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그런 지각기관에 의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자아를 인식하는 능력을 얻었을 때에만 자기 물질체 밖에서도 지속적인 자아를 인지할 수 있다(비밀학 개요, 2024, 99)."
우리나라의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것은 참으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동안 일본, 중국은 여러 차례 받았으나, 단 한번(평화상 외)도 받지 못한 우리는 다소의 열등감과 패배의식이 가슴 한켠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것이 늘 아픈 상처에 생채기로 남아있었는데, 그것을 단박에 깨뜨려준 쾌거이다. 그런데 한강 작가는 어떻게 그렇게 쓸 수가 있었을까? 이것이 질문이다.
필자는 맨부커상을 받은 '채식주의자'를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언론에서 화제가 되기에 빌렸는데 읽으면서 재미가 너무 없어서 그냥 책장만 넘기다가 반납하고 말았다. '세계적인 상을 받은 이유가 뭘까'란 생각, 통상 '일반적인 글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만 했을 뿐 더 이상의 생각이나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그때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그러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첫째 글이 시적으로 압축되었다. 압축되다보니 읽는 사람이 그 의미, 압축을 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둘째, 시적으로 압축되니 그 문체가 통상적인 글과는 다르다. 예컨대 칼을 시퍼렇게 갈아서 비수로 만든 후에 쓴 듯, 한자 한자가 가슴을 찔렀다. 그러니 한강 작가의 가슴에서 얼마나 다듬고 갈았을까. 짐작이 되기도 어렵다. 과거 어디에서도 누구에게서도 이런 문체를 보지 못했다. 이것을 스웨덴 한림원이 주목한 듯하다. 셋째, 역사(?)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모습을 다시 소환해서 드러냈다.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식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넷째, 짐작하기에 한강 작가는 이런 생각을 다소 꿰뚫어 본 듯하다. 그래서 5 18, 4 3 사건을 주제로 한 듯.
여기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정신의 수준, 그 단계이다. 처음에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한강 작가의 '시적 산문'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통상적인 글이 아니다'라는 사실만 파악한 수준이었다. 요컨대 산문을 시적으로 쓸려면 글을 얼마나 갈고 닦아야 하는지 감도 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것을 스웨덴 한림원에서 파악한 것이다. 역시 세계적인 수준은 정신의 수준이 높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인류를 이끌어 나간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이제나마 그런 사실을 알 게 된 것은 조금이나마 필자의 정신 수준이 높아졌기 떄문이다. 역시 중요한 것은 정신의 수준이 높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먼저 자신의 정신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것, 이것이 핵심이다.
정신의 수준이란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인식하는 능력, 방법이다.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지각기관으로부터 인식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체 바깥에서 인식하는 방법(능력)이다. 물질체 바깥에서 인식하는 그 자체가 능력이다. 지각기관으로부터 자아를 인식하는 능력은 모두가 태어남과 동시에 얻은 능력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진다. 반면 지각기관이 아닌 물질체 바깥에서 인식하는 능력은 정신기관이 발달한 결과 얻는 능력으로 반드시 노력을 해야 얻는다.
물질체 바깥에서 자아가 인식한다는 것은 물질체에 매이지 않고 자아가 인식하므로 당연히 그 수준이 높다. 왜냐하면 자아가 물질체에 매이면, 지각기관에 매이면, 지각기관에 투영되어서 나오는 인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물질체 바깥에서 자아를 인식할 것인가. 그리고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크게 보아 명상과 집중이다. 정신을 조야하게 말하면 길가에 난 한포기 풀과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연약하고 여리고 그러면서도 강인해서 쉽게 꺽이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인류를 이끌어 가고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 그것이 정신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정신이 보이지 않으므로 드러내기는 참 많이 어렵다. 그 드러내어서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내가 그런 상태인지 살펴보아야 하고, 자신을 그런 존재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정신의 속성이 예술과 같으므로, 예술을 하면서 정신을 발달시킬 수가 있고, 반면에 정신기관을 발달시켜 예술로 드러낼 수도 있다. 슈타이너의 방법은 인간의 정신기관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이번 주제는 자아가 물질체에 매이는 것이 통상인데, 물질체를 벗어나는 방법이다. 조야하게 말하면 초감각적인 세계에 자신의 자아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자아는 원래 초감각적인 세계에 연결이 되어있는데, 그것이 무의식세계에서 이루어져서, 의식세계에서는 감춰져 있다.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 호흡(명상)을 통한 방법이다. 호흡은 인간의 생명기관과 바로 연결되어있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존재는 에테르체이다.호흡을 통하여 에테르체에 연결이 되는 방법인데, 문제는 호흡에 집중해서 물질체인 육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어렵다. 통상 노력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만큼으로 어렵다. 수많은 선지식이 여기에서 좌절하였다. 또 한번 연결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계속 연결되지도 않는다. 계속 연결이 될려면, 정신세계의 속성인 한 포기 풀과 같은 존재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때 스승이 큰 도움이 된다. 육체를 벗어나 정신세계에 연결된 스승이 옆에 있으면, 정신의 속성으로 정신은 흐르므로 그 정신에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존경심, 경외와 같은 감정이 반드시 있어야 정신세계에 연결이 된다. 슈타이너가 말하기를 어린 시절에 존경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아이는 커서 정신세계에 연결될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조수미 선생님 역시 어릴 때,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의 초상화를 자신의 방에 붙여 놓아서 후일 카라얀을 만날 때, 마치 늘 만나던 사람처럼 친근감이 들었다고 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연결되는 것, 들어가는 것이다.
정신세계에 들어가는 길은 쉬은 일이 아니다. 평생을 걸어도 들어가지 못하는경우도 아주 많다. 그런 사람은 이번 생에서 준비해서 다음 생에서 다시 시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내심, 굳은 의지, 성실함, 흔들리지 않는 내적 평정을 갖추고 온 몸과 마음을 모아서 집중해야 한다. 하물며 짜증과 분노와 감정 등을 지니고 있으면 당연히 안된다. 정신세계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아주 여린 감성과 진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한강 작가, 조성진 피이니스트, 임윤찬 피아니스트 등등이다. -길가에 난 한포기 풀과 같은 감성을 지녔다-.
문제는 이 관문, 육체를 벗어나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승을 통하거나 성인(위대한 사람)들의 경전을 읽는 것 등등이 도움이 된다. 성인들의 경전을 읽으면, 정신세계의 파장인 에테르의 파장이 내재해 있다. 그것이 정신세계의 파장이기 때문에 그들의 경에는 그 흐름이 들어있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정신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그 파장을 지닌다. 그러므로 정신세계에 들어간 사람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이비 종교의 전도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혼자서도 정신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는데, 굉장히 어렵다. 얼마나 어렵냐고 하면, 만명의 사람 중에 한 명 정도가 들어간다고 한다.
결론은 정신세계에 얼마나 나의 자아가 연결되어있는지 그 수준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통상 자신의 정신기관이 잠을 자고 있는 경우도 아주 많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정신기관의 잠을 께워야 한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노래는, "노래를 부를 때에 전개되는 본질적인 것은 에테르체의 활동입니다(청소년을 위한 교육예술, 2023, 75)." 그러므로 자신의 에테르체를 알아야 에테르체를 활동시켜서 노래를 부를 수가 있다.
에테르체는 우주적 파장, 우주적 리듬인데, 지구 음악 속에 들어있다. 음악 속에 들어있는 리듬을 통해서 나의 에테르체에 우주적 리듬을 연계하고, 그 리듬을 다시 나의 에테르체에 활동시키는 것이다. 그럴려면 노래를 굉장히 많이 불러야 한다. 하지만 나의 에테르체를 안다면, 자신의 에테르체를 활동시키면 된다. 훨씬 쉽다. 반면 음악을 통해서 들어갈려면 캄캄한 암흑 속에서 헤맬 수가 있다. 먼저 음악을 좋아하는 것자체도 정신에 연결되어야 한다. 결국은 정신세계에 연결되는 것이 자신의 삶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지각기관에 의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자아를 인식하는 능력을 얻었을 때에만, 자기 물질체 밖에서도 지속적인 자아를 인지할 수 있다 (비밀학 개요, 2024, 99)." 거기서 부터 예술이, 자신의 분야에 창조적인 작품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