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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를 메는 쉼으로의 초대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장)
파송(10장) 이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된 제자들(마 10장)의 사역이 어떤 결과를 거두었는지, 오늘 본문에서 제외된 11:20-24에 암시됩니다. 격앙에 찬 꾸지람에 언급되는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은 갈릴리의 대표적인 유대인 마을들로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라고 명하신 “이스라엘 집”(10:6)입니다. 아마도 예수 공동체는 이 도시들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 가장 공들였을 터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탄식에 비추어 보아, 갈릴리의 주요 도시들은 예수의 복음을 거부하고 제자들을 배척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보다 먼저, 11장은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으로 시작됩니다(11:2-25).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했던 세례요한의 확신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정작 세례 요한 자신도 옥중에 묶여 있는 상태이니, 그가 전개한 세례 운동도 장벽에 가로막힌 채 위협을 당하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배척당하는 예수 공동체와 박해를 겪는 요한 공동체는 엇비슷한 처지에 놓인 셈입니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고 춤추는 아이들 (16-17절)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할까”라는 말로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를 풀어내십니다. 이 비유에는 장터에서 놀이를 벌이는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피리를 불고 춤추는 것은 결혼식을 모방한 놀이입니다. 이와 나란히, 슬피 우는 놀이도 등장하는데, 이는 장례식을 본뜬 것입니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아이들의 놀이는 실제 삶을 흉내 냅니다. 놀이는 놀이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놀이는 현실과 유리되지 않습니다.
결혼식 놀이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결혼 잔치’에 비유하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마22:2-14; 25:1-13). 비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보이신 행동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잔치의 성격을 갖습니다. 모든 복음서가 일제히 보도하고 있는 오병이어 이적을 포함하여, 예수께서는 먹는 것에 탐닉한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19절)로 잔치 지향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장례를 모방한 놀이는 세례 요한 공동체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심판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면서,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라”(마3:2-10)고 일갈합니다. 세례 요한 공동체는 죄의 자백과 통회, 슬픔과 금식을 중요한 일과로 강조했습니다.
초대를 거절하는 세대 (18-19절)
비유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은 동무들을 불러 놀이에 초대합니다. 하지만, 그 초대가 거부당하자,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한다”(17절)고 탄식합니다. 이는 예수 공동체와 요한 공동체가 대중에게 배격당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비유입니다.
사람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금식과 회개)는 이유로 세례 요한 공동체를 외면하고(18절), 먹고 마시기를 즐긴다는 이유로 예수 공동체를 배척합니다(19절). 요한은 지나치게 비사교적이고 금욕적이라 꺼려지고, 예수는 지나치게 사교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식탁 교제를 극도로 절제하는 나눈 적 없는 요한의 엄격함을 이해하기 어렵고, 죄인들과 함께 먹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는 예수의 처신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이고(11:2), 예수께서 공들여 능력을 행한 도시들이 등을 돌립니다(11:20-24)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고대하고 희망합니다. 그런데 예수와 세례 요한의 하나님 나라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기에, 예수와 세례 요한의 운동은 유치한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합니다. 현실을 잘 모르는 아이들의 짓거리와 같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놀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처하는 이들, 즉 스스로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이들의 판단입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에게는 감춰져 있다 (25절)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예수께 찾아와서 물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바리새인이거나 산헤드린 공의회원 정도 되는 유대 지도자, 말하자면 자타가 공인하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었습니다. 예수께 직접 찾아와 물을 만큼의 진정성을 지녔고, 영생을 위하여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만족할 답변을 얻지 못한 채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이유는, 영생은 무엇을 해서 얻는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를 멀리하고, 율법을 지키며, 금식과 기도를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을 바쳐 얻는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은 선물입니다. 그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요, 값없이 선사되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영생을 얻기 위해 남다른 수고를 하겠다고 분투하는 이들을 맥빠지게 합니다.
지혜롭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을 멸시합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을 들여 가지게 된 것만을 가치 있게 여기고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니 막대한 비용을 얼마든지 치르겠다는 이들의 입장으로는, 거저 받는 영생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이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 (25절)
어린아이에게는 일상과 놀이가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실이 곧 놀이이고, 놀이가 현실입니다. 현실에서는 터무니없는 것이 놀이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고, 상식에 갇히지 않은 창조가 놀이에서 일어납니다. 지혜로운 이들이 만든 세상의 법칙과 질서가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는 뒤집히고 전혀 새로운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토록 경건한 의인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나라가 아이들의 유치한 놀이에서 발견되고 표출됩니다.
놀이에는 무엇을 기대하거나 바라는 목표가 없습니다. 잘 놀았다고 상을 바라지도 않고 열심히 놀았다고 대가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때로 이기고 지는 결과도 있지만, 으스댈 것도 실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좋아서 하는 활동이고 즐거워서 하는 일이 놀이입니다. 이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눈으로 본다면, 구원은 잘한 사람에게 주는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는 이겨서 차지하는 상급이 아닙니다. 조건 없이 참여하고 대가 없이 누리며 모두가 기뻐하는 은혜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놀이를 할 줄 아는 아이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장터에서 결혼 잔치 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같은 예수 공동체가 그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가 쉬게 하겠다 (28절)
인간의 비극은 놀이를 잊어버린 삶에 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고자 더 많이 노력하고, 무한히 경쟁하며, 더 큰 목표를 세웁니다. 가장 귀하고 아름다우며 소중한 것들이 대가 없이 주어지고 있다는 진리를 외면한 채, 욕망의 부추김에 영혼을 팔고 노예처럼 살아갑니다. 산다는 것 자체는 수고이고, 수고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수고로 목적을 성취하고 대가를 얻으려 할 때,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팽개치고 예속화됩니다. 그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고 대가를 얻지 못한 모든 수고는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이런 삶은 그대로 짐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어떤 값진 희생이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짐을 무겁게 만듭니다. 죄를 멀리하고, 율법을 지키며, 금식과 기도를 하고,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산 결과로 영생을 얻는다고 믿는 이들은 유대인만이 아닙니다. 소위 복을 받는다는 목표를 가진 신앙인들의 열정과 헌신이 같은 오류에 빠집니다. 예수께서는 수고와 짐의 대가를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고 좋다고 여기셨고 쉬셨습니다. 좋다고 여김이 곧 쉼이 됩니다. 그 쉼은 할 일과 수고를 다 마치고 주어지는 미래의 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당장 누릴 쉼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29절)
한데, 쉰다는 것이 멍에(짐)을 벗고 아무 일도 안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삶은 쉼이 아니라 곤욕입니다. 쉼은 다른 멍에, 즉 예수의 멍에를 지는 것에서 옵니다. 예수께선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므로(29절), 우리에게 멍에를 억지로 지우지 않습니다. 그 멍에는 우리에게 부과되는 멍에가 아니라, 온전히 나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자원하는 멍에입니다. 보상을 대가로 우리를 종으로 삼는 멍에가 아니라, 생명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는 멍에입니다.
23 배우지 못한 사람들아, 나에게로 와서 내 학교에 들어오너라. 24 어찌하여 지혜를 갖지 못한 채 불평만 하고 너희 영혼의 갈증을 풀 생각을 하지 않느냐! 25 나 이제 결론삼아 말한다. 지혜를 돈으로 살 생각은 말아라. 26 네 목에 지혜의 멍에를 씌워라. 그리고 네 마음에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라. 지혜는 바로 네 곁에 있다. (집회서 51장)
멍에는 땅을 가는 소에게 메우는 것으로, 보통 경험이 많은 소와 어린 소, 두 마리의 소가 하나의 멍에를 멥니다. 예수께서는 “내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노련한 소의 멍에를 함께 짊어진 어린 소처럼, 예수의 멍에를 지는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배웁니다. 예수의 제자(disciple)가 된다는 것은 지식을 배우는 학생(pupil)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배우는 도제(견습공, apprentice)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스승인 예수께서는 자신의 멍에를 제자에게 떠맡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맨 멍에 속으로 제자를 초대하시고 함께 걷습니다. 그런 배움을 통해, 어린 소는 노련한 소가 되어갑니다. 제자는 스승이 닮아갑니다.
놀아도 해도 힘은 듭니다. 하지만 노는 아이들은 숨차게 뛰고도 즐거워합니다. 지치게 놀고서도 더 놀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힘들지 않은 멍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자원한 멍에,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의 멍에, 겸손한 배움의 멍에는 무겁지 않습니다. 놀이 자체가 쉼이 되는 것처럼,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를 배우는 수고 자체가 쉼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놀이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총 가운데 현실이 됩니다. 수고도 멍에도 쉼이 될 수 있는 삶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돌이켜 은혜를 신뢰하기만 하면,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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