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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 씨뿌리는 자의 비유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3장)
비유 : 이해할 수 없는 쉬운 이야기
길가에 떨어진 씨앗들을 새들이 먹어버리고, 돌밭과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들은 다 자라지 못한 채 죽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은 많은 결실이 되었다는 이 비유는, 내용에서나 표현에서나, 어린아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쉽습니다. 그런데 알아들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씨앗을 길과 돌밭과 가시덤불 위에 뿌리는 것인가요? 씨를 흩뿌리는 농법의 관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소수의 씨앗은 밭 경계를 넘어 떨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러는길가에’(4), ‘더러는돌밭에’(5), ‘더러는가시떨기 위에’(7), ‘더러는좋은 땅에’(8) 씨앗이 떨어졌다는 말은, 소용없는 땅에 씨앗이 떨어지게 된 것이 비의도적인 실수가 아님을 암시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9절)는 결어(結語)에 이어 “어찌하여 비유로 말씀하십니까?”(10절)는 제자들의 불만은, 대다수가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을 암시합니다. 아예 어려운 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농부가 씨를 뿌렸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좋은 땅을 골라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상식을 무너뜨리고 있으니 혼란스럽습니다. 못 알아들어서 생겨나는 혼란이 아니라, 알아들었기 때문에 더욱 커지는 혼란인 셈입니다.
그날, 집에서 나가사 (1절)
“그날”이 어떤 날인지 알기 위해서는 12장을 살펴봐야 합니다. 바로 전에, 예수께서는 가족들과 갈등을 겪으셨습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어느 집에서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셨고, 무리 중 하나가 가족들이 왔음을 예수께 알렸습니다. 전언을 들은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동생들이냐”라는 격한 언사로 내치셨습니다(12:46-50). 가족과 불화하게 되리라(10:35-37)는 말씀이 예수께도 일어난 셈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집에서 ‘나와’ “씨 뿌리러 ‘나간’ 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온 이유는 예수께서 하는 일을 말리기 위함이었습니다. 11-12장은 예수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예수를 증언했던 세례요한이 예수의 정체성에 의혹을 제기하고(11:1-6), 예수께서 가장 많이 능력을 행하셨던 유대 고을들(고라신,벳세다,가버나움)이 예수의 복음을 거부합니다(11:20-24). 나아가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언행을 사사건건 트집 잡아 공격하고(12:1-21), 예수를 죽일 모의가 시작되고(12:14), 급기야 예수는 귀신의 왕(바알세불)이라는 낙인이 찍힙니다(12:22-37). 이런 위기와 곤경에 빠진 예수의 소문을 들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에게 경고하고자 온 것이었지요.
길가, 돌밭,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들 (3-7절)
공들인 노력이 수포가 되고 결과가 실망스러워 다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지요. 마태복음 13장에 묶여 있는 예수의 비유들(씨뿌리는 자의 비유,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 보화를 찾은 사람 비유, 진주 장사 비유, 그물 비유, 곳간 비유)은 그런 상황 속에서 태어납니다. 13장을 구성하는 이 비유 모음은,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의 다섯 담론 중 세 번째 담론입니다.
씨뿌리는 자 뿌린 씨앗이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 속에서 결실 없이 소멸하는 13장의 첫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씨앗)을 전파하는 예수 공동체의 곤경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천국)를 가르치시고(5-7장),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행하시며(8-9장), 제자들을 파송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도록 하셨지요(10장). 그런데 이 모든 수고는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들처럼 허망한 실패로 드러납니다.
공동체의 물음에 비유로 답하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이 거절과 박해를 당하리라고 예수께서 직접 예고하신 바가 있지만(10:16-39), 이런 형국 속에서 예수의 공동체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공동체가 벌이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패가 분명해진 시점에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다수가 등을 돌려 떠나가고, 남은 제자들은 실의에 빠진 처지가 어렵지 않게 유추됩니다. 또한 남은 자들에게도 물음이 남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씨앗)은 진리인가? 진리라면 그것을 파종하는 일꾼이 문제인가, 파종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는가?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바꿀 것인가? 계속해야 할 가치가 있는가? 등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런 내부의 동요와 의문에 대한 답변의 역할을 합니다.
이 비유에서 제기되는 의구심은 효율성과 관련됩니다.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에 씨앗을 뿌리는 헛수고는 멈춰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효율성은 일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며, 성패를 떠나 씨앗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경제성의 원칙은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 효율성을 높이고 비경제적인 요소들을 바꾸어야 한다는 논리는 종종 교회의 선교 사역까지 지배합니다. 경영의 잣대가 교회의 상식이 되고 방향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더러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 (8절)
길가에서, 돌밭에서, 가시덤불 속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죽어간 씨앗들을 언급하는 이 비유의 궁극적 메시지는 절망이 아닙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적은 양의 씨앗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열매를 맺고야 만다는 것이 이 비유의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더러”라는 말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소수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소수의 씨앗이 백, 육십, 삼십 배씩 열매를 맺습니다. 이는 열매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씨앗의 손실을 상쇄하고도 남는 역전이며, 부질없는 수고와 낙망이라는 우울하고 무거운 흐름을 일시에 뒤집는 반전입니다.
삼십, 육십, 백 배라는 말은 축복의 법칙처럼 알려져 인간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세상에 속한 물질적인 부유함과 관련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역전과 풍요함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수고와 투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라, 사람의 실패와 악의 방해를 뒤엎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철저한 실패처럼 보이는 현상을 뒤엎는 역전이며, 궁극적 왕성을 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황폐함뿐이더라도, 마침내 하나님 나라는 도래한다는 확신의 선언입니다. ‘도래한다(오다, 임하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노력과 헌신으로 세워지지 않고, 압도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표현합니다.
좋은 땅 - 예수의 새 공동체 (23절)
한때는 경쟁적으로 예수께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바람과 소원을 예수께서 실현해 주실 것으로 기대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나라가 자신들의 생각과 다름을 알게 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떠나갔습니다. 비유의 말씀들이 끝나는 13장 결부에서도 예수께서는 고향에서 배척받으실 것입니다(53-58절). 이렇듯 아무 효력 없는 씨앗 파종이 계속되는 가운데, 좋은 땅이 언급됩니다. 예수의 새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해석해주시는 자리(18-23절)에서,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는 의미가 밝혀집니다(23절). 더 뒤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라고 물으시고, 제자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51절). 이는 예수를 떠나지 않고 남아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제자들이 좋은 땅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이는 “(내 가족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12:50)는 말씀과도 공명합니다.
좋은 땅이 되지 못한 세 경우의 정체도 밝혀집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여 악한 자에게 빼앗기는 길가(19절), 말씀을 듣고 기쁘게 받았지만 환난이나 박해로 넘어지는 돌밭( 21절),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가시떨기(22절)로 설명됩니다. 예수께 와서 말씀을 들었다고 깨달음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빼앗아 가는 사탄, 외부의 환난과 박해, 내부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은 언제나 가까이 있는 걸림돌입니다. 이들 중에 가장 강력하고 교묘한 방해는 세상 염려(욕망)와 재물의 유혹이겠습니다. 오늘날 이 세대가 복음에서 멀어지는 이유이겠지요.
하나님 나라의 특징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에서 보듯이, ‘낭비는 창조의 과정’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용서를 허비하라는 뜻과 같습니다. 길에서, 돌밭에서, 가시덤불에서의 수많은 실패는 실패로만 귀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효율적인 전략과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능한 이들의 무익한 수고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일꾼들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이 새에게 먹힘으로써 농부의 수고는 헛되어 버린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먹힌 씨앗은 새의 양식이 됨으로써 생명의 일을 합니다. 양식이 된다는 것은 모든 씨앗이 가진 고유한 존재 이유이며 목적이지요. 또한 새들의 배설물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자라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새들이 쪼아 먹은 씨앗은 헛되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싹이 터 조금 자라다가 마르거나 기운이 막혀 시들어 죽어간 곡식도 그렇습니다. 열매를 얻고자 하는 농부의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조금 자라다가 죽어간 작물들은 땅을 비옥하게 만듭니다. 이런 희생은 거친 땅을 기름지게 하여 언젠가 결실이 있도록 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말씀은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뜻을 다 이룬다”는 이사야의 신탁(55:11)처럼, 어떤 땅에 떨어진 씨앗(말씀)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힘써도, 여전히 보이는 것은 희망을 찾을 수 없이 참혹한 벌판인 상황을 맞습니다. 하지만 모든 선한 수고와 인내가 허무하게 묻혀버린 것 같은 죽음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는 무덤을 열고 일어섭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나라의 믿음을 버리지 않는 이들 가운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손길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으며, 마침내 그 열매가 세상을 뒤덮으며 하나님 나라가 도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뿌려지는 좋은 땅이며, 또한 그 말씀을 뿌리는 예수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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