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류건 간에 신체적 손상을 겪어야 합니다. 다리가 부러져서 더 이상 맞출 수 없는 경우에서와 같이 에테르체가 신체로부터 분리되는 일을 겪어야만 합니다(발도르프 교육방법론적 고찰, 2009, 33)."
인간의 정신발달은 발달단계가 있어서 그 시기를 놓치면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사실을 우리는 정신이 보이지 않기 떄문에 다만 알지 못할 뿐이다. 슈타이너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 시기에 발달되는 바로 그 힘이 흐지부지되어서 나중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시기에 놓친 것을 성인교육에서는 결코 만회할 수 없습니다(위 책, 256)." 그러니까 특정한 시기에 발달되는 그 힘이 사라져버리므로 나는 그 힘이 있는지도 모르고, 나아가 그 힘이 발달하지 않으므로 쓰지도 못한다. 예컨대 "내면의 이 음악적인 고찰은 서 너살의 어린이에게서 가장 많이 존재하는데" 이 시기에 음악을 접하지 못한 사람은 음악적인 재능이 발달하기 어려운 것이다(위 책, 35)." 비단 음악뿐 만이 아니다. 다른 재능도 그렇다. 이것을 모르는 것은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육체만 보기 떄문인데, 하지만 가만히 보면 정신이 모든 것을 움직이고, 정신이 물질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리하여 조금도 과장하지 않아도 현재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청소년뿐 만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이 정신이 올바르게 발달하지 못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수가 있다.
필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역시 경험했기 떄문이다. 물론 그 당시는 정신이 망가지는줄도 몰랐기 떄문에 그렇게 당했을 것이다. 요컨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안타까운 일인데, 그것을 만회할려고 오랜 시간 노력, 지금도 노력하는데 슈타이너의 주장대로 쉽지가 않다. 정신은 지금도 발달하거나, 잠자거나, 망가지거나, 셋 중 하나이기 때문에 언제나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인간의 발달단계에 따르면 0-7세까지는 육체가 발달하고, 7-14세까지는 에테르체가 발달한다. 13-14세 즈음 아스트랄체가 탄생해서 21세까지 발달하고 21세는 자아가 탄생해서 지구에서 인간이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발달 시기 중에서 필자는 에테르체가 발달하는 시기에 어려움이 발생했다. 에테르체는 0-7세까지 인간의 몸을 만드는데 몰입하고 이 작업이 끝나면, 이 작업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자신의 속성을 펼친다. 인간의 몸을 만드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에테르체는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 조형작업을 하는 속성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정신세계에서 살다가 육체를 입었다. 그러므로 정신세계에서 존재할 때의 에테르체와 육체를 입은 상태에서의 에테르체는 서로 다르다. 따라서 인간이 육체를 입은 상태에서, 에테르체는 다시 적응을 해야 한다. 슈타이너의 표현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65도씨의 온도에서 적응한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힘들겠는가. 사실 이 시기의 에테르체는 이와 같이 적응을 해야 하는 상태이다. 이 사실을 인간만이 모르게 인간의 내면에서 작업이 이루어진다.
아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활발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있다. 활발한 아이는 정신이 활발한 아이로 지난 생에 활발하게 정신이 움직인 아이이다. 반면 활발하지 못한 아이는 육체가 무거워서 정신이 활발하지 못한 아이이다. 정신이 활발하지 못한 아이는 흥미를 불러일으켜서 정신이 활발하게 웁직이도록 돕고, 정신이 활발한 아이는 그림을 그리도록 해서 정신이 그 쪽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슈타이너의 주장).
에테르체가 몸을 만드는 작업에서 벗어나면, 즉 그 구속에서 풀려나므로 굉장히 자유롭다. 더불어 정신이 활발한 아이라면, 더욱더 자유로울 것이다. 아마도 필자가 여기에 해당한 듯하다. 필자의 초등 2학년 무렵에 선생님으로부터 큰 충격을 받았다. 수업 중에 장난을 치고 뛰어다닌 모양, 물론 선생님은 여러 번 주의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뛰어다닌 모양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받는 충격이다.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지만, 아이가 충격을 안 받을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 선생님은 수업 중 돌아다니는 필자에게 소리를 크게 질렀다. 소리의 내용은 기억이 안나는데, 그 순간 만큼은 기억이 난다. 이렇게 화를 내는 선생님을 처음 본듯, 필자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필자가 수업 중에 웃고 돌아다닌 것은 필자의 내부의 외침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즉 필자의 내부애 강하여 연결되어서 외부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아이들은 이것이 당연하다. 그래야 내부가 발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의 화를 본 순간 필자는 생각했다. 내부에 계속 연결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 내부와의 연결을 끊어야 외부의 상황에 귀를 기울일 수가 있다는 생각말이다. 필자는 선생님의 고함을 듣는 순간 '스스로' 내부와의 연결을 끊었고 외부에 시선을 고정을 하였다. 그 결과는 조금씩 조금씩 서서히 드러났는데, 에테르체가 발달하는 시기에 에테르체가 발달하지 못하므로 에테르체의 속성에 따른 정신의 발달이 멈춘 것이다.
필자가 이를 알게 된 것은 초등 5학년 무렵부터 암기(기억)공부가 안된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이해하지만, 에테르체가 기억을 담당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상적인 개념의 이해도 거의 되지 않았다. 당시 산수공부에서 계산 문제가 아닌 설명식 문제에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당시 기억을 하면, 선생님은 설명하는데 나는 이해하지 못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당연한 듯 이해를 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왜 나는 이해를 못하는가'.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란 생각을 그 당시 한 듯하다. 물론 학년이 올라가면서 계속 공부를 했지만, 여전히 막히는 부분은 있었다. 다행인 것은 당시 구구단을 열심히 외웠는데, 이것이 그나마 정신을 발달시켜 주어서 조금이나마 나아갈 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산수, 숫자는 반 물체적, 예술이 가장 정신적, 읽기, 쓰기가 가장 물체적이어서 숫자가 정신에 연결되어 정신을 발달시킨다. 하지만 에테르체가 발달하지 않음으로 해서 막히는 부분은 여전히 지금도 있다. 예컨대 외우는 작업, 추상적인 작업은 부족하다. 생각하기에 그때부터 정신에 대한 의문이 생긴 듯하다.
에테르체는 인간의 생명을 움직이는 힘이다. 명상자세로 앉아서 가만히 자신의 호흡에 집중해보면 그 힘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알수가 있다. 아주 작은 힘이다. 그리고 이 힘이 삼라만상의 생명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므로 에테르체가 발달하는 시기에 아이들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윽박지르면, 아이들의 에테르체는 위축이 되어서 발달하기 어렵다. 에테르체는 맥박, 호흡, 혈액의 순환 등등과 같이 리듬을 가지고 움직인다. 그러므로 리듬을 통해서 수업을 한다면 아이들은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문제는 이 시기 아이들은, 자아가 드러나지 않아서 모든 존재들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선생님도 자신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선생님이 자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기에 필자도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회복 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당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미 망가졌기 떄문에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이와 같이 지금의 아이들 역시 자신의 정신이 올바르게 발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망가지는 것이 현실이다.
기억과 추상적인 사고를 에테르체가 담당해서 에테르체의 발달이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에테르체는 인간이 태어날 때 인간의 몸을 만드는데,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신경체계를 완성하는 일이다. 신경체계가 완성되면, 거울과 같이 물질을 비추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러면 자아가 상속에 들어가서 인간의 삶이 비로소 시작된다. 즉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이와 같이 자아가 상속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서 부터 (자아가 상속에 들어가므로), 본래의 자아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에테르체가 하는 이 작업을 하기 전에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본래의 자아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본래의 자아가 보는 모습, 이것이 바로 인간의 정신작용이다. 모든 작업은 정신세계에서 먼저 이루어지고, 우리는 그 작업이 이루어진 뒤에 다만 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본래의 모습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에테르체가 발달하면, 에테르체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수행하면, 우리는 에테르체의 작업 전에 본래의 정신작용을 볼 수가 있지 않겠는가. 최소한 지금보다는 쉬울 듯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선지식들이 이 작업을 보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에테르체가 정상적으로 발달한다면, 되풀이 하지만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이를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산책을 하는데, 에테르체가 상을 만들기 전 작업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상을 만들기 전, 자아가 상속에 들어가기 전, 본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본래의 모습, 단풍이 든 나무의 색깔이 너무나 선명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글로 쓸 수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났는데, 그 모습은 한 마디로 '희열' 그 자체였다. 온 몸에 분포된 에테르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에테르체가 발달하는 시기에 발달하지 못하면, 슈타이너의 주장처럼 에테르체가 몸에서 분리되어야 다시 발달한다.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인데, 슈타이너는 만약 '이것이 업이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발달단계에 정신의 발달이 중요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