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글 첫 머리에 안부 인사를 올리는 것이 예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메르스에
감염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니 안부를 묻는 것이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의
한가한 말이 되었습니다.
서울시가 늦은 밤 기습적으로 메르스 대책발표를 하여 정부가 상대적으로 손을
놓은 것처럼 보여 딱하거니와, 서울시를 상대로 비난하는 성명을 내는 정부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지는 정치권의 여러 반응을 보니, 자칫 진영논리로
벌어질 조짐도 보여 걱정입니다.
매사를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의 정쟁으로 보는 풍조는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려면 일단 멈추어야 하는데,
인간의 긴 역사를 돌아보면, 달려 나가는 일을 멈추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지성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정쟁을 조장하여 당장 눈앞의 이득을 보려는 충동이
지성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 단체는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이면 을지로에서 삼계탕을
보시합니다. 그리고 몇몇 가까운 을지로 거사님들과 노숙하는 보살님들께 촌지를
드립니다. 하루라도 찜질방에서 지내며 몸을 쉬기를 바라는 뜻에서 입니다.
지난 5월 24일 을지로에서 삼계탕을 보시했을 때 일입니다.
삼계탕 보시가 끝날 때 쯤, 회원 벽안(김경숙)님이 한 보살님에게 남모르게 작은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살님은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삼계탕을 대접받은
것도 고마운데 어떻게 봉투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벽안님이 우리 뜻을 더 설명하자,
마침내 그 보살님은 고마워하며 봉투를 받아갔습니다.
저는 벽안님을 통해 이 말을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사람의 기운이 살아 있는 것이 반가웠고, 어렵고 한 푼이 아쉬운 환경에서도
욕망을 멈추고 자신을 지키려는 그 보살님의 모습에 잠시 제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일찍이 당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지었지요.
여유(與猶)는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마치 살얼음위로 걷는 듯,
조심조심 머뭇거리는 태도입니다.
여유당으로 호를 짓고는 다산선생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병은 내가 잘 안다. 나는 용감하지만 무모하고, 선을 좋아하지만 잘 가려서
하질 못하며, 마음이 끌리는 대로 곧장 나아가 의심할 줄도 두려워할 줄도 모른다.
그만둘 수 있는 일이지만 마음에 기쁨을 느끼면 그만두질 못한다.
그런 까닭에 선(善)을 몹시 좋아했지만, 비방을 유독 많이 받았다.
아, 이 또한 운명인가? 성품 탓이니 내 어찌 감히 운명을 말하겠는가?
(<다산의 마음> 박혜숙 역)
앞으로 내닫는 마음을 경계하기 위해 호를 여유당으로 지은 다산선생도
귀양살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표현대로 탐욕과 성냄, 그리고 무지(無知)의 "거센 물결"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흔듭니다. 부처님은 탐욕과 집착의 뿌리가 쾌락과 불쾌라고
법문하였지만, 보아도 보아도 그 심연을 알기 어렵습니다.
최근 회원 몇 분과 함께 초기경전 <숫타니파타>를 공부하며 내적인 성찰이
깊은 부처님의 모습에 경이로움마저 느낄 때가 많습니다. 지금은 숫타니파타 중
큰 법문 품에 나오는 <바쎗타의 경>을 공부합니다.
바라문 바쎗타는 제사를 지내주며 거대한 부를 축적하면서도, 안으로는 바라문의
종교적 권위에 대해 회의하는 젊은 학자입니다. 바라문교에서는 다음 세상에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이나 복을 얻는 일은 모두 바라문의 권위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은 바라문의 진정한 뜻을 묻는 바쎗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친 말을 하지 않고, 의미있고 진실한 말을 하는 사람,
아무도 해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 사람,
삶과 죽음을 알고 욕망과 윤회에 대한 집착을 버린 사람,
쾌락과 불쾌를 버리고 집착없이 세상을 이겨낸 영웅,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고 합니다.
- <숫타니파타> 큰 법문의 품, 바쎗타의 경>
(2015. 6. 7. 여운)
첫댓글 노숙하는 환경속에서도 마음을 잃지않는 보살님께 합장올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