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420) 상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 - ④ 상실을 받아들이는 자세 2-2/ 시인,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 정재찬
상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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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상실을 받아들이는 자세 2-2
애도의 예로는, 그래서 롤랑 바르트보다도 이 시가 좀 더 적절해 보입니다.
아버지의 모자
이시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따르던 오촌당숙이 아버지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아버지가 평소에 쓰시던 모자를 들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그러고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모자를 쓰고 사립 밖으로 걸어 나가시는 것이었다.
― 《바다의 호수》(문학동네,2004)
이 시의 당숙은 혼자서 깊이 생각한 겁니다.
한참 동안 아버지 없는 그 빈 방에 말없이 들어앉아서 말이지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고 추모하며 있었을 겁니다.
참 존경하며 따르던 분인 모양입니다.
고인을 기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끝에 모자 하나 딱 들고 나오면서
선언하듯 이렇게 툭 말하는 겁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무뚝뚝한 말과 행동에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시도 더 이상 말을 덧대지 않습니다.
당숙이 통곡을 하지 않았듯 시인도 묘사만 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그 애도의 뜻을 압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굳이 곡을 하지 않아도,
고인을 따른다는 것은 고인의 뜻을 따라 고인이 살아온 길과 정신을 따른다는 것이지,
고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저승길을 따라나서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숙을 애도의 모델로 삼기에는 또 우리 정서상 다소 무리인 듯싶지 않나요?
그래도 눈물을 좀 흘려야 할 거 아닌가 말이죠.
그러니까 애도는 상실에 대한 적절한 거리와 태도를 뜻합니다.
멜랑콜리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문제요,
도무지 그런 감각과 감성이 부재하여 전혀 아픈 줄 모르는 것도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애도에 관한 시로 읽고 싶은, 황동규의 〈더딘 슬픔〉을 소개해보렵니다.
더딘 슬픔
황동규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 《꽃의 고요》(문학과지성사,2006)
이게 죽음 혹은 상실에 대한 예의 아닐까?
스위치를 꺼도 형광등은 바로 빛을 버리지 않고 희끄무레 남습니다.
눈이 그쳤다고 눈더미가 대번에 녹지도 않습니다.
길모퉁이에 추억처럼 남아 서서히 사라져갈 겁니다.
봄이 왔다고 꽃나무가 바로 잎을 피우지도 않습니다.
지난해 땅으로 내내 끌어당기던 중력과도 이별할 채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듯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는 겁니다.
그 까닭은 타인의 죽음을 통해 얻은 것입니다.
올 봄 먼저 간 그대, 그대의 불이 꺼지고 보니 그렇더라는 거겠지요.
장례식장의 촛불이나 향불이 꺼질 때도 희미하게 남아 서서히 사라지는 연기처럼,
그대가 떠나고 나서 어쩐지 이 봄이 더디게, 너무 더디게 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는 추모의 시, 애도의 시가 되는 것입니다.
더딘 슬픔, 그것이 상실에 대한 올바른 애도입니다.
끝내 허무하게 사라질지라도, 생명의 불 꺼지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은 연기로 남아, 무중력처럼,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렇게 잠시 그대와 함께한 추억들을 되새기며,
그대 떠나 텅 비어버린 이 세상의 공백을 채우는 것, 그것이 애도 아니겠습니까.
우리네 짧은 인생에도 그런 정도의 여운과 여백은 허락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애도의 여백도 다 사후의 일입니다.
그리운 사람, 그리워해야 할 사람이라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아니 대숲에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라도 그리워해야지요.
너무 늦으면 안 됩니다.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어두워진다는 것》(창비,2001)
목련 같이 보자고 했던 친구가 이른 나이에 먼저 세상을 등진 모양입니다.
목련꽃 지기 전에 목련 그늘 아래로 놀러 갔어야 하는데 세상사 바빠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만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목련 진 지 한참 지나 겨울에 찾아간 친구에게 너무 늦어 미안하다 하렸더니,
친구는 목련 피려면 아직 멀었다며 달래줍니다.
올해는 목련이 일찍도 피었군요.
그러기에 겨울 상가(喪家)에 조등(弔燈)만 하나 목련처럼 피어 있었겠죠.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 사람들,
고맙다고 할 사람들, 존경한다 해야 할 분들,
너무 늦지 않게 다시 만나야 할 사람들의 버킷리스트는 갖고 계신가요?
다시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그분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할 소망들로 우리의 버킷리스트를 꾸며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우리가 상실로부터 배워야 할 버킷리스트인 것 같습니다.
죽음을 잊지 맙시다. 메멘토모리!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정재찬, 인플루엔셜, 2020)’에서 옮겨 적음. (2023. 2.1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420) 상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 - ④ 상실을 받아들이는 자세 2-2/ 시인,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 정재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