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강좌 / 시의 인문학>
■ 초보시인 맨땅에 헤딩하기
_디카시에 대하여 1.
‘디카시dica-poem'의 출현은 시대의 요구였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자시에서 표현하기 힘들었던 현대인의 감성과 디지털 시대의 생활양식이 ’디카시‘라는 형태로 발현됨으로써 누구나 다가갈 수 있는 대중문학으로서 크게 환영을 받고 있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제도화 시키고 개념화 시킴으로써 디카시의 창시자가 된 이상옥 교수의 노력은 한국 디카시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그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디카시의 사진을 ‘영상기호’로, 시적 언술은 ‘문자기호’로 본다, 즉 디카시의 사진은 ‘완결성을 지니는 사진예술로서의 영상이 아니라 자연이나 사물에서 느낀 시적 형상, 또는 시적 감흥을 찍은 기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카시는 디카시일 뿐”이라고 한다. 그는 또 일본의 유명 사진작가 후지와라 신야(藤原新也)의 예를 들었다. 후지와라는 사진의 ‘사’자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형에게서 빌린 카메라의 ‘세터를 누르면 찍힌다’라는 정도만 알고 인도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으로 「인도 발견 100일 여행」이라는 책을 발표하여 일약 유명한 사진가로 활약하고 있음을 소개하였다. 이 일화는 “디카시 창작도 사진 기술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말해준다”라고 했다. 즉 “디카시의 사진은 사진예술이 아니라 시적 기호를 포착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라는 것이다.
나는 1996년부터 강희근 교수의 문하에서 지역 문학운동으로 시작한 ‘화요문학회’ 1대, 2대, 4대 회장을 맡았었고, 이 교수도 함께 참여하여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후 나는 이상옥 교수가 재직하는 창신대학 문창과의 평생교육원 진주분원장을 맡아 40여 명의 사회인이 시 공부를 했고, 더러는 창신대학 문창과 등에 입학을 시키는 관계였으니 그와 나의 문학 인연은 깊을 수밖에 없다. 나는 연하의 이상옥 교수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그를 존경했고 따랐다. 이상옥 교수는 2004년 ‘디카시’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를 제주대학교 윤석산 교수가 구축한 ‘디지털한국문학도서관’에 연재하면서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첫 디카시집 『고성가도』를 펴냈고, 곧 『디카시 창작 입문』이라는 이론서를 펴 냄으로써 디카시의 창시자가 된 것이다. 그해 나는 제주도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초창기 제주 생활은 옆 돌아볼 여유가 없을 정도로 힘들고 바빴지만 10여년 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서 스승님과 지인들의 강력한 권유로 그동안 절필하고 있었던 시에 다시 집중하기로 했다. 나의 문학인연과 깊은 관계가 있는 화요문학회라는 이름으로 매주 화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두세 시간씩 시와 디카시를 내가 운영하던 북카페에서 공부를 했고, 이것이 활성화 되어서 다른모임도 생기고 동인들이 시집도 내고 시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디카시 창작 입문』은 우리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2017년부터 나는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시와편견》이라는 시 전문지를 발행하면서 이런저런 문학단체나 여러 시인과의 교류가 있었다. 자연스레 디카시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시를 쓰는 시인 중에는 디카시의 사진과 언술의 가벼움이 결국 디카시가 좋은 문학으로 자리 잡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디카시는 사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형태인데, 사진의 작품성이나 품질이 떨어지면 언술이 아무리 좋아도 가독성이나 전체의 작품성이 살아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시인들과 영상기호로서의 디카시 개념에 대한 논쟁을 나와 벌이기도 했다.
시의 문외한이 쓴 것도 가끔은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일반화 될 수 없듯, 사진의 기초도 모르는 사람이 어떤 시적 감흥이 떠올랐더라도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에는 좋은 언술이 뒷받침해도 결국 좋은 작품으로 남기 어렵다는 지적에 나도 점차 동의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진동호회에서 30년 이상 활동하면서 사진을 배웠기 때문이다. 사진도 시가 추구하듯 작가의 의도나 감흥을 곳곳에 배치하거나 숨겨놓을 수 있는 함의성의 장르다. 그러나 디카시가 요구하는 사진의 품질이나 작품성이라는 것이 전문 사진가의 예술작품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사진의 기본적 구도와 고립성, 기록성, 현실성, 예술성과,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빛 그림과 언술이 합쳐졌을 때 비로소 디지털문학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겠다는 결론이었다.
“문학은 발전해야 한다. 그것이 세계문학사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디카시도 확실한 문학의 장르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더욱 좋은 쪽으로 경쟁하고 여러 갈래 진보되어야 한다”라는 확신이 왔다. 이상옥 교수가 주창하는 디카시의 개념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더하여 “사진의 작품성과 언술의 문학성도 높여 나가자”라는 방향을 나는 잡게 되었다. 그런 개념에 입각하여 지역의 일간지에 디카시에 대한 칼럼을 써오다가, 우리나라 최초로 ‘뉴스N제주’라는 인터넷 매체에 디카시를 포함한 신춘문예를 공모하기로 하고 모든 비용을 부담하였고, 이런 저런 디카시 운동을 하였다. 디카시가 제주대학교의 서버에 탑재된 [디지털한국문학도서관]을 매개로 전국에 처음 소개되었으므로 이상옥 교수의 고향 경남 고성은 '디카시의 발원지'로 하고, 제주를 ‘디카시의 본향’으로 부르기로 한국디카시인협회 김종회 회장과 한국디카시연구소 이상옥 대표, 그리고 시를사랑하는사람들 전국모임(시사모) 대표를 맡고 있던 나와 정식 합의를 하기에 이른다.
나는 20여 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와『한국디카시학』이라는 디카시 전문지를 만들었다. 전국의 문인들과 디카시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우선 배포했고, 1천만원 고료 [한국디카시학 문학상] 제정, 일간지인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에 디카시 부문을 포함하는 조건으로 상금과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등 년간 4천만 원 이상의 사재를 쓰면서 디카시 확장 보급 운동을 하였다. 한국디카시인협회 제주도지부가 처음 설립되었고, 경남지부 창립에도 역할도 했다.
탈이 났다. 디카시의 주류라는 자부심을 가진 분들에게는 나의 이런 활동은,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꼴이었나 보다. 그들에게 나의 적극적 행동이 불편함을 줄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어산이 한국디카시의 주류처럼 행세한다”라는 것이다. 나를 폄훼하는 여러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깊은 내용도 모르면서 말할수 없는 모멸감을 주는 행동을 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어떤 목표가 정해지면 최선을 다하는 성격과, 옳다는 일에 대한 신념이 강한 것도 욕심이라는 사실을 그 일로 인하여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내 탓이다”라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과 “올무에 걸렸을 때는 가만히 있어라.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죄어오고 나중에는 죽게 된다”라던 국문학자 여증동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일로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소리가 커지면 디카시가 자리를 잡아가는데 도움 될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먹던 우물에 침을 뱉을 수는 없다”라고 마음을 추스리며 조용히 있었다.
아군이 열이면 적군도 열이라고 했던가? 믿고 따르고 협조하고 봉사한 결과치고는 가슴 아팠지만 내가 희생하더라도 디카시는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기에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순수했던 디카시 운동의 첫 사랑을 이어가기로 했다. 힘있는 자들의 논리가 진리인양 포장되고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는 세상 뉴스를 접하면서 "우리는 어떠한가?"라는 의문은 있었다.
다음 기회에 디카시 짓는 방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겠지만, 나는 디카시가 디지털 시예술(dica-art poem )의 자리에 까지 오를 수 있는, 현대인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문학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문학의 장르가 여럿 있고 접근하는 방법도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개개인의 취향이다. “이것이 절대 옳은 것이다”라는 문학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더욱 진보하고 발전하는데 기여한 사람들로 인한 문학이 이어질 뿐이다. 그것이 문학사(文學史)다.
첫댓글 디카시가 반은 사진이어서
사진도 좋아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해서 사진을 예술적으로 잘 찍는 기술이 아니라
가슴을 찍는 사진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겉 제목이 전부
토요 시 짓기 강좌로 되어 있어서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헷갈립니다. 물론 다시 읽어도 좋지만요.
겉 제목에 번호를 달아 주시거나
아니면 부 제목을 달아 주시면 다시 보고 싶은 글을 찾기도
쉬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