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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게임(2)
이성열 작
군 제대 후에도 바스씨는 조그만 개인회사에 다시 취직하여 아무 말 없이 네식구를 먹여 살렸다. 평범하게 생긴 아내 아이린과 프레드보다 네 살 위인 딸 쥬디가 그 가족 구성원의 전부였다.
그 속에서 노란 피부의 프레드는 마치 사자새끼들 틈에 끼인 한 마리의 표범새끼처럼 설음을 받으며 자라나야 했다. 누이 뻘인 쥬디를 비롯하여 동네 아이들이 그를 볼 때마다 “칭크” 또는 “잽”이라 부르며 지분거렸다. 처음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던 프레드는 점차 자라나면서 그 말이 동양인, 즉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을 멸시해서 부르는 호칭이란 걸 알았다.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그런 호칭으로 불릴 때마다 노란 피부를 가졌기에 가슴에 한으로 와 맺히는, 자신을 멸시하고 놀린다는 사실에 어린 마음을 썩히며 자라나야 했다.
“헤이, 잽! 네 나라로 돌아가!”
“칭크! 우린 노랑개미가 싫단 말이야!”
동네 아이들이 그를 그렇게 놀릴 때마다 그는 대들어 덤비고 싸워도 보았지만 원체 자신의 편이 없었으므로 객지에 떨어진 한 마리의 낯선 개처럼 외로운 싸움이 될 뿐이었다. 심지어는 쥬디 조차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아이들과 합세했다.
“스투핏(이 병신아)!”
밖에 나가 싸워서 얼굴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들어오면, 그녀는 주먹으로 그 상처를 쥐어박으며 그를 나무랐다.
그렇게 자라난 프레드가 이곳에서 무상교육인 고등학교 교육을 마치자 아무도 그의 대학 진학에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진학을 꿈꿀 수 없게되자 그는 그만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야 이제부터 자신의 보금자리를 일궈나가게 되겠고, 그 길이 바로 이 미국에서 평범한 인생들이 살아가는 전철이었다. 이미 집에선 누이인 쥬디 마저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에서 만난 남자에게 팔려 가출을 하고 난 후였다.
그는 무상으로 학교가 있는 곳엔 어디에나 널브러져 있는 성인기술학교에 등록했으며 그곳에서 통신에 관한 기술을 습득했다. 본래 그는 이곳 아이들과는 다르게 성격이 소극적이고도 치밀한 편이었으므로, 처음 배우는 기술이었지만 적성에 맞았는지 금방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 년여의 과정을 마친 후 그는 일자리를 찾아 나서자마자 곧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그리고 처음 몇 년 동안 열심히 돈을 모아 자신이 원하는 중고승용차 한 대를 구입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은 그의 꼼꼼한 성격대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같은 회사에서 만나게 된 프레드는 이 미국 사회의 지각생 장기선 씨에게 늘 호의를 가지고 대해 주었다. 그의 외모는 이곳에서 성장한 탓으로 뼈마디가 굵고, 또 피부색깔이 검으며, 머리통이 컸다. 그는 그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길게 길러 뒤통수에 질끈 동여매고 다녔으므로, 서부영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용감한 인디언이나, 쿵푸를 휘두르며 대륙을 누비고 다니는 중국인 협객쯤으로 보였었다. 그래서 장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지나치는 그를 만나면 “하이!” 정도로 가볍게 인사나 나누는 정도였다.
그런데 하루는 화장실에서의 일이었다. 장씨가 소변기에 바싹 붙어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어느새 그가 옆에 들어와서 같이 소변을 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 혹시 한국 사람 아니오?”
“그렇소 만......,”
“나도 본래 태생은 한국이요.”
“아-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성씨가 바스란 말이요?”
그 물음에 그가 머뭇거렸고, 장씨가 다시 농담을 섞어,
“남자가 아내 이름을 땄을 리도 만무하고...” 하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건 나의 스텝 파더(양아버지) 이름이지요.”
“아, 그렇군-.”
그도 이를 허옇게 내놓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들은 말이 같은 회사에 다녔지 서로가 다른 부서, 다른 시간 조에서 일했으므로 서로가 가까이 대면할 시간이란 좀처럼 없었다. 단지 그는 항상 번쩍거리는 벤츠 승용차를 애지중지 몰고 다니는 별난 녀석이라는 것만 장씨의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그가 비록 한국인의 혈통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원체 그의 외모가 한국에서 자란 젊은이와는 다르기 때문에 장씨는 왠지 그렇게 친하게 굴지는 못했었다. 그저 그를 볼 때마다 어려서부터 사람이 취하고 사는 섭생이 사람 외모를 저렇게 다르게 만드는구나 라는 생각만을 금치 못하곤 했다.
그런 사실에 근거한다면, 어느 학자들의 주장처럼 이곳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조상이 혹시 한국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아주 신빙성이 없는 말은 아닌 성싶었다. 그 설에 의하면 대략 일만 이천여 년 전, 빙하시대에 아직 얼음이 지금처럼 녹아들기 이 전,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아시아 제국으로부터 <베어링> 해협을 따라 사냥을 위하여 북미 대륙으로 자연스럽게 건너오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들이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란 법도 없지 않은가? 비록 우리 한국의 기록된 역사는 반만년에 불과하다지만, 그야 누가 알겠는가? 선사시대에 벌써 우리 조상들이 미 대륙을 넘나들게 되었는지-.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근거는, 그들에게도 아기가 태어나면 엉덩이 부위에 검은 몽고리안 반점이 있다는 사실과, 그들의 여러 생활 습관, 또는 식기나 생활 도구 등이 우리조상의 것과 흡사한 점이 많다는 것 등을 들고 있다.
하긴 불과 4 살에 와서 25 여 년 좀 넘게 살아 온 프레드가 저렇게 본국의 젊은이들과 다를진대 몇 백년, 아니 몇 천, 만년을 살아 온 그들이 우리와 다르게 보이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라 생각되었다.
프레드가 조금 가깝게 되었을 때부터 그는 장씨에게 아주 친절을 다하여 대해 주기 시작했다. 언어 문제도 그렇고, 그가 먼저 발 디뎌 놓은 통신분야에는 단연 그 기술이 월등했으므로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는 일이 많았다.
나이로 따지면 장씨가 훨씬 연로해서 부자지간이라 해도 무리야 없을 테지만, 그야 이 사회에서 이제 겨우 이민 온지 10 년이 조금 넘는 이민 초년생 신세나 겨우 면한 셈이었다.
하긴 그도 결혼에 실패한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는 그 또래의 아들이 하나 있긴 있었다. 비록 그들은 고국에 살고 지금은 다시 재혼하여 그들과는 연락조차도 두절되고 말았지만, 그래서인지 장씨는 그를 볼 때마다 각별한 정 같은 게 통하는 바가 없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를 대할 때마다 자신의 잃어버린 아들 생각조차 문득 문득 하게 되는 거였다. 물론 그래도 그에게서 풍겨나는 이국정서가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건 장씨로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만 해도 프레드는 매일 매일 그런 대로 행복해 보였다.
그는 장씨를 만나면 무엇보다 그의 애인 이야기와 유난스레 보이는 자신의 승용차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미스터 챙, 당신 내 말 믿지요? 내가 9천 달라나 되는 돈을 저 차에 쏟아 부었단 말이오, 9천 달라-.”
“허, 미쳤군-. 9천 달라라면 새 차도 한 대 살 수 있는 돈인데-.”
“그렇지요, 작은 차라면 충분히 사고도 남지요. 그런 돈을 나는 저 차에다 들였지요. 제길헐, 다른 곳에 갔다면 아마 6천 달라라도 충분했어요. 그런데 나는 양질의 서비스를 원했거든요. 그래서 몇 천 달러를 더 투자했지요.”
“아무리 벤츠 라지만, 차의 뭘 고쳤는데?”
“엔진을 새로 바꿨지요. 차가 약 20만 마일을 뛰니까 엔진이 그만 힘을 못 쓰는 거예요.”
“헌 차에 그 많은 돈을 쏟아 붓다니-, 새 차도 아니고-.”
“글쎄요, 나는 내 차를 좋아하고, 매일의 필수품인 승용차를 위해서 그렇게 쓰지만-, 오래 쓰니까, 또 덕을 보고 있는 셈도 돼요.”
“하긴 새 차를 사도 그 돈은 들여야 하니까-, 당신이 만족하면야 누가 뭐라겠소? 그런데 참, 그 타이어 바뀌는 왜 그렇게 매일 문지르오?” 장씨는 이 때다 싶어 프레드에게 이렇게 그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아, 그건요-, 더러우면 고양이가 지나가다 오줌이라도 싸댈까봐 그렇죠.”
“내- 원, 이 나이가 되도록 고양이가 자동차 바퀴에다 오줌 눈다는 소리는 처음이군.”
“정말 싼다구요.”
“오줌을 싸도 그렇지-, 다 닳아 버리겠다.”
하긴 그는 그의 차를 너무도 사랑해서 어떤 미모의 여자와 데이트를 하다가도 그녀가 차를 빌려쓰자고 하기 때문에 그만 두었다는 소문까지 나 있었다. 그래도 10 년도 훨씬 넘은 그 헌 차에 거의 만 불 가까운 돈을 쏟아 붓는다는 건, 몇 천 불 짜리 낡은 포-드 차나 몰고 다니는 장씨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또 장씨에게 무슨 굉장한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새삼스레 이렇게 말했다.
“하이, 미스터 챙, 나 오늘 한국친구 하나 사귀었지요. 내 아파트 주위에서 장사하는 사람인데 내가 드링크를 하나 사러 들어갔더니 반기면서 다음에 또 오라고 라이터를 하나 주더군요. 바로 이거 에요.”하며 그는 부탄 라이터 하나를 꺼내 보였다.
장씨는 반가워하며,
“아, 그래요? 무슨 장사를 합디까?”
“리커(술) 상회 에요. 내가 그곳엘 자주 가는데도 전에는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래서 전엔 본 적이 없다고 했더니, 자기는 다른 사업처에 가서 있고, 그곳엔 가끔 나와서 볼일만 보고, 사람을 고용해서 운영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럴 수도 있겠지.”
“가만히 보니 그 사람 그런 가게가 여럿 있는 것 같아요. 돈도 많은 것 같고요. 어디 가나 한국인들은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버는 모양인데, 왜 당신은 이렇게 봉급쟁이 노릇을 하나요?”
“돈 많은 것을 어떻게 알았오?“
“그 친구가 그러는데, 나보고 언제 한국에 갔다 왔느냐고 하면서, 자기네 가족은 일 년에도 몇 번씩 한국에 간데요. 아이들도 다 사립학교에 보낸다고 했어요. 자동차도 최신형으로 몰고 다니더라구요. 자기 집에 차가 다섯이래요. 식구마다 한 대 씩-.”
“장사를 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나는 장사는 할 줄을 모르니까-. 그러는 당신은 왜 장사를 안 허나요?”
대답이 궁색한 그가 어깨만을 추슬렀다.
“그것 봐요. 사람은 다 자기에 맞는 직업이 있게 마련인 거요. 당신도 장사는 할 줄 모르듯이 나도 마찬가지요. 그러니 이렇게 봉급쟁이나 할 수밖에-. 그건 그렇고 당신 애인은 잘 지내고 있소?”
장씨는 장사를 잘 해서 돈 만 아는 한국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돈을 벌다가 강도의 총에 희생되고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그런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깃거리로 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물론 잘 지내고 있지요.”
프레드의 애인 켈리라는 백인 여자는 같은 회사의 다른 분소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만나서 수년을 넘어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고, 서로는 장래까지도 굳게 약속한 사이였다. 장씨도 두어 번 본 적이 있는 켈리는 동양 여성처럼 몸매가 아담하고 얼굴도 예쁘장한 편이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녀는 이미 결혼에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고 그 후에 프레드를 만났다는 것이다. 장씨는 왜 하필이면 총각인 프레드가 한 번 경험이 있다는 여자를 좋아하고 있나 의아해 했었지만, 이곳 사고방식으로는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고쳐먹게 되었다. 눈치를 보면 프레드가 그녀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그들은 이유가 뭔지 곧 결혼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 서로는 좋은 직장도 있고, 또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무런 아쉬움이 없었으므로 그냥 그렇게 친구로서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 가는 모양이었다. 하긴 결혼만 안 했을 뿐이지, 이곳 미국 젊은이들의 관계는 장씨의 상상을 훨씬 초월해서 살고 있을 터이므로, 아무런 불편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귀찮은 결혼으로 서로를 구속하며 살아야하는 것을 아예 한 물 간 낡은 제도로 비웃어 가며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그 젊은 나이에 벌써 쓰디쓴 이혼 경험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얼마 후 프레드가 고개를 숙인 채 장씨에게 와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장씨는 우선 그가 젊은이답지 않게 구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씨는 그가 얼굴까지 수척해서 눈물까지 흘려야 하는 이유가 뭔지 이모저모로 생각하며 그를 마주보고 앉았다. 프레드는 주저 없이 장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켈리가 나를 떠났어요.”
장씨는 할 말이 없었다. 그로선 이미 인생의 단맛쓴맛을 다 겪은 처지라서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일이 그리 놀랍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레드가 지금 안고 있는 감정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폭풍에 밀려오는 격랑처럼 그의 감정을 혼자 수습하기조차도 매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이렇게 물었다.
“싸웠소?”
그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그럼 왜, 갑자기?”
“몰라요, 나를 더 이상 만나지 않겠데요......”
“......”
“최근 들어 그녀가 나를 점 점 멀리 한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럼 진작에 그 원인을 알아보고 손을 쓰지 그랬소?”
“노력은 했어요. 그런데 그녀 마음이 이미 냉정하게 떠나 버린 걸요.”
그제야 장씨는 그들의 관계가 실제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녀와 사귄 지는 얼마나 됐소?”
“7 년이요. 장장 7 년이란 말이오. 그 긴 세월동안 그녀와 나는 너무나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많고, 지금도 눈에 삼삼하게 보일 정도예요”
프레드가 주저 없이 말을 쏟아냈다. 그는 상심한 나머지 수치심 같은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랬겠지. 7 년이란 작은 세월이 아니니까-.”
장씨는 이렇게 우선 그를 동정하는 체 한 다음, 내친 김에 좀 더 깊은 것을 물어 보고 싶은 충동으로,
“어느 정도 깊은 관계요? 둘 이는-, 같이 살기라도 했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감정을 조금 수습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요, 그 걸 내가 잊기 힘들단 말입니다. 내가 그녀 아파트엘 찾아가면 그녀는 늘 따뜻하게 대해 주었어요. 그리고 밤늦게 내가 떠날 때면 그녀는 아쉬워하며 가지 말라고 붙잡곤 했어요. 그게 벌써 오래 전 얘기에요. 내가 없이는 하룻밤도 지낼 수 없다고요. 그러던 그녀가......” 그가 복받치는 감정으로 말을 다 끝내지 못하자 장씨가,
“그럼 아이를 가져 본 적은 있었나?” 하고 재차 물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왜 아이를 갖지 그랬소? 그랬다면 아마도 그녀가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소?”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 벌써 자궁수술을 받고 그걸 떼어 냈단 말이오.”
장씨는 고개를 끄덕 끄덕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경우에 이 젊은이를 위로해 줄 수 있는가? 실연이란 참으로 앞이 캄캄할 정도로 괴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걸 치료하는 약이란 바로 세월이었다. 그래서 실연으로 자살 충동까지 갔던 젊은이들도 세월이 지난 후엔 자신이 죽으려 했던 과거가 우습게 여겨지게 되는 법이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프레드에게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리라고 해 봐야 무슨 효용이 있겠는가? 잠시 후 장씨는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봐요. 무엇이 그녀를 멀어지게 했나 말이지.”
프레드가 잠시 땅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최근엔 그녀가 성 관계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요. 나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요.”
“왜?”
장씨는 갑자기 눈이 번쩍해 수사관이라도 된 표정으로 프레드에게 다그쳤다.
“접근을 두려워하다니......”
“그 전에도 그런 일은 있었거든요. 자궁 수술을 받은 후부터 가끔 그랬어요. 통증을 호소하곤 했어요......하긴 병원에서 그녀의 자궁을 다 들어내어 잘라 버렸으니까요. 스투핏-”
그는 분풀이라도 하듯 말이 거칠어졌다. 장씨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게 이유인지 모르겠소. 그녀는 당신이 싫어진 게 아니오. 남성 자체가 두려워 진 거요. 자신의 육체적인 통증 때문에 말이요. 나도 그런 경우를 들어 본 적이 있거든...”
그가 고개를 젖더니, “모르겠는데요.” 했다. 장씨가 다시 말했다.
“그게 이유일 꺼야. 당신이 싫어져서가 아니라 남자가 귀찮아져서 그런지 모르지.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 일이쟎소? 그렇다고 자신의 육체적 문제를 수치감 때문에 다 터놓고 남자에게 말할 수 있는 성질도 아니고, 내 말 알아듣겠소?”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 말은 한 여성이 그 성을 완전히 절단 당하고, 그 통증으로 여자 구실을 할 수가 없다면, 그걸 말하기도 부끄럽고, 또 자존심 때문에 탁 들어놓고 내색할 수 조차도 없다 이 말요, 이해가 안 가요?”
장씨의 말을 듣고 그는 이해가 가는지 안 가는지 입을 삐쭉하며 어깨를 들썩했다.
장씨에게 와서 그런 고백을 늘어놓은 후에도 그는 계속 자신의 실연문제를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고 남에게 무슨 도움이라도 청하듯 노골적으로 울먹이면서 회사내의 직원들에게 하소연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직원들도 호기심에, 아니면 동정심에, 그의 실연 담에 대하여 근심 어린 표정으로 들어도 주고, 위로도 해주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직원들은 그의 반복되는 신파조 같은 넋두리에 식상해서 신물을 내게 되었다. 그러더니 그들은 점차 그의 정신상태마저도 정상이 아니라는 쪽으로 그가 없는데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찔찔거리며 울고,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해 대고,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자신을 가누지 못하는 한심한 모습의 젊은이로 전락해 버리는 거였다. 사람들은 그의 뒤에서 공공연히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 소리라면 이제 넌더리가 날 지경이야! 무어라고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맞아, 누군 왕년에 실연 한 번 못 해 본 사람 있나? 제길할-.”
그런 광경을 가슴 아프게 보다 못한 장씨가 프레드를 한 번 조용히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프레드,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요. 같은 한국사람으로서 진심으로 당신을 염려해서 하는 말이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눈만을 끔벅이며 장씨가 계속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 말을 명심해서 듣기를 바래요. 물론 프레드의 지금 그 심정은 이해가 가요. 얼마나 속이 끊어지듯 아프면 그르겠소. 하지만 이제는 그만 좀 할 때가 된 것 같아. 내 말은....., 직원들에게 자꾸 찾아가서 한 번 한 말을 또 하구, 자꾸 반복해서 그러지 말란 말이요. 그리고 이제 그 우는 짓도 그만 좀 해요. 사람들이 이제 당신을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단 말요. 나는 같은 동료로서 또 한국 사람으로서 프레드가 사람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 걸 가슴 아프게 생각해서 이런 충고를 해 주는 거요. 알겠소?”
그가 고개를 끄덕 끄덕 했다. 그의 뒤편에서 바네사라 불리는 흑인 여직원 하나가 지나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장씨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제 다시는 사람들에게 그 켈리 이야기는 그만 하라 이 말요, 사나이로서 마음을 대범하게 먹고 살아 가야지, 오케이?”
그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나와 약속해요! ”
장씨는 이렇게 말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프레드도 손을 내밀고 그들은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또 다짐하듯,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았죠?” 했더니, 그가 천천히 이렇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이제 다시는 안 할 거예요. 하지만-, 난 아직도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단 말예요. 그녀를 놓치고 나면 나는 다시 백인 여자를 만나거나 구할 수도 없단 말예요...... 난 백인 여자를 아내로 맞고 싶단 말예요.”
“.......”
장씨는 기가 막혔다. 그리고 왜 프레드가 그토록 켈리를 잊지 못해 하는지도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성장해 온 과정과 아주 무관한 것만은 아닌 듯 했다.
즉 백인 아내와 좋은 자동차-, 거기에 프레드의 인생, 그 열쇠가 있는 듯 했다. 마치 백인 아내의 끔직한 살해범으로 지목되었던 흑인 풋볼스타 심슨처럼, 백인 가정에서 백인이 아니기 때문에 당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서러움, 그는 그 컴플렉스를 이렇게 풀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길만이 그가 이 차별의 인간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신의 신분과 그 위치를 확보하고 성공적으로 살아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길만이 그가 그녀가 사는 백인사회를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얻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사실 가난한 사람들이 낡은 승용차를 타야하는 서러움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었다. 장씨 자신도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중고차를 한 대 사서 미국 이민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런데 그 차가 툭하면 가다가 서는 바람에 조그만 동양인이 길로 나와 지나가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라치면 어느 누구도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거였다. 누구도 그를 도와 주려거나 또는 태워 주려하지 않았고, 그렇게 서글프게 길에 서서 도움을 청하노라면 자신의 신세가 지나가는 개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개가 지나면 그들은 일제히 차를 세우고 다 지날 때까지 기다려 라도 준다.
결국 아무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그는 몇 마일을 터벅터벅 걸어가서야 자동차 정비소를 찾았고, 그제야 비로소 장씨는 왜 돈 없는 흑인들마저 자동차만은 그렇게 번들거리는 좋은 차를 몰고 다녀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씨의 충고 덕분인지, 아니면 이제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서인지 프레드는 더 이상 추태를 보이는 일이 없이 다시 일상생활로 복귀해서 곧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세상 살아 갈 의욕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고, 꼭 몽유병자처럼 방황하며 얼이 빠져 있던 표정은 이제 찾아보려야 볼 수없이 정상을 되찾고 있었다. 장씨가 어쩌다 지나치며 마주칠 때 “하이, 요즘은 어떻소?” 하고 물어보면, “아임 파인!” 하고 정상인의 대답을 하곤 했다.
언젠가는 마주친 그에게 “그녀에게서 연락 와요?” 하고 물었더니,
“지금 그녀와 나는 친구 사이죠. 서로 잘 지내고 있어요. 연락도 가끔 오고, 참 그때는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라고도 했다.
“고맙긴-”
얼마가 지난 후 회사 내에서는 프레드가 일하는 부서에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공석 하나가 생겨났다. 그런데 그 곳은 장씨가 오래 전부터 가고 싶어했던 그런 자리였다. 새로운 기술도 더 배우게 되겠고, 대우도 훨씬 나은 그런 자리였다. 그는 즉시 그리로 옮기겠다는 지원서를 접수시켰다.
그런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 경쟁이 만만치가 않았다. 더군다나 프레드의 여자였던 켈리마저도 그 자리로 옮길 양으로 지원서를 냈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그리고 그녀가 그 자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프레드 때문이고, 그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그 자리로 오라고 권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울 자리는 하나인데 지원자는 다섯이나 되었다.
그 즈음 프레드는 아주 행복한 우월감에 싸여 있었다. 자신의 생각대로만 된다면 켈리가 그리로 전근 오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그 탁월한 기술로 그녀를 훈련시켜 줄 수도 있겠고, 그렇게 해서 그녀에게 다시 자신에 대한 환심을 사게 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장씨에게 와서 아주 노골적으로 말했다.
“내 생각에 그 자리는 켈리 차지가 될 거요. 그녀가 당신보다 회사에 먼저 들어 왔다는 사실 때문이죠.”
프레드의 이런 말을 듣고 장씨는 우물우물하고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다시 그가 켈리와 가까워지기라도 했는지 그 사실이 더 궁금하기도 해서,
“자네가 무슨 참견이야, 나는 자네가 아주 그녀와의 관계가 끝 난 줄 알았는데...” 하고 말했다.
“지금도 그냥 친구로 남아 있죠.”
그 소리를 듣자 장씨는 좀 아니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자신이 그렇게 실연을 당했다면 그녀와는 다신 연락도 하지 않을 거였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한 마디 했다.
“그냥 친군데 뭘 그렇게 앞장서서 열을 올리고 그래?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거지. 나 같으면 젠장 자존심 때문에 다신 연락도 않겠네.”
“친절하게 대해주면 언젠가는 그 대가를 받게 마련이라는 걸 난 믿거든요.”
그 말을 듣고 장씨는 약간의 부아가 치밀었다. 그 여자만 친구고 같은 한국사람이며 동료인 자신은 그럼 뭐란 말인가? 언젠가 제가 실연으로 절망했을 때 찾아 와서 값진 충고까지 해 주었던, 그래도 뭔가 좀 끈끈한 인연으로 서로가 통했던 사이 아닌가? 생각하니 장씨는 그 동안 아들처럼 생각했던 그가 괘씸했고, 그와는 다시 상대도 하기가 싫어졌다.
“그걸 믿고 가서 계속 그녀에게 잘 해 보게나!”
프레드의 말을 듣고 나니 장씨의 마음에 조금 걸리기 시작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 켈리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말 잘하는 백인인데다가 또 회사 경력이 장씨보다는 월등 유리했다. 즉 그녀는 장씨보다 고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자리를 놓고 정하는 인선에 있어서는 고참 권이 우선 이긴 해도, 직속상관의 결정권이 더 중요했다. 직속상관이 자신이 필요한 사람을 뽑아 쓰는 데는 아무런 이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그 점을 감안해서 3배수라는 조항을 정해놓고 있었다. 즉 고참권 중에 상위 3명 가운데에서 누구든 상관이 그 적임자를 선임하는 제도였다.
그렇게 볼 때 장씨는 아주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장씨는 평소 감독의 신임을 듬뿍 얻고 있기 때문이었다. 프레드는 같은 부서이긴 해도 저녁 당번이었으므로 낮의 감독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었다.
얼마 후 그 공석을 메울 새로운 부임 자로 결국 장기선 씨가 선정됐다는 발표가 나왔다. 선정과정에서 마이너리티(소수계)이며 고참 권에서 열세에 있던 장씨가 내정된 것은 그에게 크나큰 행운이었지만, 회사에 먼저 들어온 백인 여자 켈리에겐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자세히 보면 어디 억울한 일이 하나 둘이겠는가? 얼마나 많은 본인에겐 아주 심각한 문제들이 기득권자들의 편견이나 소홀함 때문에 경쟁에서 불리하게 떨어지거나 아주 제외되고 마는가? 그 뿐인가? 심지어는 얼마나 많은 억울한 영혼들이 시대를 잘못 만나 그 꽃도 피워내기 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마는가?
그렇게 확정이 발표된 날 오후, 프레드가 뚜벅뚜벅 자리에 앉아 있는 장씨에게 다가 왔다. 어쩐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씨는 그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보냈다. 그런데 그가 장씨에게 와서 대뜸 이렇게 내 뱉었다.
“나는 당신한테 아주 실망했소! 어떻게 당신이 감독에게 아부를 했기에 고참권도 낮은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단 말이오?”
장씨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다가,
“자네 일이 아니면 참견을 말아!” 라고 차게 내 뱉었다.
“그렇지 않지요, 옳은 건 옳은 거고 틀린 건 틀린 거지요. 말해봐요! 어떻게 이 회사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도 않는 당신이 오래 된 사람을 제키고 승진을 하느냐 말이오? 내가 노조에 가서 한 번 따져 보겠소!”
장씨는 그의 무례한 말에 대꾸조차도 그만 둘까 어쩔까 하다가, 마음을 진정시켜 약을 올리듯 이렇게 타일렀다.
“여보게 프레드, 그런 건 모두 하나의 게임이나 마찬가지야. 우리가 살면서 해 내는 게임 말이야. 그리고 일단 게임을 하기로 했으면, 우리는 이겨야 하는 것이야. 자네가 좋은 승용차를 굴리고, 또 켈리에게서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조차도 하나의 게임이야-. 알겠나?”
그가 장기선 씨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또는 못 알아들었는지, 낭패한 얼굴이 되어 황소처럼 커다란 그의 어깨만을 으쓱하고 들먹일 뿐이었다.
<끝>( 2003년 한국 소설가 협회 간 대표이민소설선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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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야금야금 조금씩 연재하려 했는데 새로 당선된 부회장 이선자님의 명령이 떨어져 전부 올리기로 했지요. 약속을 안지킴 양해바랍니다.
선생님 저는 부회장이 절대 아니구요.
속속 올려주세요.
정해정 회장님께서
함께 일하실 새로운 임원들을 선임하셔서
1월 총회에 발표를 하실거예요.
이렇게 올려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이런 소설은 이곳에 살아본, 이민을 이렇게 와서 살아본
저희들이 쓸 수 있는 것이죠.
과연 한국으로 보내진 소설이군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후에도 선생님의 대표작품들을 속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