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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들은 흔히 그 입을 통해서 말하면 듣기 나름으로 얘기가 다르게 느껴질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또 진정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행하고 있는 예술 행위, 지향하는 예술 세계가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없는 가장 희소하고 희귀한 최고의 가치 속에 자리잡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예술가들이각자 갖는 확신은 대체적으로 착각이나 오해 속에서 빚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퍽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소위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남아있는 고전 작품을 남긴 위대한 시인 작가 예술가들이 수만 수백만 명이 되면,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세계 명작을 찾아 읽다가 다 읽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예술가란 착각 속에 자기가 지향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확신 즉 착각, 스스로의 오해 속에 살기 때문에예술은 여러 가지 변화무쌍하고 포복절도할 결과가 빚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윤동주라는 시인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사람들은 징용에 붙잡혀 간다든가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이나 빨치산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용케 그것을 면했다 해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일본 순사한테 따귀를 맞아가면서 소작인이나 머슴으로 살고 세금도 내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윤동주는 선조가 선각자이면서 기독교 신자로 뼈대 있는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빨치산의 혁신 또는 좌파사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제가 마련해 놓은 교육기관에 가서 유학을 했으니까 떳떳하지 못한 면도 많을 것입니다.
예슬의 가치와 삶의 고저장단은 늘 불일치한다 그런데 윤동주는 살아서 자기가 시인이었던 적도 없던 사람이 공책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제목까지 정해놓고 순서대로 시를 써놓은 채로 죽은 것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서는 시인의 영예를 누린 적이 없었던 사람이 죽은 뒤에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윤동주가 살았던 당시에는 잡지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매체들을 통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던, 당대의 개념으로 보았을 때 장안에서 이름을 날렸을뿐더러 생전에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사람들 가운데에는 오늘날 변변한 시인의 반열에 들지조차 못한 이들도 수두룩합니다. 시인이라고 자처한 적도 없는 윤동주는 시인으로 죽음을 넘어 지금까지 살고, 시인이랍시고 나대고 다니고 신여성과 연애도 하면서 개화적이고 현대적인 생활을 하던 대부분의 시인들은 오늘날 존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시인의 가치라든가 예술가의 가치가 삶의 가치나 삶의 고저장단하고는 늘 불일치하고,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 의미가 있고 재미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얼마 전 미당 서정주 시인이 세상을 떠나니까 그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제 입장을정하기 전에 이런 일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윤동주는 그 당시에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적이 없는 스물 너댓 살 된 일본 유학생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미국 하버드대나 영국 옥스퍼드대의 유학생보다 더 희소하고 존귀한 가치 속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주 창피하게 자기의 부끄러움도 모르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고 노래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노래할 때 동시대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했습니까. 윤봉길 의사 같은 이는 폭탄을 던져서 자기의 몸과 나라의 독립을 맞바꾸고자 하는 판인데, 바람이 부니까 잎새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아픔을 느끼고 괴로움을 느꼈다는 고백을 했다는 것은 그 나이에도 맞지 않는 아주 창피스러운 고백입니다. 그런데도 문학은 자기가 세상을 바라보는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을 고백함으로써 존재 가치를 드러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학의 가치와 삶의 가치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오랫동안 학교에서 시와 소설을 강의하면서도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이십 몇 년을 살아오면서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가장 창피스러운 경험을 떠올려 보아라"고 권하곤 합니다. 모름지기 사람들은 아무한테도 말 못했지만 자기 자신만은 잘 압니다. 자기는 까먹었지만 꿈속에서도 나타날 정도로 창피했던 것이 상상의 세계로 나타나는 수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기말시험에 다섯 문제 중 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냅니다. 즉 '살아오면서 가장 치욕스러웠던 체험을 2백자 원고지 두세장 분량으로 써라. 만일 그 답을 쓰면서 유치원이나 초등 학교 때 수영장에 가서 오줌이 마려운데, 화장실에 가지 않고 그 안에서 소변을 봤다는 정도가 창피하다고 쓰면 문학을 할 생각을 말아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보다 훨씬 창피하고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고민이 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가 말 못할 창피스러운 고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그와 마찬가지로 윤동주는 그 나이에, 우리가 자연인의 입장에서 보면 지탄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때 남달리 유복하게만 지냈다고 보여지는 유학생이, 동시대의 젊은이들은 독립 운동하다 총 맞아 죽고 징용을 가서 강제 노역을 하는 현실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자기가 살아온 인격이 부정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부끄러운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그것이 문학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제 35년사를 공부할 때 윤봉길, 안중근처럼 훌륭한 이들이 남긴 작품들이 서예 예술이나 또는 시로서 평가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들의 치열한 삶에 담긴 주제나 의지, 투혼은 굉장한 것이지만, 반면에 윤동주처럼 비겁하고 부끄러운 고백을 한 사람이 시에서는 존중이 된다는 말입니다. 윤동주의 짤막한 시들이 해방이 되고 나서야 겨우 빛을 보았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그때에 만주 벌판에서 왜군을 천 명을 무찌른 장군의 승전보보다도 더 우리의 정서를 일깨워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문학은 부끄러움을 고백한 자체가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고백한 자체에 큰 의미와 감동이 서정주 시인이 돌아가신 다음 여러 가지의 얘기가 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문학 작품을 대한다든가또 어떤 시인 작가를 평가할 때는 언제나 기본적으로 음악은 소리, 그림은 빛깔, 문학은 말로 되는 것이니까, 그 말의 쓰임새, 말이 가지고 있는 함축적인 뜻을 자꾸 생각하면서 읽어야 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당 서정주 시인의 일제 시대의 행적이나 그 후의 어떤 것은 다른 사람에게 비판받고 비난받아서 마땅한 요소가 다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인 서정주, 유권자 서정주, 어디에 살고 주민등록번호가 몇 번인 서정주를 평가하는 자료 쪽이어야지 그것이 문학적으로까지 넘어오지 않아야 된다고 봅니다. 윤동주를 가리켜 다른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하고 다니는데 유학간 놈 친일파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에는 남아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 우리 나라를 들여다보면 아주 우스워질 때가 많습니다. 흔히 정권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수적이고 야당이 혁신적이어야 사회가 유지된다고들 하는데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뜯어고치자고 나서는 사람들은 현재의 여당 쪽이고, 고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쪽은 야당 쪽인데 꼭 이게 꼭 입장이 뒤바뀐 것 같습니다.
모든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보수 세력이고 그것을 개선해 나가고자 애쓰는 쪽은 혁신 세력이 됩니다. 그러다가 혁신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자연스레 입장이 뒤바뀌게 되지요. 예를 들어 우리가 젊을 때는 부모한테 반항을 하다가, 자기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게 되면 9시 전에 들어와라, 아침 일찍 일어나라, 용돈을 아껴서 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류 사회가 이렇게 되는 것인데 우리는 거꾸로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은 집의 자손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옛날 시골분으로 아주 엄격하시고 일본 순사의 따귀를 때려서 야단을 치시던 분입니다. 그렇다고 독립운동을 한 분은 아닙니다. 그 당시에 우리가 다 그런 식으로 하면 해방이 되었을 때 다 죽었다거나 다 어디로 갔으면 만세 부를 사람이 없는 겁니다. 민족의 개념은 복합적이고 지속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걸 참고 묵묵히 견디면서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굴욕을 참는 것이 민족이 유지되어 오는 개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시는 우리말을 새롭게 닦아 반절거리는 보석처럼 나는 소설도 쓰고 시도 쓰는 사람인데 최근에는 시를 아주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타고난 재능이나 그때 반짝 떠오르는 생각을 가지고 시를 썼습니다. 아무개가 시를 이 정도 쓴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시인은 누구나 자기 것이 전무후무한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착각을 하듯이 이 정도면 그 전에도 쓴 사람이 없고 앞으로도 백 년 안에 쓰는 사람이 없으리라는 착각도 하고 했습니다.
우리말 즉 남한 쪽의 언어에는 영어나 외래어가 섞여 있는데, 북한 쪽은 언어 정책을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공부를 하다 고전작품을 보면 순수 우리말인데 굉장히 좋고 아름다운 말인데 사람들이 쓰지 않아서 숨결이 끊어진 말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두고 병아리를 키우다가 죽어버렸으면버리지, 죽은 걸 닭장에 넣는다고 암탉이 되느냐는 식의 비유를 하면 안 됩니다. 비록 잘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시인이나 작가 눈에 띄어서 좋은 보석으로 바뀔 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쓰지 않고 벽장 속에 넣어 두었다가 다시 그걸 닦으면 새로 살아나는 것처럼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시인이 시어를 찾아내기라는 것은 녹슨 동전을 젖은 모래로 부비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몇년도 한국은행 10원짜리 글자가 나타납니다. 그걸 부비지 않으면 돈이 아닌 단순한 쇳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을 자꾸 닦아내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라고 합니다. 이쯤에서 저의 졸작 한편을 소개하지요.
비 내릴 생각 영 않는 게으른 하느님이 소나무 위에서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
쥐눈이콩만한 어린 어린 수박이 세로줄 선명하게 앙글앙글 보채고 뙤약볕 감자도 옥수수도 얄랑얄랑 잎사귀를 흔든다
내 마음의 금반지 하나 금빛 솔잎에 이냥 걸어두고 고추씨만한 그대의 사랑 너무 매워서 낮곁 내내 손톱여물이나 써는 동안
하느님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재채기라도 하셨나 실비 뿌리다가 이내 그친다
-[실비] 전문
이 시는 이번 7월호 {현대문학}에 발표된 것입니다. 나는 시골에서 컸지만 집에서 수박농사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최근에 시골을 왔다갔다하면서 조그만 텃밭에 수박을 몇 포기 심었는데 수박이 크는 걸 보니까 아주 신기했습니다. 수박이 꽃이 피었다가 떨어지니까 수박이 달려 있는데 땅콩보다 더 작았는데 커지는 것입니다. 아주 신기하고 우스운 것은 그렇게 조그만 놈도 제가 수박이라고 S자 모양으로 세로줄이 그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것이 물을 주니까 금방 자라서 느낌이 와닿았습니다. 어릴 때 집에서 수박농사를 많이 지어본 분들은 당연하니까 시의 소재가 안 되지만 나는 모르니까 모티브가 된 것입니다. 시인의 시선은 어릴 때로 돌아가는 겁니다.
저의 연치쯤 되면 용감무쌍하고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으로 하는 것은 젊은 시인들에게 맡기고,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소위 숭늉 맛 같은 것을 찾아서 내가 쓰는 글 속에서 살려내는 게 중요한 할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의 우리의 할머니들이 추석 때 송편을 빚고 나서 찔 때, 손녀를 등에 업고서 광주리를 들고 야산에 올라가서 솔잎을 땁니다. 솔잎을 딸 때 솔잎이 햇빛을 받아서 왕성하게 활동할 때 솔잎을 따면 소나무가 아프니까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소나무가 첫잠이 들었을 때 살살 땁니다. 옛날 선조들은 솔잎을 딸 때 소나무의 아픔까지도 생각하고 살살 땄다는 말은 할머니가 힘이 없이 광주리에 따서 갖다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슬기롭고 좋은 마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을에 감나무 가지가 힘겹위 기울도록 열린 감을 따다가 상수리에 몇 개는 까치밥으로 남겨둡니다. 그건 사실 장대 끝이 짧아서 못 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을 하면 겨울에 까치나 까마귀가 와서 먹습니다. 그것도 참 현명한 것이 모조리 다 따버리면 까치가 배가 고파서 죽고 봄이 되면 해충을 못 잡아먹습니다. 옛날에 밭을 갈 때 몇 개가 땅에 떨어진 것을 며느리가 다 주우면 시어머니나 시아버지가 야단을 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물론 짐승도 먹으라는 것이지만 그 동네에 못사는 사람들이 이삭을 줍는 것입니다.
탐스러운 감을 남겨두는 까치밥의 지혜를 어떤 대학생이 얘기하기를, 자기 할아버지 산소에 가는 길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도 은행이 다닥다닥 열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암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 앞에 강물이 흐릅니다.강물에 그림자가 비치니까 암 은행나무가 그림자를 보고 숫은행나무로 착각을 해서 여자가 상상 임신을 하듯이 바로 앞에는 숫은행나무가 없지만, 바람이 부는 윗마을에서 뭐가 통하니까 열리는데 이것을 시적으로 해석을 하고 삽니다. 그게 재미나고 은행이 다닥다닥 열리니까 번성한 자손을 바라는 조상의 마음 같기도 합니다. 또 은행나무는 혹독한 빙하기에서도 살아남은 나무입니다. 빙하기 때 웬만한 나무는 다 죽었는데 중국에서 살아남아 세계적으로 다 퍼져 있습니다. 그만큼 나이가 굉장히 많은 나무가 은행나무입니다.
다음에 읽어드릴 작품은 저의 미발표작입니다.
첫돌 아기가 - 엄마엄마 아빠아빠 말 배우듯 봄이 되면 꽃들도 - 가갸거겨 오요우유 한글을 하나하나 배우면서 예쁜 눈망울을 뜨는 것일까?
내가 사는 삼호 아파트 개나리는 봄이 온 지도 모르고 겨울잠에 그냥 빠져있는데 개나리 아파트 담장에는 샛노란 개나리가 활짝 피었다
개나리 지고 진달래 필 무렵 개나리 아파트의 진달래는 꽃피울 생각 영 않지만 진달래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의 진달래는 활짝 볼우물 짓고 있다
첫돌 아기가 - 맘마맘마 지지지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배우듯 봄이 되면 꽃들도 - 개나리개나리 진달래진달래 아파트 이름 하나하나 읽으면서 봄소식 전해주는 것일까?
-[봄소식]
이 시는 시계를 보면서 발상을 얻은 작품입니다. 시계 하면 언뜻 소재로 연결이 되지 않는데, 왜 시계가 동그랗느냐 하는 데서 모티브를 잡았습니다. 어느 날 개나리 아파트를 지나가는데, 우리 집 앞에는 피지 않았던 개나리가 활짝 피었더군요. 그 순간 '개나리 아파트'라 했으니 개나리가 많이 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진달래 아파트 앞을 지나가는데, 거기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고 다른 아파트에는 피지 않았더군요. 문득 봄소식은 아파트에 붙은 이름 따라 오지 않나 하는 발상을 했습니다. 그런 아이들과 같은 발상을 시로 옮겼습니다.
제가 서른이나 마흔 살이었더라면 이런 시를 쓸 수 없을 겁니다. 새롭게,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이 시를 낳게 한 것 같습니다. 짓궂고 호기심이 많은 기분을 회복한 게 이 시를 낳은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물이 아주 잔잔하면 조금만 모래 하나에도 파문이 일 듯이 욕심을 버릴 때 그동안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지요. 그런 느낌에서 쓴 시에 [애기똥풀]이 있습니다.
기저귀 빨래 하는 젖이 불은 엄마에게 애기의 똥은 똥이 아니었다. 애기의 숨이 새록새록 잠든 사랑이었다. 새끼 붕어들도 도랑 물풀 사이에서 욜랑욜랑 헤덤볐다.
1만 달러 소득을 뽐내던 시절 애기의 예쁜 똥은 엄마의 눈길 한 번 못받고 1회용 기저귀에 싸여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가 되어 멀리멀리 엄마품을 떠나갔다.
이제 IMF 바람이 불어 다시 천 기저귀를 쓴단다. 봄 여름 아직 멀었지만 집집마다 눈부시게 흰 기저귀에는 애기똥풀 빛 동글동글한 애기똥이 담뿍담뿍 피어나겠다.
-[애기똥풀] 전문
만해 한용운의 시에는 어느 한 군데에도 '대한 독립 만세' 따위의 구절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민족의 정서를 더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그게 바로 시라고 봅니다. 20년대의 프로문학에서 보듯이 당시대인은 문학을 잘못 해석하기 쉽습니다. 당시에는 프로문학에 동조하지 않은 작가들은 발을 못 붙였지요. 그런데 오늘날 김소월, 이육사, 윤동주, 정지용이 형형이 살아있는 데 비해 프로문학 계열에서 남아 있는 작품이 있습니까. 저는 이 시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1회용 기저귀와애기똥풀을 대비시켰습니다. 궁핍한 시대를 맞아 우리는 눈앞의 일에 급급하기 쉽지만, 멀리 보는 눈을 갖게 해주는 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저의 시와 문학에 대한 생각의 일단을 말씀드렸습니다. 궁금한 점이나 저의 모자라는 점을 질문을 통해 채워 주시기 바랍니다.
문; 20대나 30대나 자기에 맞는 나이가 있습니다. 시를 쓰다 보면, 어린애와 같은 마음으로 쓰라고 했는데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은 아니고 쓰고 싶기는 합니다. 무위도에 가서 보름달을 보고 다른 곳에 가서 보름달을 보면서 생각을 했는데 내가 쓰고 나서도 너무 어린애처럼 사삭스럽게 쓰지 않았나 하고, 내 자신이 나이가 몇 살인데 부끄럽거나 창피할 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욕이나 하지 않을까 망설여집니다. 그런 것도 물리치고 써야 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고 그래도 어린애 마음으로 써야 되는지 말씀해주십시오.
답; 때묻지 않은 어린이가 봤을 때 무엇이었을까. 그쪽으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애답다고 욕하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에 어른스럽게 써야 된다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가 좋고 느껴지는 대로 써야되는데, 그것이 어떤 비유라든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아까 얘기한대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라는 것이 참 좋다라고 보면 우리가 말을 배우기 전에 시가 뭔지도 몰랐을 때 잎새가 흔들릴 때 막연한 게 산재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미당 선생의 글을 보니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일을 나가고 난 다음 마당에 뙤약볕이 비치면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옥수수밭은 저 멀리 보이고 가끔 황소 우는 소리만 '움메' 하고 들리면 어린 나이에 굉장히 공포스러웠다고 합니다. [연애 미학 서설]은 어른 입장에서 쓴 시인데 '무지개도 뛰어넘을 만한 힘센 황소가 녈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다.' 무지개도 뛰어넘을 힘센 황소라는 표현은 가당찮은데 나에게는 좋은 걸로 와 닿았습니다. 아이처럼 쓰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더 아이처럼 이라는 게 초등 학교 국어책에 있는 표현처럼 쓴다는 게 아니고 아무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때 내가 뭘 생각했을까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상의 시는 띄어쓰기도 없고 쉼표도 없는데 이상의 시를 다 읽었다고 하면 잘못 읽은 것입니다. 읽다가 숨이 막혀서 못 읽어야 합니다.
꾸밈없고 살아 있는 언어를 찾아
문; 선생님 시 중에 '연애 미학 서설'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언제 쓰셨으며 이 시 전체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자가운전하는 예쁜 여자가 내가 달리는 차선으로 얌체같이 끼어들기하고는 차창 밖으로 흔드는 하얀 손을 보면 무 베어먹듯 그냥 한 입 물고 싶다 눈 마주치면 눈흘레나 하고 싶다 뒤에서 들이박을 생각 아예 말고 살가운 접촉사고나 내고 싶다 - 지금쯤 고향의 억새밭 물녘에서는 무지개도 뛰어넘을만한 힘센 황소가 녈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다 밤길에 잽싸게 끼어들기하고는 점멸등 깜박이며 달아나는 차를 보면 반딧불이가 반딧반딧 짝을 찾는 것 같다 나도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어 하늬바람에 공중제비하고 싶다 홰친홰친하는 낚시대 펴고 동동거리는 형광찌 불빛따라 얄미운 붕어 한 마리 잡고 싶다 - 지금쯤 고향 집 지붕에는 하양 박꽃이 환하게 피어 은하수까지 다 물들이겠다
[연애 미학 서설] 전문입니다만, 이 시는 2년반 전에 써서 어느 시 전문지에 발표한 것입니다. 눈흘레라고 하면 개가 흘레붙었다고 하는데 눈흘레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성추행이나 성폭행하고는 다를겁니다. 눈으로 하는 행위, 녈비는 지나가는 비, 홰친홰친하다는 우리의 사전에는 없고 북한 쪽의소설을 읽다보니까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시는 잠자리나 나비와 같은 것입니다. 잠자리를 야구방망이로 잡으면 어떻게 됩니까? 잡긴 잡았는데 잠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포충망으로 잡아야 됩니다. 문학을 제대로 문학으로 보지를 않고 문학에 담긴 주제 따위로만 보려고 듭니다. 윤동주 시를 저항문학으로만 보면 맛이 사라지고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지요. 이런 저의 생각이 담긴 졸시 한편을 더 읽어 드리면서 이 말을 마치겠습니다.
민박집 천장에서 쥐 달리는 소리 들리면 참말 오랜만에 동갑내기 만난 것 같다 쥐불놀이 하다가 눈썹 태우고 시래기죽 먹고 잠든 겨울밤 쥐불연기에 수염을 그슬린 쥐들이 눈썹 태운 나와 더 놀고 싶다는 듯 쥐오줌자국 난 천장을 밤새 달렸다 씨옥수수 갉아먹던 새앙쥐들도 이불 속까지 기어들어와 내 어린 발가락을 자꾸 깨물었다 고드름이 제 무게에 툭툭 떨어지는 아침이 밝아오면 일곱 문 반 내 고무신에 봉숭아씨처럼 예쁜 쥐똥만 남겨놓고 숨어버렸다 쥐 달리는 민박집 천장 아래 누우면 옛 동갑내기의 발자국소리 들린다
-[쥐에 관한 명상]
이 시는 강화도 낚시를 갔을 때 민박집에서 고기는 잘 안 집히고 소주를 먹고 누워 있으니까 쥐가 다다닥거리고 도망을 가더군요. 그전 같으면 비위생적이라고 했을 텐데 오랜만에 쥐소리를 들으니까 옛날 정겨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쥐똥'을 '봉숭아 씨'로 볼 수 있는 눈이 곧 시인의 눈이 아닌가 합니다. 모두 꾸밈없는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시기를 권하면이 제 말을 마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