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 위에 있는 교회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태복음 14장)
“즉시”(22절)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적”(14:22-33) 이야기는 “즉시(euvqe,wj)”라는 부사로 시작됨으로써, 앞선 “오병이어의 급식 이적”(13-21절)과 강하게 연결됩니다. 두 이적 사건이 뗄 수 없이 직결되어 있음이 의도되는데, 이는 다른 복음서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납니다(막6:45-52; 요6:16-21). 무리를 먹이는 급식(給食) 사건과 바다를 건너는 도해(渡海) 사건을 병렬(竝列)하는 배치는, 구원 이야기인 출애굽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광야 전통의 두 이야기, 즉 만나를 내리시고 바다(홍해)를 건너게 하신 사건의 재연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구약 전통에서 주님의 은혜를 대표하는 만나 이적과 구원을 대변하는 도해 이적은, 오천 명 급식 이적과 갈릴리 도해의 이적으로 연결됩니다. 이렇듯, 구약과 신약에서 중심인 급식 사건과 도해 사건은 구원의 여정을 가는 교회의 본질적 경험이 됩니다. 교회는 성찬식과 세례라는 두 성례를 통해 “급식”과 “도해”라는 구원 사건을 경험하고 이어갑니다.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제자들의 배 (22-23절)
교회는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구원의 방주인 ‘배(οικουμενε)’로 이해해왔습니다. 예배당의 회중석을 일컫는 “nave”라는 말은 “배(ship)”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해는 초기 교회부터 있어 온 것으로,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이 탄 배는 교회를 뜻한다는 해석에 대체로 이견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이 타고 가던 그 배는 마태복음 공동체이면서, 오늘, 이 말씀을 마주하는 우리의 교회로 읽힌다는 것이지요.
제자들이 배를 탄 것은 예수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22절). 우연히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행인들이 탄 배가 아니라, 주님의 부름과 명령에 따르는 제자들이 탄 배라는 점에서, 이 배는 “부름 받은 이들의 모임”이라는 “에클레시아(교회)”의 정의에 부합합니다. 덧붙여, 예수께서 그 배에 타지 않으셨다고는 정황(23절)은, 부활과 승천 이후 육신으로서의 예수와 함께할 수 없는 교회의 상황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탄 이 배는 신앙공동체인 교회이며, 우리는 이 배가 겪는 이야기를 교회의 경험으로 읽습니다.
풍랑으로 고난을 겪다 (24절)
해발고도 2,224m의 헐몬산이 있는 골란고원에서 해발보다 낮은 저지대 갈릴리로 내리 부는 강풍에 의해, 갈릴리 바다(호수)에 높은 물결이 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인들의 이해로 보자면, 바다의 풍랑은 전적으로 신이 일으킨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다른 곳으로 가는 요나의 배가 풍랑을 만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욘1),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거센 바람을 만나 고생합니다. 이 어려움은 불순종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 복종함으로 인해 겪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22절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재촉하다(avnagka,zw)”는 동사는 ‘강요하다(compel)’의 뜻입니다. 억지로 제자들을 배에 태우셨다는 얘기입니다. 분명, 제자들은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동쪽은 이방인의 땅, 즉 경건한 유대인들은 출입하지 않는 부정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재촉하다’는 말은 제자들의 강한 저항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제자들이 예수의 명령에 따라 배를 탔으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는 문제를 둘러싸고 여전한 시비와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은, 초기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도행전에서 생생히 나타납니다. 이방인을 향한 진로(선교)를 두고 사도들(제자들)은 충돌하고, 교회가 분열하는 사태를 겪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신앙공동체도 겪는 경험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배가 만난 풍랑은 이방인 선교로 인해 촉발된 교회의 진통을 가리킨다는 추정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큰 물의 파도를 밟으시는 분 (합3:15)
오늘날에도 자연의 위력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지만, 고대인들이 느끼는 그 정도는 훨씬 더했습니다. 불, 가뭄, 바람, 추위 등이 다 무서움의 대상이었지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은 물이었습니다. 창세기에도 있지만, 고대의 여러 신화에서 세상을 멸망시킨 재앙은 유일하게 물입니다. 그 물이 모여 있는 바다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바다의 신에 의해 지배된다고 고대인들은 믿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 신화에 보면, 최고의 신인 제우스조차도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구약성서에도 무시무시한 신적 존재인 용 혹은 리워야단이 바다를 장악하고 있다는 언급이 있습니다(시108:24; 74:14; 욥41:1). 풍랑은 바다의 신이 지닌 혼돈과 파괴의 힘으로, 누구도 견뎌낼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홀로 … 바다 물결을 밟으신다(욥9:8)”. 성서는 종종, ‘바다를 밟으시는 분’이라는 말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묘사합니다(시77:19; 합3:15).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분이지만 바다까지도 주관하심으로써, 세상의 어떤 신과도 다른, 모든 신 중의 신임이 선언됩니다. 파도를 밟으시고 물결 위를 걸으시며 바람을 꾸짖으시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홀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풍랑이 이는 바다를 밟고 걸으셨다는 이야기는 ‘예수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25-27절) – 신현현 사건
새벽에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를 보면서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지르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나다(I am)”(27절)는 말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나다’라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evgw, eivmi)’를 히브리어로 말하면 ‘여호와(יהוה)’라는 하나님의 신명(神名)이 됩니다. 물 위를 걸으시면서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에게서, 호렙산의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나다’라고 계시하신 하나님(출3장)이 연상됩니다. 결국 이 장면은 ‘주님의 나타나심’ 곧 신현현(神顯現)의 순간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경배(절)”로 끝나는 이유입니다(33절).
직전(마14:13-21)의 오천 명 급식 사건이 이스라엘을 먹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건이라면, 이번엔 바다의 풍랑을 밟으시는 하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를 통해 계시됩니다. 양식을 먹이시는 하나님 경험이 허다한 군중에게 제한 없이 주어진 것이라면, 바다에서의 주님 현현은 배에 탄 제자들, 즉 교회의 경험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27절)
사경(오전3-6시)에 예수께서는 곤경에 빠진 제자들의 배로 가까이 오십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는 존재를 보면서 제자들은 더욱 무서워합니다. 여전한 어둠과 긴 고난으로 정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보여주시는 대신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분이 누구이신지는 모습으로 밝혀지지 않고, 말씀으로 드러납니다. 호렙산에서의 주님이 떨기나무 불 속에 자신을 감추시고 말씀으로 계시하셨듯 말입니다.
안심해도 되는 이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나다!”라는 한 마디에 근거해 있습니다.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져야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의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평화롭습니다. 그분은 바람을 꾸짖는 분이시며 파도를 밟는 분으로서, 바람과 파도를 일으키는 유령(25절, 리워야단 등)보다 크신 분입니다. 진실로 크신 분의 존재를 알게 될 때, 커 보이던 것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베드로, 물 위를 걷다, 빠지다 (28-31절)
유일하게, 마태복음은 배에서 내려 예수께로 가는 베드로 일화를 전합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기도 하지만 빠지기도 합니다. 담대히 예수를 바라보면서도, 바람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믿으면서도 의심합니다. “의심하다(dista,zw)”는 말은 마음과 생각이 갈라지 상태를 뜻합니다. 이후에,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반석인 동시에 예수의 길을 막아서는 사탄이기도 합니다(16장). 예수를 위해 용감히 칼을 뽑기도 하고,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합니다(26장). 결국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데에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궁극적으로 “건져짐을 받는 존재”입니다(31절).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다’고 말씀하시지만, 그것이 책망은 아닙니다. 믿음이 커야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겨자씨만한 적은 믿음으로도 산을 옮기기에 충분합니다(17:20). 그 적은 믿음이 있기에, 베드로는 주님께 가겠다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 적은 믿음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건너편으로 가는 배를 탔던 제자들(교회) 모두가 가진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적은 믿음을 가진 베드로는 물에 빠져들어 갈 때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주님을 부르고 건져짐을 받습니다. 구원받는 데에는 믿음이 적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힘으로 예수께 가지는 못합니다. 다만 가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적은 믿음으로도 그는 언제나 믿음이 원하는 바, 예수와 함께하고자 하는 소망을 이룹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반드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실패 없이 물 위를 걷는 큰 믿음을 가르쳐주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주님은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주십니다. 교회가 경험하는 은혜는 이것입니다.
신앙공동체 : 예수께 경배(절)하다 (33절; 28:17)
교회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지시받은 곳으로 가는 공동체입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보내시는 곳은, 높은 장벽을 넘고 반대를 무릅써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 외부의 반대는 물론 교회 내부에서도 반대가 빗발치는 금기의 영역으로 교회는 보냄을 받습니다. 그 길에 풍랑과 고난은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교회는 놀라운 순간을 맞이합니다. 주님을 경험하는 순간이지요. 혼돈 그 자체인 바다 위에서, 거센 바람으로 물결이 높아진 밤에, 겁에 질리고 두려워하고 무서움에 사로잡힌 시간에 교회는 주님의 현현을 체험합니다. 그 체험은 바다를 걷는 기적의 체험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체험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 위에서 교회는 예수를 경배합니다. 모든 의심이 사라져야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심하면서 예배하고, 예배하면서 의심합니다(28:17). 풍랑에 흔들리면서, 물에 빠지면서도 신앙공동체는 예배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시고 건져주시는 분인 까닭입니다.
https://www.youtube.com/live/GaR0glPMrfw?feature=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