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사촌 언니
유년시절 한동네에 살았던 고종사촌 오빠네 집은 작고 아늑했다ㆍ
외삼촌인 우리집은 딸이 네명에 끝으로 아들 하나였는데, 언니는 삼형제를 두 살 터울로 낳아서 엄마를 주눅들게 했다ㆍ
고종오빠의 큰아들이 나와 또래였는데, 집안의 규율을 엄격하게 따지는 아버지 덕분에
나는 어린시절부터 아줌마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ㆍ
학교에서도 조카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큰소리로
"아줌마, 아주~~줌마ㆍ'
외치곤 했다ㆍ우우 하는 남자아이들의 놀림소리가 뒤따랐다ㆍ
얼굴이 벌개지고 그 창피함이라니!
초등학교부터 줄곧 반장, 부회장을 하며 학교에너 이름 날리던 내가
조카의 그 소리에 얼굴 빨개지며 주눅이 들곤해서 둘이 되었을 때, 주먹을 쥐며 화를 내곤 했다ㆍ
그래도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리던 그애는 축구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려서
인기가 좋은 남학생으로 성장했다ㆍ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고종사촌네는 아이들 교육을 내세우며 도시로 이사를 가버렸다ㆍ
늘 마주치던 작은 동네에서 그애가 사라져서 허전해서 그애의 집을
서성이곤 했다ㆍ친척과는 다른 빛깔의 유년의 허전함이었다ㆍ
바쁜 세월속에서도 초등학교 동문회 등의 행사에서 잠깐 얼굴을 보는 것으로 세월은 흐르고,
그애는 결혼해서 딸만 셋을 낳아 콩알콩알 산다고 우리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ㆍ아랫동생이 제역할을 못하고 살고,
막내는 지병으로 가버려서 맏이인 조카가 집안을 짊어지고 사느라 고달파보였다ㆍ
등을 툭툭 두드려 주는 것으로 마음을 전달했다ㆍ
조카가 여자였다면 팔짱 끼고 다니며 절친이 되었을텐데 가끔은 아쉬웠다ㆍ
군대시절 휴가 나와 술 사주고, 용돈 주었던 기억이 남아있다ㆍ선배의 고된 구타에 그 착한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던 20대ㆍㆍㆍ
우리 큰애 결혼 때, 부부가 예까지 와서 축하를 해주어서 고마웠다
선하게 생긴 각시였다ㆍ 다행이었고 안심이 되었다ㆍ
엊그제 전화가 왔다ㆍ
"혹시 큰 딸이 결혼하니?"
요양원에서 10년 째 계시던 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ㆍ
고민이 되었다 달려가서 손잡고 위로를 해야하는데 내일 우리 손녀가 백일이었다ㆍ
나날이 자라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며 백일반지를 사놓고 기다리는 중인데ㆍㆍ
균에 약한 신생아에게 아무래도 좋지 않을 듯 해서 부조금만 보내고 다음에 위로해 주기로 했다
못가는 마음을 얹어 부의금은 두 배로 보냈다ㆍ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ㆍ
어제 산길을 걸으며 고인을 생각했다
고종사촌 오빠집에 가서 잠을 자고
언니가 차려 준 밥을 맛있게 먹었던 추억이 새로웠다ㆍ
약간은 극성스러웠던 언니의 성격탓에 외숙모인 우리엄마와는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ㆍ
그러나 우리는 신나게 놀며 자랐다ㆍ특히 조카와 나는 또래라서 친근함이 많았다ㆍ
직장생활을 할 때, 연수를 받느라 일주일 가량 신세진 일이 있었는더
언니는 내옷과 굽 높은 구두를 신기해하면 신어 보시곤 환하게 웃던 기억이 난다ㆍ
남자들 속에서 사셨으니 어떤 소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오늘 먼 길 떠나는 조카의 엄마, 고종언니를 위해 기도한다ㆍ
'사시느라 고생하셨어요.
돌아보면 제게 고마운 분이셨어요
이제 편안하게 영면하세요 언니'
2024, 2, 29
자투리 모아 하루를 만든 날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