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 '산비'에 대한 세 가지 해설
오늘은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백석 시인(1912~1996)의 시 한 편을 감상해보려 합니다. 시는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많은 창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시라도 시가 가진 창문 중 어떤 창문을 독자가 여느냐에 따라 다른 감흥을 갖게 되겠지요?
1. 3행짜리 '산비' 읽어보기
'시인의 시인'으로 불리는 백석 시인은 생애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겼습니다. 바로 <사슴>입니다. 이 시집은 1936년 100부 한정판으로 나왔습니다. 얼마나 좋은 시들인지, 윤동주 시인이 시집을 빌려와 노트에 필사해 읽고 간직하며 사랑했을 정도였습니다.
<사슴>에는 33편의 시가 실렸는데, 유달리 짮은 시 네 편이 있습니다. '비'와 '노루'란 시는 각각 2행짜리입니다. '청시'와 '산비'는 겨우 3행입니다. 이 중에서 오늘은 '산비'를 읽고 감상해보겠습니다.
산비
- 백석
산뽕잎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둘기가 인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 켠을 본다
자, 이 짧은 시를 읽고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갖게 되셨나요?
2. '산비'가 말하려는 것은?
시의 진술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산비는 산에 내리는 비입니다.
산 속에 비가 내려 빗방울이 뽕나무 잎을 때립니다.
그리고 멧비둘기가 퍼드득 하고 납니다.
나뭇가지에서 자벌레(자벌기)가 고개를 들어 날아가는 멧비둘기 쪽을 바라봅니다.
이해하시는 데 큰 어려움은 없지요?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걸까요?
백석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독자들의 감상을 돕기 위해 이 시의 해설을 싣고 있는 두 가지 책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먼저 <백석의 노래>(김수업 지음, 휴머니스트)에 나온 해설입니다.
- 너무나 맑고 깨끗한 세상, 그 속에 목숨이 마음껏 숨 쉬며 사랑을 나눈다.
무엇보다도 잡아먹고 싶어서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멧비둘기가 자벌기를 살려두고
빗속으로 날아올라 다른 사냥 길에 나선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자벌기가 멧비둘기의 사랑에 너무 놀라서
날아간 멧비둘기 켠을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한다.
다음은 <백석 시 읽기의 즐거움>(최동호 방민호 유성호 김수이 외 지음, 서정시학)이 바라본 해설입니다.
- 비는 멈추어 선 대상들에 스며든다.
멧비둘기도 자벌기도, 사람도 빗방울 가득한 산 속에, 영원 안에, 우주 안에 들어있다.
촉촉하게 젖은 화해의 고요,
이 시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의 힘이다.
나뭇가지로 위장 중인 자벌레. 중간의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것이 자벌레다.
3. 백석 시의 매력과 힘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과연 이 두 개의 해설처럼 이 시에서 '사랑'과 '화해'가 느껴지시나요?
빗방울이네는 오히려 반대로 읽힙니다.
약육강식의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읽힙니다.
자연 속에 고스란히 노출된 생명의 긴장이 보입니다.
사랑과 화해보다는 잔인과 공포가 시 속에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자벌레의 특성을 알면 그 이유가 보다 명확해집니다.
자벌레는 위험에 처하면 자신의 몸을 나뭇가지인 것처럼 위장합니다.
그러니까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는 시 구절은 자벌레의 위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막 날아오르는 멧비둘기를 발견한 자벌레가 재빨리 위장에 들어가 몸을 길게 공중으로 뻗어
나뭇가지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다급한 순간이겠는지요.
시골에서 자라 자신의 시 전편에서 자연을 노래한 백석은 자벌레의 특성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산비'를 통해 서로 먹고 먹히는 치열한 삶의 현장, 생명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시각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툭툭 던지며 우리에게 보여만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도의 긴장감으로 몸을 떨게 되네요.
우리도 자벌레처럼 연약하고 연약한 생명이니까요.
마음 깊은 데서 슬픔이 뭉글뭉글 피어오릅니다.
이것이 백석 시의 매력이자 힘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