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45)
# 역적의 딸
절친한 친구인 박대감과 오대감…
15년후에 사돈되기로 혼약 맺어
사화의 광풍에 오대감 죽게 되지만
두대감의 자식인 용이와 수빈아씨
약속대로 암자에서 몰래 혼례 치러
하지만 반대하는 용이 어머니는…...
3대 독자 외동아들의 혼사문제로 박 대감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술 한잔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건만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은 안 오고 소쩍새 소리만 박 대감의 마음을 쥐어짰다.
15년 전 바로 이 방에서였지. 박 대감과 오 대감은
어릴 적부터 한 서당에 다니며 둘도 없는 친구로,
그리고 함께 급제하여 나란히 나라의 녹을 먹었다.
세월이 흘러도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어 틈만 나면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짓고, 사군자를 치고, 어릴 적 서당
다닐 때 장난치던 일을 떠올리며 껄껄 웃었다.
어느 봄날, 박 대감의 사랑방에서 대작하다가 두 사람은
혼약을 맺었다.
박 대감의 두 살 난 아들과 오 대감의 네 살 난 딸을 15년
후에 혼인시켜 두 사람은 사돈이 되기로 약조하고
지필묵을 갖고 와 그 사실을 혼약서로 남겼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이 흘러도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국사를 논할 때 조금씩 시각을 달리하더니 결국
사색당파에서 갈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사사로이 박 대감과 오 대감은 여전히 관포지교를
이어가며 친형제 이상으로 정이 두터웠다.
박 대감의 아들은 헌헌장부가 되어 초시에 합격한 후 과거
준비를 하느라 암자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하고 두 살 위
오 대감의 딸은 절색의 얌전한 처녀로, 가끔 장옷을 덮어쓰고
몸종을 데리고 정성들여 빚은 떡과 유과를 싸들고 암자를
찾았다.
자손이 귀한 박 대감이 재촉하여 혼인날을 잡았다.
호사다마,
혼인날을 백여 일 남겨두고 사화의 광풍이 휘몰아치며
오 대감은 사약을 받고 부인은 대들보에 목을 매고
아들 둘은 귀양을 갔다.
오 대감의 딸, 수빈만 남았다가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칠흙 같은 어느 날, 장옷에 몸을 숨긴 수빈 아씨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화의 소용돌이도 잦아들고 꽃피고 새우는 봄날이 활짝
열린 날, 박 대감의 아들 용이는 급제를 해 어사화를 쓰고
말을 타고 금의환향했다. 사흘 동안 잔치가 벌어진 후,
박 대감 댁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벌어졌다.
박 대감 아들 용이가 부모를 앉혀놓고 큰절을 한 후
“부모님께 알리지도 않고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오 대감님의 따님, 수빈 아씨와 암자에서 혼례식을 올렸습니다.
부모님께서 혼례식 날짜를 잡아놓았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암자의 스님이 조촐하지만 혼례상을 차려주셔서….”
용이의 어머니는 기절했다.
이튿날 용이의 어머니는 박 대감도 모르게 몸소 의금부를
찾아가 역적의 딸이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고발을 했다.
의금부 부사와 포졸들이 암자에 들이닥쳐
수빈 아씨를 묶어 옥에 가뒀다.
박 대감이 노발대발하고 용이는 땅을 치며 울부짖었지만
박 대감 부인은 막무가내,
“그년은 내 며느리가 아니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 집안에 한걸음도
들어올 수 없어!”
바락바락 악을 썼다.
도승지의 명으로 수빈 아씨는 3일 만에 풀려났다.
오 대감에게 사약을 내리고 아들 둘을 귀양 보낸 걸로
단죄는 끝났다는 것이다.
이튿날 그 소식을 듣고 박 대감 부인은 몸져눕고 용이는
한걸음에 암자로 달려갔다.
수빈 아씨는 암자 옆 물이 콸콸 흐르는 골짜기, 두 사람이
언제나 나란히 앉아 정을 나누던 넓적한 바위에 신발을
벗어두고 소나무에 목을 맸다.
용이는 짐승처럼 울부짖고 박 대감은 눈물만 쏟는데
몸져누웠던 용이 어머니는 발딱 일어나 화색이 돌았다.
구절구절 애절한 정으로 쓴 유서를 읽고 또 읽으며
몸부림치다가 피를 토하던 삼대독자 용이는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