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상사보(相思譜)
- 춘향별사(春香別詞) 3 -
곽진구
봄이 오면
녹음이 무성한 왕대 숲이 집안으로 들지 못하도록
골을 치고 돌담을 만들어 놓으면,
대나무는 그걸 알아차리고 더는 침범치 아니하고
담을 따라 어린 순(筍) 잡고 돌며
고운 댓잎을 반듯하게 뽑아 올리곤 합니다
담 하나 넘으면 그만인 것을,
그 짓은 차마 못하겠다고
뒷담에 서성이다가 돌아가곤 하는 것이
어디 말없는 저 대나무뿐이겠어요
보세요, 봄 향기에 이끌려 와선
더는 안되겠다고 마음의 금을 그어놓고
담 없는 담 너머에서
제 가슴팍만 쳐대 싸는 도련님,
도련님의 눈빛도 꼭 그러합니다
오작교 곽진구
하늘에만 있어야 할 다리가 땅에 내려와
버젓이 다리 행세를 하는 걸 보면
그도 그럴 듯해
까막까치는 하늘에 놓아두고
그 마음만 갖고 내려와
사랑하는 이의 눈과 눈 속에
화안히 다리를 놓고 있는 걸 보면
그도 그럴 듯해
봐라, 봄날 쑥내음 같은 아스라한 마음들이
다투어 다리를 건너 고운 눈빛 속에 숨는구나
덩달아 푸른 댓잎 같은 여린 비수의 끝도
슬쩍 내비추고
춘향(春香)과 이도령(李道令) - 김소월
평양(平壤)에 대동강(大同江)은
우리 나라에
곱기로 으뜸가는 가람이지요
삼천리(三千里) 가다 가다 한가운데는
우뚝한 삼각산(三角山)이
솟기도 했소
그래 옳소 내 누님, 오오 누이님
우리 나라 섬기던 한 옛적에는
춘향(春香)과 이도령(李道令)도 살았다지요
이편(便)에는 함양(咸陽), 저편(便)에 담양(潭陽),
꿈에는 가끔가끔 山을 넘어
오작교(烏鵲橋) 찾아 찾아가기도 했소
그래 옳소 누이님 오오 내 누님
해 돋고 달 돋아 남원(南原) 땅에는
성춘향(成春香) 아가씨가 살았다지요
다시 밝은 날에―춘향(春香)의 말2 - 서정주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랭이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아기구름 같았습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 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 때
나는 미친 회오리바람이 되었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님,
바닷물이 작은 여울을 마시듯
당신이 다시 그를 데려가시고
그 훠―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습니다.
그리고는 또 기인 밤을 두셨습니다.
신령님,
그리하여 또 한번 내 위에 밝는 날
이제
산골에 피어나는 도라지꽃 같은
내 마음의 빛깔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시집 <서정주 시선>, 1956)
춘향유문(春香遺文)-춘향의 말 3 - 서정주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예요.
(시집 <서정주 시선>, 1956)
춘향(春香) - 김영랑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문장>18호, 1940.7)
두견(杜鵑) - 김영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는 도루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적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서름을 피로 새기러 오고,
네 눈물은 수천(數千)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南)쪽 땅 너 쫓겨 숨은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긔한 네 울음 천(千)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이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고나.
몇 해라 이 삼경(三更)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웠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꼈느니,
무섬증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城) 밑을 돌아나가는 죽음의 자랑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봄 옥 속 춘향(春香)이 아니 죽었을라디야
옛날 왕궁(王宮)을 나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로 우시다 너를 따라 가시었느니
고금도(古今島)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많은 귀향길
천리 망아지 얼렁소리 쇤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띠웠을 제
네 한(恨)된 울음 죽음을 호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풀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생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었느니
아니 울고는 하마 죽어 없으리 오! 불행(不幸)의 넋이여.
우거진 진달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 산이 살풋 물러서고
조고만 시골이 흥청 깨어진다.
자연(自然)-춘향이 마음 초(抄) 2 - 박재삼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시집 <춘향이 마음>, 1962)
수정가 - 박재삼
집을 치면,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울 따름. 그 옆에 순순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5월의 노래 - 송수권
누이야 너는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가
오월의 저 밝은 산색이 청자를 만들고 백자를 만들고
저 나직한 능선들이 그 항아리의 부드러운 선들을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이야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네 사는 마을 저 떠도는 흰구름들과 앞산을 깨우는
신록들의 연한 빛과 밝은 빛 하나로 넘쳐흐르는 강물을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푸른 새매 한 마리가 하늘 속을 곤두박질하며 지우는
이 소리 없는 선들을, 환한 대낮의 정적 속에
물밀듯 터져오는 이 화녕끼 같은 사랑을
그러한 날 누이야, 수틀 속에 헛발을 딛어
치맛말을 풀어 흘린 춘향이의 열두 시름 간장이
우리네 산에 들에 언덕에 있음직한 그 풀꽃 같은 사랑 이야기가
절로는 신들린 가락으로 넘쳐흐르지 않겠는가
저 월매의 기와집 네 추녀끝이 허공에 나뜨는 날.
단오 - 이수익
음오월에도 초닷새 수릿날엔
아내여, 그대는 춘향이가 되라.
그러면 나는 먼 숲에 숨어 들어 그대를 바라보는
이도령이 되리라.
창포를 물에 풀어 머리를 감고
그대는 열 일곱, 그 나이쯤이 되어
버들가지엔 두 가닥 그넷줄을 매어
그대 그리움을 힘껏 밟아 하늘로 오르면,
나도 오늘밤엔 그대에게
오래도록 긴 긴 편지를 쓰리라.
하늘로 솟구쳤다 초여름 서늘한 흰구름만 보고
숨어 섰던 날 보지 못한 그대의 안타까움을
내가 아노라고……
그대 잠든 꿈길 위에 부치리라.
춘향의 노래 - 복효근
지리산은
지리산으로 천 년을 지리산이듯
도련님은 그렇게 하늘 높은 지리산입니다
섬진강은
또 천 년을 가도 섬진강이듯
나는 땅 낮은 섬진강입니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지리산이 제 살 속에 낸 길에
섬진강을 안고 흐르듯
나는 도련님 속에 흐르는 강입니다
섬진강이 깊어진 제 가슴에
지리산을 담아 거울처럼 비춰주듯
도련님은 내 안에 서있는 산입니다
땅이 땅이면서 하늘인 곳
하늘이 하늘이면서 땅인 자리에
엮어가는 꿈
그것이 사랑이라면
땅 낮은 섬진강 도련님과
하늘 높은 지리산 내가 엮는 꿈
너나들이 우리
사랑은 단 하루도 천 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