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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장)
네 번째 담론 (18:1-35)
모세의 권위에 부쳐진 “오경(五經, Pentateuch)”의 특성을 따르는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주요 말씀은 다섯 개의 말씀군(群)으로 정리되어 묶인 “다섯 담론”에 담겨집니다. 산상수훈(5-7장), 파송 연설(10장), 비유 담론(13장), 종말 담론(24-25장)과 더불어, 18장은 네 번째 담론에 해당합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18:1)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네 번째 담론의 주제는 제자 공동체인 “교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18장에서의 천국(하나님 나라)은 땅에 존재하는 천국인 교회를 특정합니다. 18장의 말씀에 등장하는 “작은 자”(6절), “형제”(15, 21절), “교회”(17절), “두세 사람”(20절), “종”(26절 외), “동료(들)”(28, 31절)은 모두 신앙공동체 내부자들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네 번째 담론은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나라 공동체 안에서 지켜져야 할 가르침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18장에서 주어지는 가르침들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범죄와 용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작은 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한 경고(1-11절), 작은 자들에 대한 관심(12-14절), 교회가 죄(인)를 처리하는 절차와 정당성(15-21절), 용서함(20-35절)의 주제들은 모두 신앙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충돌, 원한, 분노, 분열 등의 현실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 담론은 용서라는 최종의 교훈으로 귀결되는데,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을 비유로 설명하는 마태복음답게, 하나의 비유 이야기(23-34절)를 통해 용서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형제를 몇 번 용서할까요? (21-22절)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는지, 베드로가 묻습니다(21절). 형제는 타인이 아니라 삶을 공유하는 내부인을 칭합니다.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은 세 번까지 용서해 주는 전통을 지키고 있으니, 베드로가 말한 일곱 번은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수치로는 77번 혹은 490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22절). 누가복음도 비슷한 말씀을 기록하는데, 베드로의 질문 없이, 예수께서는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17:4)고 말씀하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수치가 용서해야 할 총량의 횟수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용서하다는 동사인 “아피에미(avfi,hmi)”는 ‘떠나 보내다’, ‘놓아 보내다’라는 원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유 이야기 안에서 나오는 “(빚을) 탕감하다”는 동사도 같은 낱말입니다. 여기엔 죄를 없이한다는 의미 외에, 죄의 결과인 증오나 복수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용서의 횟수를 헤아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죄를 놓아 보내지 못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헤아리지 말라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헤아리는 용서는 이미 용서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까닭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 (24절)
이어 용서에 대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어떤 종이 만 달란트 빚을 졌다는 설정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불가능한 가정입니다. 당시의 한 달란트는 하루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받는 노동자의 15년 품삯에 맞먹는 가치이니, 만 달란트는 15만 년의 품삯입니다. 예수 시대에, 헤롯 대왕이 일 년 동안 거둬들인 세금의 총액이 900달란트였다지요. 그렇다면, 일개 종이 만 달란트의 빚을 졌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입니다. 만 달란트는 개인이 빚질 수도, 갚을 수도 없는 액수로서, 헤아림을 넘어선 영역입니다. 마찬가지로 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는 것도 헤아림을 넘어서는 차원입니다. 헤아리지 않는다는 용서의 특성을 보여주는 설정입니다.
어쨌든,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지는 종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고,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종은 임금과 거래하는 지위에 있으며, ‘조금만 참아 주시면 다 갚겠다’(26절)고 말할 만큼 실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는 진 빚만 있는 게 아니라, 받아낼 빚도 있으며(28절), 사람을 옥게 가두도록 넘겨줄 권세도 있습니다(30절). 말하자면, 그는 임금의 종들 가운데 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어떤 임금(23절) / 주인(25, 27, 32, 34절)
천국(하나님 나라) 비유라고 전제된(23절)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임금은 아무래도 하나님이라고 볼 수밖에 없겠습니다. 임금은 나라를 통치하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지위입니다. 그런데 이후로 이 임금은 ‘주인’으로 불립니다. 주인은 관계적 지위로서, 만 달란트 빚진 사람(종)과의 관계 속에서 유의미합니다. 일꾼(품꾼)과 달리, 종은 주인에게 속해 있는 내부자입니다.
임금을 하나님으로 보는 데에 걸림돌이 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는 종을 향해, 아내와 자식들을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는(25절) 대목이 그렇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빚진 사람을 옥에 가두는 것은 가능하지만, 때리거나 식솔을 팔게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니, 비유 속의 임금이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법을 위반하는 명령을 내리는 모순이 벌어진 것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유의 임금을 하나님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그 임금이 종을 “불쌍히 여긴다”(27, 33절)는 데에 있습니다. “불쌍히 여김(splagcni,zomai)”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자비의 행동들을 발현하게 하는 원천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헤아리지 않고, 깨끗이 탕감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이적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생겨났습니다(9:36; 14:14; 15:32; 20:34).
이미 시행된 용서가 철회될 수 있는가? (32-34절)
만 달란트를 탕감받고 돌아가던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백일 치 품삯)을 빚진 동료를 만나 그를 다그칩니다(28절). 그 동료는 “엎드려서”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29절)라고 간구하지만, 그를 허락하지 않고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30절). 백 데나리온은 만 달란트에 비하면 ‘육십만분의 일’에 해당합니다. 어처구니없어 보이긴 하지만, 이 종의 작태가 죄는 아닙니다. 그는 빚진 자를 때리거나 식솔을 담보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는 처사는 율법이 허용하는 바입니다. 그는 가능한 합법적 권리를 행사했을 뿐입니다.
이를 목격한 다른 종들이 이 사실을 주인에게 고합니다(31절). 이를 알게 된 주인은 노하여 그 종을 다시 불러들여, 탕감해 준 만 달란트를 다시 빚으로 부과하고,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32-34절). 이 비유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대목이 여기입니다. 분명히 임금은 종이 빚진 일만 달란트를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26절). 그런데 뒤에 가서 번복하고 종에게 다시 빚을 물립니다(33-34절). 그런데 이미 없어진 빚을 다시 부과하는 것이 타당한가요? 아무리 그 종이 부당하고 괘씸하더라도, 일단 그에게 베풀어진 용서를 취소시키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이렇듯 번복될 수 있는 용서를 용서라 할 수 있을까요? 용서한 것을 철회하시는 하나님과 그런 용서를 우리는 신뢰할 수 있습니까?
작동하지 않는 용서
이 비유에 앞서, 예수께서 용서에 관해 말씀하신 핵심적 경구(警句)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18) 이 말씀에 의하면, 하늘(임금)에서 용서되지 않는 이유는 땅(종)이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취지의 말씀이 ‘주의 기도’ 다음에도 나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4-15)
만 달란트를 탕감하는 용서를 무효로 만든 건 임금이 아니라, 종 자신입니다. ‘놓여나다’ ‘자유롭게 하다’는 용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임금은 종을 빚(만 달란트)으로부터 해방하였지만, 그 종은 자신을 빚(백 데나리온)에 묶어 버렸습니다. 본인 스스로 빚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기로 결정했으니, 임금이 빚을 탕감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 것이지요. 땅(종)이 묶어버렸으니, 하늘(임금)도 묶을 도리 외에 없는 셈입니다. 임금이 용서를 취소한 것이 아니라, 종이 임금의 용서를 무력화시킨 것이지요.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35절)
“불쌍히 여기다”는 말이 다시 강조됩니다. 비유에는 용서하지 않는 종의 행동을 주인에게 고한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 동료들은 ‘고자질’을 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그들 역시 동료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자질’이 흠이 되지 않는 것은, 감옥에 갇힌 다른 동료를 “딱하게 여겨서”(31절) 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불쌍히 여기는 동료는 백 데나리온의 존재감밖에 안 되는 미미한 동료입니다.
주인은 왜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는가를 따지지 않고, “왜 불쌍히 여기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34절). 용서의 여부보다 불쌍히 여김이 더 주목받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신앙공동체가 지녀야 할 본성입니다. 앞서, “몇 번 용서해야 하는가?”고 묻는 베드로는 용서의 양적 기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한다고 답변하십니다. 그 마음이란 “불쌍히 여김”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에는 헤아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일만 달란트’조차도 탕감되는 비유로 표현됩니다. 어떤 죄도 용서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용서가 불쌍히 여김(긍휼히 여김)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용서는 참된 용서가 아니며, 긍휼이 사라질 때 용서도 무력해집니다. 긍휼은 만 달란트의 빚도 면제하지만, 긍휼 없이는 백 데나리온도 용서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땅과 하늘에서 용서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5:7)는 복의 선언도 이와 공명합니다. 그래서 긍휼로 말미암은 용서는 하나님과 교회가 함께 이루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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