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돌아갑시다 (2539) ///////
202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 백향옥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 / 백향옥
부풀어 오르는 흙이 좋아 맨발로 숲을 걸었다
바닷물에 발을 씻다가 만난 돌은
손바닥에 꼭 맞는 매끄러운 초승달 모양
열병을 앓을 때 이마를 짚어주던 당신의 찬 손
분주하게 손을 닦던 앞치마에 묻어 온 불 냄새, 바람 냄새, 놀란 목소리
곁에 앉아 날뛰는 맥을 지그시 눌러 식혀주던 손길 같은
차가운 돌을 쥐고 있으면 들뜬 열이 내려가고
멋대로 넘어가는 페이지를 눌러두기에 좋았는데
어느 날 도서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몸 깊은 곳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놓친 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두 동강 난 돌을 잇대보았지만
깨진 돌은 하나가 될 수 없고
가슴에서 시작된 실금이 무섭게 자라났다
식었다 뜨거워지는 온도 차이가
돌 안쪽에 금을 내고 있었던 걸 몰랐다
이제 그만 됐다고 따뜻해진 돌이 속삭였다
그날, 달빛 밝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깨진 돌을 가만히 놓아주었다
달에게 돌려주었다
[당선소감] “두렵고 기쁜 마음으로 정진하겠다”
사는 일이 대체로 아슬아슬했습니다.
문이 닫히기 전 우체국에 겨우 도착해서 무사히 마감한 밤 공원엔 달이 밝았습니다.
코로나19 펜데믹으로 두렵고 애타던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아이들이 뛰어놀아야 할 운동장으로 제비꽃이 오고 개망초와 까마중이 자라고
느티나무만이 싹을 틔우던 불안한 시간이었습니다.
신춘이라는 높은 관문을 두드린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당선 소식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감격에 겨워 들에 나가니 이제 막 떠오른 실낱같은 초이틀 달이 아름다웠습니다.
나무와 달과 별, 강물 위에 썼다가 지운 수많은 문장에 이끌려왔습니다.
높고 아름다운 세계에 덜컥 들어선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만큼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쁨이 커서 어느 때 보다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천진한 아이가 된 것처럼 좋습니다.
시 쓰는 일이 위궤양과 불면의 밤을 불러올지라도 지금은 잠시 기뻐하겠습니다.
어린 달이 자라나듯 시가 자라기를 기원합니다.
물처럼 색이 없지만 모든 빛으로 물드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경계 너머와 이곳의 겹침을 믿으며 세계의 아름다움과 비정함을 견디기 위한
노래를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시가 이끄는 대로 끝까지 가보라던 김근 시인과 자신이 가진 목소리 그대로의 시를 써도 좋겠다는
격려와 함께 적확한 묘사, 첨예한 문장을 쓰도록 독려해주신 조정인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수줍고 어눌한 목소리가 가진 간절함을 듣고 손 잡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두렵고 기쁜 마음으로 정진하겠습니다.
시의 곁을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 준 시하늘과 시몰이, 길담서원 책여세,
산과 자연의 친구 우이령사람들과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준
남편 재욱 씨와 혜림, 정호, 지연에게 감사하며 기쁨과 영광을 나누고 싶습니다.
목소리 없는 존재의 말을 전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모든 생명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심사평] “불교시의 미래 열어가길 기대”
올해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대한 사부대중의 관심이 뜨거웠다.
반조(反照)의 시편들이 다수였고, 인과와 무상, 적멸을 노래한 시편들이 많았다.
그만큼 불자들의 응모가 많았다는 점은 뚜렷했다.
신행의 두터운 지층으로부터 돌올하게 솟은,
푸르고 서늘하고 생동하는 깨달음의 노래가 곧 불교시(詩)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마지막까지 살펴본 작품들은
‘만다라화 어머니’,
‘파종’,
‘천 권의 책을 귀에 걸고’,
‘가로수 아래서’,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였다.
구태여 각각의 구실을 찾고자 할 뿐이지 이 작품들은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다.
‘만다라화 어머니’는
처염상정의 꽃인 연꽃을 어머니의 생애에 견준 시조 작품이었다.
‘예토’, ‘화엄’과 같은 시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파종’은
아름다운 서정을 담은 산문시였다.
한 알의 씨를 뿌릴 구덩이 그것이 곧 우주 생명 세계라는 인식에는 공감을 했지만,
파종의 풍경이 가족사와 연결되는 대목은 자연스럽지 못했다.
‘천 권의 책을 귀에 걸고’는
아버지의 돋보기 그것을 연륜과 지혜의 안목 자체라고 바라본 작품이었다.
좋은 작품이었지만 앞에서 뒤에 이르는 동안 시행이 반복된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가로수 아래서’는
인연이 된다면 후속작들을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고심 끝에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삶의 열기를 식혀주는 찬 돌에 대한 생각을 섬세하게 담되, 옛일을 함께 회상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앞치마’에 묻어 있는 것이 불과 바람의 냄새뿐만 아니라 ‘놀란 목소리’라고 쓴 대목은
감각 내용의 확장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경계가 없는 감관의 활용은 대체로 신예가 갖기 어려운 덕목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게 했다.
“깨진 돌”을 달의 빛 속으로 방생하는 대목도 지극히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불교시의 미래를 열어가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