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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산문2-김영하 『여행의 이유』(문학동네,2019)
方 旻
1. 산문집 출간 동기
소설가 김영하 산문은 어떤가. 김훈 산문집이 작가 일상을 주요 제재로 쓴 글이라면, 김영하 산문은 여행이 제재다. 『여행의 이유』(문학동네, 2019)란 책명에서도 분명하듯 그는 김훈과 달리 집필 목표를 아주 선명하고 확연하게 밝힌다. 책 뒤에 달린 <작가의 말>에서 옮기면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두 여행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여행의 본질과 의미, 이유 따위를 질문하고 답을 얻고자 한다. 시작은 이랬지만 글은 ‘삶과 글쓰기’와 ‘타자에 대한 생각’으로 확장했다고 말한다. 즉 이 산문집은 여행을 중심에 두고 풀어낸 한 작가의 삶 전반으로 넓혀진 인생 이야기란 셈이다. 즉 수필 제재와 닮았다. 이 글을 쓰는 이유 또한 이것이다. ‘여행의 이유’라는 책 제목은 수필식으로 옮겨보자면 어쩌면 ‘작가가 사는 이유’쯤 될 터이다.
2. 산문 지향점
이 책 집필 목적은 여행에 대한 작가의 자족성 글로써 사용가치를 지니면서, 소설가의 여행이야기라는 상업성 교환가치를 동시에 추구한다. 그 전제는 ‘김영하’라는 인기 소설가의 유명세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언급처럼 “글을 팔아 제 앞가림을 시작했다는 것을”(29면)에서 보듯 ‘파는 글’ 또는 ‘팔리는 글’을 의식한 대중적 교환가치가 최우선하는 목표다. 소설가가 소설 글로 상업성 이득을 얻지 않고, 여행한 체험과 여행에 대한 의견을 펼치는 수필식 글로 소설과 동일한 교환가치 획득을 목표 삼는다. 때문에 이를 달성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불러낸다. 자신이 살아온 세대 이야기나 학생 시절 겪었던 시위와 관련된 것, 군대 체험과 집안 이야기 등, 이야기 맥락을 위해서 부를 수 있는 것은 총 동원한다. 제재는 일반 수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팔 수 있는 것, 혹은 팔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내놓는다는 면에서 수필과 다르다. 즉 글의 주제와 관련된 제재 선택과 내용을 선정하기보다 상업적이냐 아니냐의 관점 위주가 취사선택의 전제로 보인다. 곧 상업성과 대중성이 산문집을 지배하는 으뜸 가치다. 이를 위해 여행 체험을 소설화하고 글 서두를 논리적 맥락으로 시작해서 심리적 논리까지 마련해 풀어가며 완결된 현실(리얼리티)로 만든다. 이것은 사실 체험만으로 설명할 수 없고 납득이 안 되는 소설 속 현실이다. 덧붙이자면 작가 자신을 소설 속 인물로 가상하여 쓰거나 현실의 비논리성을 소설의 논리성으로 가미하여 스토리를 엮는다. 즉 그는 소설을 쓰면서 익힌 허구성을 여행 체험기를 쓰면서도 유감없이 사용한다. 이 역시 수필과 차이나는 점이다. 왜냐하면 독자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해서 상업적 교환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이 이 글 목적이자 동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 첫 글인 <추방과 멀미>는 일반 산문 특히 수필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분량인 43면이고 원고 매수로 치자면 대략 130매다. 수필의 일반 분량으로 치면 10편에 달한다. 대단한 여행 관련 체험기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김영하 산문은 ‘여행’이 핵심 뼈대지만 결국 작가의 삶을, 작가로서의 삶을 여행 체험에 비춰 쓴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가 여행하면서 겪은 다양한 체험이 산문 소재이다. 시중에서 유행하는 여행 작가의 글과 외피는 흡사하다. 여행기는 여행 장소와 그 일정을 진행하면서 체험하는 사연이 중심인데 반하여 여행을 제재로 하는 보통 수필가의 여행기는 보다 문학성을 살리기 위해서 작가의 사유와 감성 중심으로 여행지의 풍정과 특별한 사건의 상세한 기술보다, 작가의 개인성이 중심이다. 즉 대중 여행기처럼 여행지의 공간과 지역 특성 서술보다 그것을 접하면서 갖는 작가의 인간적 내면 풍경을 더욱 강조한다. 물론 양자는 넘나듦이 있다. 다만 작가가 접하는 여행지의 낯선 외면 풍경이 중심이냐, 그것을 접하는 작가의 내면 심성적 풍경이 우선이냐에 따라서 여행 작가의 여행기냐, 수필가의 여행기 수필이냐 차이가 드러난다. 이점에서 보면 김영하 산문은 수필가와 이른 바 여행 작가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다.
3. 문장 문제
그는 글을 쓰는 내내, 또는 여행하는 시종 늘 소설가 직업을 의식한다. “직업적 호기심으로”(9면)에서 확인한다. 그렇다면 이 『여행의 이유』 를 쓰면서도 그는 소설가임을 의식하였을 것이다. 그래선지 거의 글마다 과다할 정도로 다소 불필요한 지식을 과시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10면)에서 드러나듯, 더구나 그것이 주제 통합성을 저해하는 것일지라도, 주제 의식을 미약하게 하거나, 지식이란 것 대부분이 수필의 자설적(自說的) 체험 지식이 아닌 독서에서 얻은 타설적(他說的) 객관지식에 기대는 것으로 보면 수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김영하 산문을 읽으면서 쉽게 찾는 불편함은 불필요한 피동형 사용이 많다는 점이다. 예컨대 “엄중한 순간에 던져지는 이런 사소한 질문에 대해,”(9면)로 쓰는 식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영하 산문은 필요 없는 목적격 조사 ‘을/를’을 과도하게 사용한다. “그로부터 두 시간 정도를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인천행 비행기가 탑승절차를 개시하기를 기다렸다”(10-11면)는 어색한 문장이다. 주어는 생략한 ‘나’이고 술어는 ‘기다렸다’인데, 이 글은 주어와 술어가 ‘비행기가~ 기다렸다’처럼 썼다. 모두 알다시피 탑승절차는 비행기가 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항공사 직원과 승객이 함께 하고 절차에 따르는 일로 직원이 주도한다. 문제 부분만 최소한 바르게 고쳐 쓰자면, ‘인천행 비행기 탑승절차가 개시되기를 기다렸다’이다. 더 좋은 문장으로 고치자면, “그로부터 두 시간 정도를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인천행 비행기가 탑승절차를 개시하기를 기다렸다”(밑줄 필자, 이하 같음)를 ‘그로부터 두 시간 정도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인천행 비행기 탑승절차를 기다렸다’이다. 불필요하게 문장을 길게 쓰고,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군더더기 문장을 낳는 결과일 것이다. 물론 작가의 개성 문체로 일부 돌릴 수도 있지만 직업 유명 소설가 문장으로 보기에는 허점이 많아 보인다. 이 목적격 조사인 ‘를’의 무분별한 사용은 현재 꽤 깊게 유포된 잘못 쓰는 문장으로 무척 일반적인데, 이 문제가 유명 소설가한테 역시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을 유감스럽게 확인할 뿐이다. 예컨대 “짐을 찾으며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11면)로 흔히 이런 문장을 쓰는 것은 김영하나 일반인이나 너무 익숙한 행태다. 이것을 ‘짐(을) 찾으며 아내에게 전화했다.’로 쓰면 어떤지 비교해보면 좋겠다. 이런 투 문장은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한 둘이 아니기에 바람직한 바른 문장이 작가의 소명이란 전제에서 지적한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 보자. 그의 독특한 개성 문체라 볼 수도 있지만 필자에겐 꽤 어색한 문장은 종결 서술어인 ‘~것이다’의 남용이다. 예문을 보기로 하자.
그러나 자기 여행을 소재로 뭔가를 쓰고 싶다면 밑에서부터 주문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때론 동행 중에서 따라 시키는 사람이 생기고, 그 인상적인 실패 경험에 대해 두고두고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걸 글로 쓸 것이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18면)
이 글은 마침표를 기준으로 보면 5개 문장인데, ‘것이고, 것이다’가 5개다. 즉 매 문장마다 ‘것이다’를 반복해 썼다. 그의 개성 문체로 보기보단 매우 어색한 문장이다. 특히 이 산문이 작가의 의견을 내세우는 글이라면 당연하게 분명한 의견을 밝혀 써야하지 막연한 추정의 ‘것이다’는 바람직하지 않다. 위 5개 중에서 한둘만 빼고는 적절하지 않다. 간혹 수필은 의견을 강조하거나 주장하는 논설이 아니어서 막연하게 추정하며 독자에게 동의를 얻기 위해서 더러 ‘것이다’를 쓰지만 작가 의견을 제시하고 강조하는 수필이 아닌 산문에서 위처럼 막연한 글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4. 산문 특징
그는 산문을 마치 소설 쓰듯 한다. <추방과 멀미>라는 글은 중국에 여행가면서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무비자로 추방당하는 이야기인데, 여기에 요리 이야기와 자신이 쓴 소설 이야기를 함께 버무려 펼친다. 수필이라면 여러 편(최소 두 편)으로 주제를 달리해 썼을 터인데, 소설가인 작가는 스토리를 이어가듯 연결해 글을 쓴다. 이 글은 세 가지 스토리인 ①무비자 ②요리 ③여행기를 연결하여 개인 체험을 나열하며 쓴 일종 1인칭 사소설식 구성으로 쓴다. 이런 글을 필자는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식의 나열식 열차형 산문으로 부른다. 즉 화제 연결은 되나 주제 의식 없이 줄줄이 사탕처럼 글을 구성하는 맥락 없는 수다 떨기 방식 글인 셈이다. 이처럼 일상 수다나 글의 특징은 화자나 필자의 개인 체험에 연결되는 지식의 나열 및 끝없는 자기 자랑을 펼치거나 독단적 주장이 대부분 내용이다. 청자나 독자가 듣고 싶은, 읽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화자나 필자가 하고 싶은 자기 위주의 독선적 말과 글이란 점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여행하면서 겪은 체험과 관련된 지식과 주장, 소설가로서 소설 쓰는 이야기까지 끝도 없이 줄줄이 화제가 종횡무진 이어진다. 주요 화제는 여행과 관련된 이야기와 그것이 자신의 소설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굴절하는지, 현실의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풀어내면서 소설론도 아니고, 여행담도 아닌 이야기를 묶는다.
이런 내용 연결성은 간혹 쉽게 고리를 끊고 나타나기도 한다. 작가는 내면 연결고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글을 이어갔을 터이지만 외형적 연결고리인 접속사와 내용 화소가 없어 양자 연결을 독자가 납득하기 어렵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에서 보자면 “나는 호텔이 좋다”라는 한 문장의 불완전 첫 문단 다음엔 ‘반복적인 경험’의 필요성을 얘기하고, 셋째 문단에선 ‘호텔 숙박의 경험’을 그리워한다고 쓴다. 첫 문단의 ‘호텔’이 연결된다. 넷째 문단에선 작가의 ‘영화 대본을 써본 일’로 화제가 이어진다. 앞 문단과 연결고리는 사라진다. 다음 문단에선 ‘시나리오 작법 책’을 본 걸 이야기하다가, 다음 문단에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얘기로 이어진다. ‘인물 캐릭터 창조’ 수업 이야기를 하더니, 다음 문단에선 ‘모든 인간’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드디어 여덟째 문단에서 ‘인물과 호텔’이 등장 한 뒤에 다시, 자신의 그리움이 ‘호텔’로 표상된다 말한다. 이어진 문단에선 자신의 호텔에 대한 정서, 즉 편안과 고통의 이중성이라고 말한다. 다음엔 이 낯섦의 고통과 친숙함의 반복과 적응에 대한 작가와 아내의 공통 경험을 이야기하며 소설 쓰기에 대입한다. 다음 문단에선 작가의 2013년 소설 쓴 경험을 풀어내면서 이 글의 의미로 볼 수 있는 작가의 ‘인생론’을 제시한다. 이어서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고 다시 그의 ‘호텔론’을 덧붙이며 그의 나열식 구성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문단도 앞에서 본 것처럼, 이야기를 펼치다가 읽은 책의 일부를 인용하며 이야기를 잇고, 그것을 해석하고 풀이한다. 호텔과 관련지을 수 있는 것, 그의 호텔 체험과 간접 경험한 독서, 영화 관람한 내용을 이어 엮는다.
그런데 문제는 호텔과 관련 있다고 작가가 생각하는 여러 이야기를 끌어와서 호텔이 왜 좋은지 장광설을 펼치고 마무리 짓는 허탈한 결말에 있다. 작가는 끝 문단에서 이토록 길게 ‘호텔’에 관한 자신의 모든 것(실제 투숙 체험과 독서, 영화 관람 의 경험, 연관된 사유와 감상 등)을 펼쳐낸 뒤, 마지막 문장에서 독자를 의외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다.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68면) 지금껏 작가가 체험한 호텔과 관련된 온갖 것을 동원하여 이성과 지식에 기대어 일종 ‘호텔 호감론’을 펼쳐 설득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라는 경험론으로 마무리하면 지금껏 그가 펼쳐온 주장에 대한 신뢰는 다 어디로 갔는가. 이 말은 경험해보지 못한 독자는 알 수 없다는 선언과 무엇이 다른가. 글이란 필자와 같은 경험과 지식을 갖거나 맛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걸 표현하고 전달하는 소통 기능이 본질이다. 그럴 수 없다면 이토록 긴 글(14면, 200자 원고 52장 분량)이 왜 필요한가. 직접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거라면 글을 쓰지 말거나 쓰더라도 간단하게 ‘호텔이 좋은 것은 직접 경험해 보세요. 글로는 좋은 것을 전할 수 없어요.’라고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이 글의 문제가 바로 이 대목인 이유다. 글 첫 문장인 “나는 호텔이 좋다”는 수필 서두처럼 시작한다. 만약 수필이라면 작가 화자는 어디의 무슨 호텔에 묵었는데, 그곳의 어떤 점이 좋다거나, 여러 개의 호텔 숙박 경험을 모두 종합하여 좋은 점을 설득적이던 감상적이든 펼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 좋다’는 것은 모두 알다시피 개인 취향과 기호에 속한다. 여기엔 타인에게 설득하거나 공유할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 성향의 것이라 일반화할 정답이 없다. 사람마다 다를 뿐이고 그 선호에 관해 차이를 확인할 뿐 누구도 ‘옳다, 그르다’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거나 할 일이 아니다. 그냥 받아들이거나 나와는 다른 데 하고 인정하면 되는 일이다. 소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와인을 즐기는 사람을 뭐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때문에 이 글은 김영하 작가가 왜 호텔을 좋아하는지, 어떤 호텔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본인 말대로 많은 호텔 숙박을 수없이 이미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것을 종합하거나 개별화해 쓰면 된다. 이것을 마치 호텔론을 쓰는 학자처럼 잡다한 개인 지식을 동원하고 덧붙여 개인 관련 체험을 섞어 독자를 설득하는 논설을 쓰듯 썼기 때문이다. 제재부터 이것은 설득할 논설 내용이 아니다. 개인 감상의 수필문에 해당하는 것을 독자에게 계몽성 설교를 하려 했기 때문에 소설가 김영하의 일면 호텔론이 된 것이다. 이것이 글의 집필 의도와 어울리지 않는 경험론 결말로 귀결하게 한 까닭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의 공통점은 한 마디로 고급 일식집에서 비싼 회를 주문했는데, 맛나고 신선한 회보다 양과 질 면에서 우위를 차지한 것은 스끼다시가 넘치는 음식상과 같다. 이를 더욱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 번째 글인 <오직 현재>다. 작가의 캄보디아 여행 체험이 주요 제재다. 다양한 체험 사례를 들어가면서 그가 내세운 것은 ‘여행은 현재다’란 명제다. 이 주제를 위해서 꽤 지루하게 불필요한 것이 넘치고 군더더기가 의외로 많다. 모두 12면인 이글에서도 여행 현장 체험과 소설을 읽고 쓴 경험이 주 내용이다. 이런 글을 읽으면 여행론인지 여행 감상문인지 아니면 둘을 공유한 것인지 모호하게 다가온다. 작가 자신의 여행론의 일종인 ‘여행의 현재성’을 설파하기 위한 글인데 작가가 소설가이니 소설과 관련해서 쓴 글이다. 위 글은 집필 동기와 서술 구성 방식으로 보자면, 독자에게 핵심 주제(회 몇 점)가격의 몇 배에 해당하는 분량(가격)을 읽도록 요구하는 글이다. 실상 횟집의 스끼다시는 회맛을 때로는 방해하는 부속 요리로 손님의 식욕을 채우는 횟집과 소설가 김영하 산문집의 상업 전략은 동일하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값은 헐하지만 싱싱한 회맛으로만 승부(유명 소설가의 명성이 아닌)하려는 일식집도 적잖다. 이 점에서 이 산문집은 다소 실망스럽다. 이 책 속 표지의 저자 소개란에 보면 소설가로서 유명 문학상을 휩쓸다시피 한 유능 작가다. 결론적으로 이처럼 허점이 보이는 산문보다 소설에 집중하는 것이 그의 문학 재능을 특화할 수 있는 강점으로 보인다. 물론 선택은 오로지 작가 몫이란 점 역시 두말할 게 없다.
5. 수필이 아닌 이유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는 ‘여행은 유전 본능이다’를 설명하는 글로써 비문학에 속한다. 논증이 도드라지고 이에 약간의 유사 체험을 곁들인 글인데, 그 체험이 집필동기가 된 글이다. 자신의 개인 체험에서 이런 주제를 설정했고 이것을 논증 형식으로 설명한다. 이 책의 제목인 ‘여행의 이유’에 적합한 분석적인 글에 속한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은 방송에 출연하면서 체험한 여행에서 연유한 여행론이다. 마지막 문장은 “내가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117면)이다. 이 글 결말은 다소 수필적이다. 작가 여행 체험을 거친 뒤 각성에 이르렀기 때문인데, 그것도 이지적이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역시 여행 체험과 관련한 소설을 융합하여 작가의 여행관을 제시하는 글이다. 글의 마지막 문장 “요즈음의 나 역시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에서 자성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무리는 수필답다. 여행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경우와 연관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책은 여행 체험(일반인으로서든 소설가로서든 막론하고 그의 여행 체험 양은 상당하다)과 연관하여 독서 지식을 첨가한 ‘여행의 이유’를 피력하는 목적의 글이다.
이 책은 기본 발상부터 계몽주의식 교시성을 갖는다. 때문에 아는 것(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여행에 대해 그 이유를 가르치고 훈계하려 한다. 일종의 여행 전문가 관점에 서 있다. 그러므로 애초에 이 책은 문학이나 수필이 아니다. 서적을 인용하거나 객관 지식을 제시하는 것이 주이다 보니 거기에 첨부한 개인 여행 체험은 어쩌면 부차적이다. 때문에 객관성을 높이려고 지식을 나열하여 학자가 논문을 쓰듯 논증적 설명문이 주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따라서 유능한 소설가의 유려한 묘사와 감상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즉 수필과는 거리가 멀다. 이 점은 이 글의 마지막 문단(148면)에서 “~알게 된다”와 “신뢰와 환대 덕분이었을 것”의 단정과 결론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유명작가라고 반드시 문학 글만 쓰라는 법도 없고, 써야한다는 의무 규정도 없다. 어떤 글이라도 쓸 수 있고 실제로 쓰는 것에 시비할 일은 당초에 할 일은 아니다. 다만 그는 유명한 유능 소설가이기에 선입견으로 문학 산문만 쓸 것, 문학 산문으로 쓸 것이라는 편견에서 바라본 결과일 따름이다. 그냥 유명인의 여행관을 밝힌 글로 읽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있을 수 없다. 필자가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거북한 ‘여행 작가’란 이름으로 여행 체험기를 발표하는 책이 적잖은 현실에서 소설가가 쓴 여행이란 주제가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글을 쓰기 위한 준비가 철저했고, 그 주제에 집중하는 프로 의식과 완벽한 산물을 추구하는 도공의 태도를 보인다. 이점 수필가인 필자가 배워야할 대목임을 깨닫는다. 책 한두 편을 읽고서 마치 대가연하며 글쓰는 이가 적잖은 현실에서 볼 때, 충실하게 자료를 조사하고 세밀한 근거를 제시하여 그는 글을 쓴다. 이점 책갈피 여기저기 충실한 각주에서 확인한다. 소설가 김영하의 집필 태도와 자세를 보면서 수필가와 비교한다. 산문집의 집필 의도는 상업성이지만, 태도는 적극적이었고, 자세는 철저했다. 체험 기록 위주의 수필가로서 반성할 대목이다. 수필가로서 주제의식을 강조하거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자세를 본받아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대체로 주제와 집필 동기나 화제를 서두에 제시하는 두괄식 연역 방식으로 쓴다. 즉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써 주로 논설문에서 즐겨 쓰는 글 구성이다. 따져 보자면 이런 식이다.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18면)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이것을 자신이 겪은 여행 체험, 독서 체험, 소설 창작 체험을 총 동원하여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는 글을 쓴다. 아니면 어떤 단정적 의견을 내세우고 그것을 입증하려는 글을 쓴다. “여행을 통해 뭔가 소중한 것을 얻어 돌아와야 한다는 관념은 세상의 거의 모든 문화에서 발견된다.”(27면) 또한 “2005년 12월의 어느 날. 나는 상하이 푸둥공항 티켓 카운터에서 서울로 가는 편도 항공권을 사고 있었다.”(9면)처럼 수필과 같은 방식으로 시작한다. 즉 사건 시작의 시공간을 화자가 제시하며 글을 연다. 이런 식은 수필에서 흔히 접하는 글의 서두다. 그러면서 수필 화자인 작가에게 어떤 특이한 사건과 사연이 펼쳐지고 그 과정에서 문학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혔는지를 마무리 하며 글을 끝낸다. 이런 면에서 보면 김영하의 <추방과 멀미>는 수필과 동일하게 시작한다. 그러나 글을 펼치면서 수필과는 다른 길로 들어가서 영영 나오지 않는다. 수필로 시작한 글이 소설가의 논설 산문으로 끝난다. 아쉬운 대목이지만, 유명 소설가에게 수필(문학 산문)을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한 욕망임을 새삼 확인한다.
첫댓글 김훈 역시 수필을 쓴 걸 보면 웃겼어요. 여자들의 토플레스가 아름답느니, 마치 '나는 젊은 여성들을 좋아한다' 라는
뉘앙스를 엄청 풍겼어요. 이광수가 쓴 '돌베개'도 참 좋게 쓴 수필이지만 수필 전문문학가가 쓴 것 만은 못해 보였어요.
송충이는 갈잎을 먹을 수 없는 이유가 그런데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거라고 느꼈어요.
그래도 베스트 셀러만 됩니다. 김영하가 썼다는 이유만으로....
전문수필가들의 책은 서가에 진열도 안되는 현실.....
@이복희 오호~!
통재라~!
수필의 진수는 수필가가 쓴 수필에 있는데
그저 명성으로 베스트 반열에 오르는 거지요.
기대로 들었는데 좀 허전했어요.
난 아직 다 못읽었어요.
여행의 이유를 어디에 두었는지 감만 잡고 있을 뿐입니다.ㅎㅎ
방민 교수님, 분석 좋습니다 . 문제는요 저 산문은 말씀대로 예술로서 형식미가 부족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읽는 재미는 준다는 거죠. 순수 수필은 형식미는 있어요. 하지만 저 산문보다 재미는 없어요. 윤오영, 피천득, 손광성, 최민자 정도의 수필이 되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요. 이 문제가 저는 고민입니다.
자타공인 그분들만 능가하시면 되겠네요. 다른 수필들은 모두 재미 없으니(재미라는 표현은 좀 아니라는 생각이지만 굳이 그리 표현하셨으니) 그 네 분이 기준이시라면 내공이 아주 높으신 듯 자신감 뿜뿜입니다. 그런데 뭘 고민하시는지요?
시인의 숫자에 버금가는 수필가들이 통탄할 의견을 올리셨습니다. 열거하신 네 분의 작품이 '재미있다'로 표현하는 것에도 동감할 수 없지만 그 외의 수필가들을 폄훼하는 주장에는 도저히 댓글을 달지 않을 수 없네요. 물론 신변잡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글을 쓰는 작가도 있지만 놀라운 수작을 쓰는 작가도 있습니다. 이렇게 함부로 수필가들을 평론하시기엔 좀 경솔하시다 싶은게 저의 뜻입니다.
여기가 좁은 공간이기 망정이지 어느 매체에 칼럼으로 올리셨다면 그 반격을 어찌 다 감당하시려구요.
활자는 언어와 달라서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복희 제 말씀은 우리 수필가들 글이 잘 팔리는 김훈이나 김영하의 산문보다 재미 없다는 뜻이지요. 솔직히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판매 부수가 말해 주지 않나요. 저는 여러분보다도 못 쓰니 논외입니다만. 우리 수필가의 수필이 그런 분들의 산문보다 안 읽히는 이유가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우리 정통 수필가들의 수필이 그들보다 안 읽히는 게 고민이라는 거죠. 여러분은 그거 고민하지 않으시나요.
제 글이 오해를 일으킨 점은 미안합니다. 다만 제가 말한 고민의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 문제는 오래된 논쟁이죠. 황필호의 우리 수필 평론 21쪽입니다. 백보를 양보해서 이상에 열거한 사람들의 에세이집들은 진정한 문학성이 결여된 수필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과연 기형도 김현 김윤식 김지하의 에세이집들이나 김병걸의 솔직한 자서전이나 신영복의 서간문보다 더욱 문학성 있는 수필을 쓰고 있는가. 1994년 한국수필문학상을 받은 필자를 포함한 우리나라 수필가들은 이제 좀 반성할 필요가 있다.
맞습니다. 이 문제는 오래된 논쟁이죠. 모두의 고민인 점도 사실이고 그 이유를 굳이 따진다면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는 접겠습니다. 단 쉬운 말로 이야기하자면 선생님의 답글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였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 수상하신 선생님의 입장에서 더더욱 그리 쉽게 말씀하실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열거하신 분들의 작품을 우리도 높이 평가하지만 그분들조차 '수필가'로서 문단에서의 자리매김이 미미한 것을 볼 때, 서점의 서가에서 찾기 힘든 것을 볼 때 결국 이 문제는 '지명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현상이 그렇습니다. 수필 외적인 문제도 간과할 수 없지요
저는 지명도가 중요한 이유라는 걸 인정합니다. 하지만 또 하나는 내용의 재미입니다. 지명도 없는 사람이 쓴 산문, 실용수필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용이 재미있어서입니다. 정통 수필은 왜 안 읽히는가 고민해야 합니다. 저는 함께 고민하자는 것이지 딴 뜻이 아닙니다. 저야 욕먹어도 좋지만 수필이 사랑받기를 원해서 드리는 고언입니다.
우선 무명들에게는 읽힐 기회조차 없다는 거죠. 선생님은 다른 이들의 수필집을 다 읽으셨는지요?
물론 작가들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저도 동감이지만, 고언도 좋고 사랑도 좋지만 단지 댓글로 전한
말씀이라 할지라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수필가들이 재미없는 글, 읽하지 않는 글을 쓰고 있다고 한꺼번에 매도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는 데 문제가 있지요.
고언을 하시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모두 몰라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 여러 외적인 문제들도 살펴 보신다면 어떠실까 싶어요. 아무튼 관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김영하의 산문보다 정통 수필가들의 수필이 재미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수필이 재미없다는 게 아니라 비교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논쟁이 거기에서 출발했으니까요. 저는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김영하의 산문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배울 생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무튼 읽히니까요. 우리는 읽힐 글을 써야 합니다. 그걸 고민해야 합니다. 나는 정통 수필을 쓴다는 자부심만 갖고는 수필의 소외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저는 수필가들이 깊이 고민해야 햔다고 생각합니다. 황필호는 앞 책 280쪽에서 썼습니다. 수필가가 잘 팔리는 수필집을 발표해야 한다는 원칙은 영원히 옳다.
초지일관, '팔리는 글= 재미'의 등식으로만 이야기하시네요. 도무지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시니 더 나눌 이야기가 없습니다만 '수필가가 잘 팔리는 수필집을 발표해야 한다는 원칙은 영원히 옳다'
참 원론적이고 옳은 말씀, 선생님께서 스스로 증명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