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왕국의 잔치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마태복음 14장)
복음서의 대표 이야기 – 오천 명을 먹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제외하고, 네 복음서 모두에 언급되는 예수의 행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떡(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군중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오병이어(五餠二魚)” 이적 사건이 유일한 그 하나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기독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구원론), 신앙공동체는 어떻게 존재하는지(교회론)를 두루 설명하는 원형적 이야기로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복음서들이 자신의 다양한 관점들을 지니고 있듯이, 오병이어 일화를 기록하는 복음서들의 이해 역시 저마다 다릅니다. 이는 복음서마다 오병이어 기적을 각각 다른 맥락과 배경 속에 자리매김한다는 사실에서 밝혀집니다(막6장; 눅9장; 요6장). 마태복음 역시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 오병이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마태복음만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 따로 빈 들로 가시니 (13절; 4:12)
공관복음에서 두루 알려진 대로, 오천 명을 급식하신 이적이 일어난 장소는 “빈 들”(13, 15절; 막6:30; 눅9:12)입니다. 예수와 많은 무리가 왜 빈들에 함께 있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쓸데없어 보일 수 있지만, 적어도 마태복음으로 오병이어 이야기를 읽을 때는 필수적인 질문입니다. 마태복음엔 예수께서 빈들로 가신 이유가 명확하게 적시됩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얘기를 전해 “들으셨고”, 그로 인해 따로(혼자) 빈 들로 가셨다고 마태는 말합니다.
바로 앞 절(12절)을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죽음 소식을 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죽음을 들으신 예수께서 “배를 타고 떠나서 따로 빈 들에 가셨다”는 말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오천 명 급식 이적’이 일어날 빈들에 예수께서 계시게 된 정황입니다.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죽음 소식을 접하시고 충격에 휩싸이셨고, 슬픔을 가누고자 홀로 빈 들로 가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4:12에서도, 세례 요한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물러나신 적이 있습니다.
헤롯의 잔치와 요한의 죽음 (14:3-12)
마태는 오병이어의 이야기 앞에 잔치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는데,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던 헤롯 안티파스가 자신의 생일을 맞아 배설한 잔치입니다(14:6-12). 왕의 연회이니 지체 높은 고관들이 참석했겠지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진귀한 음식과 흥겨운 가무(歌舞)가 마련되었겠습니다. 아마도 이 연회의 백미는 헤로디아의 딸이 춘 춤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족한 헤롯은 춤의 대가로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헤로디아의 딸은 옥에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목숨을 달라고 합니다(14:6-8). 민중들이 예언자로 여기는 세례 요한을 죽이는 것이 백성들을 절망과 분노에 빠뜨릴 일인 줄 알면서도, 헤롯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자(9절)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라고 명합니다. 유대의 지배 세력에게는 세례자 요한이 목에 가시 같은 존재였으니, 요한을 참수한 것은 잔치에 참여한 이들에게 헤롯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기도 했을 테지요. 이것이 헤롯과 그의 왕국이 벌인 잔치였습니다.
예수의 잔치 – 애통해하는 이들은 복이 있나니
헤롯의 잔치에 이어 예수의 오병이어 사건이 바로 뒤따라옵니다(14:13-21). 분위기는 매우 어둡게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나십니다(13절). 배를 타고 가셨다는 것은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으시겠다는 예수의 강한 의도를 반영합니다. 이는 요한의 죽음이 예수께 깊이 애도할 만한 상실과 아픔이었음을 방증합니다. 그런데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따라옵니다. 무리를 따돌리고자 배를 타신 예수를 따라왔다는 것은, 이 무리에게도 어떤 절박함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 절박함이 무엇인지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유대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면서 정신적인 지도자요 예언자로 각인되었던 세례 요한의 죽음은 분명 많은 민중에게 좌절감을 안겼을 터이겠지요.
예수께서는 혼자 있고 싶으셨으나, 상심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 그들과 함께하며 병자를 고쳐주십니다(14절). 오병이어의 이적 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행하신 일이 “고침”이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마가복음은 오천 명 급식 이전에 예수께서 무리를 “가르치셨다”라고 전합니다(막6:34).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셨다”(눅9:11)라고 말합니다. 주목할 것은, 공관복음서 중에서 유난히, 예수를 가르치는 분으로 강조하는 마태복음이, 이 대목에서는 가르침의 요소를 배제하고 치유만을 언급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고침이란 함께 애통하고 위로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종일 그들을 위로하시고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시다가 저녁을 맞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이곳은 빈들이고 모두가 허기졌으니 군중들을 돌려보낼 시간이 되었다고 예수께 귀띔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군중들을 먹이시기로 작정하십니다. 예수의 잔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잔치를 벌일 음식이라고 해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이 마음껏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이것이 예수와 그의 공동체가 빈 들에서 벌인 잔치였고, 이는 애통해하는 이들(5:4)의 잔치였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6절)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은 무리를 해산시켜 마을로 보내어 먹을 것을 사 먹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15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가 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광야에서 예수를 찾아왔던 사탄의 첫 시험이 연상됩니다. 사탄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광야의 (많은) 돌로 (많은) 빵을 만들어 (예수와 많은 이들을) 먹이라’고 제안했고 예수께서는 거절하셨지요(4:3-4). 이번엔 ‘빈 들에 먹을 것이 없으니 사람들을 마을로 흩어 보내자’라는 제자들의 제안을 거부하십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이기 위해’ 많은 사람을 먹이는 일을 예수께서는 단호히 반대하십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지치고 상한 이들을 먹이는 일은, 제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시행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직접 아픈 이들을 고치십니다만(14절),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은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16절). 먹을 수 있도록 오천 명의 무리를 정돈하여 앉히는 일, 오천 명에게 떡을 나누어 주는 일, 다 먹고 난 후에 남은 음식을 거두고 치우는 일 등, 모두 제자들의 몫입니다. 열두 바구니에 남은 조각이 찼다는 것은, 식사를 배분하고 뒤치다꺼리하는 수고를 열두 제자가 담당했다는 의미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는 중노동, 예수께서는 좀 더 간편하고 손쉬운 방식으로 군중을 먹이실 수 없었을까요? 가령, 음식을 먹지 않고서도 포만감을 느끼게 한다거나, 굳이 음식을 나르고 번거로움 없이 떡이 사람들에게 전달되거나 하는 방식 말입니다. 제자들도 군중들만큼이나 힘듭니다. 그래서 제각각 마을로 보내서 알아서 먹게 하자고 청하는데, 예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다”(19절)
제자는 주는 빵을 받아먹고 돌아가는 군중과는 다릅니다. 제자는 스승의 뜻을 따르고 스승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너희가 하라’는 뜻은, 제자들이 주님을 돕지 않으면 군중을 먹일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은 양식을 나누는 자리에 예수께서 계시지만, 장차 예수께서 계시지 않는 때가 오더라도 제자들은 이 잔치를 이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너희(제자)가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이 일은 26장 마지막 만찬(17-30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재연이 아니라 “가지사(들어)… 축사하시고(축복하시고)… 떼어… 주시다”(26:26)는 일의 반복입니다. 두 급식 이야기에 사용된 네 동사는 14장과 26장에서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설명으로 보충하자면, 이 일은 예수를 기념하기 위해 ‘이후로도 행할’ 일이라고 명시됩니다(눅22:19). 마지막 만찬과도 연결되는 오병이어 급식은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고유한 사건입니다. 교회는 이를 성례전으로 제정함으로써, 예수 공동체가 부단히 수행해야 할 본질적 성사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두 왕국의 잔치
헤롯의 잔치는 힘과 권력에서 나옵니다. 소유의 힘으로 잔치는 거대해지고 화려해지며 기름집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이들이 참석한 이 잔치에서는 욕망이 거래되고, 술수와 음모가 고상한 가면을 쓰고 축배를 듭니다. 이 잔치의 무대 뒤에서 정의는 압살당하고, 의인은 처형되고, 민중들은 비탄 속에 빠집니다. 어느 시대에나 헤롯 왕국의 잔치가 세상을 지배해왔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 잔치에 취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의 잔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가난한 빈 들에서, 곤궁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배설(排設)됩니다. 애통해하는 이들이 위로받고(마4:4),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배부르게 됩니다(마4:6). 소유와 권력의 힘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의 힘으로 벌어지는 잔치입니다. 적은 것으로도 넘치도록 풍성하며, 결코 모자람이 없습니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하늘 아버지의 잔치요, 궁극적으로 생명을 치유하고 살리는 종말론적인 잔치입니다.
예수 공동체가 빈 들에서 행한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헤롯 왕국의 잔치를 예리하게 겨냥하고 타격합니다. 저 거대하고 강력한 세속 왕국의 의기양양한 잔칫상을 둘러 엎으면서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하늘나라의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주님은 목자 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목자요, 아픔과 배고픔을 헤아리는 사랑의 임금입니다. 그분이 베푸는 긍휼과 자비의 식탁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은 만나를 먹었고, 예수 공동체는 오늘 여기에서 변함없이 생명의 식탁을 마주합니다. 자본과 권력이 여전히 잔치의 주인이 된 오늘날에도,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세상 속에서 이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너희가 할 일이다”는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이 몸을 이루는 교회가 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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