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70)
*곽 노인이 말한 '팔도의 특성'
개성을 떠난 김삿갓이 예성강(禮成江) 물줄기를 따라 이틀쯤 거슬러 올라가니, 그때부터는 사람들의 말씨도 다르거니와 얼굴조차 다르게 보였다.
(여기가 어딜까?)
사람들의 사투리가 정겹게 들려와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여기가 어디인지 물었다.
"여기는 황해도 금천 땅이라오."
김삿갓은 이곳이 황해도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불현듯 복받쳐 오르는 어린 시절의 향수에
가슴이 젖어왔다. 김삿갓은 어린시절,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7년을 살아 온 바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 금천에서 2백여 리만 더 올라가면 곡산이 아니던가?
사투리가 정겹게 들린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황해도의 지세는 멸악 산맥이 황해도를 동, 서로 갈라 놓고 있다.
서쪽은 바다가 가까운 관계로 연백 평야와 재령 평야 같은 들판이 많지만, 곡산이나 신계같은 곳은 서쪽으로는 멸악 산맥이 가로막고 있고, 북쪽에는 언진 산맥이 덮어 누르고 있는데다,
남쪽에서는 마식령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한낮에도 해를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험악한 산악 지대다.
선천군수 겸 병마 절도사를 지낸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어이없이 항복을 하자,
김삿갓의 어머니 이씨는 어린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그 당시의 머슴이었던 김성수의 고향인 곡산으로 피신한 것도, 곡산이 그처럼 첩첩 산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김삿갓의 나이는 겨우 네 살이었다.
그러기에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곡산으로 오게된 김삿갓은 천진난만하게 뛰놀며 글만 읽어 왔었다.
그것은 이미 30년 전의 일이었지만, 김삿갓의 기억 속에는 그 시절이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후에 김삿갓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면서 어머니를 따라 양주, 광주, 평창, 영월,등지로 3년이 멀다 하게 이사를 다니게 되었지만 지금도 누가,
"고향이 어디냐 ?" 하고 물어 본다면,
"내 고향은 황해도 곡산이라오."
하고 대답하고 싶을 정도로 곡산에 대한 추억이 너무도 많았다.
물론 황해도에서는 곡산 이외에도 보고 싶은 곳이 너무도 많았다.
해주(海州)와 구월산(九月山)도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이 이끄는 곳은 역시, 곡산이었다.
(그렇다! 이번 겨울에는 아무데도 가지 말고, 곡산에서 보내기로 하자!)
생각만 하여도 가슴 벅찬 흥분이 일었다.
이렇게 황해도 금천으로 들어선 김삿갓은 첫날밤을 어느 서당에서 자게 되었다.
산골 훈장이라면 으레, 입성이 꾀죄죄하고, 언동도 옹졸한 법이다.
그러나 '선풍재(仙風齊)' 라고 하는 그 서당의 훈장은 구레나룻이 허연 데다가 풍채가 유난히 좋아서, 마치 신선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풍채가 저렇게도 좋은 양반이 무슨 할 일이 없어, 이런 산중에서 훈장 노릇을 하고 있을까?)
이름이 곽호산이라고 하는 훈장은 김삿갓과 수인사를 한 후, 묻는다.
"보아하니 귀공은 공부를 많이 하신 선비 같은데, 이런 산중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저는 워낙 역마성을 타고나서, 명산 대천으로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명산 대천으로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하신다니, 그거 참 좋은 팔자시구료.
말만 들어도 귀공의 팔자가 부럽소이다."
"팔자가 기박해서 거지처럼 떠돌아 다니는데, 뭐가 부럽다는 말씀입니까?"
"그나 저나 선생은 본시 이 고장 어른이 아니신 것 같은데, 어떤 사연이 있기에 이런 산골에서 서당을 열고 계시옵니까?"
하고 김삿갓이 물어 보았다.
그러자 곽호산 훈장은 '허허'.. 웃으며 말을 하는데,
"나는 본시 한양 사람이라오. 내 조부께서 벼슬을 지내시다가 이리로 귀양을 오게 되셨지요.
나는 삼십 년 전에 조부님을 따라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산수가 하도 좋아, 조부님이 세상을 뜨신 뒤에도 이곳에 그냥 눌러 살고 있다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심심 파적거리이구요."
그리고 이번에는 김삿갓에게 다시 묻는다.
"그래, 명산 대천을 두루 찾아 다니신다니, 각 도의 풍습과 인심은 어떠합디까?"
"아직 삼남 지방은 가보지 않아, 뭐라고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함경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기도는 이미 다녀 보았는데, 각 도마다 사투리도 달랐지만, 특히 사람들의 기질은 제각각 다른 것 같습니다."
"잘 보셨소이다. 귀공이 보기에는 함경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기도 사람들의 기질은 어떻게 달라 보이더이까?"
"글쎄올시다. 뭐라고 한마디로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함경도 사람들은 끈기가 있어 보였고,
강원도 사람들은 부처님처럼 순박해 보였고, 경기도 사람들은 말은 잘하지만 미덥지가 않아 보였습니다."
"잘 보셨소이다. 그러기에 옛날 어른들은 팔도의 특색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아시오?"
김삿갓은 옛날 어른들이 팔도 사람들의 특징을 어떻게 말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훈장께 솔직하게 물어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저는 과문 (寡聞)한 탓으로 옛날 어른들이 팔도의 특색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모르옵니다.
선생은 저의 무식을 깨우쳐 주소서."
"귀공이 무식하다니, 무슨 말씀을!"
곽 훈장은 김삿갓을 어떻게 보았는지, 깍듯이 존대를 해주어 가면서,
"좋은 벗이 멀리서 오셨으니 우선 술이라도 한잔씩 나누면서 얘기합시다."
하며 사환 아이더러 안에 들어가 술상을 차려 내오라고 이른다.
이윽고 술상이 들어 오고, 술잔을 기울여 가며 김삿갓이 다시 물었다.
"선생께서 알고 계시는 옛 어른들의 팔도 사람의 특색을 들려 주십시오."
"허허 .. 귀공은 지식욕이 대단하시구료. 그러면 내가 옛어른들이 이르는 팔도 사람들의 특색을 적어 보이지요."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보이는 것이었다.
1. 京畿道는 鏡中美人 (거울 속에 비친 미인)
2. 江原道는 岩下老佛 (바위 위에 앉은 늙은 부처님)
3. 咸鏡道는 泥田鬪狗 (흙탕밭 속에서 싸우는 개)
4. 黃海道는 石田耕牛 (돌투성이 밭을 갈고 있는 소)
5. 平安道는 猛虎出林 (숲속에서 달려 나온 사나운 호랑이)
6. 忠淸道는 淸風明月 (맑은 바람 부는 밤의 밝은 달)
7. 全羅道는 風前細柳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버드나무)
8. 慶尙道는 泰山峻嶺 (첩첩 태산 속의 험준한 고갯마루)
김삿갓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어느 어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비유가 모두 그럴 듯 합니다.
저는 아직 다른 지방에는 가보지 못해 잘 모르겠습니다만,
강원도를 암하노불이라 하였고, 함경도 기질을 이전투구에
비유한 것은 어쩐지 수긍이 갑니다.
경기도의 특색을 경중미인에 비유한 것도 그럴듯 하고요."
"하하하, 귀공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나 역시도 남도 지방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고향이 제각기 다른
내 친구들을 두고 따져 본 일이 있는데, 모두들 그 비유가 옳은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살고있는 지역에 따른 자연 환경의 영향으로
각 지방의 특색이 형성되는 모양 입니다."
"물론 그럴겁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니까요.
그러나 황해도를 석전경우라고 하는 것은 약간 어색한 것 같은데,
선생은 그 점을 어떻게 생각 하시옵니까 ? "
곽 노인은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보기에는 황해도 기질을 석전경우에 비유한 것도
옳은 표현인 것 같아요.
소란 놈은 다소 우둔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아첨을 하거나 군림을 하려는 동물이 아니거든요.
자기 일 밖에 모르는 소가 돌밭을 꾸준히 갈아 나가고 있다고 했으니,
그것이 어찌 황해도 사람들의 기질이 아니겠소이까.
나는 이래서 황해도 사람들을 좋아하는 거예요."
"황해도 사람들의 그런 기질이 마음에 드셔서,
한양에 돌아가지 않으시고 이곳 황해도에 뿌리를 내리신 겁니까 ? "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요. 남에 일에 간섭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충실한 것이 황해도 사람들의 특색이 아니겠어요 ? "
곽노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귀공은 고향이 어디시지요 ? "하고 물어 본다.
"집이 강원도에 있으니까, 제 고향은 암하노불에 해당하는 강원도 입니다.
그러나 저는 열 살이 넘을 때까지 황해도 곡산에서 자랐으니까,
황해도가 고향이라고 해도 별로 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