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감각적 인식이 일상적인 감각에서 동떨어진 영역에서 관찰하는 것도 일단 발견되고 난 이후에는 일상적인 판단력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다(비밀학 개요, 2024, 101)."
필자가 초감각적 인식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한 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 초감각적 인식이 과연 있는가. 둘째, 초감각적 인식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 생활에 활용될 수 있는가. 셋째, 다른 사람도 초감각적 인식을 활용하는가이다. 물론 이런 질문에 답할려면 먼저 초감각적 인식을 이해하고 경험해야 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수준만큼 초감각적 인식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초감각적 지식이 아니라 '머리가 좋다'라는 말로 포장된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머리가 좋은 그 내부로 들어가면은, 자신의 정신기관을 활용하기 떄문이다.
첫째 질문, 초감각적 인식이 있는가. 초감각적 인식이라면 뭔가 비밀스러운 현실에서 이해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현실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반드시 파악되어야 하는 직관, 또 자연이나 사물을 보고 느끼는 영감, 대상으로 가기 위한 상상, 대상이 드러내는 정신적인 상이다. 요컨대 직관, 영감, 상상이 모두 초감각적 인식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초감각적 인식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개를 생각하면은 집을 지키는 커다란 개도 있고, 앙증맞은 애완견도 있다. 이런 개들을 상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상상이다. 나아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반려견을 보면, 그 귀여움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온다. 이것이 영감이다. 예컨대 또르르, 무럭 무럭, 등등. 직관은 이런 개를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 예컨대 개가 끙끙대면은 과거에 경험을 떠올려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이 직관이다. 우리는 늘 이렇게 상상, 영감, 직관을 오가면서 삶을 살아간다.
이는 둘째 질문하고도 연결되어서, 초감각적 인식은 우리 생활에서 항상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 범위인데, 초감각적 인식은 우주를 통틀어서 그에 맞먹는 수준이라서 그것을 글로, 언어로 표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내가 초감각 세계를 파악하는 정도에 활용 범위가 달려있다. 즉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초감각적 인식을 이해하는 정도에 달린 것이다.
초감각적 인식이란 '우주 지혜'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상상, 영감, 직관이 우주 지혜하고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내가 어떤 상상을 한다면, 나의 정신과학적인 요소가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고, 나의 정신과학적 요소가 우주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작업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것이 우주 지혜이다. 즉 인간이 우주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상상, 영감, 직관을 하는 것이다. 이를 모르는 것은 인간의 정신기관이 수행하는 그 일을 현실에서는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정신기관이 그 일을 안하는 것이 아니므로, 만약 우리가 정신기관이 수행하는 것을 파악한다면, 그 기능을 활성화 시킬 수가 있다.
셋째 질문, 다른 사람도 초감각적 인식을 활용하는가이다. 인간이므로 당연히 활용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활용하는 것을 언제 아는가 하면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 즉 내가 간섭을 당할 때 가만히 살펴보면 안다. 또 그 간섭의 수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초감각적 인식 수준도 파악한다. 하지만 정신세계의 속성은 다른사람을 간섭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한다. 이는 그 폐해가 크기 때문인데,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간섭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간섭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기관을 움직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렇게 저렇게 하라'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저렇게 하기를 바라고 하는 말과 행동이다. 상대방이 그렇게 할려면 자신의 정신기관을 움직여야 한다. 인간의 정신기관은 우주가 움직이는 원리에 따라서 움직이는데, 이를 같은 인간이 움직일려고 하는 것이 우주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이 우주 원리에 맞게 하지 못하기 떄문이다.
이와 같이 간섭은 엄격하게 금하지만, 허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조언이 있다. 조언은 반드시 그 사람을 위한 경우에만 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엄격하게 심사를 해서 그 자격을 준다. 법사이다. 즉 법사만이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엄격한 것은 되풀이 하지만 그것이 정신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그 사람의 정신기관을 망치기 때문이고, 이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섭은 절대해서는 안되고, 조언도 될 수 있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필자는 보이지도 않는 세계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에서 쓸모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궁금해서 질문을 하고 공부는 했지만, 현실에서는 쓰일 데가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역시 슈타이너가 이 질문에 답을 주었다. 위 문장이다. 이렇게 초감각적인 인식을 발견하면, 일상적인 판단력에서 이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적인 판단력으로도 초감각적 인식이 가능하다. 더불어 이 말은 그 인식을 현실에서 활용할 수가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다음은 초감각적 인식을 경험한 여담이다. 이 경험으로 초감각적 인식이 현실의 판단력으로 이해할 수가 있고, 또 이해되면 현실의 삶에서 활용된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사물의 내적 언어에 관한 경험이다. 슈타이너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사물에는 내적 언어가 있고, 이 내적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 정신세계를 공부하는 의미라고 했다. 사물의 내적 언어가 정신세계의 언어이므로, 그 언어를 읽어야 사물에 표현된 정신, 그 의미를 파악해서 그 의미대로 행동한다. 필자는 이것이 어려웠다. 현실에서 사물은 그냥 사물인데, 그것이 정신세계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정신세계는 참 신기한 것이 내가 알고자 할 경우, 내가 그 수준이 되면 그 답을 반드시 알려 준다. 물론 그 수준이 안 될 경우는 -지식으로-, 읽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꾸준히 노력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 수준에 이르고 답을 파악하는데, 이 경우도 그랬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알게 되는 경우, 표현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적으로 깊이 침잠하라'. 그리고 '의지를 내어서 몰입하라'. '더 큰 의지를 내어서 몰입하다 보면, 그 세계에 들어간다'라고.
사물의 내적 언어가 무엇일까? 사물의 정신인 것만은 분명한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에밀레종의 비천 무늬가 떠올랐다. 에테르체의 상이었다. 이것이 필자의 에테르체의 모습이지만, 당시 사람들의 소망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비천 무늬의 내적 언어인 것이다. 인간의 에테르체가 우주로 날아오르는 것이 당시 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인간의 소망인 것이다. 요컨대 당시 사람들도 이렇게 정신세계를 갈구했고, 그 소망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에밀레 종의 비천무늬이다. 이렇게 에밀레 종의 비천 무늬의 내적 언어를 해석할 수도 있다. 물론 정신세계의 모든 언어는 다만 하나의 상으로만 인식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작품으로 표현되면 예술이 된다. 즉 예술이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사물의 내적 언어를 파악한다면, 예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인간의 정신기관의 활성화이고 초감각세계의 인식이다. 이렇게 초감각적 세계의 인식은 현실세계에서 이해될 수 있고, 현실세계에서 활용된다.
문제는 현실세계에서 이를 인식하는 방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초감각 세게를 배척하지 않는 것이다. 배척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자아'가 순간 순간 질문하고, 그 질문을 현실의 '내'가 파악하면 역시 답도 알려준다. 결론은 이 또한 자신의 정신기관의 수준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