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향기
미사의 독서로 룻기를 읽었던 적이 있었지요. 집에 돌아와서 그 감동을 적어보았습니다.
히브리 사람인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 둘을 데리고 흉년이 든 고향을 떠나 모압땅으로 와서 살게 된다. 이방인 땅 모압에서 세상을 뜬 남편 대신에 자식을 차례로 장가를 보내고 한 시름 놓게 된다. 그러나, 자식도 죽으며 나오미의 인생은 철저히 시련이 계속된다. 룻기의 내용은 나오미와 며느리인 모압 여인 룻이 겪는 인생의 시련과 어려움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우정을 이어가는 고단하지만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인생사가 그 내용이다.
신약성경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마태오 복음서의 첫 째장을 읽어보라. 누구는 누구를 낳고 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예수님의 족보에 기이하게도 다섯 명, 여인의 이름이 나온다. 그 여인 중의 한 사람인 룻이라는 여인은 유다인이 아니라 모압 사람이다.
성스러운 예수님의 족보에 어울리지 않게 등장하는 이방인, 룻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방인에 불과한 그녀가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 나오미를 지극히 보살펴서 위대한 다윗 가문을 계승한 데에 그 촛점이 있는 게 아닐까? 어떤 이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알리며 유다인들의 편협한 선민사상을 깨뜨리는 대 사건이라고 하지만 전적으로 수긍할 수 없다. 또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남편도 잃고 자식들도 다 잃은 한 노파 나오미를 지극정성으로 살핀 며느리 룻. 이 아름다운 고부간의 사랑에 하느님이 감동하여 행복한 결말을 보장해 준 것이라는 상선벌악, 아니 효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도덕 교과서적인 해석이라면? 그런데 사실 꼼꼼히 들여다보면 나오미와 룻 고부에게 새로운 삶을 보장해 준 보아즈에게 두 여인이 보여주는 약간 비도덕적이고 천박한 행동이 실망스러울지 모르지만 당시 유다의 사회관습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남성우위의 사회에서 두 과부가 살아가야하는 현실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자기 앞에 떨어진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삶의 약속으로 그녀들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은 가부장적 남성위주의 사회 속에서 남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룻과 나오미 두 고부는 그들의 문제를 남자에게 맡겨 놓고 수동적으로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상황을 주도하여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주체적 결단과 실천이 돋보인다. 과부를 보호하기 위해 죽은 남편의 가장 가까운 친척 형제와 결혼하게 하는 제도에 그들은 단순하게 동조하지 않는다. 나오미는 며느리가 남편을 대신할 아들을 낳아주는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며느리들이 친정으로 되돌아가 그들 자신을 위해 새로이 남편을 마지하는 일을 주선하였다.(1,8) 나오미는 시어머니이기에 앞서 여인으로서의 행복을 며느리 룻이 누리도록 개가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리고 나오미와 룻의 고부간의 관계가 현모양처형의 여성 그리스도인으로 삼기에 룻기가 가지고 있는 비장감은 더하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아름다운 고부간이라기 보다는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절박한 어려움을 당하는 여성들의 절박한 처지와 가혹한 운명을 이겨내는 같은 처지의 '여성들이 펼쳐보이는 우정'의 관계로 말이다.
당시 여자는 남편 집안의 대를 이어주는, 다시 말해 자식 낳아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 룻기에는 남성과 여성의 시각차이가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베들레헴 성문에서 남자 장로들은 룻을 아내로 맞은 보아즈의 행운을 축하하며(룻4,12) "주님께서 이 젊은 여인을 통하여 그대에게 주실 후손으로.....'" 남자들의 관심은 집안의 대를 잇는 자식농사에만 쏠려있다.
반면에, 룻이 출산하였을 때 마을 여인들이 모여와 나오미를 축하하는 장면은 많이 다르다.(룻4,15)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에게는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 아이가그대의 생기를 북돋우고 그대의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고부간의 사랑(우정)이 아들 일곱보다 더 강조되어 있다. 참된 행복은 이렇게 사람과의 관계가 참된 우정의 경지로 발전되어 갈 때 진정 누릴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룻기에서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건강하고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는 위대한 여성의 모습과 삶의 지혜를 읽었다. 물론 그리스도가 나오기로 약속된 다윗 가문을 소개하려는데 큰 뜻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다윗가문의 족보가 갖는 무게를 생각할 때, 이 족보에 들어온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는 편협한 유다의 선민의식을 뛰어 넘어 민중해방의 역동적인 꿈틀거림을 느끼게 해 주었다. 지나친 해석일까? 유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꼭 드리는 기도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하고 두 번째로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음을 고마워하는 기도라 한다. 이렇듯 이방인과 여자를 경멸하는 유다인들의 구약에 룻기가 들어간 것을 보면 성경은 인간이 쓴 것이 아니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큰 사랑이라 부른다. 이방인 룻이라는 여인과 오갈 데 없이 난감한 처지에 빠진 나오미라는 노파에게 넘치도록 큰 사랑을 부어주신 하느님의 참 사랑을 통해 나 자신에게도 가득 차오는 그분의 사랑을 느끼며 룻기를 다시 읽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