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405)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얹어라 - ② 시에 숨어 있는 기승전결/ 시인, 우석대 문창과 교수 안도현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얹어라
Daum카페 https://cafe.daum.net/rimpoet/ 삶 외 / 황인숙
② 시에 숨어 있는 기승전결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 황인숙, 「삶」(『슬픔이 나를 깨운다』, 문학과지성사, 1990, 34쪽) 전문
단 석 줄로 삶을 간명하게 정리하는 이 시는 자꾸 읽어볼수록 아프다.
문장의 끝에 찍은 물음표와 말줄임표, 그리고 마침표를 유심히 보기 바란다.
첫 행의 물음표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두 번째 행의 말줄임표는 이루어지지 않는 꿈의 좌절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마지막 행의 마침표는 삶의 어찌할 수 없음으로 인한 체념,
혹은 그래서 살아가야 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따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에서 외상값의 의미도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빚,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빚, 이웃에 대한 빚……. 그런 외상값 때문에 사는 것,
그게 삶이라는 것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이렇듯 아무리 짧은 시라도 한 편의 시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사건의 전개와 인물의 배치에 관심을 두는 서사지향의 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하나의 관념이나 순간적인 이미지의 포착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시가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소재에 대한 시인의 장악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사를 쓸 때처럼 시에 도식적인 육하원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독자가 바라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머리는 매우 세밀한 육하원칙을 바탕으로 시를 통제해야 한다.
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감정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구성한다는 것은 드러내고 싶은 감정의 순서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시도 하나의 구조물이라고 하며 시에도 기승전결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시의 기승전결 구조가 겉으로 보이지 않고 시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시인은
머리와 가슴속에 이야기를 쟁여두고 시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행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었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속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 나희덕, 「허공 한줌」(『어두워진다는 것』, 창비, 2001, 32쪽) 전문
이 시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판타지의 힘을 빌린 아기 엄마 이야기 하나와 그 이야기를 듣고 옮기는,
귀가하는 화자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죽음으로 아기를 살리는 모성도 감동적이지만 삶의 어떤 집착으로부터 풀려나는
한 인간(화자)의 모습이 시를 읽는 독자까지도 시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여 해방시킨다.
사인의 뛰어난 소재 장악력이 감동을 낳았다.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3. 1. 4.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405)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얹어라 - ② 시에 숨어 있는 기승전결/ 시인, 우석대 문창과 교수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