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 공동체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0장)
보내는 스승이 보냄을 받는 제자들에게 / 마태복음 10장
마태복음 10장 전체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도록 이스라엘의 고을로 보내시는 배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너희”(40절)라고 부르는 이들은, 예수께서 부르신 열두 제자(10:1-4)이면서, 예수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각 고을로 보냄을 받게 될 이들입니다. 시방 예수께서는 자신이 파송하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마태복음의 다섯 말씀 군(群)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10:5-42의 말씀은, 파송 받은 사도들이 무엇을 전파하고 어떤 사역을 해야 하는지를 지시하고(10:5-15),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을 것인지를 알려줍니다(10:16-39). 예수께서는 보냄을 받아 가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16절)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17절)는 예견도 덧붙여집니다. 또한 지난 주일에 읽은 바와 같이, 가족으로부터 단절되고(35절) 죽음 앞에 설 수도 있다(28, 39절)는 언급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이 많은 곳에서 배척받으리라는 뜻입니다.
환대에 대하여 / 10:40-42
그러나 제자들이 거부만 당하지는 않습니다. 나그네가 된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제자 파송 말씀의 마지막 주제는 환대에 관한 것입니다(10:40-42). 40-41절에 걸쳐 다섯 번 등장하는 동사 “영접하다”(dechomai)는 ‘맞아들이다’, ‘환대한다’는 의미로서, 길손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 음식을 접대하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포함하는 행동입니다.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9,10절)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여행하는 제자들은 전적으로 환대에 의존하여 생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환대 주제가 파송 말씀의 하이라이트에 놓일 이유는 충분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가장 빛나게 만드는 특별함이 그의 환대에서 발견된다는 점은 두루 알려진 사실입니다(창18장).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전통은 율법에서도 그렇거니와 그리스도교에서도 사랑의 구체적 길로 강조됩니다. ‘최후의 심판’으로 알려진 비유(마10:31-46)에 의하면, 구원과 심판을 가름하는 유일한 기준은 ‘환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빈손의 나그네로 보냄을 받은 제자들을 영접하는 일은, 권장할 만한 선행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자 믿음의 척도이며 그리스도인의 필수입니다.
그런데 난점이 있습니다. 이 환대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나그네(손님)들을 영접할 주인(host)이 아니라, 환대를 받아야 할 객(guest)입니다. 다른 이의 환대가 필요한 그들에게 “환대를 잘하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방문을 받는 다른 이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지, 나그네로서 타인의 집을 방문해야 할 제자들에게는 적절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길 떠나는 제자들에게 하셨다면, 그 상황에 맞추어 이 말씀을 뒤집어 해석해야 합니다.
환대가 필요 없는 세상 : 환대로 세워지는 천국
남의 도움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성서 시대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가난을 대표하는 부류였습니다. 환대에 의존해야 하는 삶을, 세상은 박복하고 비루하다고 여깁니다. 세상에서는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권장되고, 도움을 받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일이 기림을 받습니다. 환대가 필요한 처지는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환대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긍정됩니다. 따라서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소유하고, 나누어줄 만큼 더 소유하는 삶이 치하를 받습니다. 이러한 논리에 편승하여, 교회도 많은 소유를 복으로 가르치고 환대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삶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철저하게 환대가 필요한 삶으로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최소한의 필수품조차 챙길 수 없는 제자들은 환대에 의존해서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광야 속으로, 즉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의미도 그렇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완전무결한 신이 부족투성이의 인간, 즉 환대가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복(福)은 환대가 필요한 삶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도, 심각한 기근 중에 살아가는 엘리야도, 마구간에 태어나신 예수께서도 환대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만나와 가난한 과부와 들판의 목자들로부터 환대를 받는데, 그 모든 환대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요, 구원입니다. 팔복(마5:3-12) 중에 으뜸이 가난한 자들의 복이라는 사실은, 천국이 절대적으로 환대의 법칙으로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드러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이 환대에 의지한 삶을 산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천국은 노력과 능력에 따른 많은 소유로 유지되지 않고, 전적인 환대에 의해 살게 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구원 사건인 환대 (40절)
사실상, 환대는 사랑의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일이었던 ‘천지창조’는 모든 생명을 위한 터전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환대 행위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광야로 뛰어든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환대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곧 환대임을 보여주는 예입입니다. 율법에서 ‘(과부, 고아와 더불어) 나그네를 영접하라’는 명령이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은 그 환대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베푼 환대는, 개인의 선행을 넘어 주님의 구원에 닿는 일입니다.
환대가 구원 사건인 것은, 환대는 어떤 한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보낸 분을 영접하는 일입니다. 제자들을 각 고을의 사람들에게로 가도록 보내신 이는 예수이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영접하여 맞아들인다면, 그는 예수를 영접하여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여 맞아들인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선언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요1:12) 사건입니다.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를 보내신 분인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40절)임을 감안할 때, 이는 그 자체로 구원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비유에서도, 병든 자와 갇힌 자와 헐벗은 자들을 환대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구원 사건으로 간주됩니다.
환대에는 상이 있다 (41절)
환대에는 상이 있습니다(41절). 상(misthos)이란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는 것으로서, 은혜(선물)와는 다릅니다.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고, 의인은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5:12) 거절당하고(13:57) 죽임을 당하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고(13:43)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25:46). 예언자와 의인을 환대하는 사람은 예언자와 의인이 받을 상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 양식을 가지고 엘리야를 환대한 사르밧 과부와 그의 아들은,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매일 함께 먹는 상을 받습니다(왕하17:8-16). 그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주시는 것인데, 엘리야를 환대한 과부와 아들이 함께 받습니다.
사실상, 예언자와 의인을 영접하는 이들에게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자가 받는 미움과 의인이 받을 박해를, 그들을 영접하는 이들도 함께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예언자와 의인을 영접하는 이들이 누릴 보상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환대한 이들과 함께 거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환대한 사르밧 과부가 받는 진정한 상은 엘리야가 과부의 집에 거하게 된 것이지요. 제자들은 자기를 환대한 사람과 함께 거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과 거하는 이들은 예수와 거하게 되는 셈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임마누엘 사건은 그 자체로 구원입니다(마1:21; 28:20). 환대에 의한 상으로 무엇이 주어지든 간에, 우리가 환대한 이들로 말미암아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최고의 상입니다.
작은 자와 냉수 한 그릇 (42절)
다른 곳에서, ‘작은 자’는 업신여김을 당하는 어린아이를 가리키기도 하고, 무시당하는 비천한 이들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여기서 작은 자는 제자, 즉 절대적으로 환대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처럼, 비천한 작은 자로 세상에 보냄을 받습니다.
냉수 한 그릇이 넉넉한 환대가 되는 것은, 그들이 작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지체 높고 부유한 이들을 환대하기 위해서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마련한 향연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 마지막 끼니로 먹을 밀가루와 조금의 기름, 냉수 한 그릇으로도 부족함 없는 환대가 되는 것은, 큰 자들이 아니라 작은 자들의 성찬이요, 많음이 아니라 다함 없음의 기적으로 지속되는 환대이기에 그렇습니다. 부유하고 강한 이들을 환대할 능력을 지닌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가장 비천한 나그네가 되었기에, 가난한 이들의 냉수 한 그릇이 충분히 상 받을 만한 환대가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도움이 필요한 작은 자들을 환대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환대가 필요한 작은 자들로 세상 속에 살아가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는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은 환대가 필요한 연약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심으로써, 세상을 위한 구원의 길이 되셨습니다. 그분을 영접한 이들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요3:16). 환대가 필요한 이들로 인해 환대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고, 이는 세상을 환대하시는 구원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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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환대를 많이 베푸는 능력과 덕을 펼치는 데에 있지 않고, 환대가 필요한 이들로 살아가라는 데에 있습니다. 누구나 환대를 베푸는 자리에 서고자 하는 세상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기꺼이 환대가 필요한 나그네가 됩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환대하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와 같은 나그네의 삶을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환대가 필요한 이들이 환대의 불씨를 지피고, 환대가 발생하는 자리가 하늘나라임을 보여주는 공동체, 바로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