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걸 선생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님도 뵙고 싶었답니다
토지 작가 박경리 님은
최서희
최서희여인의 이야기 즉 성장 과정이 최 애두리의 성장과정과 유사한점이 많아서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최 애두리 어머닌 최애두리 아버지최상섭님께서 일찍 타계하시어 너무 애닯아 애두리랍니다
그래서 최애두리 어머니 천석궁의 딸 김여인은 팔자가 기구 하셨
던 모양입니다 아들이 없으면 그 문중은 그 집안사를 양자에게 넘기게 되나요?
부잣집 딸 김여인이 다른사람에게서 낳은 딸이 시집간 서씨집안은<서낭당골>신대마을
아주 곤궁한 궁핍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그의 딸이 낳은 딸도 양씨집안으로<비봉실> 시집을 갔는데
그집 역시 아주 궁핍했다 그의 아들이 재국? 아무튼 그랬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뿐 기정사싷이 아니기에 묵묵이 바라만 보았습니다
이젠 조정래 선생님께 공개적으로 여쭈고자 합니다
태백산맥
한장수님 누구십니까?
그분의 아드님들은 대한민국사를 어떻게 보내셨나요?
그분은 일제 강점기에 어떤일을 하셨습니가까
들으셨습니까?
만나뵌적이 있으셨습니까?
혹여 만나 뵌적이 있으셨다면 언제이신지요
혹여
만나뵌적이 대략 몇년도 이신지요
혹여
한쪽 수족이 바르르떠시던가요?
그렇다면
여순반란 후 겠지요
어디인지 모르나 그 분이 끌려가신곳이 어느 기관이신지요
그곳에서 심한 고초에 시달려 그렇게 되었다지요?
어느 몹시도 추운 겨울날
6.25전쟁이 끝나기 전? 후? 그시기에
곧바로 집에도 못 오시고 나뭇잎쌓인곳에서 잠이 드신 모양입니다
머리에 새똥이 뭍은게 역렬한데 애잇 애잇 차 암 재수없게 새가 날아가다가 똥을 싼게 하팔이면
당신의 머리란게 기분 나쁘다고 투덜거림의 그 여유와 허세
그리곤 몇일 후 가픈 숨을 몰아세시다가 돌아가셨다지요
선생님
요 며칠전 무슨 드라마에
대한민국 사에
남산으로 끌려가서 심한 고초에 시달리며 자필이력서를 계속쓰게 종용하는걸 보았습니다
선생님
책속에 한장수님이 누구십니까?
선생님 답좀 해 주세요
이젠 공개적으로 답좀 부탁 드립니다
그 어르신은 1933년도에 양지개 큰동네에 박콩집을 성주하시어 들어 가셨답니다
그리곤 그 곳에서 그의 가족들은 클레멘타인 노래를 브르시던 기억
그의 딸은 그 노래를 기억하시며 불려주셨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중후반에
공책에 흑심<연필>으로 글을 써 내려 갔습니다
장댓비가 내려서 곡식이 다 떠내려가도 꼼짝없이 바삐 바삐 글을 써내려갔습니다
그곳은 별량면 덕정리 백동마을 정재앞 옹달샘이 있는 오막살이였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책 한권을 써 내려가신 실력자께서 그렇게 급하게 바삐 써내려가셨다면
그 용도는 무엇이 겠습니까?
순천을 근교로 잡지사나 신문사를 뒤적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잡지는 아닌것 같습니다
분명 신문 연재소설 같습니다
아님 아드님이 급하게 위험한데 어딘지 모르게 떠나게 되나요?
그래서 급하디 급하게
마지막 유언마냥?
그의 아들들은 다 어데에서 일제강점기를 보냈나요?
그의 가족을 아시나요?
무슨일이 있으시면 아들들부터 가둬서 찾아오시길 바래며 일본에 협조를 요청하셨나요?
아님 학교문제로 집에서 못 사셨나요?
그렇더래도 그의 동생은 알게 해야 되잖아요 그의 부인 어머닌 알고 계셨을까요?
워낙 과묵 하신 분이라잖아요
수수께끼같은 세상에 수수께끼같은 가족사
그래서 순천 지방에선 그의 가족사를 더 의구심?
그러더가 여순 반란
순천은 그의 아들들을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 가지고 놀았나?생각 합니다
지금 21세기에서서 도
서슴치 아니하고 주무르고 있답니다
죽은 영혼이신데 그려시면 안되잖아요
이젠 그의 가족이라는 집단에서도
잊지않고 가지고 논다는군요
그의 딸이 죽고 없는데
그의 딸 동서지간과 며느리가 제각각 우습고 창피한 가족사의 한 모퉁이에서
거둬차 버리고 싶노라
더려운 피 까지 논한다지요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의 수근거림을 무얼로 대신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소문에
아무 꺼림없이 쌩뚱하게 내 퍁아도 보았습니다
1922년생도 있다던데요?
그분은 순천에 계시지않으셨는데 이제와서
또다시 순천이! 대한민국이!
저도 모릅니다 찾고 싶어도 당신들이 더 무섭습니다 엉엉엉엉 했습니다
그 분의 피붙이가 생존하셨음 걱정스럽고 두려운가 봅니다
허나 제 허세일뿐 그 뿐입니다
군수집에 개가 죽었는데 조문자가 그집에 많이 모였는데
군수가 죽으닌까 조문자가 겨의 없드래요 겨의
해방전
그분은 아드님들보다 더 일찍히 집에 오셨답니다
해방전 일년전에 오신것 같습니다 1944년 7월초에 오셔서 창씨개명이 아니신 호적을 만드셨습니다
해방을 미리 짐작 하신 모양입니다
구룡역 동네에 덕정이라는 호로 학당을 열어서 아드님들을 기다리셨다지요
그래서 한재훈님은 그분의 자가 <어린애때에부른 이름 덕형이라고 했다기에 족보를 보니
형도 되고 정도 되는 덕정이였습니다
그리고
혹여
박경택님을 아시나요?
선생님 제발
남겨 주세요 그분이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선생님
이젠 밝히셔도 되잖아요
그의 손주가 돌아가시기전에 당신의 가문사를 알아야 되잖아요
그의 손주가 학교를 못가신 이유를 이젠 당당하게 그의 자녀들이 알고 보듬으셔야 되잕아요
그리고
이나라가 난리 아닌 난리가 나진 않겠지만 그걸 거울삼아 절대로 .......
그의 손주는 자녀들 앞에서 좀더 떳떳해야 되잖아요
그분의 손주는 남들 구구법을 배울시기엔 백동마을에서 순천까지 다 찢어진 고무신을 신고서
맨발같은 모습으로
아이스케끼를 받아다가 파셨답니다
기차는 돈이 없어서 못 타고 걸어서 걸어서
마치 우리나라 아이가 조기유학 한답시고 시카코에서.....그리고 그래서 미시피시 강줄을 따라따라 걸어서 걸어서 <차가 세우며 타라하면 무서워서 걸어서 걸어서 1시간이상 걸어서>
집밥같은 어머니 와 같이 먹고싶은 송아지갈비구이를 먹으러 다녔다는 가슴아픔보다 더 한 아픔입니다
그 고생 고생으로 팔 병신이 된 노파와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합니다
그의 손주는
배가 고픈걸 물로 배를 채워가며 사셨답니다
그래도 애두리가 낳으신 趙가님이신 큰아버지댁에서
일을 도와 얻어온 찬밥 한덩어리는 아주 휼륭한 만찬이었고 고마웠답니다
현재
그의 손주는 피키슨병에 시달리고 허리까지 수술하시어 힘든 생활을 하신답니다
무엇보다
전혀 학교를 못 다니셨기에 일반상식이 많이도 부족한데다가
약간의 귀가 이상증후군으로 <노인성? > 그의 부인도 힘들어 합니다
대한민국은
하물며 외국국적의 사람들에게도 한글공부며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분도 도움이 갈 수 있으신지요
어렵겠지요?
선생님
그의 손주가 알고싶은 마지막 한마디를 남겨 주세요
당신의 할아버지가 어떤분이시며
당신의 아버지와 삼촌들이 어떤 분이신지는 알고 싶답니다
여순반란 이전에
구룡역에서 학당을 열어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다지요?
덕정이란 이름으로 학당을 여셨다지요
아드님들을 그렇게 기다리셨다지요
그때 만나신분이 한지섭님면장님의 아드님이신 한재훈님도 제자이셨다지요
정녕 양지개 큰동넨 구룡역에서 내려 양지개 큰동넬 가나보죠? 아님 어떠한 연고가 있던 모양입니다
혹여 그 곳 서당에훈장님들이 시기하시진 않으셨을까요?
뭔가 가 이상 합니다
趙가들의 행패?
조례동과 왕지동에선 훈장님들과 주민들이 대 찬성하셨고 응원 하셨다는데요
사범학교를 추진하셨고 그의 대비로 민족교육과 함게 가르침에 대 찬성하셨다는데요
그러나 얼마 못 가셔 아들님들이 총상으로 돌아가셨노라 하시더군요
둘째 아들은 순천땅을 영영 못 밟으셨을까요?
아님 ???!!!무섭습니다
딴나라당과 지만원님이 더 무섭습니다
그리고 장좌리 바닷가 박경택님 따님이신분<첫째부인?> 그리고 당신의 증조할머니 최운옥님의 묘소를 이장하려는데
정확성을 못 찾는답니다 그분의 손주는
별량면 면장님의 아드님이신 고 한재훈님의 도움으로 조상찾기에 도움을 많이도 받았답니다
양지개 큰동네 그 주소지의 의문도 풀고 싶은데 아쉽답니다
그의 딸이 말하는 과동 큰댁의 비밀도 풀고 싶답니다
봉림리 는 벌교도 있구요 별량면에도 있답니다
본디 양지개 큰 동넨 동초면이라지요 순천군
지금은 벌교이지만
그리고
1930년대 초반에서 중반사이에 그 근교 중학교는 현재의 매산중학교만 있었답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공부한 곳도 알고싶고 교우도 알고 싶답니다
다 돌아가셨겠지만 흔적을 찾고자 합니다
매산중학교 교사분중에 고산병원장님도 계셨다지요?
매산중학교는 빨리 문을 닫았으며 순천에선 더 공부하고싶으면 광주 농업학교로 가셨다지요
그 사실은 그 당시 매산하교다니시던 가족이나 그 분들에게 들었을 뿐 입니다
제가 좀 더 빨리 무언가를 알아챘더라면
그 매산학교 사정을 알았을텐데 아쉽답니다
다 돌아가시고 난뒤에 알았답니다
2년을 다니셨더군요 중등과정을
1920년생이 17살때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는데 그해에 졸업하신 것 같습니다
주로 부잣집 도련님들이 다니셨드라구요
전 그분들을 세분만 알고 있답니다
두분은 1920년생 그리고 다른분은 정확한 나이를 모른답니다 아마 동갑일걸요?
차후에 매산학교에 여쭈엇습니다
학교에 화재로 ??
다 소실되었노라고
이상합니다
별량면 면사무소와 매산중학교가 화재
그리고 사범학교가 페교
순천은 그런가? 봅니다
그리고 아프답니다
1930년대 중반에
국어책을 만드시려고 지리산행을 하셨다지요
그 이유만으로
여순반란 이후에
운동마을엔 군인들이 그분의 주변인들을 잡아들이려고 했다지요
모두들 숨고 무서움과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의 딸을 마을에선 다들 다독여 주시고 안아 주셨다지요
나쁜 군인들! 하며
나쁜 위장 국군들 !
그러나
별량면과 해룡면사람 음 음 휼륭하신 민주경찰님들의 대단한 민주주의 선봉에 제 앞이 흐려집니다
그의 마지막 제자중에 가장 아끼시던분이 6.25전쟁시에 구레경찰서에서 <전투경찰>로 전사하심
그의 형<그분도 마지막 제자분>별량면 덕정리 백동오두막에서 휼륭하다는
민주경찰의 발탁으로 파아란 경찰복을 입게되며....
아픔니다 아픔니다 그 아픔은 대한민국에 묻고 싶답니다
대한민국아
대한민국아
그의 마지막 제자분이 파란경찰복을 입고서 선임들에게 배운 민족의식은 비참했습니다
이젠 풀어주셔야지요
이젠 사실을 사실대로 풀어 주셔야지요
그의 딸 이웃에 사시던
그분의 장남과 같은 직장인
차후엔 변전소 소장님을 하신분은 늘 뼈돗친 말씀을 하셨다지요
그의 딸과
같은 동네에서 아니 이웃에 사시면서
그분의 딸을 얼마나 벌레보듯 하셨기에
파란경찰복을 입으셨던 분과 어울리시며
백로야 까마귀있는곳에 가지마라 를 물감으로 해석해서 논리적으로 해석하셨다지요
변전소에서 그의 아들을 놓고서 얼마나
얼마나 우습게 굴었는지 짐작이 간 이시각에
21세기에 서서
21세기에서서
부탁 드립니다
이젠 찾으려 해도 한장수 님의 일제 강점기에 쓰시던 함자를 알 수 없답니다
그 어르신께선 어떤 분이시며 일제 강점기에 무슨함자를 쓰셨을가요?
그의 따님은
그분의 아버지 어머님의 함자를 한문으로 쉽게 쉽게 응용하라??? 아니거든요? 절대로 아니랍니다
보성출생 같습니다 보성군 수중산에 선산도 있었다고 가르쳐 주셨답니다
주변에 고마우신 분들의 도움으로
그렇다면 한장수님은
평상시에
가난하시어 혼자서 혼자서 상 차람을 생략하신 채 성묘도 하신 모양 같습니다
그 분의 따님은 단 한번도 성묘를 간 적이 없노라 하십니다
한재훈님께서 제작 해 주신 족보의 원본도 보고 싶답니다
원본이 있었어야 제작이 가능 하잖아요>
일년 머슴살이를 해서 그 쌀을 다 갖다주고 얻어낸 족보라면 원본이 있을텐데 그 족보의 원본도 찾고 싶답니다
한장수 님의 딸이 기억하는 한장수님을 보좌해 주셨던 님은 뉘 신지요?
공개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첫댓글 백로야 까마귀 있는곳에 거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