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히 봄같이 오래 살기를 희망했지만...운현궁에서 만난 봄
구름재, 운현(雲峴)은 서운관(書雲觀) 앞의 야트막한 고개다.
서운관은 천문·지리를 관장하던 천문기상대과 같은 기구로, 조선 개국 초 설치됐다.
지금의 계동 현대건설 사옥 오른쪽에 있었다.
세종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하응(1820~1898)은 안국동 외가에서 태어나고 살았다.
이후 운현의 허름한 집을 구입해 이사했다.
이곳에서 태어난 그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가 조선 26대 왕 고종(高宗, 1852~1919)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원군의 칭호를 받고 10년간 섭정을 한다.
대원군은 후사 없이 죽은 왕을 대신해 종친 중에서 뽑은 왕의 아버지를 뜻한다.
조선에는 여러 대원군이 있었지만, 흥선군만 살아서 대원군이 됐다.
흥선대원군은 작고 낡은 집을 궁궐 못지 않은 대저택으로 개축했다.
구름재(雲峴·운현) 옆에 위치한다고 해서 운현궁이다.
대원군은 이곳에서 전용문을 통해 궁궐로 드나들며 섭정을 펼쳤다.
운현궁 정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오른편의 수직사(守直司)다.
수직사는 운현궁을 지키는 수하들이 사용했던 곳이다.
고종 즉위 후 운현궁의 규모가 확대되고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커지면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군졸이 파견됐다고 한다.
현재 건물은 1998년 운현궁 복원 공사 때 새로 지어진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였던 노안당(老安堂)으로 들어가는 중문은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 왼쪽에는 노둣돌이 있다.
말을 타고 내릴 때 발돋음용으로 쓰이는 돌이 노둣돌이다.
서울시가 운현궁 관리를 맡게 돼 살펴봤을 때 이 출입문은 안이 아니라 밖에서 잠그게 돼 있었다고 한다.
밖에서 문을 잠가버리면 내부에서는 나올 수가 없고 갇히게 된다.
흥선대원군의 부상과 몰락을 함께 보여준다.
지금은 고쳐 달려 있다.
중문을 들어선다.
노안당(老安堂)은 <논어>에 있는 '노자안지'(老者安之)에서 따온 것으로 ‘편안한 노후’를 소원했던 대원군의 바램이 담긴 당호다.
대원군이 집정할 당시 국정을 논의하던 곳이었다.
안채는 노락당(老樂堂)이다.
노락당은 안채로 지어졌으나, 명성황후가 왕비수업을 받고 이곳에서 가례를 올리면서 별궁이 됐다.
운현궁의 건물 중 가장 화려하다.
궁궐의 건축 양식에서 볼 수 있는 익공(翼工)이 있다.
통상 왕비가 궁궐에 들어가기 전 예비 준비를 하는 별궁은 주로 어의궁(於義宮, 지금의 대학로 효제초등학교 근처)을 활용했으나, 명성황후의 경우 대왕대비가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으로 별궁을 정했다.
고종의 혼례에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명성황후 민자영은 원래 흥선대원군 부인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집안이 가난하고 아버지가 일찍 죽었다.
외척(外戚) 세도의 폐해를 뼈저리게 체험한 흥선대원군은 부인의 사촌동생이자 천애고아 같은 민자영을 며느리로 선택했다.
그런데, 영민한 명성황후는 남편과 궁중을 장악하고 시아버지와 대립했다.
'귀신은 속여도 대원군은 못 속인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지략이 뛰어난 그였지만 며느리 간택만큼은 자신이 속은 셈이 된 것이다.
운현궁 제일 안쪽에는 고종의 친어머니인 부대부인 민씨의 거처 이로당(二老堂)이 자리하고 있다.
노락당을 대신해 세워진 안채다.
‘이로’는 흥선대원군과 부인 민씨를 뜻한다.
노락당과는 회랑(연결 복도)로 연결돼 있는데, 회랑의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여성만의 공간이어서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았다.
지극히 폐쇄적인 'ㅁ'자형 건물이다.
이로당 뒤편에는 고종이 어린 시절 자주 오른 노송을 기념한 경송비(敬松碑)가 있으나, 노송은 사라지고 없다.
노안당 등 운현궁의 편액은 대원군의 스승인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글씨다.
생전에 쓴 것은 아니고 사후에 좋은 글씨 중에서 골라 집자한 것이다.
남연군은 아들 이하응을 추사 김정희에게 보내 글씨, 그림을 배우게 했다.
남연군의 양어머니 남양 홍씨(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인 은신군이 아들이 없어 남연규은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추사 김정희의 어머니인 남양 홍씨(김정희도 큰아버지에게 입양돼 실제는 큰어머니)와 자매지간이었다.
흥선대원군은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연을 이어갔다.
운현궁 뒤편에는 운현궁 양관(洋館)이 있다.
건물 양식은 프렌치 르네상스식이다.
정면 중앙에 현관을 두고 좌우의 2층에는 아치로 개방된 베란다를 두었다.
일본의 최고 건축가였던 궁정건축가 가타야마 도쿠마의 작품으로, 벽돌과 석재로 992㎡(300평) 규모의 2층 구조로 건축했다.
일제가 회유책의 일환으로 운현궁을 물려받은 대원군의 손자(고종 형 이재면의 아들 이준)에게 지어줬다는 것이다.
1946년 백범 김구가 2층 사무실을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2016년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장으로 사용돼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졌다.
1948년 덕성학원에 인수됐다.
옛 일본문화원과 종로소방서, 덕성여대 평생교육원까지 운현궁 터였다.
별당채로 지었던 영로당(永老堂)은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김승현 박사가 매입했다.
운현궁엔 아름다운 꽃담이 있다.
문양으로 그려진 글귀는 '영세춘 수복강녕 만세락(永世春 壽福康寧 萬歲樂)’이라고 한다.
영원히 봄같이 오래 살고, 복을 받고 강녕하며, 만세 동안 즐겁기를 축원한 것이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1873년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한 최익현의 상소로 실각했다.
대원군의 권세는 10년으로 끝났다.
이후 청나라로의 압송, 일본의 가택 연금을 겪었고, 며느리인 명성황후 시해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흥선대원군은 세도가들의 음모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파락호를 자처하며 '상갓집 개'라는 별명까지 들었다.
그때 깨달은 문제들을 과감한 개혁으로 해결했다.
비변사 폐지, 양반 세금 징수, 지방관리 부패 척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유교사회의 질서가 흔들릴까 두려워 천주교를 박해하고 쇄국정책을 펴는 바람에 신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로당 화단의 매화나무가 봄을 맞아 꿈틀댄다.
운현궁에도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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