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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유럽여행 80일
산디아고 순례길에서...
이번 2차 유럽여행은 2016년 6월15일부터 9월1일까지 80일간으로 다녀왔다. 금년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출발하여 여름이 끝날 무렵 온 셈이다. 유럽 알기에 2014년에 70일과 이번에 80일 여행으로 150일간 여행을 하였다. 5개월 동안 유럽여행을 한 셈이다. 참으로 의미있는 시간들이라고 생각이 든다.
‣ 이번 2차 유럽여행은 특히
① 슬로베니아를 비롯한 유럽 동구권 여행
② 이탈리아의 아말피 코스트 여행과 트래킹
③ 로마의 4대 성당을 비롯한 대성당 순례
④ 그리스의 유럽 문명 발상지의 찾아보기
⑤ 스페인의 2차 산티아고 순례길
⑥ 고흐를 비롯한 유럽 예술가의 발자취 찾기
⑦ 영국(스코트랜드, 북아일랜드) 전역 여행
⑧ 아일랜드 일주 여행
⑨ 오스트리아 빈과 오페라 관람,
이탈리아 로마와 그 유적탐사,
프랑스 파리 및 루브르 박물관
다시보기로 요약 할 수 있다.
‣ 2차 유럽여행지: 여행순서 아래와 같다.
(1) 오스트리아(비엔아)에서 유럽여행 시작
(2) 슬로베니아(류블랴나)
(3) 크로아디아
① 쟈그레브, ② 플리트비치 호수 국립공원 ③ 스플리트 ④ 두브로브니크
(4)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
① 사라예브 ② 모스타르 ③ 메주고리예 ④ 네움
(5) 세르비아(베오크라드)
(6) 그리스
① 아테네 ② 델비 ③ 메티오라 ④ 크레타 ⑤ 산토리니
(7) 이탈리아
① 로마 ② 나풀리
아말피 코스트< ③ 비코 에쿠엔세(vico equense)⟶ ④ 쏘렌토⟶ ⑤ 포지타노⟶
⑥ 아말피⟶ ⑦ 살레르노 > ⑧ 카프리 섬 ⑨ 시칠리아 섬
(8)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① 생장피드포르⟶ ② 론세바예스⟶ ③ 수비리⟶ ④ 팜플로나 ⟶ ⑤ 까스트로헤리스⟶
⑥ 레디고스⟶ ⑦ 사아군⟶ ⑧ 사리아 ⟶ ⑨ 포르토 마린⟶ ⑩ 팔라스테레이⟶
⑪ 아르수아 ⟶ ⑫ 아르카도피노⟶ ⑬ 산티아고⟶ ⑭ 피스테라
(9) 프랑스
① 마르세이유 ② 생장 피드포르 ③ 파리 ④ 몽생미셀 ⑤ 오베르 쉬르 우아즈
⑥ 지베르니
(10) 영국
① 런던 ② 스톤헨지(stonehenge) ③ 바스(bath)와 바스 YMCA숙소,
④ 스토 온 더 월드(stow-on-the wold) ⑤ 버턴 온 더 워터(bourton-on-the-water) ⑥ 버퍼드(burford) ⑦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straford-upon-avon)
⑧ 콘위(conwy)성 ⑨ 맨체스트(manchester) ⑩ 요크(york) 및 요크 캠프장
(11) 스코틀랜드
① 에덴버그성 ② 캐빈 ③ 키콜리(kirkcaldy) ④ 퍼스(perth) 및 퍼스 캠프장
⑤ inverness ⑥ 네스호(loch ness) ⑦ 모기 많은 캠프장 ⑧ 스카이성(skye I)
⑨ 포트리(portree) ⑩ 포트 윌리암(fort william) ⑪ 스텔링(stirling)
⑫ 크라스고(glasgow) 공항에서 북 아일랜드 벨페스트 공항으로
(12) 북 아일랜드
① 벨페스트(belfast) ② 공항 캠프장 ③ giant's causway:절벽
④ 그 옆에 있는 성 ⑤ 벨페스트 공항 렌트카 반납
(13) 아일랜드
① 더블린(dublin,3일) ② 기니스 맥주공장 ③ 골웨이(galway-서쪽해안 항구)
④ 모헤어 절벽(cliffs of moher) ⑤ 고인돌(poulnabrone dolmen) ⑥ 코크(cork)
⑦ 킬케니(kilkenny: 큰 중세 성당) ⑧ 더블린공항에서 런던 공항으로
영국 런던 히스로 국제공항에서 귀국하였다.
1. 오스트리아(빈: 비엔나)에서 유럽여행 시작
오스트리아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관람
오스트리아 여행지: 비엔아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 문화의 중심지인 오스트리아는 약 850여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중앙유럽 알프스 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다. 유럽의 중앙에 위치해 여러 나라의 국경이 맞닿아 서쪽으로는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북쪽으로는 독일, 체코, 동쪽으로는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가 있다.
(1) 빈(비엔나)
도나우 강변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인 빈은 12세기 중엽부터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된 이래 15세기 합스부르크 왕가가 들어오면서 수백년 동안 정치, 문화, 예술, 음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영어로 비엔나(Vienna)라고도 불린다. 빈은 도나우 강변에 자리한 유서 깊은 도시로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스트라우스, 브람스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예술의 도시이다.
유럽 최대의 왕실 가문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심장부라고 불리는 쇤브룬 궁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백 년 동안 대제국의 수도였으며, 지금도 중부 유럽의 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이다.
빈의 관광지는 링 안쪽과 링 바깥쪽으로 나뉘어져 있고, 링 안쪽은 도보로 관광할 수 있지만 링 바깥쪽 관광지는 트램이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시청 앞 광장에서는 여름에는 필름 페스티벌이 열리고, 겨울이 되면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린다.
<빈의 관광지>
① 벨베데레 궁전
.벨베데레 궁전은 1716년 오이겐 폰 사보이 공의 여름별궁으로 하궁을 먼저 세우고, 1723년 연회장으로 이용할 상궁을 건설했다.
상궁은 1955년 5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의 외무 장관이 모여 오스트리아의 자유와 독립을 부여한 조약을 체결한 장소로 유명하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페르디난트가 잠시 거주한 곳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의 대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벨베데레는 이탈리아어로 ‘좋은 전망의 옥상 테라스’를 가리키는 건축 용어이다.
현재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가장 많이 전시하고 있는 곳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인 〈키스〉를 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구스타프 클림트 이외에 오스트리아가 낳은 또 다른 대표 화가인 에곤 실레의 작품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하궁은 오이겐 왕자의 별궁으로 현재는 바로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하궁 옆에 있는 오랑게리는 아열대 식물을 보관하던 식물원인데 오스트리아의 중세 작품 등을 전시 중이다.
② 슈테판 대성당
빈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슈테판 대성당은 오스트리아 최고의 고딕식 성당이다.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지어졌으며, 14세기 중반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고, 18세기에 들어와 성당의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독특한 혼합 양식의 건물이 되었다.
화려한 모자이크가 인상적인 지붕은 기와 23만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137m 높이의 남탑과 67m 높이의 북탑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진 장소로도 유명하고, 내부엔 16세기의 조각가 안톤 필그람이 만든 설교단이 있으며, 지하에는 대주교의 묘지가 있다. 페스트로 사망한 2천여 명의 유골을 모아 놓은 카타콤베는 가이드 투어로만 들어갈 수 있다.
③ 쇤브룬 궁전
‘아름다운 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쇤브룬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으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다.
백조의 성을 건설한 루트비히 2세, 그 아버지인 막시밀리언 2가 1569년에 지역을 매입하여 별궁을 지었으나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파괴되었으며, 1696년 레오폴드 1세 때 재건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개조와 증축을 거쳐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화려한 로코코 양식이 돋보이는 궁전은 1,441개의 방이 있으며 그중 45개의 방만 공개하고 있다. 방마다 전시되고 있는 회화와 가구, 도자기 등이 볼 만하며, 특히 백만의 방(The Millions Room)과 거울의 방이 가장 인기 있다.
④ 빈 미술사 박물관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17세기 레오폴드 빌헬름이 수집한 방대한 전시물들을 전시하기 위해 1891년 개관한 미술관으로 파리의 루브르, 마드리드의 프라도와 함께 유럽 3대 미술관 중 하나이다. 독일의 건축가인 고트프리트 젬퍼의 설계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똑같이 생긴 자연사 박물관과 마주 보고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 화가였던 벨기에 출신의 루벤스가 그린 작품들과 함께 벨라스케스, 뒤러, 라파엘로 등 거장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층에는 그리스, 로마, 이집트에서 수집한 골동품들과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유럽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2층 전시실 중에서 루벤스와 브뤼헐의 전시실은 놓치지 말고 꼭 둘러봐야 한다.
< 빈 미술사 박물관 우수 작품 >
Ⓐ 초원의 성모 - 라파엘로 산치오
르네상스 3대 화가로 손꼽히는 라파엘로는 특히 성모자의 그림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하는 화가였다. 이 작품 역시 성모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성모자와 어린 요한이 등장한다.
이 그림은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로 그려져 있으며, 세 인물은 긴밀하게 교감하고 있다. 그리고 뒷 배경인 넓은 초원은 원근법으로 표현되어 인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초원의 성모 - 라파엘로 산치오
Ⓑ 수산나의 목욕 - 틴토레토
이 작품은 성서 속 수산나 이야기를 주제로 그린 것이다. 수산나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두 원로가 훔쳐보고 겁탈하려 하자, 그녀는 죽은 힘을 다해 순결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두 원로의 모략으로 그녀가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데, 다니엘의 도움으로 누명이 벗겨져 두 노인이 사형을 받게 된다. 틴토레토는 목욕 중인 수산나를 두 원로가 훔쳐보고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묘사했다.
수산나의 목욕 - 틴토레토
Ⓒ 바벨탑 - 피테르 브뤼헐
브뤼헐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구약 성서 속 바벨탑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브뤼헐은 바벨탑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타락을 보여 주려고 하는데, 특히 이 작품 속 바벨탑은 방과 창문만 있고 복도가 없는 형태라서, 나선형 구조이지만 결국 걸어서 올라갈 수 없다. 그리고 구조적으로도 불안정해 보인다. 브뤼헐은 바벨탑 작품을 총 3점 그렸는데,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다.
바벨탑 - 피테르 브뤼헐
Ⓓ 월력도 연작 : 사냥꾼의 귀가 - 피테르 브뤼헐
이 작품은 달력을 위한 연작 중 하나로, 1~2월의 겨울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이 최초로 눈 내린 풍경을 그린 작품이었다. 세 명의 사냥꾼과 사냥개들이 사냥을 마치고 눈 위를 걸어 마을로 돌아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월력도 연작 : 사냥꾼의 귀가 - 피테르 브뤼헐
Ⓔ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 카라바조
구약 성서 속 다윗과 골라앗 이야기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연약한 다비드가 거대한 골리앗의 머리를 잘라 승리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을 그릴 당시 카라바조는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하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불안한 자신의 모습을 묘사해 놓은 것처럼 보이며, 특히 소년이 들고 있는 골리앗은 자신의 먼 미래를 내다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 카라바조
Ⓕ 모피를 두른 엘렌 푸르망 - 페테르 파울 루벤스
이 작품은 루벤스의 그림 중에서도 가장 에로틱한 그림있다. 작품 속 주인공은 루벤스보다 37세나 어린 루벤스의 두 번째 부인 엘렌 푸르망으로, 개인 소장용으로 이 작품을 그렸다. 어두운 색의 모피와 배경 덕분에 여인의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이며, 여인의 육체는 생동감이 넘친다. 이 작품은 루벤스가 죽은 후 세상에 공개되었다고 한다.
모피를 두른 엘렌 푸르망 - 페테르 파울 루벤스
Ⓖ 회화의 기술, 알레고리 - 요하네스 베르메르
이 작품은 베르메르가 죽을 때까지 소장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던 작품으로, 그의 유언, 혹은 그의 예술 세계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림 속 주인공은 베르메르 본인으로, 그는 몸을 구부려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커튼 뒤로 누군가 화가의 작업실을 엿보는 듯한 구도로 그려져 있어,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델이 아닌 화가에게 시선이 향하게 한다.
회화의 기술, 알레고리 - 요하네스 베르메르
Ⓗ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 - 디에고 벨라스케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의 궁정 화가로 활동하면서 왕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특히 이 작품 속의 모델이 된 마르가리타 공주의 경우 3살 때부터 초상화를 그려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궁으로 보냈는데, 그 이유는 공주가 레오폴드 1세의 신부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마르가리타 공주가 8살일 때 그려진 것이며, 2년 후에 벨라스케스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림 속 주인공인 마르가리타 공주 역시 15세 때 레오폴드 1세와 결혼한 후,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 - 디에고 벨라스케스
⑤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 하우스와 함께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에 꼽히고, 파리 오페라 하우스, 밀라노 라 스칼라와 함께 유럽 3대 오페라 하우스에도 꼽히는 극장인 만큼 빈에서 놓쳐서는 안될 명소이다.
1861년부터 약 10년에 걸쳐 완성되었고 개관 작으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초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던 1945년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빈의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1955년에 시청사보다도 먼저 복원하기도 했다.
건물 정면은 장식이 많은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화려한 느낌을 주며, 내부의 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이다. 해마다 9월부터 공연이 시작되어 이듬해 6월까지 약 300여 회의 공연이 이루어진다. 7~8월에는 빈 필하모니 단원들이 잘츠부르크 음악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잘츠부르크에 머물기 때문에 이 기간에는 공연이 열리지 않는다.
⑥ 빈 자연사 박물관- 유럽에서 손꼽히는 자연사 박물관
마리아 테레지아의 동상을 사이에 두고 미술사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이 마주하고 있는데, 아기 코끼리 청동상이 서 있는 쪽이 자연사 박물관이다. 미술사 박물관을 건설했던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의 설계로 19세기 말에 개관했다.
런던의 자연사 박물관과 함께 유럽에서 손꼽히는 자연사 박물관으로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광물, 화석, 박제품, 인간의 진화 과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자연사 박물관에 놓치지 말아야 할 전시품은 약 2만 5천 년 전에 구석기인들에 의해서 조각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조각품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117kg의 토파즈 원석,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해 만들어졌던 약 1,500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든 보석 부케 등이다. 이밖에 약 3만여 점의 전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⑦ 빈 시청사 (Wien City Hall)- 필름 페스티벌과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는 곳
1883년 완공된 네오고딕 양식의 건물로 건물 중앙에 솟아오른 뾰족한 첨탑이 매우 고풍스럽다. 시청 앞 광장에서는 여름철엔 대형 스크린을 통해 음악 등을 감상하는 뮤직 필름 페스티벌이 열리고 겨울철엔 크리스마스 4주 전부터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린다.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면 시청사 주변의 큰 나무들 위에 예쁜 전구들로 불을 밝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살려 준다.
2. 슬로베니아(Slovenia: 수도- 류블랴나)
슬로베니아블레드 호수와 블레드 섬
- 멀리 블레드 섬에 있는 성모 마리아 승천성당이 작게 보인다
슬로베니아 여행지: 류블랴나
1991년 독립한 신생국가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오랜 전통을 가진 국가이다. 7세기에 슬라브족이 사바 강 유역을 중심으로 슬로베니아 왕국을 세웠다.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엔 덥고 겨울에 따뜻한 나라가 ‘슬로베니아’이다.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의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한다. 면적은 2만 273㎢, 인구는 약 200만명이고, 수도는 류블랴나(Ljubljana)이다. 주민은 슬로베니아인 83.1%, 크로아티아인 1.8%로 구성되어 있다.
(1) 류블랴나 (Ljubljana)
슬로베니아의 수도이며,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도시이다.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는 슬로베니아어로 ‘사랑스러운’을 뜻하는 이름처럼 산과 강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17세기 이탈리아의 영향으로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도시 곳곳에 많이 지어졌다.
그러나 그 이후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도시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스타일의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바로크 양식과 묘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자연 속의 도심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3. 크로아디아 (Croatia )
크로아디아 플리트비치 호수 국립공원에 있는 폭포
크로아디아 여행지: ①쟈그레브 ②플리트비치 호수국립공원 ③스플리트 ④두브로브니크
웬지 아름다움이 많을 것 같은 나라가 ‘크로아디아’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1918년에 수립된 남부 슬라브족 다민족국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고,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와 내전을 거쳐 1991년 6월 분리 독립하였다.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 중서부의 알프스 산맥과 지중해 사이, 유럽 아드리아 해 동부 해안에 위치하며 헝가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접경하고 있다. 면적은 56,594㎢로 한반도의 4분의 1 크기이며 인구는 약 4,500천명이다. 수도는 자그레브(Zagreb)로 약 8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주요 도시로 쟈그레브, 플리트비치 호수 국립공원, 스플리트, 두브로브니크, 오시예크(Osijek), 리예카(Rijeka)가 있다.
남부 해안 지역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이며 북부 내륙 지역은 대륙성 기후 특징을 보인다. 공식 언어는 크로아티아어이고 슬라브계 언어로 라틴문자를 사용한다. 민족 구성은 크로아티아인 89.6%, 세르비아인 4.5%로 이루어져 있고 종교는 가톨릭(88%), 세르비아정교(4%), 이슬람교도(1%) 등이다.
(1) 쟈그레브
자그레브는 오스트리아 빈을 연상시킬 정도로 분위기가 비슷하다. 해발 약 122m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나우강의 지류인 사바강 유역에 있다. 수도권은 ‘자그레브 시’를 포함하여 별도의 자그레브 자치주를 포함하고 있고, 2011년 기준 수도권의 총인구는 약 110만 명 정도이다. 이 지역은 크로아티아에서 유일하게 100만명 이상의 인구를 보유한 도시권이다.
<쟈그레브 관광지>
① 반 젤라치크 광장 (Ban Jelacic Square)
도시의 대표적인 명소는 반젤라치크 광장이다. 사회주의 시절 공화국광장이라고 불렸으나,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한 후 반젤라치크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광장에는 업무지구, 카페, 상가가 밀집해있으며 트램으로 자그레브 전 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반 젤라치크 광장 (Ban Jelacic Square)은 상부도시(Upper Town)와 하부도시(Lower Town)을 이어주는 중간에 위치한 자그레브의 중심광장이다.
② 반 옐라치치 동상.
오스트리아 조각가 Anton Dominik Fernkorn에 의해 만들어진 Ban Jelačić 동상이 인상적인 이 광장은 평소 카페가 즐비한 드넓은 광장이지만, 종종 큰 축제가 열리는 축제의 장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③ 자그레브 대성당
자그레브 대성당은 고딕양식이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있는 가장 유명한 건물로 캅톨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가장 높은 건물이다. 주보성인은 하늘나라로 승천한 성모 마리아와 성 스테파노, 성 라디슬라오이다. 대성당과 대성당 내부의 제의실은 전형적인 고딕 양식이며, 건축학적으로 가치가 대단히 높다. 대성당의 첨탑은 시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높다.
또한 자그레브 대성당은 1093년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1102년에 완성된 77m 크기의 거대한 건축물이다. 1242년에 타타르족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되었다가 다시 고딕양식으로 복원하고, 화재로 손상을 입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또한 성 마르코 성당과 성 캐서린 성당 역시 자그레브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또한 1895년에 건립된 자그레브 국립극장에서는 수준 높은 오페라 공연 등이 상연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2) 플리트비치 호수 국립공원 (Plitvice Lakes National Park)
말라 카펠라 산과 플리에세비카 산 사이에 위치해 있는 곳이 ‘플리트비치 호수 국립공원’이다. 석회암과 백악(chalk) 위로 흐르는 물은 수천 년 이상에 걸쳐 석회 침전물을 쌓아 천연의 댐들을 만들었으며, 그들은 그들대로 또 일련의 아름다운 호수, 동굴, 폭포 등을 만들었다. 이들 지질학적 과정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이 국립공원의 삼림 지대는 곰, 늑대 그리고 수많은 희귀종 조류들의 서식지가 되고 있다.
(3) 스플리트(Split)
3세기경 로마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임 후 지중해의 따뜻한 고향인 스플리트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궁이 ‘디오클레티안 궁전’이다. 스플리트는 수도인 자그레브보다도 긴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이탈리아와 마주 보고 있는, 아드리아 해에 접한 달마티아 주의 주도로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이다. 스플리트 항구에서 바로 보이는 종탑이 인상적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은 스플리트의 상징과도 같다.
현재는 관광 중심 도시로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흐바르 섬이나 트로기르, 시베니크 등 주변 도시들이 인접해 있어 많은 여행자들이 이 도시를 찾고 있다.
(4) 두브로브니크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 해 스르지 산자락에 자리잡은 성곽도시이다. 14~19세기 달마티아 공화국의 수도이다. 크로아티아의 최남단에 위치한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 불릴 정도로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중세 시대에는 아드리아 해에서 중요한 무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크게 성장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다 1358년 라구사(Lagusa)라는 도시 국가로 탈바꿈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가 1991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끝난 후에는 크로아티아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를 침공한 세르비아 군대가 두브로브니크를 포위하고 포격을 가해 도시의 건물 상당수가 파괴되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전 세계의 학자들이 인간 방패가 되어 두브로브니크를 지켰으며 전쟁 후 유네스코 등의 지원을 통해 대부분의 유적들이 복원되었다.
4.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
보스니아의 성모 발현 메주고리예 성당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 여행지: ①사라예브, ②모스타르, ③메주고리예, ④네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유럽 동남부와 발칸반도 서부에 위치하며, 수도는 사라예보이다. 국민 구성은 이슬람교도(48%), 세르비아인(37%), 크로아티아인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종교 또한 이슬람교(40%), 세르비아정교(31%), 로마가톨릭이다. 동쪽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경계를 이루며, 3면을 크로아티아가 둘러싸고 있다.
(1) 사라예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시민의 거의 절반이 이슬람교도이며, 이슬람교적 특성이 강한 많은 모스크와 옛 투르크인들의 장터 등이 있다.
1415년에는 브르보스나라고 불렸으며, 15세기말 투르크에게 점령당한 후 교역 중심지와 이슬람 문화의 거점으로 발달했다. 오스만 제국이 1850년 사라예보를 행정중심지로 삼았다.
(2) 모스타르 (Mostar)
모스타르는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가장 큰 도시로 네레트바 강을 끼고 있다. 버스 터미널이 위치한 신시가지는 상당히 현대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조금 걸어서 구시가지로 넘어 오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모스타르는 네레트바 강을 중심으로 보스니아인이 거주하는 지역과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세르비아인도 상당히 거주하고 있었으나 전쟁 이후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지금은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도시를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3) 메주고리예
메주고리예는 1992년 3월2일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 동쪽에 위치한 치트룩에 속한 여러 마을 중 하나이다. 본당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마을(메주고리예, 비야코비치, 수르만치, 비오니카, 밀레띠나)중 메주고리예가 가장 큰 마을이기 때문에 본당도 이마을 이름을 딴 것이다.
메주고리예는 슬라브어에 기원을 둔 “산과 산사이의 장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지역은 해발 200m에 위치한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곳으로 포도와 담배, 과일을 재배하였다. 이곳에는 약 4,000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가톨릭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
‣ 성모님 발현
발현이 시작된 1981년 본당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1981년 6월24일 이 곳 담배농장에서 일하던 6명의 아이들이 크리니카산 기슭에서 성모 마리아 발현을 목격한 이후 카톡릭 신자들의 순례성지가 되었다.
성모님의 첫 발현이 있은 후 메주고리예 발현 24년동안 전 세계에서 4천만명의 순례자들과 더불어 각국의 많은 추기경과 주교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순례를 왔었다.
(4) 네움
네움(보스니아어: Neum)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바다에 닿아있는 유일한 해안 지대이다. 이 작은 바닷가 마을 때문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아드리아 해로 통하는 약 21km의 좁은 해안선을 확보하여 내륙국에서 벗어났다.
이 마을은 행정 구역상으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 속하는 주인 헤르체고비나네레트바 주에 속하며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는 네움으로 말미암아 크로아티아 본토와 끊어져 있는 월경지이다.
5. 세르비아(베오크라드)
세르비아 베오크라드에 있는 성당
세르비아 여행지: 베오크라드
세르비아는 북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 서쪽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남서쪽으로는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남쪽으로는 마케도니아, 동쪽으로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북쪽으로는 헝가리와 경계를 이룬다.
(1) 베오크라드
도나우 강과 사바 강이 합류되는 곳에 있다. 베오그라드는 칼레메그단 곶에 세워진 고대 요새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1284년 세르비아의 통치를 받았으며 1402년 세르비아의 수도가 되었다.
1440년 이후 오스트리아인들이 3차례 정복한 것을 제외하고는 투르크가 지배했다. 투르크 점령기 동안 베오그라드는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1804년 제1차 세르비아 봉기 이후 1807~13년에 세르비아의 수도가 되었으나, 그후 투르크가 이를 탈환했다. 1867년 다시 세르비아의 수도가 되었고, 1921년 유고슬라비아의 수도가 되었다.
주민은 대부분 세르비아인이며 크로아티아인과 몬테네그로인도 상당수 차지한다. 2006년 옛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완전히 해체되며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의 수도로 남았다.
6. 그리스
그리스 메티오라 바위 위에 있는 수도원
그리스 여행지: ① 아테네 ② 델비 ③ 메티오라 ④ 크레타 ⑤ 산토리니
발칸 반도의 최남단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로 유럽문명의 발상지라고 한다. 수도는 아테네로 화폐는 유로이다. 국민의 98%가 그리스인이며 선진 개발도상국으로 민간기업이 경제를 주도한다. 주요 경제 산업은 농업과 제조업이다. 15세까지의 무상의무교육을 실시하며 모든 공공교육이 무료이다. 국민의 문맹률은 현재 8% 이하로 낮은 편이다
수도는 아테네. 북쪽 국경을 따라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알바니아·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가 있으며 동쪽에 터키가 있다. 반도인 그리스 본토는 남서쪽은 이오니아 해, 남쪽은 지중해, 동쪽은 에게 해가 둘러싸고 있다.
지중해에 이 나라 최대의 섬인 크레타(크리티)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약 266km로 뻗어 있으며 섬과 반도 사이에는 크레타 해가 있다.
(1) 아테네
서구 문명의 발생지이며, 고전 문명의 많은 지적·예술적 사상이 비롯된 곳이다. 오래 전부터 교통 중심지로 철도망을 통해 그리스 곳곳과 연결되며, 그리스의 주요항구인 피라이우스가 있다. 주요산업으로는 관광업·해운업·출판업 및 섬유·도자기·주류의 제조업이 이루어진다.
아테네는 무엇보다도 고대의 신전과 공공건물들로 유명하다. 그중 이 도시의 수호 여신인 아테나를 위해 세운 직사각형의 원주식 신전인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의 도리아 양식 건축물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파르테논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에는 원래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신전이었던 에렉테움과, 아크로폴리스의 벽을 통해 입구가 이어지는 프로필라이아 신전도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기슭 남쪽에는 헤로데스 극장과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고 북서쪽에는 고대 장터였던 아고라가 있다. 아고라 부근에서 발굴된 거리들과 아크로폴리스 북쪽 사면의 화려한 플라카 지구에 고대 아테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2) 델피 (Delphi)
델피는 그리스의 포키스(Phocis) 협곡에 있는 파르나소스 산의 남서쪽 산자락에 자리잡은 고대 그리스의 지명이자 도시를 말한다. 델포이는 고전기 그리스 시대 가장 중요한 신탁이었던 델포이의 신탁이 이루어진 곳이자, 땅의 배꼽 움팔로스가 놓여있던 장소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아폴론이 이를 지키던 괴물 여신 피톤(고대 그리스어)을 죽였고 그 이래로 델포이는 아폴론을 숭배하는 주요 성소가 되었다.
델포이는 고대 세계 전체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전 6세기에는 리디아의 왕들이 귀한 선물을 신전에 보내 왔다. 기원전 6세기 아폴로의 신탁을 들을 수 있는 델포이 신전(sanctuary of Delphi)은 그리스와 그 주변 국가들에게도 성소로 여겨졌던 곳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델포이를 ‘세상의 배꼽(navel of the world)’이라는 뜻의 옴팔로스(omphalos)라는 돌을 세웠다. 뛰어난 풍광과 조화를 이룬 성소인 델포이 유적은 진정한 종교의 중심지이자 고대 그리스 세계 통일적 상징이었다.
(3) 메티오라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매달린 바위", "공중에 매달린", "하늘 바로 아래"라는 뜻이다. 그리스에서 아토스 산 다음으로 정교회 큰 수도원이 많이 밀집한 지역이다. 여러 수도원이 자연 사암 바위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위치상 중부 그리스의 핀도스 산맥과 페네이오스 강 근처의 테살리아 평야의 북서쪽 끝이다. 메테오라에는 여섯 수도원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4) 크레타 (Creta)
지중해 동부, 에게 해 남부에 있는 그리스령의 섬이다. 이 곳의 토지는 석회암으로 흰색을 띠는데, 지명은 이탈리아 어로 '하얀 토지'라는 뜻이다. 기원전 2000년 직후 화려한 미노아 문화가 꽃피었으며 기원전 17세기에는 크노소스 왕권 아래 섬 전역이 통일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400년에 그리스 인에 의해 크노소스 궁전은 파괴되고 기원전 66년에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823~961년 이슬람 교도의 지배를 받았으며,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베네치아에 속하게 되면서 칸디아라고 불리었다. 17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었으며, 1913년 그리스령으로 복귀하였다. 포도, 올리브, 감귤류가 주로 생산된다.
(5) 산토리니(Santorini Island)
산토리니는 지중해에 큰 섬이었는데 기원전 1500년경 화산활동으로 폭발이 일어나면서 섬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둥근 형태의 칼데라(Caldera) 호로 남게 된 것이다. 이때 발생한 거대한 화산재는 주변의 크레타 문명을 파괴시켰다. 섬은 사라지고 남은 흔적은 섬 외곽과 가운데 봉우리 일부만 남았다. 남은 흔적은 암벽지대를 이루는 섬이 되었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바닷가에 떠있는 각각의 섬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7. 이탈리아
이탈리아 로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이탈리아 여행지: ① 로마, ② 나풀리,
<아말피 코스트> ③ 비코 에쿠엔세(vico equense)⟶ ④ 쏘렌토⟶ ⑤ 포지타노⟶
⑥ 아말피⟶ ⑦ 살레르노⟶ ⑧ 카프리섬⟶ ⑨ 시칠리아섬
유럽 중남부에 있는 나라로, 5세기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국토가 분열되었다가 1861년 3월 17일 당시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북동부와 교황이 지배하던 로마를 제외하고 통일되어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되었고 1870년 완전한 통일을 이루었다.
지중해 중앙부, 북서에서 남동으로 약 1200km에 걸쳐 장화 모양을 한 반도와 시칠리아·사르데냐 두 섬으로 구성된다. 북쪽은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스위스·오스트리아와 접하며, 동쪽은 아드리아해(海), 서쪽은 티레니아해에 면한다.
이탈리아 반도는 발칸·이베리아 반도와 함께 남유럽의 3대 반도의 하나로서 동(東)지중해와 서(西)지중해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자연·문화면에서 두 반도와는 달리 순수한 유럽형을 이루고 동시에 지중해 지역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낸다.
(1) 로마
국가의 수호신으로서 로마 여신에 대한 본격적인 숭배가 시작된 것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 여신을 통해 로마의 국가 이념에 종교적 신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로마(이탈리아어: Roma)는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라치오 주의 주도로, 테베레 강 연안에 있다. 로마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서울시의 2배정도이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다. 원래는 로마의 일부였으나 교황령으로써 독립한 바티칸 시국이 자리잡고 있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나라이지만 역사·종교·문화적으로 이탈리아, 특히 로마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지역은 거리가 좁고 대부분이 테베레 강가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로마의 과거의 영광의 흔적인 기념 석조물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있다.
<로마의 관광지>
① 라테라노 광장(Piazza Laterano)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인상적인 광장
라테라노 성당 뒤를 돌아 큰 오벨리스크가 보이는 곳이 라테라노 광장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기원후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가 가져온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 역시 다른 오벨리스크처럼 치르코 마시모(진실의 입 성당 뒤편)에서 발견되었는데 1587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오벨리스크는 로마에 있는 총 14개의 오벨리스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자그마치 기원전 15세기 때의 것으로 고대 이집트의 수도 테베의 암몬 신전 앞에 있던 것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상형문자가 적혀 있는 진품이다. 이 오벨리스크와 아울러 중요한 오벨리스크가 포폴로 광장에 있다.
②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i Campidoglio) -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아름다운 광장
포로 로마노를 둘러본 뒤 계단을 올라가면 캄피돌리오 광장과 연결된다. 베네치아 광장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왼쪽으로 끼고 연결이 되기도 한다.
캄피돌리오 언덕을 올라가는 계단은 경사도가 상당히 완만하다. 과거 이곳은 정치의 중심지였고 그러다 보니 많은 외국 사절들이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바티칸이 아니라 이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올라왔다. 따라서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완만한 경사가 필요했다. 이 경사진 완만한 계단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이고 계단 양쪽으로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사자상이 있다.
언덕을 오르자마자 말을 타고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상이 있다. 진품은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있다. 이 기마상은 약 2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라테란 광장에 있었던 것을 미켈란젤로가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면서 1538년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분수대가 있다. 이 분수대는 신문고 구실을 한 곳이다. 분수대에 누워 있는 신은 강의 신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억울한 일이나 알리고 싶은 일을 이곳에 말을 하든지, 적어 놓고 갔다고 한다. 이 캄피돌리오 언덕에 각종 신전들이 즐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분수대가 있는 건물은 세나토리오 궁으로 1143년 교황에 반기를 든 원로원들의 건물이었는데 현재는 로마 시장의 집무실이며 들어갈 수는 없다.
③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 로마인들의 삶의 중심지, 로마인의 광장
포로 로마노는 ‘로마인의 광장’이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로마인들이 모여 생활하고 살던 중심이며 계속 발굴이 되고 있는 곳으로 사법, 정치, 종교 등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이다. 원로원, 로물루스 신전, 2개의 개선문 등 과거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고, 기둥이나 초석만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이곳에서는 원로원, 에트루리아 왕에게 대항한 로마 반역을 추모하기 위한 사원, 로마의 중심부로 쓰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 외 많은 건물들의 잔해가 있다.
포로(Foro)라는 말은 ‘포럼(Forum)’, 즉 ‘아고라’와 같은 공공장소를 지칭한다. 주변으로 고대 로마의 중요한 건물들이 있었으나 4세기 말에 서고트 족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었다.
④ 판테온 -모든 신을 위한 신전에서 유일신을 위한 성전으로
판테온는 로마제국 전성기 건립되었고, 천체와 우주의 상징하며, 신전 건축의 원전이 되었다.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북서쪽을 바라보면 로마의 지붕들 사이로 바로크 시대에 세워진 성당들의 쿠폴라가 수평선을 뚫고 나오고 있다.
이곳이 바로 로마의 평지인 마르스 들판 지역으로, 고대 로마인들이 언덕에서 로마 시가지를 내려다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물은 단연 판테온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판테온의 형태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판테온의 둥근 지붕이 온통 금박으로 덮여 있어 마치 태양처럼 눈부신 광채를 발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빈 공간으로 이루어진 판테온의 내부가 특징적이다. 내부 공간’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 ‘비어 있는 공간’ 안에서는 눈앞의 공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등 뒤의 공간도 느껴진다. 판테온은 역사적인 인물의 묘소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왕을 비롯해 1520년 37세의 나이로 요절한 르네상스 천재 예술가 라파엘로의 묘소도 있다.
⑤ 콜로세움 (Colosseum in Rome, Italia )- 스펙터클의 전당
영원의 도시 로마의 시민들은 콜로세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콜로세움이 서 있는 한 로마도 서 있으리라. 콜로세움이 무너지는 날에는 로마도 멸망하리라. 로마가 멸망하는 날에는 이 세상도 멸망하리라”
로마를 찾은 많은 관광객들이 갖는 콜로세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거대한 원형경기장이 검투사들을 동원한 살육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⑥ 바티칸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안에는 바티칸이라는 또 하나의 국가가 있다. 바티칸 시(Vatican City) 또는 교황청(Holy See)이라고도 하는 바티칸 시티는 전체 면적이 0.44km2로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다.
이곳은 전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이라는 성스러운 의미가 있다. 이외에도 미켈란젤로 불굴의 명작인 〈천지창조〉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 책에서만 보던 홀륭한 예술 작품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이탈리아 미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바티칸 시티는 이탈리아 로마 시내 테베레 강 서안에 자리잡고 있다. 한 번에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 베드로 광장 앞에는 도로 위에 흰색 선이 그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와 바티칸을 구분 짓는 국경이다.
⑦ 산탄젤로 성 (Castel Sant’Angelo)- 전망이 아름다운 천사의 성
산탄젤로 성은 135년 하드리아누스 대제가 자신의 묘로 건축한 것으로 이후 역대 황제의 묘가 되었다. 이 성이 ‘천사의 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590년 페스트가 만연했을 때,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이 성 위에 병을 퇴치하려는 검을 든 천사 미카엘이 나타난 환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 얼마 안 지나 페스트가 사라졌기 때문에 성 위에 미카엘상을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 세웠던 미카엘상은 벼락을 맞아 소실되고, 다시 피뢰침과 함께 미카엘상을 세워 놓았다.
중세 시대에는 성채이자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교황의 은신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성의 내부는 산탄젤로 성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으며, 성 내부의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성 앞에는 산탄젤로 다리(ponte Sant’Angelo)가 있다. 이 다리에는 베르니니가 만든 천사상이 세워져 있는데, 물론 지금 세워져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원본은 거의 소실되었지만, 남아 있는 오리지널 원본 두 개는 산탄드레아 델 프라데 성당에서 만날 수 있다.
⑧ 바티칸 박물관 (Vatican Museum , Musei Vaticani)- 세계 최대의 박물관
관광객들이 바티칸 시국을 방문하는 목적이 대부분 바티칸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바티칸 박물관은 영국의 영국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고대 로마 시대의 유물과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걸작들은 최고로 손꼽히고 있는 곳이다.
바티칸 박물관은 1506년 산타 마리아 마조레 궁전 근처의 포도밭에서 라오쿤상이 발견되고,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이 조각상을 전시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또한 율리우스 2세는 바티칸에 당대 최고의 화가와 조각가들을 불러들여 바티칸 궁전의 건축과 장식을 맡겼는데, 이 또한 바티칸이 지금의 최고의 박물관으로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
⑨ 산 피에트로 대성당 (Basilica Papale di San Pietro)
- 성 베드로의 묘 위에 세워진 가톨릭의 총본산
로마 가톨릭의 총본산인 이 성당은, 베드로의 무덤 자리에 세워진 성당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한 성인으로,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이었으며, 기독교 초대 주교이자, 제1대 교황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하늘나라 열쇠를 주며 그에게 반석이라는 의미인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고, 기독교의 반석이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를 상징하는 것이 열쇠다.
349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으로 순교한 베드로가 묻혀 있던 자리에 거대한 바실리카가 세워지게 되었으며, 1506년 율리우스 2세 교황에 의해 지금의 대성당이 지어지게 되었다. 대성당 공사는 120년 동안 지속되었고, 당대 최고의 천재들이 모여 만들었다.
처음 착공은 브라만테가 했고, 이후 상갈로,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등이 합류해 당대 최고의 성당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성당의 길이는 187m이고, 내부에는 11개의 예배당이 있다. 성당에 들어가서 바로 오른쪽 복도에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걸작 〈피에타〉가 있고, 성당 중앙에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돔 아래에 베르니니가 만든 발다키노가 있는데, 이 아래에는 성 베드로의 묘가 있다.
⑩ 산 피에트로 광장 (Piazza San Pietro) -산 피에트로 대성당 앞 광장
알렉산드로 7세 교황의 명령에 따라 바로크 시대의 거장 조각가인 베르니니가 1656년부터 12년에 걸쳐 만든 광장이다. 이 광장에는 수많은 원기둥이 광장을 빙 둘러싼 반원형의 회랑을 따라 늘어서 있다. 원기둥은 4열로 겹쳐져 총 284개가 늘어서 있는데, 오벨리스크와 분수 사이의 흰 대리석 보도블록 위에서 회랑을 바라보면, 4열로 된 기둥이 신기하게도 한 개로 겹쳐서 보인다. 기둥 위에는 높이 3m의 140명의 성인의 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광장의 중앙에는 40년에 칼리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으며,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바라보고 오른쪽 건물에는 교황의 서재가 있어 교황이 축복을 내리고 메시지를 전할 때 이곳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쿠폴라(돔) 위에 오르면 산 피에트로 광장을 더욱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마치 그리스도가 양 팔을 벌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며, 산타젤로 성으로 향하는 길과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모습과 합쳐서 성 베드로를 상징하는 열쇠 모양을 하고 있기도 하다.
< 로마 4대 성당 >
①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은 ‘산 피에트로 인 바타카노 대성당’이라고도 하며, 바티칸 시국에 있는 대성당으로 ‘바티칸 대성당(Basilica Vaticana)’이라고도 부른다.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거대한 교회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기 67년에 순교한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립했다.
건축양식은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으로 되어있다. 대성당의 건설은 1506년 4월 18일에 시작되어 1626년에 완료되었다. 공사기간이 약 120년이 된다. 건축 내역에서 길이 220m, 너비150m, 최고 높이138m, 돔 지름 외경이 42m 내경이 41.5m이다. 성당은 테베레 강 방향이며, 로마의 지평선을 압도하는 전통적인 돔 양식이다. 또한 바티칸 영토를 포함하여 2.3헥타르(5.7에이커)의 넓이를 가졌다. 그리고 최대 6만 명 이상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 내부에는 500개에 달하는 기둥과 400개가 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따로 분리된 44개의 제대와 10개의 돔이 있으며, 1300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종교성과 역사성, 예술성 때문에 세계적인 순례 장소로 유명하다. 르네상스부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계의 거장들이 주임 건축가 직책을 계승하면서 120년에 걸쳐 지은 건축 작품으로서 당대의 가장 거대한 건물로 여겨진다. 로마의 모든 초창기 성당들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 역시 입구가 동쪽에 있으며 후진(後陣)은 서쪽 끝에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성 밖의 성 바오르 대성당(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과 더불어 로마의 주요 4대 성전 중 하나이다. 이곳은 바티칸 시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며, 대성당의 돔은 로마식 지평선의 특징을 갖고 있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대성당의 제대 아래에 묻혀 있는 까닭에 옛날부터 교황이 선종하면 그 시신을 제대 아래에 안치해오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중에 로마의 최초의 교황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낡은 콘스탄티노 대성당을 헐고 새로 지은 지금의 대성당이다. 이곳 대성당은 위치가 바티칸 시국 벽 안에 있고 교황의 주거지와 인접해 있을뿐더러, 교황이 집전하는 대부분 의식이 열리는 장소가 이곳이기 때문에 교황의 가장 중요한 성당으로 여겨진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라틴어로는 “페트루스(Petrus)”이며 그리스어로는 “페트로스(Petros)”인데, 그리스어로 “돌” 또는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petra)”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마태오 복음서 16장 18절에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한 말에서 기인한 말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성 베드로는 머리를 아래로 두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역 십자가형의 순교로 전해진다.
②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은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 또는 ‘라테라노 대성당’이라고도 한다.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4세기 초 로마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으로 지어졌다. 이 성당이 로마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이유는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4년 이곳에서 기독교를 처음 공인했으며, 당시 이 성당은 로마 교황에게 기증되면서 최초의 교황청이 되었다.
1309년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기 전까지 이 근처의 라테라노 궁전이 교황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이 성당이 교황의 본거지였다. 내부에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흉상이 있으며, 흉상 왼쪽에는 성 베드로가 미사를 하던 테이블이 있고, 제단 밑에는 마르티노 7세 교황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보로미니가 설계한 열두 제자들의 대리석상도 있다. 성당의 입구로 나와 정면을 바라보면 성당을 향하고 있는 성 프란체스코 동상을 만나게 된다.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은 로마 교구의 대성당이자 로마교구 교구장인 교황의 좌(座)가 있는 대성당이다. 대성당의 공식 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 대성당”이다.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대접받고 있다.
정면 외관에는 ‘구세주 그리스도(Christo Salvatore)’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모든 총대주교좌 성당을 대표해서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 그리스도에게 봉헌되었다. 교황좌(Cathedra Romana)가 있는 로마 교구 주교좌 성당으로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다른 어떤 성당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조차 예외는 아니다.
대성당은 바티칸 시국 영토 안에 있지 않은데, 대성당이 있는 토지는 이탈리아 공화국의 로마 시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다른 몇몇 건물의 경우처럼 라테란 조약의 체결과 함께 로마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성좌의 자산으로서 특별한 치외법권 상태를 누리고 있다.
대성당 건물은 황실 기병 근위대의 요새인 카스트라 노바 에퀴툼 싱굴라리움의 유적 바로 위에 세워져 있다. 요새는 서기 19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설립하였으나,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막센티우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나자 근위대는 폐지되고 요새는 헐려 버렸다. 요새의 기본적인 유적은 대성당 중랑(中廊) 바로 아래쪽에 일직선으로 그대로 있다.
라테라노 궁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막센티우스의 누이인 파우스타와 재혼할 때 황제의 수중에 떨어졌다. 당시 ‘파우스타의 집(Domus Faustae)’로서 알려진 라테라노 궁전은 궁극적으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로마 주교에게 넘어갔다. 대성당을 헌납받은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교황 멜키아데의 재위 중 313년 도나투스파에 대항하고자 주교회의를 소집하여 그들을 이단으로 선언한 시기였을 것으로 믿고 있다.
궁전에 딸린 대성당은 개축과 확장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로마 주교로서의 교황좌가 있는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대성당의 으뜸 직을 반영하고자 중앙 입구에는 라틴어로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이자 머리인 지극히 거룩한 라테라노 성당(Sacrosancta Lateranensis ecclesia omnium urbis et orbis ecclesiarum mater et caput)’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은 두 번에 걸쳐 다시 봉헌되었다. 10세기에 교황 세르지오 3세는 대성당의 세례당을 새로이 축성하면서 이곳을 성 요한 세례자에게 봉헌하였다. 12세기에 교황 루치오 2세는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을 다시 성 요한 복음사가에게 봉헌하였다.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는 주교좌 성당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간주하지만, 역시 최고의 수호자는 대성당의 입구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구세주 그리스도이다. 때때로 대성당은 공식적인 이름인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 대성당’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대성당은 두 요한 성인의 영광을 기리는 가장 중요한 성당이 되었지만, 공동으로 공경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중에 라테라노 궁전에는 두 요한 성인에 대한 신심으로서 봉헌된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설립되어 대성당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하였다.
교황 멜키아테 시대부터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5세 시대에 교황청이 1309년 아비뇽으로 옮겨져 아비뇽이 프랑스 영토 안에 둘러싸인 교황의 영지가 될 때까지 모든 교황은 라테라노 궁전에 거주하였다. 아비뇽 유수 동안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은 그대로 방치되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307년과 이후 1361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화재로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은 크게 손상되었다. 양쪽의 사례에서 아비뇽에 있던 교황들은 재건과 유지비용 명목으로 로마에 있는 주교들에게 자금을 전달하였다. 그러한 조처가 내려졌음에도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은 과거의 화려함을 상실하였다.
아비뇽 교황 시대를 완전히 끝내고 교황이 로마로 돌아오고서,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은 그동안 축적된 손상을 고려해볼 때, 교황이 거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교황들은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을, 나중에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을 임시 관저로 삼아 거주하였다. 최종적으로는 바티칸에 궁전을 건설하여 교황청을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오늘날까지 교황은 바티칸에 거주하고 있다. 라테라노 궁전은 또한 5차례에 걸쳐 세계 공의회인 라테란 공의회가 개최된 장소이기도 하다.
③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일명 ‘성모 마리아 대성당’, ‘성모 대성당’ 또는 ‘성모 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고도 부른다. 이 대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로마 최고(最古)의 성당이다. 위치는 테르미니 역에서 도보 5분에 있다.
‘눈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에는 눈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325년 교황 리베리우스의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눈이 내리는 곳에 성당을 건축하라고 계시를 내렸는데, 8월의 한여름이었음에도 실제로 에스퀼리노 언덕 부근에 눈이 내렸다고 한다. 이에 교황 리베리우스는 당장 그곳에 성당을 지으라고 명령을 했는데, 실제로 성당이 건축을 시작한 때는 431년이다.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로마의 4대 성당 중 하나다.
성당의 화려한 정면부는 1743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며, 성당 위의 종탑은 중세를 통틀어 가장 높은 75m의 높이를 자랑한다. 성당 내부에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예배당이 있어면, 천장에 도금으로 된 격자무늬 장식은 르네상스의 건축가 줄리아노(Giuliano)가 만든 것이다. 이 격자무늬 장식의 금은 바로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유럽으로 처음 가져온 금이며 그 금을 교황 알렉산드로 6세에게 기증한 것으로 이를 녹여 금으로 장식했다.
내부에 들어서면 벽면에 36개의 화려한 모자이크가 있는데, 이는 5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제작된 모세, 이삭, 야곱, 아브라함의 에피소드와 성모 마리아 대관식을 묘사한 장대한 모자이크가 있다. 또한 천장과 벽면에는 성모 마리아가 그려져 있다.
내부에 총 36개의 기둥들은 이오니아식으로 전부 그리스에서 직접 공수해 온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기둥 위에 있는 모자이크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그린 것이다. 성당의 뒤쪽, 에스퀼리노 광장(Esquilino)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식스투스 5세가 1587년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성당 앞 분수대에 있는 부조물은 포로 로마노에 있는 막센티우스 공회당에 있는 기둥을 1600년 초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1348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말미암아 손상을 입고 여러 번에 걸쳐 추가적인 건설 작업을 거쳤음에도 원래의 구조를 보존한 로마에서 유일한 대성당이다. 대성당의 이름인 ‘Maggiore’(마조레)는 ‘위대함’과 ‘주요한’이라는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로마의 성당들 가운데 가장 ‘거대한’ 성당이라는 의미도 있다.
아비뇽 교황 시대를 공식적으로 마감하고 교황좌가 로마로 복귀하고서, 라테라노 궁전의 상태가 악화하였기 때문에 대성당이 교황의 임시 관저가 되었다. 교황의 관저는 나중에 지금의 바티칸 시국에 있는 바티칸 궁전으로 옮겨졌다.
④ 성 밖 성 바오로 대성당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은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이라고도 한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주도하에, 서기 64~67년경 지금의 트라 폰타네 지역에서 처형된 바오로의 유해를 비밀리에 수습해 매장한 장소위에 세워졌다. 386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치세에 중랑(中廊)과 더불어 네 개의 측랑(側廊)과 익랑(翼廊)이 추가되면서 대성당을 좀 더 크고 아름다운 대성당이 지어졌다.
5세기까지 이곳 대성당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규모가 더 컸다.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은 5세기 오스티아의 순교자들이었던 성 타우리노와 성 헤르쿨라노에게도 봉헌되었으며, ‘세분주님 대성당’이라는 뜻의 ‘트리움 도미노룸 대성당(basilica trium Dominorum)’이라고 불렸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 치세에 대성당은 다시 광범위하게 수정되었다. 성 바오로의 무덤 위를 일직선으로 덮은 제대를 한층 높여 치장하였다. 무덤 위에 세워진 제대로 말미암아 성 바오로의 무덤에 접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 기간에 대성당 근처에 성 아리스토 수도원과 성 스테파노 수녀원 등 수도원 두 곳이 생겼다.
기존의 신랑에 네 개의 측랑과 익랑이 추가되고 포로 로마노에서 가져온 원기둥 24개를 포함한 80개의 원기둥을 내부에 세웠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 되었습니다.
성당 내부는 성당 신랑을 이루는 열주랑 위쪽 프리즈(Frieze)에는 초대 교황 베드로부터 교황 프란치스코에 이르는 역대 교황 266명의 원형 모자이크 초상화(Medallion)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현재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그려져 있습니다.
1980년 로마 역사 지구로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대성당은 전세계 10대 성당에 들어간다. 레오 12세는 교황에 즉위하자 곧 바오로 대성당의 재건을 위해 전 세계 교회에 특별 요청을 하였다. 그 당시 이름 있던 건축가 벨리, 폴레티, 베스피냐니, 칼데리니 등이 참여하여 원래 대성당의 설계도대로 복원하였고, 1854년에 교황 비오 9세가 축성하였다.
회랑의 72개의 기둥은 그리스도가 파견한 최초의 72제자와 옛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상징하고,
정면 12개의 기둥은 열두 제자와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 성당 입구에 대칭을 이루는 회랑의 가운데 천장에는 열두제자의 초상화가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다. 정원의 네 그루의 야자수 나무는 4대 복음사가를 상징하며 정원 중앙에는 "이방인의 아버지, 진리의 설교자, 사도 바오로"라고 적힌 받침대 위에 칼과 성서을 든 사도 바오로의 조각상이 있다.
(2) 나풀리
이탈리아 반도의 서해안에 자리잡고 있다. 거대 항구도시이자 지적 활동의 중심지이며, 이탈리아 남부지역의 금융중심지이다. 나폴리 왕국과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의 하나를 끼고 있다.
전통산업으로는 자기제품·직물·강철 생산이 있으며, 신흥 산업으로는 전자공업·정유업·자동차조립공업이 있다. 관광업도 이 지방 경제에서 중요하다. 로마와 이탈리아 남부지역을 연결하는 철도의 중요한 연결지점이다. 항만시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재건되었지만 여객항으로서 차지하던 나폴리의 중요성은 감소되었다.
(3) 아말피 코스트
캄파냐 지역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이 바로 아말피 해안이다. 서쪽 소렌토에서 동쪽 살레르노까지 이어지는 해안선을 따라 해안 도로가 뻗어 있다. 포시타노, 아말피, 라벨로 같은 작은 마을이 이어진다. 아말피 해안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① 비코 에쿠엔세(vico equense : 비코 에퀜세)
주도(州都)이자 현 중심지인 나폴리(Napoli)로부터 남동쪽으로 25.1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평균 고도 90m에 위치하며, 지중해성 기후에 속한다. 소렌토 반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나폴리 만을 면하고 있다.
내륙 방향으로는 파이토 산(Monte Faito)에 둘러싸여 있다. 주요 건축물로 14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Chiesa della Santissima Annunziata)이 있다.
② 쏘렌토(Sorrento)- 아름다운 해안이 있는 작은 마을
나폴리 민요 ‘돌아오라 소렌토로’ 덕분에 소렌토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지중해 바닷가의 절벽 위에 세워진 소렌토는 아말피 해안 도시를 여행하는 데 거점이 되는 도시이며, 카프리 섬으로 가는 페리도 자주 있는 편이다.
소렌토는 아름다운 해안 전망을 볼 수 있어서 사랑을 받고 있는데, 특히 세계3대 미항이라고 할 수 있는 나폴리의 항구를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빌라 코무날레(Villa Comunale)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다.
‘돌아오라 소렌토’ 노래 가사
아름다운 저 바다여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 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고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벗이여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 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③ 포지타노
포지타노(Positano)는 이탈리아 캄파니아 주(Regione Campania) 살레르노 현(Provincia di Salerno)에 위치한 인구 약 4,000명의 코무네(Comune, 기초 자치 단체)로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아말피 해안의 멋진 바닷가 전망을 가진 그림 같은 마을이다. 아말피 해안의 서쪽에 해당한다. 해변가로 이어지는 언덕위에 군락들이 자리하고 있다.
④ 아말피 (Amalfi)- 레몬 향기 가득한 해안 도시
아말피는 원래 자체 공화국이었는데 로마 제국에 의해 편입되었다. 이 아말피를 통해 제일 처음으로 외국의 카펫, 커피, 종이 등이 들어왔다.
두오모는 아말피에서는 가장 유명한 건물이다. 9세기경에 건축되어 계속 증개축되었다. 바로 두오모 옆에 있는 종탑은 이탈리아 내에서도 정말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완전히 아랍 스타일의 건축물로 12세기에 만들어졌다. 아말피는 구시가지와 산 위의 마을 라벨로(Ravello) 마을이 있다.
라벨로 (Ravello)는 아말피 윗쪽 350m 고도에 위치하며, 주요 건축물로 산타 마리아 아 그라딜로 성당(Chiesa di Santa Maria a Gradillo)과 빌라 루폴로(Villa Rufolo) 등이 있다. 그 외 유명한 랜드마크로 브라질의 건축가인 오스카르 니에메예르(Oscar Niemeyer)가 2010년 건축한 오디토리움이 있다. 관광객들은 모두 아말피와 포지타노에 있기에 라벨로 마을은 적막감이 흐른다.
아름다운 루폴로 정원으로 들어가 눈앞에 펼쳐지는 지중해의 경치는 아말피 코스트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입장료5유로) 이곳에서는 6월14일부터 2달 간 바그너 음악회가 진행된다.
⑤ 살레르노(Salerno)
살레르노만(灣)을 바라보는 항구도시로 나폴리 남동쪽 약 50km 지점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에는 영국·미국 등 연합군의 상륙지점이 되었으며, 독일군과의 격전이 있었던 곳이다. 시의 남쪽에는 캄파니아 평야가 전개되어 곡물·포도·올리브·과일·야채·잎담배 등의 재배가 이루어지는 외에 방목도 성하다.
(4) 카프리섬 (Capri I.)
이탈리아 나폴리 만(灣) 입구, 소렌토 반도 앞바다에 있는 섬. 지명은 라틴 어로 '야생의 숫산양'이라는 뜻이다. 섬 전체가 화산에 의하여 만들어진 용암으로 덮여 있으며, 온난한 기후와 풍경이 아름다운 관광지로 유명하다.
특히 로마 시대부터 알려진 ‘푸른 동굴’은 길이 53m, 너비 30m, 높이 15m의 해식 동굴인데 햇빛이 바닷물을 통해서 동굴 안을 푸른 빛으로 채운다. 또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한 흔적이 있으며 로마 시대에 있었던 등대의 터도 남아 있다.
(5) 시칠리아섬
이탈리아 남서부에 있는 지중해 최대의 섬으로 영어로는 시실리섬(Sicily I.)이라고 한다. 주변의 작은 섬과 함께 이탈리아의 한 주(州)를 형성하며, 주도(州都)는 팔레르모이다. 북동단은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본토 남단에 접한다.
주도는 팔레르모이다. 섬의 동쪽에는 이탈리아 최고봉인 에트나 화산(3,323m)이 있다. 섬의 형태가 삼각형이기 때문에 그리스 인은 트리나크리아(Trinacria)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이곳의 선주민인 시쿠리(Siculia) 인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기원전 8세기경 페니키아 인과 그리스 인의 지배를 거쳐 기원전 3세기에는 로마에 정복되었다.
6세기에는 비잔틴, 11세기에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고, 1130년에 노르만 인이 침입하여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13세기 말에는 에스파냐의 아라곤 가(家)가, 18세기에는 부르봉 가(家)가 지배하였으며, 1860년 가리발디의 원정으로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정부가 시칠리아의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추진하여 토지 개량, 공장 유치, 도로 정비 등을 시행함으로써 젤라에 석유 화학 단지를, 팔레르모와 카타니아에는 공장 지대를 형성하였다. 주변 해역은 천해어·다랑어 등의 어업 자원이 풍부하다
8.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순례길을 마치고 스페인 산티아고 데 꼼뽀스떨라 성당에 도착
① 생장 피드포르⟶ ② 론세바예스⟶ ③ 수비리⟶ ④ 팜플로나 ⟶ ⑤까스트로헤리스⟶
⑥ 레디고스⟶ ⑦ 사아군⟶ ⑧ 사리아 ⟶ ⑨ 포르토 마린⟶ ⑩ 팔라스테레이⟶
⑪ 아르수아 ⟶ ⑫ 아르카도피노⟶ ⑬ 산티아고⟶ ⑭ 피스테라
예수의 열두 제자였던 야곱(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약 800km에 이르는 길이다. 산티아고(Santiago)는 야곱(야고보)을 칭하는 스페인식 이름이며, 영어로 세인트 제임스(Saint James)라고 한다.
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가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성스로운 도시로 선포한 바 있다. 1987년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가 출간된 이후 더욱 유명세를 탔으며, 또한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되자 유럽과 전 세계로부터의 성지순례가 더욱 활발해졌다. 순례길은 11∼15세기에 가장 번성하였으며,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급속히 쇠퇴하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처음 출발지인 프랑스 생장 피드포르에 도착하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순례자와 함께 정해진 순례길을 가면 최종 순례지인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다. 그런데 출발지인 생장 피에드포르에 오는 방법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들어오는 방법과 프랑스 파리에서 들어오는 방법이 있는데, 보통 프랑스 파리를 통하는 길을 많이 택하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 방법의 경우는 마드리드로 입국 후에 스페인 팜플로냐 마을까지 기차 혹은 버스로 이동하고 다시 버스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생장 피에드포르로 가는 방법이다.
파리로 입국할 경우, 파리에서 떼제배를 타고 바욘으로 왔다가 바욘에서 기차를 타고 생장 피에드포르로 온다. 도착 후에 숙소를 정하고 순례자 사무실에서 끄레덴시알을 발급는 등 일정한 절차를 밟고 출발하며 된다.
만약 배낭 짐이 많을 경우에 일정한 곳 다음 순례길까지 짐을 탁송하는 방법도 있다. 순례길에 소요되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대체로 하루 20km에서 30km을 잡았을 때 25일부터 40일 정도 소요된다.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에서는 37일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나의 이번 순례길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palermo)공항에서 로마로 비행기로 이동한 후 로마에서 관광 후,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기차로 연결하였다. 그곳 마르세이유와 조금 떨어진 이프성을 관광한 후에 바욘(bayonne)역에서 생장 피에드포르에 가서 순례길을 처음 시발점부터 시작하였다.
(1) 생장 피드포르
(2) 론세바예스
(3) 수비리
(4) 팜플로나
(5) 가스트로헤리스
(6) 레디고스
(7) 사아군
(8) 사리아
(9) 포르토 마린
(10) 팔라스테레이
(11) 아르수아
(12) 아르카도피노
(13)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
(14) 피스테라
9. 프랑스
프랑스 파리 에펠탑
프랑스 여행지: ① 마르세이유 ② 생장피드포르 ③ 파리 ④ 몽생미셀 ⑤ 오베르 쉬르 우아즈 ⑥ 지베르니
수도는 파리(Paris)이다. 행정구역상 파리시의 인구는 약 220만 명이나, 위성도시를 포함하면 1,100만명이 된다. 면적은 64만 3801㎢로 한반도의 2.5배이고 유럽연합(EU)의 5분의 1의 넓이이다. 인구 약 6655만명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인권선언’을 통해 구체제를 무너뜨렸다. 혁명 후 나폴레옹 통치, 1, 2차 세계대전까지 다양한 정치적 변화를 겪었으며 1944년에 의회민주주의를 회복하였다. 육지의 반 이상이 농업에 적당하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간직한 넓은 삼림지역이 영토의 1/4가량을 덮고 있다.
인종은 북부·중부 유럽에서 이주해 온 켈트(Gaule족)·게르만·노르만계가 대다수이고 소수의 라틴계가 혼재하며, 피레네산맥 북부의 바스크족 50여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다. 종교는 가톨릭교(81.4%)·이슬람교(6.89%)·신교(1.64%)·유태교(1.29%)·불교(0.68%)·그리스정교(0.34%) 등이다.
(1) 마르세이유 (Marseille)
지중해에 면해 있는 프랑스 제1의 항구도시로 론 강 하구 부근에 있다. 마르세유는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마르세유는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엔 온난다습하고 여름엔 건조하다. 12,1,2월은 가장 추운 달로 평균기온은 낮 12°C이다. 7,8월은 가장 더운 달로 평균기온은 낮 30°C이다. 지중해 연안의 유럽, 북부 아프리카, 근동, 중동 지역, 인도양 및 태평양 연안의 아시아 지역에서 북해 연안의 서부 유럽으로 가는 물자 유통의 적환점이다.
마르세유는 자유도시의 성격이 강했는데 BC 1세기 로마 군대에게 점령당한 후에도 그런 성격이 유지되었다. 그후 여러 세기에 걸친 침체기 이후 10~14세기에는 프로방스의 자작 가문 지배하에 들어가 독립성이 강한 도시로 성장했다. 15세기 프로방스가 프랑스 왕국에 통합된 이후에도 마르세유는 중앙과 분리된 행정체제를 유지했다.
(2) 생장 피에드포르 (St Jean Pied de Port)
생장 피에드포르는 스페인 국경으로부터 약 8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니베강(Nive)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바스크 지역 곳곳으로 도로가 뻗어있는 교통 허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생장 피에드포르는 피레네를 건너 론세스바예스로 향하기 직전의 마지막 구간으로, 전통적으로 산띠아고 가는 길을 따라는 순례자들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마을입니다.
(3) 파리
프랑스의 수도이며, 유럽 최대의 대도시권 가운데 하나다. 이 도시는 영국 해협에 면한 센 강 어귀로부터 내륙쪽으로 약 375km 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의 파리는 이 시테 섬으로부터 센 강의 양쪽 기슭 훨씬 너머까지 확대되었다.
(4) 몽생미셀
몽생미셸은 렌의 북쪽으로 노르망디 해안에 있으며,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사이에 있는 몽생미셸 만에 화강암 노두로 날카롭게 솟아 있다. 거대한 모래 둑으로 둘러싸여 있다가 만조일 때만 섬이 된다.
원래 몽통브라고 불렸던 몽생미셸은 아브랑슈의 주교인 성 오베르가 이곳에서 대천사 성 미카엘의 모습을 보고 소예배당을 세웠던 8세기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주요순례지가 되었으며 966년에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대수도원이 세워졌다.
나폴레옹 치하에서 감옥이 된 이래 계속 감옥으로 쓰였으며, 1863년 사적기념물로 분류되어 복원되었다. 섬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솟아 있는 수도원 교회는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다. 화려한 고딕양식인 라메르베유 수도원의 외벽은 군사요새가 지니는 강렬함을 지니고 있다
(5) 오베르 쉬르 우아즈 ( Auvers Sur Oise )
생레미의 생 폴 정신병원에서 힘든 치료 시기를 보낸 후 반 고흐는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이사를 온다. 그리고 침대와 작은 의자가 있는 조그마한 다락방에서 지내며 매일 그림을 그리러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반 고흐는 70여 일(1890년 5월 21일~1890년 7월 29일) 짧게 머문 이곳에서 70점이 넘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리고 방랑자처럼 수많은 도시를 떠돌던 그는 결국 평화로운 마을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파리로부터 이곳에 도착한 방문객들은 먼저 기차역과 가까운 공원에 들러 깡마른 모습의 반 고흐 동상을 만난다. 삶에 찌든 병약하고 초췌한 모습이지만 이젤을 어깨에 둘러메고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모습이 예전 그의 일상을 말해주는 것 같다.
반 고흐 공원에서 조금 걸어가면 반가운 건물과 만나게 되는데 반 고흐의 그림의 배경이 된 시청이다. 신기하게도 마을과 건물 등은 반 고흐가 그림으로 표현한 1800년대 후반의 풍경에서 그다지 많이 비껴 있지 않다. 반 고흐의 그림의 배경이 된 곳 앞에는 반드시 그림 표지판과 함께 작품 설명이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작품집을 한 장 한 장 펼치며 걷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해준다.
지금은 반 고흐 기념관이 된 라부 여인숙(Maison De Van Gogh)은 반 고흐가 짧게 머물다가 생을 마감한 곳으로 2층에는 그의 고단했던 하루를 품어주던 작은 방이 있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가늘게 비치는 작고 초라한 반 고흐의 방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권총 자살을 시도한 후 바로 죽지도 못하고 이틀 후에야 그 고통을 끝낼 수 있었던, 비극적인 삶을 산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연민이 간다.
기념관을 나와 반 고흐의 동선을 따라가다 만나는 반가운 건물은 유명한 반 고흐의 작품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 속 주인공 교회다. 교회의 전체적인 모양새나 탑 쪽의 시계, 교회 옆의 나무 등이 그림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리고 너무나도 사랑하고 의지했던 동생 테오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반 고호를 만나러 공동묘지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파리 생 라자르역에서 기차를 타고 퐁투아즈(Pontoise)역에서 하차. 페르상 보몽(Persan-Beaumon)행 기차를 갈아타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내린다. 퐁투아즈역에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행 기차 플랫폼을 안내하는 화살표가 있다.
(6) 지베르니(Giverny)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베르니는, 르누아르, 세잔 등과 함께 19세기의 새로운 예술 운동인 인상주의를 탄생시킨 클로드 모네(Claude Monet)가 거주하며 작업한 곳이라 유명해진 마을이다. 모네는 1883년 43세 때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환경을 찾아 센 강변을 전전하다가 결국 이곳을 찾았고, 작품 활동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지베르니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줄곧 이곳에서 창작 활동을 하다가 1926년에 86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집과 정원은 모네가 살았던 그때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서, 마치 모네가 살던 시절로 돌아가서 그림 속의 풍경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을 준다.
지베르니 가는 방법은 생 라자르 역에서 국철로 루앙(Rouen) 또는 르 아브르(Le Havre)행을 타고 45분 정도 이동하여 베르농(Vernon) 역에서 하차한다. 베르농 역에서 모네의 집까지는 버스로 약 15분 소요된다.
10. 영국
영국 스톤헨지 앞에서
영국 여행지: ① 런던, ② 스톤헨지:stonehenge, ③ 바스-bath ymca숙소,
④ stow-on-the wold ⑤ bourton-on-the-water-작은 베니스 ⑥ burford
⑦ straford-upon-avon<세스피어 생가>) ⑧ conwy 콘위성(서쪽 끝),
⑨ manchester ⑩ york- 요크캠프장 cabin 2일
영국은 웨일스가 14세기에, 스코틀랜드가 18세기에 잉글랜드에 통합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생겼다. 그 후 아일랜드로부터 분리된 북아일랜드가 합쳐져 현재의 연합왕국이 확립된 것은 1921년의 일이다. 그래서 잉글랜드, 웨일스(Wales),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의 면적은 24만 3610㎢, 인구는 약 6400만명이며, 인구의 민족적 구분은 주로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앵글로색슨족(Anglo-Saxon族)과 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에 사는 켈트족(Celt族)으로 대별된다. 공용어는 표준영어(King’s English)이나 켈트계의 겔릭어(Gaelic語)·웨일스어·콘월어(Cornish)도 사용된다.
종교는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 50%) 외에 가톨릭(11%), 감리교(Methodism)(30%)가 신봉된다. 기후는 멕시코만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북위 50°∼60°의 고위도임에도 따뜻하며 기온의 차도 적다.
(1) 런던
런던은 대도시지만 템스 강과 시내 중심가만 본다면 그리 넓지 않는 유서 깊은 곳이다. 영국의 수도 런던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등을 통틀어 가장 큰 대도시이다. 런던은 잉글랜드 남동부의 템스 강 하구로부터 약 60km 정도 상류에 위치해 있다. 서울 잠실이 강 하구로부터 56Km이니, 런던과 서울이 강 하구로부터 비슷한 위치에 있다.
런던은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다. 런던의 면적은 1,578km로, 서울의 약 2.5배에 달하는 대도시이며 1개의 특별구와 32개의 자치구 등 총 33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2) 스톤헨지(stonehenge)
영국 런던에서 서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솔즈베리 평원에 홀연히 서 있는 거석 유적인 스톤헨지는 높이 4미터, 무게 25~30톤의 거대한 돌을 원형으로 늘어놓은 거석유구(遺構)다. 스톤헨지은 고대 앵글로색슨어로 ‘공중에 매달린 바윗돌’이란 의미이다.
돌기둥들은 그리스 신전의 기둥들처럼 가운데 부분이 불룩하게 되어 있는데 분명 원근법의 영향을 감안하여 밑에서 올려다볼 때 기둥이 직선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스톤헨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고인돌과 같이 거석유물로 분류하지만 그리스 신전과 같이 중앙 집중적인 배치방식으로 공간을 한정했다는 점에서 건축물로도 간주할 수 있다. 스톤헨지는 종교의식 또는 천문 관측 등 여러 설이 있지만, 무엇 때문에 세워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에 싸여 있다. 만들어진 지는 3,000년 이상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3) 바스 (bath)
바스는 로마 인이 개척한 우아한 휴양지이다. 이곳에 좋은 YMCA숙소가 있다. 런던에서 서쪽으로 156 킬로미터와 브리스틀에서 남동쪽으로 21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바스는 에이번 강 계곡에 위치한 언덕 안에 위치하며, 영국에서 유일하게 자연 온천수가 발생하는 곳이었다
바스는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다양한 극장, 박물관, 문화 장소, 스포츠 경기장 등을 갖추고 있는 주요 관광지이다. 매년 백만명의 관광객이 그 지역에 머무르며, 3백만 8천명이 당일로 바스를 방문한다. 바스에는 2개의 대학교와 몇몇의 스쿨 및 칼리지가 있다.
(4) 스토 온 더 월드(stow-on-the wold)
코츠월즈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도시다. 이 도시는 양모 제품의 마켓타운으로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시내 중심에 돌이 깔려 있는 광장인 마켓 스퀘어가 있고, 마켓 크로스라 불리는 이곳의 돌 십자가는 양모의 공정한 거래를 해오던 도시의 상징이었다. 런던 패딩턴 역~ 모턴 인 마시 역까지 약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된다.
(5) 버턴 온 더 워터(bourton-on-the-water)
아름다운 도시와 마을이 흩어져 있는 이 지역를 ‘코츠월츠의 작은 베니스’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코츠월즈 지역에서 가장 진입하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가장 번화한 곳이다. 물론 번화했다고 해서 왁자지껄하고 화려한 모습이 아니다. 다른 마을에 비해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등 상점들이 많은 탓에 코츠월즈에서 가장 번화한 마을이라고 불린다.
마을 사이에 흐르는 강의 수심은 10Cm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따뜻한 날이면 어린 아이들과 강아지들이 강가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가족여행지로도 사랑받고 있다.
버턴 온 더 워터 찾아가는 길은 런던 패딩턴 역~ 첼트넘 스파 역으로 약 2시간 25분이 소요된다. 첼트넘에서 801번 버스로는 약 50분이 소요된다.
(6) 버퍼드(burford)
강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마을이다. 완만하게 경사진 하이 스트리틀를 따라 집들이 늘어서 있는 버퍼드는 옛날부터 목양 산업을 주요 산업으로 발전시켜 온 마을이다. 마을을 둘러싸듯 집들 주변으로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뜬는 목초지가 펼쳐져 있다.
가는 방법은 런던 패딩턴 역에서 옥스퍼드 역으로 약 1시간 소요되고 옥스퍼드에서 853번 버스를 타고 약 45분이 걸린다.
(7) 스트랫퍼드 어펀 에이번(Straford-upon-Avon)
잉글랜드 중부의 아름다운 전원 지대를 흐르는 에어번 강 부근의 스트랏포드는 옥스퍼드 북서쪽 약 60km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생가가 있는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16세기의 튜더 양식인 나무 구조에 석회를 바른 건물이 늘어서 있다.
(8) 콘위
콘위 강 주변에 있는 콘위 성이 있는 곳이다. 군사 거점으로, 15세기 초 웨일즈인의 반란과 17세기 청교도 혁명에 의한 왕당파와 의회파의 전쟁에는 거리를 둘러싼 공방전이 계속 전개 되었지만, 22개의 탑과 마을로 들어오는 3개의 문을 가진 성벽은 지금도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9) 맨체스트 (manchester)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2번째로 큰 도시였으며 산업혁명의 상징적인 도시다. 20세기에 들어와 경제적 활력을 잃게 되었다. 중심도시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다양하고 안정된 경제상태를 유지해왔다. 1830년대에는 세게 최초로 리버풀과의 사이에 여객 철도가 개통되었다.
축구 프리미어 리그의 인기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거대한 홈그라운드가 있는 곳이다. 팀의 오리지널 상품이 가득한 메가 스토어도 있다.
(10) 요크 (york)
좋은 캠프장이 있는 곳이다. 요크의 역사는 서기 71년 로마 군이 주둔지를 세웠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색슨 족과 바이킹, 노르만 인의 침략이 있었다. 그래서 요크의 거리는 성벽과 성문, 교회 유적 등이 많다.
우즈 강과 포스 강이 만나는 곳에 있으며, 런던과 에든버러의 중간 지점에 있다. 요크 대주교가 있는 성당도시이다. 로마인 철수 후 앵글로색슨족이 통치했다.
12세기에 런던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도시로 성장했고, 13~15세기에 잉글랜드 최대 고딕 양식 교회인 세인트피터 성당이 건립되었다. 언덕 위에 솟아 있는 옛 성 위에서 이 도시를 조망할 수 있다.
11. 스코틀랜드
영국 스코틀랜드의 털이 많은 스코틀랜드 소
스코틀랜드 여행지: ① 에덴버그성 ② 캐빈 ③ 키콜리(kirkcaldy) ④ 퍼스(perth) 캠프장
⑤ inverness ⑥ 네스호 (loch ness) ⑦ 모기 많은 캠프장 ⑧ 스카이성(skye I)
⑨ 포트리(portre) ⑩ 포트 윌리암(fort william) ⑪ 스텔링(stirling)
⑫ 크라스고(glasgow) 공항에서 북 아일랜드 벨페스트 공항으로
스코틀랜드는 북국의 대자연과 옛 왕국의 역사를 전하는 영국 북쪽의 지역이다. 4개 지방 중 가장 북쪽에 있다. 잉글랜드와는 다른 중후한 표정이 있는 곳이다. 남부 도시와는 대조적으로 하일랜드 지방에는 호수와 계곡, 굴곡진 해변과 크고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다.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약 1/3을 차지하며, 남쪽은 잉글랜드와 접하고 나머지 3면은 바다에 면해 있는데 서쪽과 북쪽은 대서양, 동쪽은 북해와 접해 있다.
오랫동안 영국의 직접적 통치에 저항하였고 1707년까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1명의 국왕 밑에서 독립된 왕국으로 남아 있었다. 1707년에 두 왕국은 영국으로 통합되었다. 1820년대 산업혁명으로 인구는 증가하여 조선업, 석탄채굴업, 철·강철 제조업이 주요산업이 되었으나 20세기 후반에 전자산업의 중심지이자 북해유전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근해 정유기지가 되면서, 중공업은 쇠퇴했다.
(1) 에덴버그
에든버러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에 웅장한 성이 우뚝 솟아 있다. 중세의 향기가 짙게 남아 있는 옛 도읍지에는 세련된 분위기가 감돈다. 스코틀랜드 관광의 거점이다. 스코틀랜드의 수도이며, 글래스고 다음으로 큰 도시다. 1437년 스코틀랜드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후 스코틀랜드의 문화, 정치, 교육, 관광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18세기 스코틀랜드를 유럽의 상업, 지식, 산업, 문학, 교육의 중심지로 만든 스코틀랜드 계몽주의가 시작된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영어권에서 여섯 번째로 오래되고, 스코틀랜드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에든버러 대학교와 에덴버그성이 있다. 에든버러 성(Edinburgh Castle)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성이다. 캐슬 록이라는 바위산 위에 세워진 고대의 요새로 에딘버러의 상징이다.
(2) 퍼스 (perth)
좋은 캠프장이 있는 곳이다. 15세기까지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였으며, 하일랜드 지방으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운명의 돌’이 있던 국왕대관식을 거행하는 땅이다. 스쿤 성은 도심에서 2Km 떨어져 있다.
(3) 인버네스(Inverness)
네스 강 주변에 개발된 도시로 하일랜드 지방의 동쪽 거점 도시다. 영국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주 인버네스 구의 구청소재지이며 칙허 특권도시이다. 오래 전부터 하일랜즈 지방의 중심지였으며, 글렌모어 공원 동쪽 끝에서 네스 호로부터 흘러나오는 네스 강을 건너기에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네스 강과 칼레도니아 운하가 지나가며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도로망이 뻗어 있다.
(4) 네스 호
산으로 둘러싸인 둘레 40Km의 가늘고 긴 호수이며, 호수에서 바라보는 어쿼트 성은 환상적이다. 호수 크루즈도 할 수 있다. 이 호수는 네스(Ness)라는 호수에 목이 긴 거대한 공룡 모양의 괴물이 산다는 것. 스코틀랜드말로 호수의 뜻인 Loch를 붙여 Loch Ness 라고 불리는 이 길쭉한 모양의 호수는 스코틀랜드 고지의 심장부인 인버네스에 위치해 있다.
(5) 모기가 많은 캠프장
스코랜드에서 조심할 문제는 모기 같은 것이 있는데, 마치 벌집에서 벌이 날아든 것 같이 캠핑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캠핑을 할 때는 방충망을 얼굴에 쓰고 캠핑을 해야하는 실정이다. 하일랜드의 소들이 얼굴부분에 털이 많은 이유가 이러한 영향이 아닌가 생각이든다.
(6) 스카이섬 (skye I)
지금도 게일 어가 쓰이고 있고,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영국 북서쪽에 있는 섬이다. 이 섬은스코틀랜드의 이너헤브리디스 제도 최대의 섬있다. 주요 산업은 관광, 농업, 어업, 임업이다. 스코틀랜드는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지세가 높아진다.
스코틀랜드를 지형별로 나누자면, 로우랜드와 하랜드로 구분되는데, 로우랜드는 그나마 덜 춥고 그나마 농사라도 조금씩 지을 수 있어서 "그래도 사람 살만한다"는 남부의 로우랜드와 대관절 이런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을 까 싶은, '광활', '황량', '척박'한 북부의 하이랜드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7) 포트리(portree)
스카이 섬의 제일 큰 규모의 도시이다. 작고 아기자기한 도시 마을로 레스토랑과 도예, 수공예를 판매하는 상점이 많다. 아침에 바다가 뚝방 길을 걸어면 여기가 영국 북서쪽 태평양 연안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8) 포트 윌리암(fort william)
포트 윌리암은 태평양과 북해를 잇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Highlands) 지역의 중심에 있다.태평양에서 출발해 북해에 도착하는 길이기도 하다. 인공적인 운하 때문에 마치 북쪽이 영국 섬에서 분리된 것처럼 지도상에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북해 쪽에는 인버네스가 있다.
(9) 스텔링(stirling)
스털링(Stirling)은 스코틀랜드 스털링의 도시이다. 인구는 약 45,000명이다. 에든버러와 글래스고 중간지역에 있는 도시로 들판 위에 성이 있는 곳이다. 1297년 잉글랜드에 굴복한 스코틀랜드 왕국을 구하기 위해 봉기한 윌리엄 월리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싸운 곳이다. 스털링 성은 평야에 우뚝 솟은 바위산 위에 있으며, 산 사면에 펼쳐저 있는 구시가에는 비탈길 양쪽에 오래된 집들이 늘어서 있다.
(10) 글래스고(glasgow)
스코틀랜드의 경제 중심인 글래스고는 산업 혁명기에 발전한 공업 도시다. 글래스고 공항에서 북 아일랜드 벨페스트 공항으로 간다. 글래스고는 중서부 스코틀랜드의 클라이드 강 유역에 위치해 있다. 영국 본토 내에서 런던과 버밍엄, 리즈에 이어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글래스고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인구가 1백만 명 이상 되는 도시로 성장해 1960년대까지 100만 명 이상이 거주했으나, 이후 감소해서 현재는 약 6000,000명이 거주하고 잇다. 영국에서 런던과 에든버러 다음으로 3번째로 관광객이 많은 도시로, 연간 300만 명의 관광객이 이 도시를 찾는다.
(11) 포클랜드 (Falkland)
영국 스코틀랜드 파이프 주에 위치하고 잇고, 인구는 약 1,000명 정도 사는 조용한 도시이다. 예전에는 왕실 저택이 있었다. 이스트로몬드 구릉(448 m)의 북쪽 기슭에 있다. 이곳에 있는 12세기의 성은 현재 포클랜드 궁전으로 바뀌었다.
12. 북 아일랜드( Northern Ireland )
영국 북 아일랜드 벨페스트에 있는 타이타닉 박물관
북 아일랜드 여행지: ① belfast: 벨페스트 ② 공항 캠프장 ③ giant's causway:절벽,
④ 그 옆에 있는 성 ⑤ 벨페스트 공항 렌트카 반납
아일랜드 섬의 북동부를 차지하며 남쪽과 서쪽으로 아일랜드 공화국, 동쪽으로 아일랜드 해와 노스 해협, 북쪽으로 대서양과 접한다. 북아일랜드는 영국을 구성하는 4개의 홈 네이션스 중 하나이다.
아일랜드 섬 북동부에 위치하며, 독립국인 아일랜드와 구분하는 공식 용어이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얼스터(Ulster)라고 불리던 지역의 일부만 해당하지만, 영국에서는 북아일랜드를 '얼스터'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최대 도시이자 수도는 항구 도시인 벨파스트이다
(1) 벨페스트(belfast )
벨파스트는 영국의 도시로, 북아일랜드의 수도이다.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로 아일랜드 섬에서는 더블린 다음으로 크며, 영국 내에서는 인구규모 17위이다. 벨파스트 대도시권(Belfast Metropolitan Area)의 인구는 약 600,000명이 살고 있다.
17세기에 아서 치체스터 남작(Arthur Chichester, 1st Baron Chichester)에 의해 도시가 성립되었다. 주로 브리튼 섬에서 온 이주자들이 정착하였다. 18~19세기에는 아일랜드 섬의 상공업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특히 아일랜드 아마포(亞麻布) 공업의 핵으로 리네노폴리스(Linenopolis)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담배가공, 밧줄 제조 및 조선업(造船業)으로도 유명했다.
1911~12년에 걸쳐 타이타닉이 이 곳에서 건조되었을 때, '할랜드 앤드 볼프(Harland and Wolff)'는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였다. 벨파스트는 산업혁명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인 산업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세웠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벨파스트는 잠시나마 아일랜드 섬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기도 했다.
1920년, 아일랜드 분할에 의해 북아일랜드의 수도가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 공군의 심한 폭격을 받았는데, 1941년의 한 공습에 의해서는 천여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집을 잃었다.
(2) 공항 캠프장
공항 뒤편에 있는 캠프장으로 비행기 이용에 매우 유용한 곳이다. 여러 가지 편의 시설도 많고 걸어서 공항까지 이동이 가능한 곳이다.
(3) 자이언트 코즈웨이(giant's causway)
자이언트 코즈웨이는 영국 북아일랜드의 주상절리이다. 고대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총 4만여개의 주상절리가 모여 있다. 북아일랜드 북부 앤트림 주 부시밀스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986년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1987년에는 북아일랜드 환경부가 선정하는 국립자연보존공원으로 지정되었다.
(4) 그 옆에 있는 성
북 아일랜드 던루스 성 던루스(Dunluce) 성은 13세기경에 처음 만들어졌다. 17세기말 한 전투에서 오늘날의 모습처럼 파괴되고 버려졌다. 이후 방치되었다가 현재는 문화재 관리를 받는 중이다. 3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바다갓 요세로 풍광이 아름답다.
(5) 벨페스트 공항 렌트카 반납
13. 아일랜드
아일랜드 골웨이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모헤이 절벽
아일랜드 여행지:① 더블린(dublin,3일) ② 기네스 맥주공장 ③ 골웨이(galway)
④ 모헤어 절벽(cliffs of moher) ⑤ 고인돌(poulnabrone dolmen)
⑥ 코크(cork) ⑦ 킬케니(kilkenny) ⑧ 더블린공항에서 런던 공항
기원전 4세기 무렵 켈트인이 이주하여 여러 개의 부족 국가를 세우고 9세기에는 노르만인들이 이들과 융화하면서 아일랜드에 살게 되었다. 5세기경에는 성 패트릭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12세기부터 영국의 침략이 시작되었고 아일랜드가 영국 국교를 거부한 것을 구실로 영국은 아일랜드의 북부 지방에 영국인들을 이주시켰다. 특히 크롬웰이가 토지를 몰수하여 영국인에게 나눠주면서부터 아일랜드인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였고, 이때부터 처참한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미국 등에 아일랜드인이 많이 이민 간 이유 중 하나이다.
19세기이후 오코넬이 이끄는 청년 아일랜드당 등은 자치권과 터지문제 해결을 계속 요구하면서 활발하게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북부 지방을 제외한 아일랜드를 자치령으로 인정하겠다는 타협안이 1922년에 승인되었다. 아일랜드는 1937년 헌법을 제정하고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였다.1949년 “에이레‘라는 국명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바꾸고 영연방에서 탈퇴하였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지방문제로 영국과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고, 그후 독립을 위한 테러를 행하기도 하였으나, 북아일랜드 평화 협정 이후 현 상태로 유지 하게 되었다.
아일랜드는 영국 본토 서쪽의 섬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이며, 수도는 더블린으로 화폐는 유로이다. 켈트족과 영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민 대다수의 종교는 로마가톨릭교이다. 대체로 농업·화학공업·서비스업에 기반을 둔 혼합시장경제 체제로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이웃한 서유럽 국가들보다 낮으나 대체로 선진국 수준이다
수도는 더블린이고 섬은 남북으로 486km, 동서로 275km가량 뻗어 있다. 유일한 이웃은 섬의 북동부에 위치한 영국의 북아일랜드이다. 북아일랜드와의 국경선 이외의 경계는 해안선뿐이며 북쪽·서쪽·남쪽으로 대서양과 만나고, 동쪽으로는 영국과의 사이에 아일랜드 해와 세인트조지 해협이 있다
(1) 더블린(dublin,3일)
아일랜드 해와 접한 더블린만의 가장자리에 있으며, 아일랜드의 주요항구이자 금융·상업·문화 중심지이다. 이 도시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야지대에 있으며 리피 강이 이곳을 가로지른다. 한때 섬유산업으로 이름이 높았다. 맥주 사업과 그 밖의 산업으로는 식품가공·유리·담배·조선 등이 있다. 시 법령으로 거의 모든 건물들을 10층 이하로 짓도록 제한하고 있다. 대표적인 역사적 건축물로는 더블린 성이 있다.
바이킹의 침입은 다른 유럽과 달리 여러 세대에 걸쳐서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었던 아일랜드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바이킹은 초기에 약탈을 비롯한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이후 아일랜드에 정착하고 일부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더블린은 점차 바이킹의 정착지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되었다. 템프 바 지구, 더블린 성 등이 유명하다.
(2) 기네스 맥주공장
맥주 생산업체인 '기네스 브루어리회사'는 아일랜드에서 제일 큰 기업체이자 수출업체이다 기네스 맥주공장을 견학하면 기네스 맥주의 역사와 맥주를 시음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있다. 기네스 북도 이 공장에서 유래된 사실도 알 수 있다.
(3) 골웨이(Galway)
골웨이는 아일랜드 골웨이 주의 주도이며, 아일랜드 제3의 도시이다. 돔 지붕과 기둥은 르네상스 양식을 띠고 있는 ‘골웨이 대성당’(Galway Cathedral)있으며, 매년 9월에는 ‘골웨이 굴 페스티벌’ Galway Oyster Festival) 이 열린다.
골웨이시 인구는 약 8만, 골웨이주(County Galway) 인구는 약 18만. 합쳐서 약 26만이 넘는다. Co. Clare의 유명한 절벽 ‘Cliffs of Moher’이 있으면, 전통이 그대로 살아 있는 ‘Aran Islands’ 그리고 동화의 성 같은 ‘Kylemore Abbey’ 등등. 푸르고 황량한 아일랜드 서쪽을 만끽해볼 수 있다. 아일랜드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미국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유럽 국가인 것도 또 다른 이유라 생각한다.
(4) 모헤어 절벽(cliffs of moher)
아일랜드 ‘골웨이’(Galway)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40분 정도 달리다 보면 ‘모어절벽(Cliff of Moher)이라는 곳이 나온다. 높이가 보통 120m, 가장 높은 ‘오브라이언 타워(O'Brien's Tower)’는 214m에 이르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오브라이언 타워는 ‘코닐우스 오브라이언 경’(Cornelius O'Brien)에 의해 1835년에 세워진 타워이다.
(5) ‘플나브론 고인돌’ (Poulnabrone dolmen)
기원전 2500년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플나브론 고인돌’(Poulnabrone dolmen)이 있다. 그 의미는 '슬픔의 구멍’(The Hole of the Sorrow)이다.
(6) 코크(cork)
코크 켄트(Cork Kent) 기차역, 코크는 더블린 다음으로 큰 아일랜드의 두번째 도시이다.
같은 아일랜드지만 더블린과는 분위기가 또 다른다. CorkCity의 세인트 핀바스 성당이 있다.
코크는 이민의 역사가 있다. “애니 무어 (Annie Moore)와 그 동생들”의 작품에서 보듯이 이 사람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최초의 사람이라고 한다. 1800년대 아일랜드에는 대기근이 일어나 많은 이들이 죽었으며, 많은 아이리쉬들이 미국과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된다. 이 대기근의 원인을 누구는 감자마름병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감자마름병은 대기근의 원인중 하나일 뿐 가장 중요한 원인은 영국 지주들의 착취라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코브 대성당 (Cobh Cathedral)은 코브를 떠나 미국과 캐나다로 이민간 아이리쉬들이 성금을 모아 지어진 성당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아일랜드에서 가장 멋있는 성당 중 하나이다.
블라니 스톤(Blarney Stone)은 세계에서 가장 불청결한 관광지로 뽑혔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돌에 키스를 하면 말솜씨가 좋아진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이곳으로 몰려든다. 영국의 수상 처칠도 이 돌에 키스를 했다고 한다. 이 돌에 키스를 할때는 허리를 거꾸로 뒤집어서 키스를 해야 한다.
(7) 킬케니(kilkenny)
노르 강변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중세의 도시의 모슴을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킬케니는 아일랜드 남부 내륙의 킬케니 주의 주도이다. 이곳에는 큰 중세 성당이 있으며, 킬케니 성도 있다.
(8) 더블린공항에서 런던 공항으로 그리고 영국 런던 히스로 국제공항에서 귀국하였다.
‣ 1차 유럽여행지(2014. 6.19.~ 8.26: 70일간)
(1) 출발- 인천 공항 / 모스크바 러시아 항공으로
(2) 영국 (①런던 ②옥스퍼드 ③윈즈 ④그리니치) 기차로 이동, 유레일 패스 33일간 사용 시작
(3) 프랑스 (파리)
(4) 벨기에(①브뤼셀 ②바뇌)
(5) 네델란드(①암스테르담 ②잔세스칸스)
(6) 독일(①프랑크푸르트 ②장크트고아르스하우젠)
(7) 덴마크(①오덴세 ②코펜하겐)
(8) 노르웨이(오슬로)
(9) 스웨덴(스톡홀름)
(10) 핀란드(①헬싱키 ②로바니에미 ③투르크)
(11) 유람선 타기: 스톡홀름⟶ 코펜하겐⟶ 함부르크
(12) 다시 독일(베를린)
(13) 체코(①프라하 ②체스키크롬로프)
(14) 오스트리아(빈)
(15) 헝가리(부다페스트)- 유람선과 기차로
(16) 다시 오스트리아(빈) 짤츠부르크
(17) 또 다시 독일(①뮌헨 ②푸센)
(18) 스위스(①베른 ②취리히 ③루체른 ④인터라켄 ⑤몽트뢰)
(19) 다시 프랑스 남부(①아를 ②아비뇽 ③마드리드 ④칸 ⑤니스)
(20) 모나코
(21) 이탈리아(①밀라노 ②베네치아 ③피렌체 ④피사 ⑤아시시⑥로마 ⑦나풀리
⑧폼페이 ⑨쏘렌토)- 사철이용, 유로페스
(22) 스페인(①바로셀로나 ②그리나다 ③세비아 ④산티아고 ⑤마드리드 ⑥세고비아 ⑦아빌라 ⑧살라망가)
(23)포르투갈(①파티마②로까곶③신트라④가스카이스⑤리스본)렌드카 (24) 다시 스페인(①톨레도 ②마드리드)
(25) 러시아(①모스크바 ②상트페테르부르크)
(26) 인천공항- 러시아 항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