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영으로 마가복음 15장 39절
해마다 우리는 봄을 맞이하고 해마다 기독교인은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독특한 사투리이고 부활신앙과 기독교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지만 사실 우리는 초기 공동체가 지니고 있던 부활신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신앙하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여러분들은 부활하면 제일 먼저 뭘 생각하십니까? 저는 어렸을 때 부활하면 영생과 연결되어 생각했고 지금도 적지 않은 기독교인은 부활과 영생을 연결지어서 생각합니다. 그 영생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신앙고백에서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고 하나님의 의가 영원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몸이 죽어도 다시 살고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한다는 불노초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개념이해는 기독교가 사이비에 빠질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줍니다. 기독교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와있으면 죽어도 죽지 않고 영혼불멸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안전을 댓가로 적지 않은 신앙인들의 선한 욕구를 착취할 수 있는 구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목사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죽음 이후에 세계는 모르겠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환상을 보고 임사체험을 경험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건 모두 그 사람들의 주장일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정직하셨습니다. 복음서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죽으면 어떻게 된다는 걸 예기 하신 적이 없습니다. 매우 은유적으로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간다는 고백들만 있습니다. 모든 육신이 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듯 모든 영혼이 하나님의 품으로 되돌아간다는 신앙은 구약 헤브라이즘의 오랜 삶의 이해입니다. 오히려 천국과 지옥의 개념은 초대교회의 박해상황 의롭게 죽은 사람들의 보상문제와 희랍의 이원론 사상이 결합되면서 생겨난 신앙이해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꾸 사두개인들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질문을 하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자꾸 담론을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여기로 바꾸셨어요. 물론 누가복음에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나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의 이야기고 그 이야기의 핵심은 시대의 예언자들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경고하는 이야기일뿐입니다. 누구의 말이 됐든 일상에서 깨닫고 삶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여기에서는 깨닫고 변화하는 삶에 대한 담론이 그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기 제자들의 부활이해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데로 복음서 어디를 읽어봐도 안식후 첫날 어느 누구도 예수를 처음부터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태와 마가, 누가의 경우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에 갔는데 이미 무덤에는 아무것도 없고 웬 젊은 남자가 흰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마가복음의 경우는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내려가는데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경우 좀 더 구체적으로 엠마오 도상을 내려가는 두제자에게 나타나시는데 어느 누구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그 예수를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밥을 먹는 와중에 눈이 뜨여 아 이분이 예수였구나 하는 걸 알아보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일곱제자가 예수를 알아보게 되는 건 더 드라마틱합니다. 낙향한 어부들이 밤새 그물질을 하는데 고기를 못잡지요. 그래서 실망을 하고 들어오는데 낯선 사람이 말을 겁니다. 그리고는 배의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권유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배의 오른쪽으로”이런 말들은 매우 종교적인 상징적인 단어들입니다. 삶의 깊은 곳 근본 뿌리 정신 삶의 정방향을 향해서 끊임없이 그물을 던지라는 겁니다. 그들이 그 말씀에 순종해서 예상치 못했던 삶을 맞닻뜨렸을 때 그들은 비로소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아봅니다.
복음서 안에서의 부활경험은 그들이 예수 이후의 삶을 살아가면서 삶에서 뭔가의 경험이 있고 그 경험과 느낌 속에서 아 여기 예수님이 동행하시는구나 이분이 예수님이시구나, 예수 이후의 예수 경험 이것이 처음 제자들의 부활경험이었습니다. 죽어서 다시 태어난 걸 보는게 아니라 예수가 떠나고 없는데 여전히 예수를 만나고 있는 경험사건이 바로 부활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거죠. 아직 섣부른 판단이지만 요 몇일 한의원에 다녀왔습니다. 어떤 교우로부터 소개를 받았는데 가만히 들으면서 보니까 미국에서 아내를 치료했던 한의사 선생님 느낌이 풍겨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병원인가 궁금해서 한의원엘 갔습니다. 마침 그 병원에 다녀온 교우들도 있었습니다. 초진을 자그마치 4시간이나 받으셨데요. 저도 한시간 반정도의 진료를 받았는데 일단은 사이비 냄새가 없어요. 특별한 거, 용한거 있다고 사기치지 않습니다. 성급하게 환자를 확 당기기 위한 제스쳐도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사람 몸이 매일같이 변하잖아요. 한번 맥을 잡고 확진하지 않습니다. 몇일 침을 맞아보면서 몸의 반응을 봐야한다는 겁니다. 사람마다 다 몸이 다르고 살아온 배경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증상도 그사람에 맞게 적용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몸의 증상에 집중하지 않고 그 증상을 일으키는 것들을 차분히 설명하면서 원인 치료에 신중하셨습니다. 제 딸을 데리고 갔는데 여러 증상들을 말하니까 경락으로 설명하면서 그 원인을 진단해 주시더라구요. 그래서 증상 치료를 아무리 해봐야 간만 나빠지고 악순환이 계속되니까 원인 치료에 집중할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하십니다. 그리고는 약도 좋고 침도 좋고 다 좋지만 환자 스스로가 자신의 생활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근본적 치료는 어렵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병이라는게 자신의 환경에서 오는 것인데 환경에 대한 변화없이 잠깐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근본적인 회복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참 좋은 사람을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환자와 환자가 앓고 있는 병에 대해 깊은 애착이 느껴졌습니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났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은 아니지만 그분안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납니다. 저는 그렇게 삶의 곳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부활은 예수님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평화시장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면 분신했던 전태일도 부활하고 가난한 이들의 성자 마더 테레사 수녀님도 부활하고 이렇게 성자 의인들만 부활하는 게 아니라 때로는 히틀러도 부활하고 박정희도 부활하고 전두환도 부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부활절에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는 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일입니다. 예수의 삶과 예수의 영은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심지어 이방 로마 지휘관까지도 인정했던 삶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라다니고 예수를 좋아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함하고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 조차도 그래도 참 저사람은 진짜야 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영과 그분의 삶은 토라의 기초를 이룬 창조이야기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제가 유대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쓴 이 창조이야기는 읽은 때마다 경탄스럽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와 자신들의 민족적인 정체성을 세워나갈 때 그들은 바벨론에 끌려가 반세기를 넘게 살면서도 바벨론이 만들어내는 마르둑 신화에 오염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힘, 전쟁으로 세상을 정복시켜 나가고 세상을 창조해나가는 그들의 신화를 두발로 걷어 차버립니다. 쥐뿔 가진 것도 없던 사람들이 고백했던 신앙은 가히 도발적입니다.
아무리 깜깜한 어둠 속일찌라도 모든 인간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그를 위한 신뢰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이기에 한낱 먼지와 티끌에 지나지 않는 존재처럼 보일찌라도 그안에 하나님의 숨과 하나님의 영으로 호흡하는 순간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 생령의 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해서도 안되고 포기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포기한 폐허 위에서도 생명이 생명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사람되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저항하면서 환대와 존중과 평화와 생명의 넓은 하나님의 품으로 마땅히 불러야할 생명의 노래를 불러야한다는 것입니다. 토라는 이 신앙을 율법화했고 예수는 이 신앙을 생활화하셨습니다.
오늘 중창단에서 부른 인간의 노래는 1987년 4월쯤에 일어난 일본 국철 분할 민영화 사건이 배경입니다. 일본은 국철 분할 민영화로 인하여 6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실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조원들이 200여명에 달하게 됩니다. 이때 일어난 것들이 요즘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민영화 외주화 비정규직화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절망과 좌절속에서 추풍악엽처럼 죽음의 행렬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불러진 노래가 이 노래입니다. 죽지 말고 살아서 살아서 마침내 사람살만한 세상을 열어가지고 다짐하며 염원하며 불렀던 노래입니다.
이 시대 예수의 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괴로움 속에서도 생명의 숭고함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때로는 슬퍼하고 노여워하면서도 다시 일어나서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상처받고 깨어져 폐허가 된 땅에서도 다시 일어나서 환대하고 다시 축제를 벌이며 대동세상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차별과 혐오가 난무하고 죽임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속에서도 여전히 생명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노래하면서 축제의 세상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영으로 날마다 날마다 부활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