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처럼, 생기처럼
37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39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오시지 않았다. (요한복음 7장)
명절의 마지막 날 (37절)
오늘은 유대 절기로는 오순절이고 그리스도교 절기로는 성령강림절입니다. 교회의 탄생이라고 보는 성령강림 사건이 오순절 명절 때 일어났다는 누가의 시간표에 따른 것입니다(사도행전 2장).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는 복음 독서의 배경이 되는 명절(37절)은 오순절이 아니라, 초막절입니다. 유월절, 오순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삼대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은 요한복음 7-8장의 시간적 배경이 됩니다. 초막절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긴 하지만,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포함하는 7:37-39이 성령강림절의 복음서 본문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행적은 명절을 무대 삼아 전개되고, 6장의 유월절(오천 명 급식)을 제외하면 명절 때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거하십니다. 세 번의 유월절(2-3장, 6장, 12-19장)이 요한복음에 거론되고, 초막절(7-8장)과 수전절(10:22-39)이 한 번씩 나옵니다. 초막절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계셨고(7:2, 10), 이 명절의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1) 나는 생수이다(7:37-52).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3)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8:31-32). 이 말씀들은 모두 유대 사회에 파장을 던지면서 논란이 됩니다.
초막절의 두 가지 의식
장막절이라고도 불리는 초막절은 일 년 농사를 마치고 난 후에 벌이는 축제입니다. 추수와 더불어 한 해가 마무리되고 새해가 시작되는데, 초막절은 한해를 감사로 갈무리하고 새로이 한해를 출발하기 위한 명절인 셈입니다. 초막절에는,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구원받아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광야 생활을 회상하며, 집에서 나와 야외에 장막(초막)을 치고 기거하는 풍습을 지킵니다. 이 광야의 시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고 새로운 삶을 위한 율법을 받았기에, 그들의 한해는 초막의 삶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장막절 동안 매일 진행되는 의식이 두 가지 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물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매일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떠서 산 위의 성전까지 옮겨가는 행진을 합니다. 뿔나팔을 불고 나뭇가지 다발을 흔들고 크게 환호하면서 물을 운반하여 제단에 바칩니다. 이스라엘의 사십 년 광야 경험에서 단연한 어려움은 물이었고, 물 때문에 생겨 난 소동들이 있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물은 생과 사를 가름하고, 풍년과 흉년을 결정하며, 정착과 이주의 이유가 되는 중요한 필수입니다. 모든 가정은 물 뜨러 가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물을 길어오는 것으로 하루를 마칩니다. 이것이 추수 축제이자 신년 축제인 초막절에 매일 하나님께 물을 바치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 의식은, 이 절기의 마지막 날(37절)에 예수께서 물에 관한 말씀을 하시게 되는 자연스러운 동기를 제공합니다.
두 번째 주요 의식은 밤에 행해지면서 명절을 축하하고 기뻐하기 위한 의식입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거대한 네 개의 촛대가 성전 경내에 세워져 밤을 밝힙니다. 그 초의 심지는 제사장들의 낡은 옷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촛대 아래서 축제 참여자들은 횃불을 들고 피리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며 레위인들은 시편을 노래합니다. 이 초막절의 의식은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는 말씀이 놓이는 자리가 됩니다.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37절)
목마르지 않은 사람은 없고 목마르지 않은 하루도 없습니다. 생명은 물에서 비롯되었고(창1:2), 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수도꼭지를 돌리면 손쉽게 물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지금도 수십억의 사람은 물을 얻기 위한 사투를 벌이고 살아갑니다. 옛사람들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필요한 물을 길어오는 것이었고, 이 일과를 거르고서는 하루를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목마른 사람은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물이 다 마실 수 있는 물은 아닙니다. 물을 마시지 못해서 죽기도 하지만 잘못 마신 물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마실 수 있는 물을 구별하는 일에 생사가 갈립니다. “나를 마시라”는 말씀은 예수 자신이 먹을 수 있는 물, 즉 생수라는 뜻입니다. 생수(生水, living water)는 살아 있는 물로 읽히지만, 생명을 주는 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일찍이, 예수께서는 수가성의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지요(요4:14).
생수의 강이 흐른다 (38절)
먹을 수 있는 물, 즉 생수라고 할 때, 우리는 깨끗한 물을 떠올립니다. 우리 시대에는 여러 단계의 정수 과정을 통해 정화하거나, 오염되지 않은 깊은 곳에서 떠서 담아온 물이 생수로 유통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그런 물을 음용하는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고대인들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먹을 수 있는 물과 먹을 수 없는 물을 구분하는 기준은, 흐르느냐 흐르지 않느냐의 여부였습니다. 생수란 흘러 움직이는 물입니다. 샘처럼, 시내처럼, 강처럼 흘러가는 물을 생수로 여겼습니다. 이 말은, 가두어놓거나 저장해놓은 물은 생수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고여 있는 물은, 흘러가지 않는 피처럼, 썩을 수밖에 없고 생명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남겨두지 않은 만나만이 하늘의 양식이 될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의 “배”에서 (38절)
생수의 강은 “그의 배”에서 흘러나오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배’는 강이나 바다에 떠 있는 배가 아니라, 신체의 한 부분인 배입니다. 배는 몸의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탯줄의 흔적인 배꼽이 위치한 곳입니다. 고대인들은 중심 혹은 핵심을 배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세계를 지배했던 시절, 자기 땅의 한 곳을 세계의 중심으로 정하고 ‘배꼽’을 뜻하는 “옴파로스”라는 지명을 붙였다지요. 생수의 강은 바로 그 중심에서 흘러납니다.
예수께서 수가성의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다시 소환됩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대부분 목마른 사람은 외부의 물을 찾아 마심으로써 해갈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기가 주는 물을 ‘샘물’이라 칭하십니다. 샘물은 밖에서 공급되는 물이 아니라, 안에서 흘러나오는 물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4:13). 하긴, 목마른 샘물은 없습니다. 시내가 마르고 강바닥이 드러나도 샘물은 여전히 솟아납니다. 중심으로부터, 안으로부터 솟아나는 샘물이 여기에서는 ‘그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강으로 명명됩니다.
누구의 배인가?
‘그의 배’에서 ‘그’는 누구일까요? 이에 관해 ‘성경이 일러준다’(38절)고 말씀하시는데, 성경의 어느 구절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두 가지 가능성 있는 이해가 있습니다.
먼저는, 당연히, 예수 자신이 ‘그’입니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앞 절의 말씀에 근거하자면, “그 배”는 예수의 배입니다. 이를 지지하는 구약성서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사44:3)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마신 사람입니다. 생수이신 예수를 마신 사람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리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이해를 뒷받침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11)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잠18:4)
물이 터져 나오는 광야의 바위처럼, 예수에게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온다는 진리는 자명합니다. 이 진리를 알고 믿는 사람은 목마름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8:32). 하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예수에게서 생수를 마신 사람에게서도 생수의 강이 흘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생명력 있는 정원으로 만들 것이며 목마른 이들에게 넉넉한 샘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는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39절)
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pneu/ma)는 히브리어로 “루아흐”, 곧 영, 숨,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데(22절), 이 숨이 곧 성령입니다. 니고데모와 예수와의 대화에서는, ‘성령으로 난다’는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바람이 분다’는 비유가 사용됩니다(요3:8). 사도행전의 성령강림에서도, 성령은 바람 같은 소리로 경험됩니다(행2:3).
바람은 움직이는 공기, 흐르는 공기입니다. 흐르지 않고서는 바람이 되지 못합니다. 숨 역시도 인체 속으로 드나드는 공기의 흐름입니다. 머물러 있거나 갇혀 있는 것은 바람도 숨도 될 수 없습니다. 흐르지 않는 바람은 죽은 바람이며, 숨이 흐르지 않는다면 죽은 생명입니다. 열려 있어야 흘러갈 수 있고, 어디론가 향하지 않고는 움직여갈 수 없습니다. 성령은 그러한 바람이며 숨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누군가에게 소유되지 않습니다. 소유는 저장이요, 저장은 흐름을 멈추었다는 의미입니다. 멈춘 물과 바람이 그렇듯, 멈춘 성령은 생명의 영이 아닙니다.
흐르는 물이 생수가 되듯, 흐르는 바람은 생기가 됩니다. 그 생수와 생기가 성령입니다. 성령을 소 더 나아가, 흐르는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고 배를 움직여갑니다. 흐르는 바람도 풍차를 돌리고 전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바, 성령은 능력이며, 그 능력으로 생명의 일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생명의 삶을 살아갑니다.
멈추지 않는 강처럼, 갇히지 않는 바람처럼, 성령은 우리를 움직여가도록 이끄시는 힘입니다. 인간이 닫아놓은 것을 여시며, 막아놓은 것을 허무시며, 벽을 넘어, 부단히 새로움으로 향해 나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천지의 간극을 넘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절,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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