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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뜻 이루어지이다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태복음 20장)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다”(19:30, 20:16)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19:30)는 선언에 이어 포도원 주인의 비유(20:1-15)가 등장하고, 이 비유 결말(20:16)에도 똑같은 선언이 반복됩니다. 20:1은 ‘그러므로’라는 의미의 접속사 “gar”로 시작된다는 사실에서, 앞 절(19:30)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면, 20:1-15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비유이겠습니다. 번역합니다. 이런 경우를 역전이라고 하는데, 살다 보면 간간이 이런 역전이 일어날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다 발생하는 역전은 틀에 박힌 세상살이에 신선한 묘미를 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비유(20;1-16) 앞에는, 예수를 찾아와 “내가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고 물었던 어떤 사람의 일화가 있습니다(19:16-30).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킨 의인이면서 재물까지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경건함과 부와 명예를 다 가고도 젊기까지 한, 그야말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첫째”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의 명령에, 그는 “근심하며” 돌아갑니다(19:21-22). 나무랄 데 없는 첫째의 추락에 보는 이들이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면서 이의를 제기하지만(19:25), 예수께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다”(19:30)는 결론으로 혼란을 정리하십니다. 그리고 20장으로 넘어와, 예수께서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십니다(20:1-16),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부르다 (1-7절)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부르는 대목에서, 어떤 이들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9:37-38)는 예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천국)의 포도원 이야기이며, 병들고 약한 많은 무리가 예수께 몰려와서 추수 때처럼 바빠지게 된 9-10장의 정황과는 다릅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일꾼이 부족해 발을 구르며 동분서주하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6시?), 9시, 정오, 오후3시, 5시, 모두 다섯 번에 걸쳐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주인이 오후까지 포도원에 일꾼을 들여보내는 이유는 일손이 모자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인은 다섯 차례 장터에 나가지만, 그중 일꾼을 부르기 위한 거동은 아침 일찍 한 번에 불과합니다(1절). 나머지 경우는 주인이 장터에 가보았더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3, 6절),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른 아침을 제외한 나머지 경우는 일꾼을 찾아 모은 게 아니라, 일자리를 제공했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첫 번째 일꾼들에게 주인은 한 데나리온(당시 보편적인 하루 임금)의 품삯을 약속했고(2절), 그다음 일꾼들에겐 ‘상당한(적절한, di,kaioj)’ 품삯을 주겠다고 말합니다(4절). 아예 품삯 약속도 없이(7절) 포도원에 들어온 마지막 일꾼들은, 포도원에서 일을 하게 된 그 자체를 감지덕지하게 여긴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습니다”(7절)라고 자탄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주인이 선물한 셈이지요. 말하자면, 포도원을 위해 일꾼들이 동원되었다기보다는, 일꾼들을 위해 포도원(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형국입니다.
모든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 품삯을 지불하다 (8-10절)
오후 여섯 시가 되어 포도원 작업은 끝나고, 주인은 청지기에게 명하여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라고 합니다. 나중에 온 일꾼들부터 시작해서 삯을 주라는 순서를 굳이 주인이 정하여 명합니다. 이에 따라 한 시간 일한 품꾼들이 먼저 나와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아침 일찍(6시)에 들어온 이들에게 약속된 품삯이라, 주인의 후함에 모두가 놀랍니다. 당연히 나머지 일꾼들은 한 데나리온 이상을 받으리라는 기대를 합니다. 그런데 그 예상과 기대는 어이없게도 빗나갑니다. 모든 일꾼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 지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시험 결과와 관계없이 모두 학생에게 백 점의 점수를 부여한 것과 같습니다.
품삯을 주는 대목 이후로, ‘처음 온 자들’와 ‘나중 온 자들’이라는 말이 밀집하여 나타납니다(8, 10, 11, 16절). 그들은 각각 많이 수고한 일꾼과 적게 수고한 일꾼으로 명백히 구별됩니다. 이들 사이에는 처음과 나중의 서열이 존재하고, 그 서열을 무시하거나 파괴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품꾼들 사이의 그 서열은 품삯의 차이로 나타나야 지당합니다. 그런데 그 정당한 기준과 가치를 허물고 역전이 일어납니다. 그 역전의 실상은,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 것이 아니라, 첫째와 꼴찌가 똑같아진 것입니다.
먼저 된 자들의 항의 (11-12절)
‘많은 일을 한 사람이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한 원칙으로, 그렇지 못하다면 정의롭지 않습니다. 가장 이른 시간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들이 주인에게 따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일토록 뜨거운 더위를 무릅쓰고 일한 자신들이, 한 시간만 일한 품꾼들과 똑같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주인)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을 부정하거나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들에게 하루치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는 관대함은 놀랍도록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종일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처우하는 결행은 부당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처분은 형평성에 어긋나며 정의에 위반됩니다. 약속된 것보다 덜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합당한 분배의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많은 일을 한 첫째는 첫째의 대우를 받아야 하고, 적게 일한 꼴찌는 꼴찌의 처우를 받아야 공정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이런 공정성을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앞서 온 일꾼들은 주인의 처사가 ‘적당한’ 품삯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13절)
그런데 오래 수고한 일꾼들의 마땅한 항의를 받은 포도원 주인은 미안한 기색이 없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결정과 행동을 두고 ‘잘못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이행했기 때문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주인이 일방적으로 정한 품삯이 아니라, 첫째 일꾼들이 흔쾌히 동의한 바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덜 받은 게 없습니다. 다만 적게 일한 동료들이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주인은 헌신과 능력과 수고와 성취 정도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고 차별적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에게는 다른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이미 주인이 일꾼들을 자신의 포도원에 불러들일 때 밝혀졌습니다. 주인의 관심사는 일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는 것 말입니다. 주인은 일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주기 위하여 품꾼을 부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일꾼을 부름은 주인의 초대입니다. 이는, 주인이 항의하는 일꾼을 향해 “친구여(etaire)”라고 호칭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암시됩니다. 이 호칭은 잔치를 벌인 임금이 초대되어 온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한 그 말입니다(22:12).
이것이 내 뜻이다 (14절)
한 데나리온은 당시 남자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일당)에 해당합니다. 일당 임금에는 보통 노동자와 그의 가족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최저 비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 데나리온은 가장(家長) 한 사람의 수입에 의지하는 한 가족이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비용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 주인은, 온종일 일한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용할 필요인 한 데나리온을 모두에게 준 셈입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그날을 살기 위해 한 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모든 생명에게 필요한 대로 주는 것, 그것은 광야에 만나를 내려 모든 백성을 먹이셨던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적당한 품삯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는 분”이 우리의 하늘 아버지라고 알려주십니다(마6:32).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와 헌신을 헤아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살피시는 하늘의 아버지이십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원 주인은 바로 그 하늘 아버지의 관심사를 따르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생각하는 적절한 품삯이란, 수고와 업적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은혜, 즉 일용할 양식입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필요한 대로 후하게 주는 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가 주의 기도 가운데 있습니다(마6:11).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5절)
앞서, 예수를 찾아왔던 의롭고 부유한 젊은이는 분명 일찍부터 하나님의 포도원에 들어와서 신실하게 일한 일꾼입니다. 그는 첫째 자리(영생)를 얻기 위해 어떤 “선한(avgaqo,j)” 일을 더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19:16). 예수께서는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19:17). 그 선한 이가 누구인지 포도원 주인 비유에서 밝혀집니다. 포도원 주인은 “내가 선하므로”라는 말로 자신의 선함을 천명합니다.
의로운 청년의 생각으로는 보상받을 만한 행위를 선한 일로 봅니다. 이는, 종일 더위를 무릅쓰고 수고를 한 일꾼들이 남다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같은 논리입니다. 그런 논리는, 종종 교회 안에서, 남다른 헌신을 하는 이들의 주장에서도 발견됩니다. 흔히, 나는 하나님께 충성스럽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서 불평을 갖습니다. 예언자 요나에게서도 발견되는 예입니다(욘4장).
포도원 주인(하나님)의 관대함은, 후한 품삯을 준다는 사실 이전에, 모든 사람을 포도원의 일꾼으로 초대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일꾼들은 일당을 약속받고 고용된 노동자들이 아니라, 포도원으로 초대받은 주인의 친구들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주는 것은 일한 만큼의 품삯이 아니라, 친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당연히 선물은 공로를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과 수고에 따르는 보상이 아니라, 자비로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많은 수고와 공을 헤아리기보다, 모두에게 필요한 바를 헤아림으로써 누구에게나 부족함 없습니다(시23:1). 한 시간만 포도원서 일한 이의 사정까지 모자라지 않게 채웁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전이란 이런 것입니다. 첫째와 꼴찌의 서열이 바뀜이 아니라, 그 서열의 탑을 무너뜨림입니다. 은혜와 자비로 가능한 일이며,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