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71)
*돌팔이 의원 집에서 보내는 기막힌 하룻밤 '상편'
다음날 아침, 조반을 얻어먹은 김삿갓은 곽호산 훈장에게 금천의 산천을 두루 돌아보겠다고 말을 하고 떠났지만, 마음은 이미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곡산에 가 있었다.
그의 발길은 곡산을 향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곡산을 가기 위해서는 신계를 거쳐야 한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산길을 걷던 김삿갓의 눈에, 신계를 앞둔,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입구에
'臍生堂藥局' 이라고 쓴 커다란 간판이 희미하게 보였다.
김삿갓은 그 간판을 잘못 보았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다시 보니, 틀림없는 '臍生堂藥局' 이었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음을 웃었다. 간판 글자가 터무니 없는 글자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약국은 생명을 다루는 곳이다. 따라서 약국은 '생명을 건져' 준단 뜻에서 흔히 '濟生堂' 이라고 써온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간판은 건널 제(濟)가 아닌, 배꼽 제(臍)자를 약국 이름으로 쓰지 않았나?
(저 약국 주인은 한문에 어지간히 무식한 모양이군.)
빈수레 끄는 소리가 사뭇, 요란하고. 못생긴 여자가 짙은 화장을 하는 법이다.
그러려니 돌팔이 의원이라고 별다른 일이 있을손가, 생각 된 김삿갓이 의원 앞으로 가보니, 의원 집은 별로 크지도 않았는데, 지붕위를 가로질러 올려놓은 간판은 지붕보다 더 커보였다.
김삿갓은 간판 글자가 잘못된 것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간판이 잘못된 것도 알려 줄 겸, 오늘 저녁은 저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자!)
김삿갓은 약국문을 열고 주인을 찾았다. 약국 주인은 나이가 60가량 되었을까, 구레나룻을 허옇고 탐스럽게 기른 것이 풍채가 그럴듯한
사람이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무슨 병으로 왔는고?"
그는 김삿갓을 환자로 알고 반가운 어조로 맞았다.
"저는 환자는 아니옵고 지나가던 과객입니다."
"과객이 무슨 일로 약국에 들렀는가?"
"이 댁 간판 글씨가 잘못 되었기에, 그것을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간판 글씨가 잘못 되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제생당의 '제'자는, 건널 제(濟)자를 써야할 것을, 배꼽 제(臍)자로 잘못 쓰셨기에 그것을 알고 계신가 하여 여쭤봅니다."
약국 주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크게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역시, 김삿갓의 예상대로 간판 글자가 잘못 된 것을 주인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약국 주인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한다.
"내가 워낙 눈이 어두워 간판을 친구에게 써달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글자를 잘못 쓴 모양이구먼.
그러나 어쨌건간에 '제생당' 이라고 읽히기만 하면 될 게 아닌가?"
약국 주인은 되지도 않은 억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일장 훈계조의 말을 늘어 놓았다.
"무슨 일이나 귀공처럼 꼬치꼬치 따지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네. 그러니 귀공도 오래 살고 싶거든 매사를 둥글둥글하게 보아 넘기게."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려 보였다. 그런 김삿갓의 모습을 본 약국 주인은 아래와 같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통에 더욱 기가 막혔다.
"귀공은 의원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데는 배꼽처럼 중요한 것이 없네. 어린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도 배꼽줄을 잘라 주어야 살게 되거든! 어찌 그뿐인가?
""배꼽에 어루쇠 붙인 것 같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명의는 환자의 배꼽만 보아도 그 사람의 뱃속에 어떤 병이 들었는지 환히 안다는 소릴세.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제생당의 제 자는 건널 제 보다, 배꼽 제를 써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 될 것이야!"
상사마(相思馬) 궁둥이 둘러대듯, 능구렁이 같은 약국 주인의 변명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판 글자가 잘못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승강이는 이제 그만 접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제가 몰라서 부질없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건 그렇고, 날이 저물어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 하고 화제를 얼른 바꿔 버렸다.
주인 늙은이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김삿갓을 위 아래로 훝어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귀공은 학식이 많은 모양이니, 오늘 밤은 쉬어 가시게나. 그 대신 내가 눈이 어두워 읽지 못하는 의서가 있으니, 그 책이나 좀 읽어 주게."
주인 늙은이는 안으로 들인 김삿갓에게 '동의보감' 한 권을 내놓으며 첫장부터 자세히 읽어 달라고 한다. 김삿갓이 생각컨데, 주인 늙은이는 눈이 어둡다는 것은 핑계이고, 워낙 까막눈이어서, 의원이라면 통달했어야 할, '동의보감'조차 읽어 본 일이 없었을성 싶었다.
김삿갓이 정좌세로 앉아 동의보감을 읽자, 마주앉아 이를 듣던 주인 늙은이는 점점 자세가
꼬부라지더니 이내, 비스듬히 다리를 뻗고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워 듣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듣다 말고 한마디 하는데,
"자고로 명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세. 명의를 들라치면 중국에는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허준(許俊)과 안찬(安瓚), 양예춘(楊禮春) 정도가 있을 뿐이지.
그러나 그들도 명의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명의가 되었거든, 그러니 명의란 칭호는 치료 과정에서 실수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칭호밖에 안되는 걸세."
자기도 명의라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려고 한 말 지는 알수 없었지만, 주인 늙은이도 어쩐지
사람을 많이 죽였을성 싶었다.
그때 마침,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환자 한 사람이 찾아왔다.
나이는 사십 가량 되었을까 , 얼굴에 살이 붙어 두 볼이 볼기짝처럼 생겨 먹은 장년이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는고?"
제생당 주인은 부랴부랴 책상다리로 꼬고 앉으며, 턱을 들어 새삼스럽게 위엄을 떨쳐 보였다.
그러자 환자는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제가 요새 몸이 몹시 불편합니다. 선생께 진맥을 받고 싶어 왔습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고? 어디, 팔을 내밀어 보게."
제생당 의원은 환자의 팔을 잡아당겨 맥을 짚어 보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맥을 짚어 볼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배꼽을 들여다 보시죠 ! )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는 없었다.
제생당 의원은 진맥을 하고 뒤로 물러앉으며 말했다.
"맥으로 보아서는 별 이상이 없군그래."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나를 어떻게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 그럼, 자네는 어떻게 괴로운지 증상을 자세히 말해 보게."
"웬일인지 밥을 먹으면 배 속이 까닭없이 평소보다 불룩해 오고, 잠시후 달걀만한 덩어리가 배 속, 위 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배 속에서 달걀만한 덩어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면서, 자네를 괴롭힌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놈의 달걀 덩어리가 위로 올라왔을때, 혹시나 입을 크게 벌리면 나와 줄까 싶어서 입을 크게 벌려 보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내, 아래로 다시 내려가 버려, 사람을 괴롭히니, 아마도 병중에서도 보통 병이 아닌가 봅니다."
"음 ...."
제생당 주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별안간 눈을 번쩍 뜨며 말한다.
"이제야 알았네. 그것은 병이 아니라, 방귀가 탈출구를 찾지 못해 뱃속에서 방황을 하는 현상일쎄.
자네 얼굴이 볼기짝처럼 생겼기 때문에, 방귀조차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찾지 못해,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며 헤매고 있는 것이야. 내가 조위승기탕(調胃承氣湯)을 세 첩 지어
줄테니, 그것을 달여 먹도록 하게. 그러면 방귀가 제 갈길을 알아차려서, 병이 깨끗히 나을 걸세."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북받쳐 오르는 웃음을 참느라고 배꼽을 움켜잡았다. 얼굴조차 빨개졌고..
김삿갓은 조위승기탕이라는 약이 어떤 병에 쓰는 약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배 속에 방귀를 몰아 내는데 약을 쓴다는 말조차, 들어 본 바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