 롤 모델이 되었던 것이
다. 안창호의 평가
을지문덕은 모든 이가 표상으로 삼아야 할 영웅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Ⅱ. 연개소문(淵蓋蘇文)
1. 연개소문
가. 개요
반대파를 물리치고 최고의 권력을 차지한 연개소문
나. 생몰
?~665(667)
다. 이름
⑴ 연개소문(淵蓋蘇文)
개소문(蓋蘇文)은 '갓 쉰'이라는 뜻으로 아버지 연태조(蓋蘇文)가 쉰 살이 되었을 때 얻은 늦둥이라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⑵ 천개소문(泉蓋蘇文)
중국 역사서와 삼국사기.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연' 자와의 휘성
연개소문의 가계
증조부 | 연광(淵廣) | ||||||
조부 | 연자유(淵子遊) | ||||||
부 | 연태조(淵太祚) | ||||||
본인 | 연개소문(淵蓋蘇文) | 연정토(淵淨土) | |||||
자 | 연남생(淵男生 634년~679년) | 연남건(淵男建) | 연남산(淵男産) | ||||
손 | 연헌충(淵獻忠) 남건, 남산에 피살 | 연헌성(淵獻誠) | |||||
증손 | 연현은(淵玄隱) | 연현정(淵玄靜), | 연현일(淵玄逸) | ||||
현손 | 연비(淵毖) |
촌수 계산과 나의 위치
나하고 촌수 | 직계존속(直系尊屬) | 傍系尊屬(방계존속) | |||
六代祖(6대조) | |||||
五代祖(5대조) | |||||
4촌 | ④高祖父母(고조부모) | ||||
3촌 | ③曾祖父母(증조부모) | ||||
2촌 | ②祖父母(조부모) | 叔祖父(숙조부) | 4촌 | ||
1촌 | ①父母(부모) | 叔父母(숙부모)3촌 | 再從叔(재종숙) | 5촌 | |
我(아) : 나 | 從兄弟4촌 | 再從兄弟 | 6촌 | ||
1촌 | ①子(자) | 直系卑屬(직계비속) | 傍系卑屬(방계비속) | ||
2촌 | ②孫(손) | ||||
3촌 | ③曾孫(중손) | ||||
4촌 | ④玄孫(현손)/高孫(고손) | ||||
5촌 | ⑤來孫(내손) | ||||
6촌 | ⑥昆孫(곤손) | ||||
7촌 | ⑦仍孫(잉손) | ||||
8촌 | ⑧雲孫(운손) |
④高祖父③曾祖父②祖父①父-자기①子②孫③曾孫④玄孫⑤來孫⑥昆孫⑦仍孫⑧雲孫
라. 대대로의 승직(承職)과 정변
⑴ 대대로(大對盧)
아버지 연태조는 고구려의 수상격인 대대로(大對盧)를 지내서 직계 세습이 가능했는데 부족 연합으로 탄생한 고대 국가로 관직을 세습하기 위해서는 부족장들의 재가가 필요했는데 부족장들은 연개소문의 품성이 잔인하고 포악하다는 이유로 반대해서 연개소문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이 직위를 계승한 후에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에는 여러 부족장들이 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해도 반발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하여 반대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연개소문은 간신히 대대로의 직에 오르게 되었다.
⑵ 천리장성 축조
고구려 27대 영류왕(榮留王)은 평원왕(平原王)의 둘째 아들로서 영양왕(嬰陽王)의 이복동생인데 영양왕이 후사 없이 죽자 618년 왕위에 올랐다. 이 해 중국에서는 수 멸망 당건국해로 영류왕은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려고 했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으므로 영류왕은 전쟁보다는 화친의 길을 택하면서도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당나라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요동 지역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았다. 천리장성의 축조 기간은 영류왕 14년 631년부터 보장왕 5년 646년까지 무려 15년이었다. 영류왕은 천리장성의 축조 책임을 연개소문에게 맡겼다.
고구려 | 영류왕 14년 631년부터 보장왕 5년 646년까지15년에 걸쳐 부여성에서 비사성에 이르는 천리장성 |
고려 | 덕종 2년 1033년부터 정종 10년 1044년간에 걸쳐 압록강 입구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 廣浦)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 |
⑶ 연개소문의 정변 : 영류왕과 반대파 제거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달리 대당 강경책을 주장하여 대당 외교 정책에 있어서 영류왕과 종종 의견 충돌이 있었고 영류왕의 국정 운영에도 큰 부담이 되었는데 평소 연개소문을 경계하던 조정의 대신들이 그를 제거하도록 영류왕을 부추겼고 마침내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죽일 계획을 세웠는데 이러한 사실을 미리 간파한 연개소문은 역으로 영류왕과 반대파들을 먼저 공격했다. 영류왕 25년 642년 연개소문은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의 사열식을 핑계로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여러 대신들을 초대하여 반대파 100여명을 처단하고 반대파 제거에 성공한 연개소문은 내친 김에 궁으로 쳐들어가 영류왕마저 죽이고 영류왕의 조카 보장왕(寶臧王)을 새 왕을 세웠다.
2. 당나라와 고구려의 관계
가. 당(唐. 618~907)
나. 영류왕(榮留王)의 대당 관계 개선과 우호정책
수(隋. 581~618)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무리한 원정으로 멸망을 자초했으나수나라에 이어 등장한 선비족(鮮卑族) 출신인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세운 당(唐. 618~907)나라는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자 했다. 영양왕(嬰陽王)을 승계한 영류왕도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영류왕 재임 기간에는 두 나라 사이에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선비족(鮮卑族) : 5호(五胡. 흉노(匈奴). 갈(羯). 선비족(鮮卑族). 저(氐). 강(羌))의 하나.
선비족의 선조는 은대 동호족(東胡族)의 한 갈래로서 농경과 반농반목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자(농경중심)는 고조선 및 부여계이고, 후자(반농반목)는 선비와 오환(五患)계로 선비족은 만주의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점차 요서와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진·한 시대에 다싱안링 산맥(大興安嶺山脈) 일대에서 남쪽의 시라무룬 강(西剌木倫河) 유역으로 옮겨와 후한(後漢. 25~220) 때 중국에 복속되었다. 흉노족이 서쪽으로 옮겨간 후 그 지역을 모두 차지했고 고비 사막 북쪽(외몽골 지역)에 남아 있던 흉노족 10만여 호(戶)가 선비족 지배하로 편입되면서 세력이 점차 강성해졌다.
2세기 중엽 선비족의 우두머리 단석괴가 선비족 각 부락에 의해 '대인'으로 추대되어, 우문·모용(慕容)·탁발(拓拔)·단(段)·걸복(乞卜) 등의 부락군사연맹을 세웠다. 부락을 동(東)·중(中)·서(西)의 3부로 나누고 각 부마다 대인통령을 두었다. 후한은 사신을 보내 단석괴에게 인수(황제가 신하에게 내리는 신표용 도장과 그 끈)를 주고 왕으로 봉했다.
선비족은 유목을 생업으로 삼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선비족이 만든 '각단궁'은 고대에 유명한 무기였다. 단석괴가 죽은 후 선비족의 부락연맹이 해체되었다. 16국 시대에 선비족의 모용·걸복·우문·탁발 등의 부락이 모두 나라를 세운 적이 있었다. 특히 탁발부는 5세기에 서진이 흉노에 멸망하자 황허에 북위(386~534) 왕조를 세워 중국 북부를 140여 년 동안이나 통치했고 또한 선비족의 한족화를 열심히 추진했다. 중국 내륙으로 옮겨온 선비족은 점차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한족과 융합되어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중국은 자칭 황금시대인 '정관의 치'를 경험하지만, 그런 당나라 역시 지배층은 선비족 출신 이었고 그랬기에 이민족이 당나라 조정에 다양한 방법으로 출사하였다. 그 후 선비족을 중심으로 한 북조의 수나라가 중국의 통일을 이룬 후 중국의 역사가 자랑하는 당 제국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다.
5호16국
5호16국(五胡十六國)(304년 ~ 439년) | 흉노(匈奴) | 전조(前趙, 304~329), 대하(大夏, 407~431) |
갈(羯) | 후조(後趙) | |
선비족(鮮卑族) | 전연(前燕), 서진(西秦), 후연(後燕), 남연(南燕), 남량( 南涼), 北涼(북량) | |
저(氐) | 전진(前秦), 선한(後蜀), 후량(後凉) | |
강(羌) | 후진(後秦) | |
한족(漢族) | 전량(前涼), 서량(西涼), 북연(北燕): 고구려계 |
다. 여당전쟁(麗唐戰爭)
⑴ 당(唐, 618~907)의 건국과 고구려의 위협
수가 멸망한후 새로 들어선 당은 고구려를 회유하여 굴복시키려 했으나 연개소문이 강경책을 쓰자 고구려 침입하였다.
⑵ 연개소문의 천리장성 축조 : 천리장성
고구려가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이 야욕을 보이자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631년(영류왕 13년)부터 16년 간에 걸쳐 647년(보장왕 6년)에 완성된 북의 부여성부터 요동반도 비사성(卑沙城, 중국명大黑山山城)에 이르는 성을 축조하였다.
⑶ 연개소문의 정변(보장왕 원년 642년 10월) :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 200여명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하고 대막리지가 되어 독재정치를 하고 대당강경책을 시행하였다.
⑷ 여당전쟁(麗唐戰爭)
① 644년 개모성(蓋牟城) 비사성(卑沙城) 함락
보장왕 3년 644년 당 태종은 "고구려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정상 이를 참을 수 없다."라고 밝히고, 원정대를 꾸려 고구려 공격을 명했다. 당의 고구려 원정대는 수나라의 대군과는 달리 정예부대로 꾸려졌다. 당나라의 원정 병력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강(江)·회(淮)·영(嶺)·협(峽)의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게 하고,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서 군사 3,000명을 모집했으며, 전함 500척은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平壤)으로 가게 했다. 또 태자첨사좌위솔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 및 기병 6만 명과 난(蘭)·하(河), 두 주(州)의 항복한 오랑캐 병사를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 가게 하니, 양군(兩軍)은 합세하여 유주(幽州)에 모이게 했다. - 삼국사기 권 21, 고구려본기 권 9, 보장왕
병력은 대부분 지원병으로 뛰어난 전투력과 전략·전술, 고구려의 성들을 공략하기 위한 공성(攻城) 장비까지 갖추고 있었다. 응집력이 떨어졌던 수나라 대군과는 질적으로 달라서 당나라 군대는 초반 공격에서 승기를 잡아 고구려의 성들을 함락했다. 이세적이 이끄는 군대는 개모성(蓋牟城)을 장량(張亮)이 이끄는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함락했다.
② 645년 요동성(遼東省) 백암성(白巖城. 성주 손대음(孫代音) 투항) 함락. 안시성(안시성) 금성철벽(金城鐵壁)
앞서 개모성, 비사성을 함락한 당은 보장왕 4년 645년 당 태종이 직접 10만 대군과 함께 고구려에 침공하여 12일만에 전략적 요충지 요동성(遼東省)을 함락시키고 백암성(白巖城) 성주 손대음(孫代音) 투항으로 백암성도 함락시키고 안시성(安市城, 英城子)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만춘(楊萬春)과 양수봉 및 원군인 북부 욕살(褥薩) 고연수(高延壽),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이 이끄는 고구려군(말갈병)이 3개월간 잘 버티어 격퇴시켰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661년까지 무려 14차례나 공격했으니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③ 안시성 전투
당(唐) | 고구려 |
제1군: 이세적(李世勣). 5만. 고구려 회원진 제2군: 요동 제3군: 장험 제4군(수군):장량(張亮). 군함 800척. 수병 73,000명 당태종 사망: 보장왕 8년 649년 | 성주 : 양만춘(楊萬春) 양수봉(楊秀峯) : 양만춘의 조카. 고고구려 제1의 명궁(2000보). 연개소문 파견 지원군 14000명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이 15만 출병. 안시8리(里)되는 지점에서 당나라 군대에 패배하여 항복 688년 고구려 부흥 운동 중심지 671년 7월 당에 함락 |
욕살(褥薩) ; 고구려의 5부 지방 장관
삼국의 지방제도
지방의 통치제도가 완성되어 종래 부족적 전통을 지닌 각부는 행정적 조직으로 개편되었고 지방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은 일치하는 모습이다.
수도 | 지방 | 특별행정구역 | |
고구려 | 5부 | 5부(東西南北內, 욕살)-성(처려근지, 도사) | 3경(평양성, 국내성, 한성) |
백제 | 5방 | 5방(방령)-군(군장) | 22담로(왕족 파견) |
신라 | 6부 | 5주(군주)-군(군태수, 당주)-현(촌.성, 도사) | 2소경(사신) |
라. 연개소문의 사망(?~665(667))과 평가
⑴ 토론(논술) 주제
연개소문의 대륙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한 명장이다.
연개소문은 국가를 망하게 한 권력자이다.
⑵ 삼국사기(김부식)
- 몸에 칼 다섯 자루를 차고 있어서 좌우의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말에 오르고 내릴 때마다 항상 귀인무장(貴人武將)을 땅에 엎드리게 해 디디는 발판을 삼았으며,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대오(隊伍)를 베풀고 가는데,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긴 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이 달아나면서 골짜기나 구덩이도 피하지 않았다.
- 송(宋)의 신종(神宗)이 왕개보(王介甫)와 고사(古事)를 논하여 말하기를 "태종이 고구려를 치다가 어찌하여 이기지 못했는가?" 하니, 개보가 "개소문(蓋蘇文)은 비상(非常)한 인물이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런즉 소문은 역시 재사(才士)인데, 곧은 도(道)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포(殘暴)를 마음대로 해 대역(大逆)에 이른 것이다. - 삼국사기 권 49, 열전 권 9, 개소문
⑶ 동사강목(안정복)
첫 번째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당나라 태종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 "위징이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나한테 이런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魏征若在,不使我有是行也)""라며 탄식하고 후회하였다.
위징(魏徵) : 580~643)
당나라의 정치가. 자(字)는 현성(玄成). 당 태종을 섬겨 간의대부(諫議大夫) 좌광록대부(左光綠大夫)에 임명되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다. 직간(直諫)으로 이름이 높았고 당 태종과의 문답은 대부분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실려 있으며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疏)는 그 중 가장 유명한 글이다.
어려서 집이 가난하였고 수말기에 이밀(李密)이 지휘하던 와강군(瓦崗軍)에 들어갔다가 이밀이 패한 뒤 당에 귀순하였다가 다시 두건덕(竇建德)의 포로가 되었는데 두건덕은 그의 재능을 아껴서 자신의 휘하로 받아들였다. 두건덕이 패한 뒤에 당으로 돌아가 태자 이건성(李建成)의 측근으로서 태자선마(太子洗馬)라는 지위에 올랐다. 이세민의 인기와 권력을 불안히 여긴 태자 이건성에게 위징은 이세민을 독살하여 제거할 것을 진언했지만 이건성은 이를 듣지 않았고 결국 현무문(玄武門)의 변(수비대장인 상하(常何)를 매수, 무덕(武德) 9년(626년) 7월 2일) 으로 이세민에게 살해당했다. 위징은 이를 당연한 결과라 받아들이고 이세민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각오하였고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위징을 문책하던 중, 이세민의 형인 이건성이 위징 자신의 충언을 듣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 것과 자신의 주군을 보필하기 위하여 충언을 한 것은 자신의 죄가 아님을 말하였고 자신이 이세민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음을 당당히 인정하였기에, 이세민은 그의 솔직함을 높이 사서 그를 간의대부로 삼았다.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관중과 위징
제양공(齊襄公)의 공손무지(公孫無知) 피살 | ① 공자 소백(公子 小白)의 사부 | 포숙아(鮑叔牙)-거(莒) |
②공자 규(公子 糾. 제환공(齊桓公))의 사부 | 관이오(管夷吾) : 관중(管仲)-노(魯) | |
당 고조(唐高祖) | ①이건성(李建成) | 위징(魏徵) |
②이세민(李世民. 당태종(唐太宗)) | ||
③이원길(李元吉) | ||
④이현패(李玄霸)[이원패(李元覇)] |
⑷ 조선상고사(신채호)
조선 역사 4,000년 이래 최고의 영웅
연개소문이 안시성, 오골성(烏骨城) 등의 군사 요충지에 병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다른 성의 병력을 일부러 철수시켰다.
연개소문이 퇴각하는 당 태종을 추격해 당나라 내륙까지 들어갔다(중국 사서에는 없음).
3. 고구려의 멸망(668년)
가. 배경
지배층의 분열, 국력 약화, 나․당 연합군의 침입 저지(연개소문)→ 지배층의 내분(657년 연개소문 사후)
나. 멸망
보장왕 20년 661년 4월 소정방이 이끄는 27만명 평양성 포위 선도해(先道解) 평양성 사수. 8월 남생이 이끄는 요수방위군 설필하력(契苾何力) 격파
설필하력(契苾何力)인간 계필하력(契苾何力)인가?
契 1. 맺을 계 2. 근고할 결 3. 부족이름 글 4. 사람이름 설(卨)
거란(契丹) ① 계단 ② 글단 ③ 거란
보장왕 21년 662년 방효태(龐孝泰) 수군 패사시킴
보장왕 25년 666년 男生이 대막리지가 되자 男建과 南山이 반란을 일으키고 싸움에 패한 남생은 당나라로 도주 투항
男建이 대막리지가 되어 나라를 장악하자 연정토(淵淨土, 연개소문의 동생)는 3,543명(763호)를 이끌고 신라에 망명(고안승과 연정토를 따라 신라로 찾아든 고구려의 유민들을 합산하면 23,100명이 넘는다)
보장왕 26년 667년 당나라 이적(李勣) 군대가 공격 시작, 신라 金庾信 호응
보장왕 27년 668년 9월 평양성 함락 고구려 보장왕 항복함.
다. 9도독부와 안동도호부
9개 도독부와 평양에 安東都護府를 두고 살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삼아 평양총독으로 임명했다.
4.고구려의 부흥운동
가. 漢城(재령)
검모잠(劍牟岑)이 궁모성(窮牟城)에서 패수(浿水, 대동강) 남쪽으로 근거를 옮겨 한성(漢城:황해도 재령)에서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고 당의 장군 고간(高侃)이 대군을 끌고 쳐들어오자 대처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의견대립을 보인 끝에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4,000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로 망명해 버렸다.
나. 오골성(烏骨城)
670년에도 고구려 장군 고연무(高延武)와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가 연합하여 오골성 일대에서 당나라의 말갈군를 격파한 바 있다.
연도 | 인물 | 내용 |
677 | 보장왕 | 조선군왕 임명. 부흥운동. 소환~682년 사망 |
685 | 보원(寶元) | 보장왕 손자. 태자 복남의 아들. 조선군왕.부흥운동 |
686 | 보원(寶元) | 충성군왕. 부흥운동 |
698 | 보덕(報德) | 조선군왕.부흥운동 |
699 | 덕무(德武) | 보장왕의 아들. 안동도독.부흥운동 |
698 | 大祚榮 | 대진(大震). 발해(渤海)~926 |
5. 고구려의 수・당 방어의 의의
고구려는 수・당을 잘 방어하여 백제와 신라까지도 방어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당과의 전쟁으로 국력소모가 심했다.
Ⅲ. 계백
1. 階伯
가. 생몰
?~660
나. 직책
달솔(달솔) 가잠(椵岑.괴산) 성
백제의 16관등 중 두 번째로 높은 벼슬로 정원이 30명이나 된다. 달솔의 직을 가진 사람은 은꽃을 꽂은 관(冠)을 쓰고 자주색 관복을 입었으며, 도성의 5부(部)와 지방의 5방(方)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의 역할을 했다.
3. 묘소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2. 나당연합의 결성
가. 국제관계의 변화
642년 백제와 고구려는 여․제 동맹 결성하고 신라가 고립되자 신라는 수에 이어 당과 연결되어 있었다. 642년 8월 백제 윤충 1만의 군으로 신라 대야성 공격하여(금일의 내응으로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김품석과 그 아내 소랑 사망) 당항성, 대야성 등 40여성 함락하고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강 반환요구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압박이 있자 신라는 648년 김춘추 문왕, 거연자, 온군해 등 호위병사 120명을 포함한 200명의 사절단 장안성에 가서 당태종과 나당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국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하였다.
3. 백제의 멸망
가. 원인 : 655년 신라공격 30여성 함락
주색탐닉 : 무당 금화(김유신 내통자 壬子)
통치 질서 문란 : 병관좌평 부여성충(扶餘成忠)(상소후 28일 단식하다가 옥사), 중국 월주(越州) 총독 부여윤충(扶餘允忠) 형제를 투옥, 좌평 흥수(興首) 고마미지로 귀양, 福信 파면
지배층의 사치, 향락, 백성들의 일체감 상실
성충(605? ~656).
윤충(允忠)의 형으로 부여(扶餘)씨라는 설이 유력하며 일명 정충(淨忠). 백제 16관등의 최고직인 좌평(佐平)에 까지 올랐다. 656년 좌평의 지위로 주색에 빠진 의자왕에 충언을 올리다 투옥된다. 옥중에서 28일간 굶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와중에 간언을 올렸다. 누신(纍臣. 옥에 같힌 신하) 성충은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이한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서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에 의거하여 적을 막은 연후에야 가할 것입니다."
의자왕은 이 간언을 중히 여기지 않았고, 결국 나라를 잃은 뒤 후회했다고 한다. 현재 부여에서는 성충과 비슷한 간언을 한 흥수(興首), 계백과 함께 삼충사(三忠祠)에 모셔지고 있다.
나. 나당 연합군의 침입
⑴ 나당연합군(18만명)
당나라 : 13만군.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 蘇定方, 우장군 金仁問,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자 인원)・,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龎孝泰)
신라 : 5만 . 제1군 김법민(金法敏, 문무왕), 제2군 金庾信(선봉 김흠순(金欽殉. 반굴(盤屈)부) 1만, 좌익 김품일(金品日, 관창(官昌) 부) 1만, 우익 천존(天存)1만, 후군 金庾信 2만)
⑵ 신라 김유신의 황산벌(충남 연산) 싸움 : 階伯과 아수라(阿修羅)의 5천 결사대
황산벌(탄현(炭峴, 침현) 싸움
계백 출전 명령(5000결사대)
2. 가족 몰살
동국사략(東國史略)(권근(權近)) : 인륜을 배반한 처사라고 비판
동사강목(東史綱目)(안정복(安鼎福)) : 가족죽이고 전장에 나선 계백과 군졸들은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계백은 전투에 앞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옛날 월왕 구천(越王句踐)은 5,000명으로 오왕 부차(吳王夫差)의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해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격려하였다.
3. 황산벌 출전
반굴(盤屈. 김흠순(金欽殉) 아들-관창(官昌.김품일(金品日)의 아들-김품일(金品日)- 천존(天存)-김품일(金品日)-김유신(金庾信)-신라군 1만명 전사-4차례 승리후 백제 결사대 전몰
4. 계백에 대한 평가(안정복) : 지용인의충(지신용인의충)
험지에 의거해서 진영(鎭營)을 설치한 것은 지(智)요, 싸움에 임해서 무리에게 맹세한 것은 신(信)이며, 네 번 싸워 이긴 것은 용(勇)이요, 관창(官昌)을 잡았다가도 죽이지 않은 것은 인(仁)이며, 두 번째 잡았을 때 죽여서 그 시체를 돌려보낸 것은 의(義)요, 중과부적(衆寡不敵)해서 마침내 한 번 죽은 것은 충(忠)이다. 삼국(三國) 때에 충신과 의사(義士)가 물론 많았지만, 사전(史傳)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마땅히 계백으로 으뜸을 삼아야 할 것이다. -동사강목
서거정(徐居正) 등 :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해 “당시 백제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기에 자신의 처자가 욕을 당하지 않도록 몸소 죽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은 그 뜻과 절개를 높이 사야 한다.
5. 충절의 표본
계백은 부여의 의열사(義烈祠), 연산의 충곡서원에 제향.
되었다
⑶ 당군: 기벌포(백강. 금강 하류) 침입 : 제1진 의직(義直) 2만 결사대. 제2진 우소(于召), 제3진 자간(自簡), 제4진 무치(武治)군을 차례로 격파하며 왕성의 목을 조여 갔다.
⑷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함락과 義慈王과 태자 扶餘孝 항복(660년)
의자왕, 왕자들, 대신과 장군88명, 주민 12,807명 포로로 장안 압송
⑸ 熊津都督府 등 5도독부 설치 : 7주 관할
시비성과 웅진성은 유인원(劉仁願) 1만명, 신라왕자 인태, 사찬 일원, 금찬 길라 등 신라군 7000명과 함께 주둔
4. 백제의 부흥운동
가. 백제의 부흥운동
⑴ 복신의 진현성 탈환(661년)
⑵ 백제부흥(재건)운동
福信 재건 총사령관 | 12,000명. 주류성(周留城) 서천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서천군 한사면 지현리 산3, 사적 제60호 |
道琛 좌장군 | 10,000명. 임존성(任存城) :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산8. 봉수산성(鳳首山城).국가지정문화재 사적90호 |
黑齒常之 | 10,000명. 眞峴城, 오늘날 黑石東山城, 密巖山城, 흑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鳳谷洞) 山 26-1. 대전광역시기념물 제15호 |
相如 | 3000명 이례성(尒禮城), 충남 논산군 노성 |
遲受信 | 3000명 가림성(加林城) 성흥산성(聖興山城) 충남 부여군 임천면과 장암면에 걸쳐 세워진 산성. 사적 제4호 |
좌평 정무(正武) | 두시원악(豆尸原嶽). 충남 청양군 정산면 두릉윤성(豆陵尹城)추정 |
달솔 여자긴(餘自進) |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웅진(熊津 공주)의 한글 발음인 ‘고마(곰)나루’를 한자로 표현한 것 |
왕자 부여풍(扶餘豐) | 왕. 中大兄. 제명천황(보황녀)의 아들 |
⑶ 반목
내분으로 福信이 道琛을 죽이고 豐은 福信를 죽였다.
⑷ 부여 隆과 黑齒常之의 항복
⑸ 부흥운동 실패;
Ⅳ. 장보고(張保皐)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 서남해안의 해도(海島) 출신으로 활약했던 무장이자 무역상
1. 생몰
785~846
2. 이름
장보고(張保皐. 신당서. 번천문집
궁복(弓福)(삼국사기. 신라본기)
궁파(弓巴)(삼국유사)
장보고(長寶高)(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
Ⅱ. 통일신라의 경제활동
1. 통일이후의 경제성장
가. 서시(西市)와 남시(男市) 설치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경주의 인구 증가로 기존의 시사(市肆, 소지마립간 12년 490년)과 동시전(東市廛. 지증왕 10년 509년)만으로는 상품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32대 4년 695년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했다.
나. 수공업
각 물품마다 생산을 관리하는 행정부서가 있었고 왕궁내에 설치한 공장에서 장인과 노비를 통해 공급했다.
2. 대외통상
가. 당
조공형태의 공무역과 사절단이나 사신들에 의한 사무역이 있었다. 통일 이후 문물교류의 확대와 더불어 점차 활발해졌다. 당이 혼란기에 접어 들면서 사무역이 공무역을 압도했고 산동반도, 강소성 등지에 신라방(新羅坊. 신라촌(新羅村, 신라인 거주지), 신라소(新羅所, 관청), 신라관(新羅館, 여관), 신라원(新羅院, 절) 등이 설치되었다. 장보고가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이 유명했다,
나. 일본
처음에는 적대관계에서 무역이 성행하지 못했으나 8세기 이후 교류가 활발해졌다.
다. 아라비아(大食國)
울산에 까지 와서 무역을 하였다. 주로 양탄자, 유리그릇, 향신료 등 귀족의 사치품이 애용되었다.
라. 장보고의 활동
장보고(張保皐, 張弓福, 張弓巴)
20대에 당나라로 건너가 군인으로 출세하여 서주(徐州) 지역에서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해적이 성행하여 신라인을 잡아다가 노비를 매매하는 일에 분개한 그는 본국에 돌아와서 흥덕왕에게 청하여 제42대 흥덕왕 3년 828년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해군기지 및 무역기지로서 일본의 규슈와 당나라의 영파 등 장쑤성 일대를 잇는 해상의 요충지인 청해진(淸海鎭, 莞島, 828~851)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에 임명되어 사병적 성격의 1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해안지대를 경비하여 해적을 소탕 제압하고 당 및 일본과도 활발히 국제통상을 전개하여 황해의 해상왕이 되었다.
해상왕 외에도 청해진대사, 감의군사, 진해장군으로서 중앙정치에도 간여하여 정년(鄭年)과 함께 김우징(金祐徵)을 도와 44대 민애왕(閔哀王)을 축출하고 45대 신무왕(神武王)에 오르게 하였다. 46대 문성왕(文聖王) 5년 846년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는 문제를 계기로 하여 귀족의 반대에 직면하여 46대 문성왕(文聖王) 8년 846년 난을 일으켰으나 중앙귀족이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암살되고 문성왕 13년 851년 청해진은 폐지되고 그 군대 1만명은 벽골군으로 옮겨 재생이 억제되었다.(石島鎭)의 츠산(赤山) 법화원(法華院)에 가면 장보고(張保皐, 785~846)를 만날 수 있다. 복원해 놓은 절에는 장보고기념관을 세워 장보고 초상화를 두었고, 입구에는 장보고를 기리는 돌비와 옆 언덕에는 장보고의 사적을 적은 거대한 석탑과 동상을 세웠다.
⑶ 성주의 자립
지방의 호족이나 진골, 성골, 6두품 출신의 몰락한 중앙귀족, 촌주들은 일정한 지역에 성을 쌓고 성주 또는 장군으로서 칭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군현의 장관을 대신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지방민에게 조세(租稅)와 역역(力役)을 부과하고 농법도 전하면서 촌락민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되어 신라의 중앙정부의 경제력을 잠식하고 있었다.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 약화를 틈탄 지방 호족들이 독자적 세력 형성하고 중앙 정부에 항거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제42대 흥덕왕(興德王)의 4촌동생 균정(均貞)이 궁에 들어 가서 와이 되었으나 균정의 조카인 제륭(悌隆)이 실력으로 균정을 내쫓고 836년 제43대 희강왕(僖康王)이 되었다. 2년뒤 868년 희강왕도 죽음을 당하고 6촌형제인 김명(金明)이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이 되었다.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은 839년 청해진 대사 장보고(張保皐)의 군대 5000명을 빌려 민애왕을 축출하고 왕이 되니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이다. 이후 장보고는 제46대 문성왕에게 딸을 왕비로 보내려다 실패하자 문성왕 8년 846년 난을 일으켰으나 중앙귀족이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피살되고 5년후 문성왕 13년 851년 청해진도 폐쇄되었다.
사건 | 내용 |
대공(大恭)의 난. 36대 혜공왕 4년 768년) | 수도 및 5道 주군(州郡)의 전국 96명 각간(角干)이 서로 싸워 김대공이 피살되고 대란으로 확대되어 3년간 계속되었다. |
김지정반란(36대 혜공왕 16년 780년)과 37대 선덕왕 즉위 |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김경신(金敬信)이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혜공왕이 살해되어 김양상이 내물마립간 10대손으로서 37대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하였다. |
38대 원성왕(785년) 즉위 | 내물마립간 12대손 김경신이 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하였다. |
39대 소성왕(昭聖王) | |
40대 애장왕(哀莊王) | |
42대 헌덕왕(憲德王) | 김헌창(金憲昌)의 난(헌덕왕 14년 822년)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金周元)의 아들로서 웅주(공주)를 근거로 국호 장안(長安), 연호 경운(慶雲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겼으나 실패하였다. 범문(梵文)의 난(헌덕왕 17년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한산(서울)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
42대 흥덕왕(興德王) | |
43대 희강왕(僖康王, 836~838년) | 흥덕왕의 사후 4촌동생 균정(均貞)과 조카 제륭(悌隆)이 싸워 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 |
4대 민애왕(閔哀王, 838~839년) | 6촌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죽이고 민애왕으로 즉위 |
45대 신무왕(神武王, 839~839년) |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민애왕을 축출하고 신무왕으로 즉위 |
46대 문성왕(文聖王) | 8년 846년 장보고난(張保皐難) |
47대 헌안왕(憲安王) | |
48대 경문왕(景文王) | |
49대 헌강왕(憲康王) | |
50대 정강왕(定康王) | |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나. 골품제도의 붕괴
성골은 통일전에 없어졌으며 통일 이후 1~3품이 소멸하고 4두품도 거의 평민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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