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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에 처지지 말거라(박성훈)
2016년 미국 브루더호프의 한 마을인 우드크레스트에 딸과 함께 머물고 귀국할 무렵 브루더호프의 지도자인 크리스토프 할어버지와 그의 부인 버레나의 집에 방문했다. 우드크레스트에 머무는 동안 잔디 밭에서 거의 매일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두 분은 매우 익숙했고, 더구나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 몸임에도 한 형제 한 형제들을 온 마음으로 맞으며 환대하는 모습이 그토록 인상적일 수 없었다. 그는 누군가 그를 보고 그에게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면, 이 세상에 오직 그 한 사람만이 있는양, 혹은 그가 예수님인양 그에게만 집중하면서, 불편한 걸음을 그에게 옮기고 그를 껴안았다. 그런 크리스토프 할아버지 곁엔 늘 부인 버레나가 있었다.
그의 집을 찾았을 때 역시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이 세상에 오직 나밖에 없는 듯이 온전히 내게 집중해주며 나를 맞아 주었다. 그의 부인은 좀 더 명랑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버레나는 "기자가 왜 이런 공동체에 직접 살아보게 되었느냐"거나 "왜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린시절 고향집의 모습을 들려주었다. 농삿일을 돕는 분들만 아니라, 지나가는 장사들과 걸인들까지 집에서 재우고 먹여, 가족들 외에도 늘 20~30명이 왁자지껄 식사를 하고 사람이 많았던 우리 시골집의 모습이 바로 공동체였던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버레나는 "당신의 부모님 같은 분들이 바로 천국을 만드는 분이다"고 말했다.
귀국 뒤 얼마 안 있어서 크리스토프 할아버지가 지난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최근 그의 아내 버레나 할머니도 별세했다는 것이다. 버레나 할머니는 남편에 비해 건강해보였는데, 이렇게 금세 남편을 따라갈 줄은 몰랐다. 너무도 사랑했던 남편 곁으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천국으로, 평화로운 모습으로 갔다고 한다.
버레나의 부음을 전해준 미국 브로더호프의 박성훈님의 글과 버레나 딸의 조사를 들으니, 다시 한번 크리스토프와 버레나의 아름다운 삶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다음은 미국에서 보내온 박성훈님의 글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지난 금요일, 우리 공동체 장로였던 요한 크리스토퍼 부인이신 버레나께서 천국으로 부름을 받으셨다. 다음날 우리는 장례식이 있기전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문상을 갔다. 80년 생의 경주를 끝내고 머리에 화관을 쓰시고 침대에 조용하게 누워있는 오마 버레나 모습이 평화롭고 아직도 살아 계신 듯 했다. 이분의 발 끝에는 불이 켜진 아주 긴 촛대와 꽃들이 담겨진 병들이 놓여 있었다. 바로 촛대 옆에는 내 눈길이 끌리는 물건이 하나 보였다. 평소 버레나가 즐기던 낡고 헐은 ‘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 카드를 보니 11년 전 한 기억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딱 한번 만 더 해요? 제발요.” 버레나는 검지손가락 하나를 펴보이며 크리스토프에게 애교하듯 간청했지만, 크리스토프는 턱 밑으로 오른손을 가로지르며 “쉴료스(Schuss독일어로 ‘끝났다’ 는 뜻이다.)”라며 단호하게 게임을 끝냈다. 이미 저녁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후덥지근한 더위가 끝나가는 2007년 여름 날, 우리는 Parents all day trip으로 연못에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날은 결혼한 부모들이 일년에 한번 아이들을 하루 종일 공동체 청년들에게 맡긴 후 근처에 있는 산에 등산이나, 자전거 하이킹, 수영등 자유롭게 부부끼리 시간을 보낸 후 오후에는 숲에 있는 공동체 연못가에 모여 다른 부부들과 게임도 하고 함께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교제하는 날이다. 우리는 한 돌이 겨우 지난 어린 유빈이와 유치원생 하빈이를 떼어놓은(?) 부모로써의 자유를 한껏 누리고 있었다. 나는 그늘진 연못 끝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레나와 한팀이 되어 크리스토프와 상대로 500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게임이라 이날 버레나에게 게임룰을 배워가면서 땀을 흘리며 쩔쩔매고 했는데, 500게임은 팀으로 하는 게임이라 버레나가 아무리 혼자서 잘해도 우리 팀은 게임을 연달아 지고 있었다. 그런데 막판에 버레나 손에 아주 좋은 카드가 들어왔다. 이제 겨우 한번 이기겠다 싶었는데, 마치는 종이 울리자 베르나는 크리스토퍼에게 한번만 더 하자고 졸랐던 것이다.
그 때 버레나가 왜 나를 게임 파트너로 선택했는지 지금도 모른다. 아마도 버레나도 이민자였고 영어를 처음에 잘 못해 어려움을 겪은 경험탓인지 미국 생활과 공동체 생활이 모두 생소한 나에게 긍휼한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평생 주변의 연약한 사람들에게 늘 손 내밀어 위로하고 등을 두들겨준 사람이었으니까. 거의 11년이 흘렸지만 지금도 이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로 난 500카드 게임을 즐겼고, 지금은 500카드게임에 베테랑이 되었다.
2년 전 우리가 4개월 동안 다른 주로 미션을 갔다 온 후 두분을 개인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거의 2시간 동안 미션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나누었는데 대화도중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렸다. 온 세계 공동체에서 크리스토퍼에게 도움과 조언을 구하는 전화였으리라. 얼마 후 크리스토퍼는 조용히 전화 수화기를 들더니 초롱초롱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시고 씩 웃으시더니 옆으로 내려 놓으셨다. 더 이상 전화벨 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 분 앞에 있는 우리에게 온 마음을 쏟으시는 그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우리 마음을 젹셔왔다.
크리스토퍼와 버레나는 늘 그런 분이셨다. 처음 우드크레스트를 방문할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11년 간 우리 가족을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셨다.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민하면서 편지하면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심지어 다른 나라에 있어도 바로 FAX가 날라와 우리를 격려하시곤 했다. 늘 열린 마음과 듣는 귀로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더 성장하도록 우리 영혼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셨다. 참된 목자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누구보다도 더 잘 보여주셨다. 우리는 그런 큰 마음을 가지신 크리스토프와 버레나가 늘 그리울 것 이다.
아래 글은 2018년 9월 24일 버레나의 장례식에서 그녀의 큰 딸 에미 마리아 블라우가 엄마 버레나의 삶에 대해 나눈 이야기다.
엄마는 1938년 5월 16일 영국에서 한스와 마그리트 마이어의 첫 딸로 태어났다. 네 명의 아들 뒤에 태어난 딸이었다. 엄마의 부모님 한스와 마그리트 마이어는 스위스 출신으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바로 직전인 1933년 독일에서 브루더호프에 합류했다. 그뒤 공동체는 나치의 심한 압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게슈타포에게 몇 번이나 강제 급습을 당하다가 결국 1937년 독일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엄마의 아버지 한스는 나치에 체포되어 3개월을 감옥에서 지내시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이미 영국에 가있던 가족과 재결합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엄마가 태어났다.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브루더호프는 영국 안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이국인 신세가 되어 당시 유일하게 난민을 받아줬던 남미 파라과이로 이주하게 된다.
엄마가 두 살이었을 때 할머니는 6명의 다른 아이들을 이끌고 공동체의 멤버들과 함께 파라과이로 향하는 선박에 올랐다. 이미 남미로 떠난 남편을 만날 것이라는 믿음을 품고서 말이다. 엄마의 부모님은 열한 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숱한 어려움과 열대병과 싸우며 집과 농장, 선교 병원을 지었다. 그리고 엄마는 파라과이에서 아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엄마는 우리에게 정글에서 겪은 모험담을 즐겨 들려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는 오빠들이 엄마가 가장 아끼던 구슬들을 타조에게 먹였던 일이다. 오빠들은 태연하게 ‘걱정하지 말아, 구슬을 곧 보게 될 거야.’ 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는 너무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 그런데 정말 오빠들 말대로 입으로 들어간 구슬이 뒤로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엄마의 오빠 안드레아스는 친절하게도 구슬에 묻은 똥을 닦아서 엄마에게 돌려 주었다. 엄마는 운동을 진짜 좋아했는데 그 당시 학교에서 높이뛰기를 가장 잘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엄마는 한번 친구들하고 몰래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 누가 오는 소리가 들려서 담배를 집어 던지고는 부리나케 도망을 치는데, 매캐한 연기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닌가. 불을 냈구나 싶어 바들바들 떠는데 다행히 엄마와 친구들이 한 짓하고는 상관이 없는 걸로 판명이 났다. 그것이 엄마의 마지막 담배였다.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들이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애정은 고스란히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아주 빈궁한 상태였는데도 악기를 구해서 가족이 함께 연주를 하며 노래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보냈다. 노래의 중요성은 우리 가족에게도 전수되어 저녁 시간이면 온 가족이 모여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엄마의 이모가 천식으로 죽게 되면서 엄마의 가족은 8명의 사촌을 받아들여 아이들만 19명이 되는 대가족이 되었다. 엄마의 아버지가 공동체 일로 출장을 많이 다녔기 때문에 어린 여동생들을 돌보는 것은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의 동생들 아가타와 프리실라에게 물어 보시라! 이때의 경험은 엄마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8년 엄마는 우르과이의 엘 아라도라고 불리던 하우스 공동체에 옮겨 갔다. 엄마는 거기서 다섯 달을 머무는 동안 세례를 받았다.
엄마는 교육을 계속 받는 일 보다는 손으로 직접 하는 일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래서 공동체 병원 실험실에서 한 의사의 조수 노릇을 하며 박테리아나 혈액 세포를 현미경 렌즈를 통해 인식하는 법과 독사들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서 제대로 된 해독제를 처방하는 일을 도왔다. 나중에는 공동체 어린이집에서 오랫동안 일했는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뒤에 엄마가 애용했던 충고는 이랬다. “단순히 상식대로 하면 되!”
1961년 엄마는 몸이 아픈 한 공동체 일원을 돌보기 위해 우드크레스트로 이사 오셨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의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를 처음으로 만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첫만남을 “첫사랑의 마주침(sight of first love)”이라고 늘 말하시다가도 웃으시면서 “첫눈에 빠진 사랑(love at first sight)”이라고 정정하셨다. (역주: sight와 love어순을 실수로 바꾸어 말한것임) 천천히 두 분의 관계는 꽃을 피웠다. 두 분이 약혼했을 때 아빠는 펜실베이니아에서 대체복무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 스마트폰은 존재하지 않았던 거다!) 떨어져 있는 시간 그래도 두 분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똑같은 달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두 분은 1965년 10월 10일에 약혼해 이듬해 5월 22일 우드크레스트에서 결혼하셨다.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는 아주 수줍은 사람이었는데 아빠는 그런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어!” 아빠는 다음의 일화를 자주 들려 주셨다. 결혼한지 얼마 안 됐을 때 두 분은 공동체 출판사 플라우가 참여한 책 전시회에 파견됐다. 영어 실력이 별로 안 좋았던 엄마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무서웠다. 전시회 중에 아빠는 갑자기 누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면서 엄마더러 책 부스를 지키라고 했다. 그러고서 아빠는 모퉁이에 서서 줄곧 엄마를 지켜봤다는 거다. 두 분은 그때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한바탕 웃으셨다.
그리고 우리들이 도착했다. 10년 사이에 8명의 자녀가 태어난 거다! 우리는 아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식사 때마다 우리는 식탁에 한 사람 자리를 늘 여분으로 차렸다. 예상치 않은 손님이 왔을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그런 손님이 진짜 찾아왔다. 제일 기억에 남았던 일은 어느 날 엄마가 우리 집 계단 위로 올라오시면서 “우리 저녁 식사에 오시는 분이에요.”라고 하시며 공동체 입구에서 만난 한 남자를 데리고 오셔서 소개해 주셨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것이 바로 부모님이 우리들에게 심어주신 거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그 순간이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될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셨고, 우리가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믿음을 지니길 바라셨다. 동시에 줏대가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셨다. 어머니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작은 일에도 축 처지는 해진 행주 같은 사람이 되지는 말아.” 우리가 십대가 되면서 상황은 흥미진진해졌다. 엄마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말 대신 행동으로 보이셨다.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 특히 어머니에 순종해야 한다는 건 철칙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아빠에게서 천둥이 터져 나왔다! 부모님은 자주 독일어로 말씀을 나누셨다. 우리가 못 알아 듣는 줄 알고 그러셨지만 두 분 사이의 독일어 대화는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독일어 수업이었다!
엄마는 우리를 놀 놀라게 했다. 내 남동생이 16살 된 날 우리는 생일 아침 식사를 위해 모두 식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킹스턴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 유니폼을 입은 엄마가 춤을 추며 들어오셨다. 어깨 보호대는 물론이고 헬멧을 쓴 채 한 손에는 미식 축구 공을 들고서 말이다. 세상에!
공동체에서 두 분이 맡은 책임이 점점 더 무거워지면서 부모님은 다른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방문하시거나, 평화와 화해를 위한 일로 다른 나라로 여행하시는 일이 잦아졌다. 엄마는 이 일에 아빠를 도우셨고, 가능한 동행하셨다. 아빠는 늘 우리들에게 엄마가 없으면 벌거벗은 느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엄마는 웃으면서 “쾃치”(스위스 말로 가벼운 욕)라고 하셨다. 부모님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려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저마다 모두 이야기가 있어. 그걸 들어줄 사람이 부족한 것 뿐이라고.” 그것이 바로 아빠가 11권의 책을 쓰신 이유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학력이 전부인 엄마만한 편집자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놓친 실수를 잡아내는 건 늘 어머니 몫이었다. 이건 내가 동생 해나와 함께 아빠 비서 역할을 하면서 타이핑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분명히 할 수 있는 말이다. 부모님과 함께 일했던 것은 내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두 분은 진실한 말에 담긴 사람들의 영혼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유머와 웃음을 즐기셨던 것도 사실 이런 면모와 연결되어 있었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웃음은 전염성이 있어. 그리고 최고의 약이지. 유머를 잊지마. 물론 깨끗한 유머여야 해!”
지난 10년은 아빠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점점 더 약해지고 아프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는 줄곧 아빠 곁을 지키셨다. 부모님은 종종 평화를 얻기 위해 자연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생 동물을 관찰하시고, 500카드 게임을 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에 엄마는 용감하게 계속 길을 가셨다. 한번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방에만 앉아서 맥 빠져 지낸다고 도움이 되는 게 아니야.” 작년에 엄마는 호주의 공동체를 방문하셨고 올해에는 영국의 공동체들을 몇 번이나 찾으셨다.
지난 몇 주 우리 가족은 어머니와 함께 여러 번을 모였고, 그때 작별 인사의 시간도 가졌다. 쉽지 않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금요일 아침, 9월 21일 새벽 4시 15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엄마는 놀라운 평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내 동생 프리실라와 내가 곁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말이다. 그 순간 나는 아빠가 엄마에게 종종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여보, 온 세상이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때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다. “여보, 온 천국이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