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돌아갑시다 (2545) ///////
200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 장석원
낙하하는 것의 이름을 안들 睡蓮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장석원
백 송이 꽃을 피운 수련은 어느덧 물에 잠겼다. 서서히 문이 열리고 있었고,바람은 그때 태어났다.
나의 이름은 피곤한 바람이다. 나는 백 송이 수련이 내뱉은 한숨이다.
햇빛이 몸을 데워 비상했고, 몸 속에는 한 방울 물이 갈증을 태우고 있다. 내 몸은 지금 구름빛이다.
나는 가볍다. 후두둑 떨어지는 적색 열매처럼 가까운 미래에 나는 돌아갈 것이다. 이마에 떨어지는 것, 얼굴에 번지는 것 내게 쇄도하는 현기증. 그대 몸에 얼룩지는 오래된 바람, 흰 손길에 갇혀 나는 물 밑에 있고 나는 오므라들어 졸고, 백 송이 꽃을 피운 수련은 어느덧 물에 잠겼고, 물 위를 지나던 나는 바람이요 장막이요, 그때 저기 부유하는 꽃잎.
[당선소감]
개념으로 쪼갤 수 없는 시간인 사랑의 순간.
그런 순간이 있는 오후의 풍경 속에서 나와 나의 시는 동시에 경계 너머의 햇빛을 보았다.
사랑하는 두 존재는 ‘동시’라는 명사에 갇힌다.
어느 한 쪽의 사랑으로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 혼자의 사랑이 날 지치게 했다.
사랑의 동시성은 시간의 그물에 포박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존재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같이 존재하면서 같은 곳을 쳐다본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그’ 나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나와 시 너머에있는 ‘그들’을 향해 나아간다.시는 감옥이었다.
‘나’와‘너’가 이루는 세계에서 ‘나’와 ‘너’와 ‘그들’이 이루는 세계로 떠나고,
다시 다른 ‘그들’이 존재하는 다른 곳으로 유목하는 내 언어의 출발이 기쁘다.
출옥하지만 나와 시는 ‘동시에’ 존재한다.
나는 다시 그 감옥을 선택하고, 시는 나를 선택했다, 동시에.
나의 출발을 있게 해 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과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내 시에 살고 있는 ‘그들’이 떠오릅니다.
내 시가 탄생했던 ‘poetika’의 벗들과 혁웅 형,찬기형,순원 형,행숙 그리고 장욱.
내게 처음으로 시를 쓰게 했던 국문과 문창반의 선후배님들,가족들….
[심사평]
끝까지 검토의 대상이 된 것은 4명.
이영옥의 ‘주먹 만한 구멍 한 개’ 외 4편,
천서봉의 ‘뿌리 내리는 아버지’ 외 3편,
김정문의 ‘賊反荷杖’ 외 2편,
그리고 장석원의 ‘낙하하는 것의…’외 6편이었다.
이영옥의 ‘주먹만한…’은
“겨울바람은/아버지 자전거의녹슨 귀를 때렸다”의 첫 2행에서 보이는 일상-추억 풍경화(化=畵)의
고전적 품격을 장장 26행씩이나 무리 없이 유지-발전시키고 있는 솜씨가 놀랍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순서대로 풍경의 긴장이 처지고 감상적이며 심지어 감상주의적이다.
천서봉의 작품은 수준이 고르지만
‘뿌리내리는…’의 “절망에 대한 썩지않는 공식”과 “소풍 같은 봄날”의 모순이 끝내 미학적으로 해결되지 못했다.
김정문의 ‘賊反荷杖’은
표면적인 산문-이야기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소설과 시의 차이를 예각의 미학으로 형상화한,
도시변방(불광동)의 대표적인 풍경화(化=畵)라고 하겠다.
하지만,제목의 서투름이 좀 불길했는데,
과연 ‘웃음’을 아직 길들이지 못했다.
당선작으로 뽑은
‘낙하하는…’은, 물, 문, 바람, 피곤, 갈증, 태움, 구름, 현기증 등 온갖 인간형상과 자연현상이 시 전체를넘쳐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요가 단아하다.
제목의 질문혹은 자문과 마지막 행 “~이요”의 음풍농월투까지 포함해서 그렇다.
이 절묘한 세파 속 ‘단아한 고요’는, “찍 침을뱉으며 햇빛 속으로 귀향하”는 ‘건달’(‘물결 그리고 물결’),
‘게르니카’와 ‘김추자의 꽃잎’과 ‘5공화국 대통령 취임 연설문’(‘김추자에게 보내는 연서’),
‘군화’와“사타구니보다 따뜻한 곳”(‘파로호’)까지 거느리면서도단아한 고요며,
급기야 거느리므로 단아한 고요다.
우리는 이분을 뽑기로 합의했다.
심사위원 김명인 김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