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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신기루 그리고 실체의 간극
강병철(소설가)
1.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꿈꾸다.
영호 형! 1년 만에 또 출산이군요.
1983년 가을인가요? 창작과 비평사의 『한국문학의 현단계 Ⅲ』에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을 발표했으니 원래는 올깎이 청년 시절을 보낸 셈이지요. 문득 형의 산물을 만나면서 바람막이 그늘을 내려주던 울타리나무에 태풍경고 탄력이 붙으신 느낌입니다. 지난겨울 꼭 이맘때 아주 늦은 첫 평론집 『지금 이곳에서의 문학』을 발간하더니 1년 사이에 사화집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꿈꾸다』를 발간함을 보며 문득 아득한 옛날 선배님에게 느끼던 외경심이 되살아나는군요.
그랬답니다. 선배님은 젊은 날 나를 비롯한 후배 문청들의 우상이었으니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문법의 실체였습니다. 가까이 하기가 두려웠으며, 몽매한 몸으로서 오직 ‘음주 감성의 배설’로써 소통하려 덤볐습니다. 하여, 좌중을 잡기 위해 과장되게 취한 몸짓이나 귀곡성 음담패설로 분위기를 돌려놓곤 했던 게 불과 엊그제 같습니다.
80년대 초반, 복학생 졸업반이던 저에게.
전인순, 이은봉 선배 등으로부터 『삶의 문학』 동인으로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으면서 받았던 막힌 물꼬가 터지는 느낌도 여전히 성성합니다. 그 후 이은식, 유도혁, 윤중호, 조기호, 전무용, 이재무 등과 조우하면서 문학과 역사, 이 나라의 경제와 평화를 짊어져야 한다고 주안상 결의를 나눌 때마다 몽롱한 흥분에 빠지곤 했답니다. 그때 동학사 민박집에서 가끔 소위 ‘까기 대회’라는 걸 열기도 했는데, 시인들의 창작품을 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는 방식이었지요. 주로 이은봉 시인과 김영호 평론가가 주제를 놓고 팽팽하게 대립했고 저 같은 부류들은 고수들의 바둑판 구경하듯 한 수 한 수마다 탄사와 서스펜스로 진땀을 흘렸을 뿐입니다. 그 와중에 저는 단편소설 「유년의 덫」 초고를 보여주며 조바심 태우는데 ……김영호 선배 왈.
“강병철이 국문학과를 나온 애 맞긴 하냐? 문장이 맞는 게 없데.”
그때 저는 문학청년의 흉내로 헛배를 부풀리며 행복하던 청춘이었습니다. 고무신을 끌고 장발 머리카락을 흔들며 철둑길 어디쯤에서 술독에 빠지던 고무신 청년 시절, 기실 암울한 시국을 견뎌내려는 발버둥이기도 했습니다. 센티멘탈과 폭주만으로 문학의 목표를 이루겠다고 큰소리도 쳤던 포즈는 태생적으로 허약함을 감추기 위한 포장이었음을 고백합니다.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 그리고 89년의 전교조 결성전후의 얘기는 다음 지면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진행하는 테마가 형의 저서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꿈꾸다』이고 책의 첫 단락 소제목이 「청소년 문학과 성장의 의미」로 붙어있군요. 그래요. 80년대 신군부시대 당시 우리들은 태양처럼 젊은 새내기 스승이었고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사랑했습니다. 그 속에서 83년도 노란 껍데기의 무크지 『삶의 문학』이나 85년도 『민중교육』까지 모두 ‘제자들의 견인과 의지가 혼재된 기획’이었고 뒷부분에 부록처럼 청소년들의 글을 실으면서 변혁에의 동지적 기대를 키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30여년 세월이 피도 눈물도 없이 흘렀습니다. 자본주의는 불안을 먹으면서 약진했고 저 역시 신산의 스크럼을 거치면서 ‘희망과 절망의 나락’을 오르내렸습니다. 시국도 오르내리락거렸고 문단판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거치면서 나선형으로 쬐끔씩 변화시켰다는 자부심도 있습니다. 게오르규의 ‘잠수함 속의 토끼’가 되자며 발자크와 루카치와 조지오웰을 끌어안던 그 80년대 민중시와 이데올로기 문학을 아프게 거쳤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셀 수 없는 스펙트럼이 순식간에 지나치더니 ‘청소년 소설’이란 장르가 새롭게 등장했고 바야흐로 1318 문학의 시즌이 도래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도 그 흐름의 연장으로 동참하는 거구요.
2. 동화나라 그 유년의 신기루
어린 날에 자양분 삼았던 동화란 것들은 대개 ‘행복한 신기루’였습니다. 『백설공주』건 『신데렐라』건 그녀들이 곡절 끝에 쟁취하는 사랑의 해피엔딩은 천편일률 왕자님에게 시집가는 웨딩마치로 마무리됩니다. 얼떨결에 공유되던 유년의 감성, 그 행복의 사연들이 자꾸만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자꾸만 옆구리가 시린 겁니다. 한반도의 국민누나인 콩쥐나 심청이와 춘향이까지 어느 누구 하나 나의 반려자가 될 엄두가 나질 않는 걸 알면서 소년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그나마 희망을 주긴 했으나 그것 역시 숨겨진 진골•성골의 가문적 받침이 있어야 가능한 실체였습니다. 딱 하나 『성냥팔이 소녀』의 사연만큼은 오래도록 껴안고 다독였으니 그 어린 마음에도 비련의 주인공들에게 동질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순식간에 초로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90년대 초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청소년 소설은 확실히 문학의 진일보입니다. 불량학생들이 범생이의 영역을 치고나왔고 다문화가정이나 신체적 소수자 청소년들도 씩씩하게 주역의 역할로 자리잡는 겁니다. 물론 아직 전형적인 틀이 나오기도 합니다. 골목 성님 포즈의 사내 주인공들은 대개 얼굴이 잘 생기고 역삼각형 근육으로 등장합니다. 사고뭉치 체질이지만 왠지 매력이 보이므로 처음부터 그가 주인공이라는 막연한 예측이 가능하지요. 그리고 막판에 고위층의 딸이면서 성적표까지 최상위권인 여학생과 조우하지요. 따로국밥처럼 따로따로 놀던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적당한 시점에서 서로 매력을 느끼며 소통할 수 있는 필연이 등장합니다. 마지막에는 설레면서 가벼운 첫 키스로 마감을 하니 마치 70년대 이소룡 영화의 천편일륙적 에필로그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상상력의 확장과 전광석화 행보는 기성세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땡볕 사막을 하염없이 질주하기도 하고 100년 전 과거와 200년 후 미래가 거침없이 등장하니 판타지 세대의 진수를 적나라하게 만나는 셈입니다. 사람과 동물과 인조인간들이 소통하는데도 문장의 구조상 인과관계가 딱 맞는답니다. 그러니까 젊은 것들이라고 하시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네들이 엮어낸 애니메이션 장면이 드라마와 시네마 스크린에 쿵, 하고 나타나 대박을 치고 인구에 회자되니……기성세대들과는 영역 자체가 별개 세상인 셈이지요.
문체는 또 얼마나 정교한지요. 우리 같은 기성세대들에겐 마치 암호해독 하듯 힘들게 읽어야 할 현란함도 있지만 그들의 네트워크에서는 모든 것들이 익숙하기 때문에 인터넷 베스트셀러가 나오고 활자와 스크린과 음악이 혼재된 생산품이 봇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생경한 단어들이 연발총처럼 쏟아지지만 어디 한 줄도 아까워서 빼먹을 수 없는 신세대식 질서도 있답니다. 이제 기성 작가들도 그들에 대한 편견을 벗어나 과감하게 손을 내밀어야 할 시점입니다.
2. 성장소설 『닭니』에 대하여
마을에는 바다가 있었다. 서해안 격렬비열도에서 가장 가까운 태안반도 천수만 리아시스 연안은 땅끝 그림자끼리 꾸불텅꾸불텅 이어져서 얼핏 보면 커다란 호수처럼 출렁거렸다. 유년의 소년은 이 세상의 모든 마을에는 반드시 바다가 옆구리처럼 붙어있는 줄만 알았다. 장원이네 뒤란이나 현수네 마당에서도 바다가 보였고 외갓집이나 당숙네 대밭에서도 언덕바지만 넘으면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갯바구니를 들고 바닷가 백사장에 앉아 있으면 수평선 너머로 안면도 끄트머리가 희미하게 보였다. 게와 조개와 망둥이를 잡던 악동들이 겁도 없이 고두리 해안선(800미터)까지 개헤엄 내기를 거는 바람에 나 혼자 쪼그려 앉아 조마조마하게 구경하곤 했다. 내가 이렇게 바다를 바라보듯 수평선 저쪽에서도 누군가가 건너편 바다를 바라보며 있으리라 상상하며 하염없이 웅크려있었다. 나는 ‘바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어진 줄 알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성적표』에서
지천명 즈음에 세 권의 성장소설을 썼습니다.
『닭니』, 『꽃 피는 부지깽이』, 『토메이토와 포테이토』인데 지금까지 쓴 강병철표 1318류의 전반부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첫 생산품 『닭니』는 5학년 때를 떠올리며 쓴 건데, 아닌 게 아니라 『엄마의 장롱』과 중첩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연화라는 소녀가 선생님의 유년 시절 애인이슈?”
그런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상대역인 소녀는 다섯 명의 여자를 한 명처럼 관통시킨 경우이니 실체와 허구의 배합이지요.
첫 번째 연화는 실증 여부도 가물가물하지만.
쇳밭둑 당숙 회갑 때 장님 거지를 따라온 아홉 살 단발머리 소녀로 기억됩니다. 한머리 악동들이 그가 단지 장님이라는 이유로 ‘생강밭을 밟았다’는 거짓말을 꾸미면서 돌멩이를 던지며 벌떼처럼 쫓아다녔으니 그게 꼬마 악마입니다. 돌우박을 맞은 늙은 장님 거지는 분기탱천 지팡이를 휘둘렀고 맨 앞에 쫓아가던 영환이가 이마를 스쳐 맞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답니다.
그제야 마을 어른들이 조무래기들을 나무라며 내쫓았고, 포장 아래 잔치 국수와 술 한 잔으로 그니를 곡진하게 달랬던 것 같아요. 잠시 후 감나무 그늘 아래에서 포만감으로 잠이 든 장님 거지 옆에서 우물쭈물하는데.
“야.”
단발머리가 멋쩍은 표정으로 나를 불렀답니다.
“넌 학교에 다니니까 공부 잘 하겠지. 나도 열 살이 넘기 전에 글자를 배워야 덜 챙피하겠다. 여기다가 글씨 좀 써줘.”
나는 네모 칸마다 아라비아 숫자를 써줬고 해와 달과 토끼와 모자를 그린 다음 그 아래에 ‘해’ ‘달’ ‘토끼’ ‘모자’라고 적으면서 얼마나 떨렸는지 모릅니다. 그뿐이었습니다. 『닭니』,에서는 ‘소녀가 연필심에 침 발라가며 글씨 연습을 시작하자 먹머루 맑은 눈이 반짝거렸다.’라고 적긴 했지만 그 후 영원히 만난 적이 없습니다.
두 번째 연화는 내 아내의 어린 시절 사연입니다.
8남매의 맏딸이었던 그미네는 소도시 초등학교 후문에서 구멍가게를 했더랍니다. 그리고 마을 잔치 같은 학교 운동회를 배경으로 그미는 아이스케키 통을 짊어지고 운동장 틈새를 누비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이스케키 세 개를 팔면 한 개가 남았으니 구멍가게에 앉아 온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운동회 출장이 훨씬 이문이 남았던 게지요.
마침내 한 시간 남짓 거리의 이웃 학교 운동회까지 진출한 겁니다. 젊은 아낙이었던 장모님과 일곱 살 소녀가 아이스케키 통을 하나씩 메고 만국기 휘날리는 낯선 동네 교문에 들어섰는데 참으로 황홀했답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팔렸는데 갑자기 날이 흐려지고 비가 쏟아지면서 평생 못에 박힌 곡절이 생긴 거지요. 운동회를 집행하던 학교 측은 파장을 선언했고 구경꾼들이 비를 피해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아이스케키 장사는 더 이상 불가능했으므로 모녀가 케키 박스를 멘 채 빗길을 치렁치렁 헤치는데, 아뿔싸 통 안의 얼음과자가 녹기 시작하더랍니다. 케키 공장에 도착하기 전에 죄다 녹을 게 뻔하므로 묘책이 안 생기자 어머니가 딸의 손을 잡고.
“우리 둘이 죄다 먹어버리자.”
장대비 쏟아지는 추녀 밑에 앉아 막대기 비린 맛이 혓바닥을 쑤실 때까지 아이스케키를 깨물었다는 장맛비 사연이 있구요.
세 번째 연화는 사돈의 팔촌 되는 일가붙이 여동생입니다.
아줌마는 시장에서 밀가루 국화빵을 구워 팔았습니다. 가로 세로 구멍이 다섯 개씩 총 스물다섯 개인 무쇠 빵틀이지요. 먼저 연탄불 위의 빵틀 구멍마다 헝겊 막대기로 재빨리 기름을 칠합니다. 밀가루 반죽 밑바닥부터 노릇노릇 익어질 때쯤 양재기에 준비해온 앙꼬무치를 갈고리로 떼어 재빨리 집어넣는 동작이 예술처럼 환상적이랍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팥소 위에 밀가루 반죽을 붓고 빵틀을 한 바퀴 돌려 양쪽 다 구워지면 갈고리로 빼내는 거지요.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아무리 열심히 손을 놀려도 가난의 등짐은 벗어날 수 없었답니다. 사돈네 누이는 연탄불 옆에서 동화책에 빠지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끝말 이어가기나 스무 고개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손가락 빨아대는 나에게 사돈 아줌마가.
“하나, 먹어라.”
뜨끈뜨끈한 풀빵을 내밀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다시 그 옆에 달라붙곤 했습니다. 나중 얘기지만, 뜨개질 밤마실을 나온 풀빵 아줌마가 어머니에게.
“병철이는 풀빵을 준다고 허먼 츰엔 ‘싫유’ 허구 도망치더니 야중에는 얼굴이 빨개진 채 몽기작몽기작 와선 ‘아줌마 하나만 주면 안 되나유’ 허더랑께유.”
아낙네들이 바닥 치며 배꼽 잡는 소리를 피해 이불 속에 숨은 내 몸으로 신열이 잉잉 달아올랐습니다. 풀빵사돈네 연화는 이사 가던 날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눈이 시뻘겋게 울었다는데, 이상하게, 나는 안도감으로 아랫도리가 부풀었습니다.
네 번째 연화는 1년 선배였고, 두 살 더 많았습니다.
전교 1등을 해서 종업식마다 우등상 받으러 나가는 수재 소녀가 지금도 또렷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날품팔이 그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 직전 이미 서울의 당구장집 식모로 보내기로 약속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일까, 중학교 입학의 꿈을 접은 마지막 시험에서는 서울의 사립 중학교로 가는 동철이에게 1등을 놓치고 딱 한 번 2등을 했습니다. 학교 측이 가장 야속했지요. 졸업식날 최우수 학생에게 주는 도지사상을 동철이에게 수여한 겁니다. 마지막 학기에 단 한번 1등을 놓친 게 이유라고 설명했지만 그보다는 가난한 집 여자 애라는 이유가 가장 컸지요. 그미는 졸업식에 불참하면서 담임선생님께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선생님은 제가 중학교에 못가더라도 공부만 잘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하셨지만 저는 이미 희망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졸업식장에서 1등으로 도지사상을 타는 게 마지막 꿈이었습니다. 실제로 도지사상은 제가 타는 게 맞습니다. 선생님은 바르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지만 저는 1등으로 졸업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희망이 없는 졸업식장엔 나타날 수 없습니다.
1967년 2월 14일 나쁜 아이 연화 올림
마지막 연화는 성인이 되어 우연히 조우했지만 안타깝게도 모르쇠로 지나쳤습니다.
그미의 남동생이자 대학교수가 된 내 친구와 쏘주 한 상을 약속한 길이지요. 아, 과거와 현재의 오버랩이 그리도 섬뜩한가요. 열한 살 때였던가. 학예회 때 ‘가을 밤’을 독창하던 꾀꼬리 6학년 선배의 영상을 가슴에 담으면서 나는 ‘가을이라 고요한 밤, 달이 밝아서’라는 음계를 수도 없이 불렀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겁니다. 김교수가 중형 마트 정육점을 가리키며 즈이 누나라고 슬쩍 치고 나갈 때, 그미는 마트 안의 정육점에서 시뻘건 고기 도막을 절단기에 들이미는 중이었습니다. 그 벅찬 감격도 그렇듯 스냅처럼 스쳐갔습니다.
‘기억력이라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궁금증이 가장 컸습니다. 6학년을 배경으로 한 『꽃 피는 부지깽이』는 『닭니』의 연작으로 이어서 쓴 것이고 중 1,2학년을 대상으로 한 『토메이토와 포테이토』 역시 그 주인공이 서울로 올라와 자취한다는 기획으로 시작했습니다. 고구마 뿌리 캐듯 우려내다 보니 실제 기억과 가상의 기억력이 뒤엉켜서 나중에는 저 자신에게까지 실체 여부가 불안했음을 밝힙니다. 물론 그 실체 여부가 성장소설의 약점이 될 수는 없는 것이구요.
3. 타향살이의 절망적 고독 『토메이토와 포테이토』
6학년 때부터 서울 유학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1968년도였던가요, 입시 지옥 해결책으로 먼저 서울 지역만 중학교 무시험 진학을 실시했고 (문교부장관, 권오병) 그 와중에 서울 평준화 틈새로 진입하기 위해 자취생의 길을 택했으니, 그게 유령 전입입니다. 가족 전체가 이사하지 않으면 전학이 불가능하도록 규제한 정부 방침을 어기고 편법을 시도한 거지요.
그 곡절의 전학 생활을 끝내고 1969년 올빼미 중학생활에 입(入)한 이유는 서울시 교육청이 지방 전입생들을 평준화 학교에 포함시키지 않고 모조리 야간학교에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서울 시내 유일의 야간부인 그 학교는 오후 네 시 반부터 시작되었는데, 1학년 네 개 반 250명 중에서 직장을 다니기 위한 자발적 선택은 두 명뿐이었고 나머지 모두 팔도강산 산 넘고 물 건너 온 유학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낮 동안의 시간 때우기입니다. 자취방엔 아무 세간이 없었으므로 아침이 되면 무조건 어디로든 나가서 시간을 죽여야 했습니다. 차비도 아낄 겸 원효로 자취방에서 종로구 수송동 그 학교까지 한 시간 남짓 걸어서 등교했지요. 시청 앞 KBS 공개홀에서 가수들 노래를 듣거나 광화문 동아일보사 게시판에서 안의섭 화백의 <두꺼비> 네 칸 만화에 집중하며 부은 발등을 식혔습니다. 그러다가 탈출구를 찾았으니 그게 남산도서관입니다. 먼 거리지요. ‘자취방 →원효로 철둑길 →성남극장 →후암동 →미군부대 담길’ 그리고 남산이 보이는 계단을 까마득히 오르다 보면 땀 배인 교복 등허리로 소금꽃이 피기도 했습니다.
그래봤자 이미 중고생들이 계단 저 아래 꺾어진 골목까지 아찔하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사람 대신 책가방을 순서대로 늘어놓고 그 언저리에서 시간을 때웠는데, 한 사람이 빠져나와야 그 빈 자리를 채우는 시스템이므로 틈새가 좁혀지는 순간 재빨리 가방을 밀어 넣어야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글자 수 맞추는 고등학생 교복들을 곁눈질하며 그들의 미래를 멋대로 재단하고 남녀의 짝 맞추기를 상상했고 가끔 뒤집기나 반전의 묘미를 만들며 히죽히죽 웃곤 했습니다.
장마철 급류에서다. 물살에 쏠린 나뭇가지 양쪽으로 수백 마리의 벌레들이 울긋불긋 붙어있었다. 딱정벌레나 진딧물, 자벌레 같은 노랗고 까만 생물들일 뿐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순간.
딱.
돌부리에 부딪치면서 나뭇가지가 쪼개지고 생물들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강변으로 쏠린 벌레들은 꾸물꾸물 수풀로 기어올라 생명을 이어갔고 강물로 쏠린 가지는 꾸불텅 자맥질 포즈로 모두 물속에 빠져 세상을 마감했다. 돌부리를 사이에 두고 생사가 교차되는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사는 게 그랬다. 갯마을의 유년기와 특별시 골목길의 사춘기 골목길까지 모두 운명이었다.
-《토메이토와 포테이토》의 작가의 말-
모든 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또래의 여공들은 공단의 닭장 틀에서 실타래를 뽑았고 시내버스 차장 누나들은 통행금지 직전까지 팥죽이 되도록 다리품을 팔았습니다. 지게 작대기 던지고 무작정 상경한 갯마을 성님들 역시 기름밥 판 종이돈을 장판 속에 집어넣으며 밑 빠진 독을 채우려 했습니다. 또 있습니다. 역전의 예비군 아저씨들이 운동장에서 기합 받는 풍경을 입력시키며 나는 일찌감치 미래를 절망했습니다. 경찰관들은 장발족 청년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가위질했고 미니스커트 아가씨의 허벅지 비늘을 키득키득 쪼아대며 치마 길이를 재었으니 참으로 야만의 세월이었습니다.
아주 가끔 북아현동 판잣집 골목에서 산 너머 초록색 ‘와우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며 ‘아름답다, 아득히 보이는 건 모두 아름답다’ 하며 감탄에 빠질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밤에는 굴레방다리 교각으로 쏟아지는 차량의 불빛과 그 너머 남대문 시장의 야간조명을 싸-하게 품어보기도 했고요.
‘돈을 많이 벌면 저런 꿈나라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어느 날 와우 아파트가 무너져 벼렸고 남대문 시장도 화마에 휩쓸려 재가 되었는데, 일기장에 반쪽짜리로 기록했으니, 그게 열네 살 성장소설의 모태가 되는 것일까요? 야간중학생 사진첩을 배경으로 했다지만 등장인물의 진위논란이나 검증은 의미가 없음을 밝힙니다. 벗들의 얘기를 섞었고 옆 테이블 술꾼들의 언어를 재빨리 훔쳐 문장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원래 그 소설은 1,200매 가량을 썼었는데 너무 주먹싸움 서사가 많아 200매 가량을 휴지통에 넣었음도 밝힙니다.
4. 이제 나는 무엇을 써야 하나?
이제 이순의 입구에 있으니 문학의 저울추로 갈무리가 가까워진 단계입니다.
저는 30년 가량 시, 소설, 산문까지 닥치는 대로 썼는데 나머지 단계에서는 청소년 소설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아마 영호 형께서도 그간의 문예비평 행보에서 변화를 주신다면 청소년 비평에 관심을 두시리라 예측합니다. 이건 우리들의 업보 탓이기도 하며 장차 이 나라의 장래를 짊어진 꿈나무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그늘 속의 벗들에게 더욱 몰입하려 합니다. 영화 <카트>에 나오는 염정아의 ‘알바 아들’이나 TV에 빠져있는 아홉 살 딸내미 사연 같은 것들을 진하게 그리며 벗들의 짐을 나누겠습니다. 그나마 응달에서도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장삼이사의 사연들을 제대로 엮어서 그동안 아껴준 벗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의 편달을 기꺼이 받으며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늦가을 쇠해가는 호박 뿌리로 저 끄트머리 성성한 새순을 틔우는 자연의 섭리를 따를 것입니다. 예전에 형이 끌어주셨던 끈 역시 당연히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저간의 감사함을 거듭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