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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서울에서 한참 바쁘실 텐데, 도법스님께서 오셨습니다. 도법스님을 큰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법스님
시작하는 거예요? 안녕하세요?
사회
스님은 장일순 선생님 전시회는 처음이신가요?
도법스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앉아서 얘기하라는 거죠? 그런데 이곳 장소의 분위기가 서라는 거 같은데, 서서 해보다가 앉아야 되면 앉겠습니다. 저는 사실 내용은 자세히 모르고, 생명평화결사, 무위당사람들, 사랑어린학교 등등 이렇게 저렇게 인연이 되어 있어서 좋은 마음들을 모아서 함께하는 자리가 있는데, 와서 얘기 좀 해라, 라는 명령을 받고 “예 알았습니다.” 하고 왔습니다. 사실은 그 얘기를 듣고 어차피 같이 마음을 모았던 인연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불가피한 일이 없는 한 당연히 와서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잊고 지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다시 일정을 체크 해 보니까 날짜가 다가 왔더라구요. 그래서 가서 뭔 얘기를 해야 되지? 그때부터 생각하다가 무위당 선생 전시를 하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생명평화운동하고, 무위당 선생의 사상과 정신, 어쩌면 한국 역사 속에서 탄생한 한국 불교의 위대한 사상과 정신을 담고 있는 한국의 명작이라고 소개하는 데요, 의상스님의 법성게(法性偈)까지를 연결시켜서 같이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사실은 제가 강의안을 보냈는데, 여기서 쓰려고 했는데, 여기는 안 쓰는 거 같아요. 제목을 그렇게 붙였습니다. “무위당의 좁쌀 한 알 우주와 생명평화 무늬” “나락 한 알 이야기” “좁쌀 한 알 이야기” “꽃 한 송이 속에 천지가 있네” 사실은 다 같은 내용이죠. 나락 한 알 혹은 작은 것, 좁쌀 한 알, 꽃 한 송이 이런 거...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같은 내용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사실, 이런것을 세밀하게 준비하고 연구하는 성격이 못 되가지고, 닥치는 대로 해보자...그래서 별 준비 없이 왔습니다. 닥치는 대로 해보자. 제 얘기는 들으면서, 들을만한 것은 아 그런갑다 하고, 시원찮은 거 있음 시원찮은대로, 흘려보내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도 편하게 얘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이 그림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다 보셨어요? 설명 안해도 될까요? (해주세요..) 저희들이 생명평화 운동을 하면서 만든, 그림입니다. 저희들은 대개 생명평화 무늬라고 하죠. 제가 생각 할 적에 “좁쌀하나의 우주” “나락 한 알의 우주” “꽃 한송이의 우주” 이런 이야기, 아까 노래 속에 보면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음을” 어쩌면, 이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까. 이건 제 생각입니다.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고 관계없이 제 해석인거죠. 그래서 무위당 선생의 “좁쌀 한 알의 우주”와 “생명평화의 무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리는데, 그 문제의식을 조금 설명해보면, 어쩌면 현대 세월을 놓고 보면 제일 마지막에 이뤄놓은 작품이 생명평화무늬이고, 그 앞에 표현 되는 게 좁쌀 한 알의 우주, 나락 한 알의 우주, 꽃 한 송이의 우주는 장일순 선생의 표현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통일신라, 한국이 낳은 대표적인 사상가 중의 한분이시죠.
원효와 의상, 의상스님은 원효대사 친구입니다. 의상스님의 저술 “법성게”라는 게 그 작품 속에서 말하고자하는 내용, 이게 제가 볼 때는 만나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얘기하고 있죠. 1700년 전에 있었던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사회방식 또 우리 스승들이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이나 사회방식, 오늘날 우리 시대를 고민하고 있는 세계관이나 사회방식이 다 만나고 있어서, 오늘 그 얘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다가 또 한 가지 보탠다면 현대과학이 밝힌 세계관의 사유 방식, 현대과학이 밝힌 세계관은 뭐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적절할까요? 잘 안 떠오르는데, 어쨌든, 물리학계에서 사용하는 언어 중에 인드라망이라는 개념이 화엄경에서 나오는 개념인데, 아니구나, 현대물리학에서 얘기하는 개념을 찾는다면, “생명그물”이라고 하는, 이것을 인디언들이 갖고 있었던 세계관과 사회방식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생명의 그물”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현대과학이 밝혀낸 세계관과 사회방식을 대중들에게 잘 전달 될 수 있도록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들도 현대과학이 밝힌 세계관과 사회방식을 잘 파악하고 이해 할 수 있도록 표현하려면 과연 어떤 개념으로 표현하는 게 좋을까 하고, 많은 모색을 하는 과정 속에서 인디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과 사회방식을 표현한 한마디가 “생명의 그물”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이걸 보고 이분이 현대과학이 밝혀낸 세계관과 사회방식을 “생명의 그물”이라는 한마디보다 더 현대과학이 밝힌 내용을 더 충실하게, 더 아름답게, 그리고 어쩌면 일반 대중이 알아듣기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을 새롭게 만든다 하더라도 만들 수 없겠다 판단하고, 더 찾아본다고 해도 찾을 수 없겠다, 하고 그래서 이 개념을 가지고 쓰자 하고 “생명의 그물”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썼습니다. 현대과학이 밝혀낸 세계관과 사회방식까지도 이 그림 속에 다 있고, 다 표현되고 있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저는 막연하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우연하게 “아인슈타인에게 묻다” 라는 책을 본적이 있습니다. 사람들한테 권하기도 했는데 별로 재미없어 하더라구요. (웃음) 어떤 분은 대단히 좋다라는 분이 있는데, 상당히 많은 분들이 “이런 걸 왜 권했냐?” 이런 반응이었습니다. 그래도 보시면 좋으실 거 같습니다. (웃음) “아인슈타인에게 묻다” 저는 아인슈타인은 유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구체적으로 그분에게 묻고 답하는 책은 처음 본 거 같은데, 그 책 내용을 읽다 보니까, 몇 가지 얘기가 나오는데 하나는 본인은 기성종교를 생각하면 온몸이 전율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지긋지긋하다. 두 번 다시 떠오르기 싫다. 이런 거죠. 특히 그 중심에는 기독교죠. 그분은 기독교의 사회적 배경으로 살았던 분이기 때문에, 그러면서 미래는 우주종교로 가야한다. 이렇게 얘기하죠. 우주종교로 가야하는데, 우주종교의 내용은 과연 어때야 될까 했을 때, 과학이 없는 종교는 위험하다. 그게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하죠. 반대로 종교가 없는 과학도 위험하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거죠. 그 위험성을...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종교와 과학은 만나고 함께 가야 된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죠. 미래 종교는 우주종교로 가야된다. 우주종교는 과학과 종교가 만나 함께 가야 한다. 저는, 사람들이 불교가 한국사회에 전래되어서 끼친 영향중에 가장 중요한 영향이 있다면 그게 뭐냐?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고, 더러 그런 얘기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하는데, 저는 잘은 모르고 막연하지만, 화엄경이라는 경전을 읽으면서 불교가 한국에 전래돼서 우리 민족사에 기여한 게 대단히 많겠지만, 그 중에서 하나만 꼽으라하면 그게 과연 뭘까 봤을 때 저는, 요새 말로 하면 한국사람들로 하여금 우주적 사고를 하게 했다. 우주정신과 만나게 하고 우주정신과 함께하게 하고, 우주적 사고를 하게 한 것이 불교가 전래되어서 우리 민족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할까?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냐,라고 더러 얘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오늘 의상스님의 “법성게”라고 하는 화엄경의 사상을 압축해서 만들어 낸 시인데요, 이 내용을 보면 그야말로 우주적 사고를 그 시대에 이미 하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봤을 때 불교가 한국사회에 준 아주 중요한 선물을 찾는다고 하면, 우주적 세계관, 우주적 사고방식, 우주정신을 갖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짚어보면, 잘 모르실 분이 계실 테니까 이 그림을 보면(생명평화무늬를 가리키며) 제일 밑에 사람입니다. 무위당 선생의 표현에 연결시키면, 좁쌀 한 알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나락 한 알, 꽃 한 송이라고 할 수도 있고, 지금 여기의 나, 각자 자기 자신, 또 더 추상적으로는 삶, 구체적으로는 각자 자기 자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또 삶, 구체적으로 나, 너, 오른쪽 편이 네 발 달린 짐승, 이쪽 편이 새와 물고기, 사람머리 위쪽이 사람, 나무, 숲, 식물 그리고 해와 달 그러니까 우주 삼라만상을 단순화시켜서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연결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것을 아까 말한 “생명의 그물”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다 그물처럼 이어져 있다. 그물의 그물코처럼 존재한다. 이것을 불교경전에서는 인드라망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인디언들은 “생명 그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물의 그물코는 전부 연결되어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분리 되는 순간 그물코는 그물코의 생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전부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지해 있고, 서로의 영향과 도움을 받으면서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얘기인 거죠. 이런 것을 불교용어로 “연기법칙”이라고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관계의 법칙” 따라서 관념적으로는 너는 너고, 나는 나야라는 따로 분리되어 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야.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관념이고 실제로는 온통 그물에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최근에 “양자역학과 불교”라는 책을 보라고 권유하더라구요. 책이 두껍다고, 두꺼운 책은 내가 아예 엄두를 못 내니까 권하지 마라, 이러니까 간곡하게 권해요, 반드시 봐야한다고. 책을 보는 순간 이것은 내가 볼 수가 없겠다. 하도 보라해서 뒤적거리는데 내가 볼 수 있는 책도 아니고, 그래서 갖다 준 친구가 스님이 못 읽을 거 같으니까 그 옆에 “불교와 양자역학”이라는 조그마한 책이 있더래요. 그걸 대충 봤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게 많죠. 그러나 거기서 하나 확실한 건 있더라고요. 달은 달대로 해는 해대로 확실히 독립된 형태로 존재하는 게 보이잖아요. 사람은 사람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다 따로따로 이런 모습을 보이잖아요.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잘 모르죠. 육안으로 보면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까. 그런데 과학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냐면, 굳이 생명의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해서 본다면, 이것은 다 점선으로 표현한 것이죠. 다 점선으로 표현한 것이죠. 그리고 온전한 선으로 표현할 것은 이것을 인간이라고 한다면 달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해와 인간이 연결되어있다는 사실. 이것은 온전한 선으로 표현한다는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연결되어 있지 않잖아요. 우리 육안으로 보면. 완벽하게, 탄탄하게. 그런데 과학적으로 밝혀보면 이것은 다 점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탄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과학적으로 밝혀보면 부실부실하다는 거죠.
천 년 만 년 변하지 않는 확실한 선은 나무와 인간의 선 또는 동물과 인간의 연결, 태양과 인간의 연결, 나와 너의 연결, 이웃과 이웃의 연결, 인간과 자연의 연결, 이것은 만고불변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영원히 한결 같은 것, 영원히 확실한 것은 관계라는 거죠.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서 날고 뛰어봐야 칠팔십년이면 자라고 나이 먹고 늙고 병들고 죽고 사라져요. 그렇죠? 부실부실하게 무너지는 거죠. 그런데 관계에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관계에서는 분명하다. 이것을 현대과학이 밝히고 내용이죠. “불교와 양자역학”이라는 책에 보니까 다른 것은 내가 잘 모르겠는데,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부분이었어요. 세상에 영원 불멸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정신도, 영혼도 그 무엇도 아니고 오로지 관계만 영원불멸하다 이런 얘기죠. 이것은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좁쌀 하나의 우주를 말을 놓고 생각을 해본다면, 현대과학을 얘기하면 전문성도 없기 때문에 대충 이 정도로 제 감으로 설명을 드리는 것이고요. 이것이 좁쌀 한 알, 나락 한 알이라고 할 수 있고, 나라고 할 수도 있는데 여기에 있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나 아닌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서 나 아닌 다른 것들과 무관하게 내가 존재 할 수 있는가? 이건 절대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그건 부처도 예수도 별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태양이 없는 지금 여기 있는 나,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자본주의 사회라서 돈이면 다 죽고 사는 거 알아서 할 수 있어, 그런다고 하더라도 태양과 관계 맺지 않는 한 나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 질수도 없고 삶을 유지 할 수도 없습니다. 그건 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자이든, 기독교든 불교든, 서양 사람이든 동양 사람이든 그 무엇도 관계없습니다. 오롯이 관계를 통해서만 태양과의 관계, 식물들과의 관계, 짐승들과의 관계, 달과의 관계 등 기타 온 우주에 존재하는 시간, 공간, 유형, 무형, 정신, 물질, 인간, 자연, 나, 너, 인간, 남, 여 온통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지하여 서로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존재하도록 되어 있는 이 관계의 질서, 관계의 법칙이 진리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요. 지금 이 우주 자연과 관계없이 분리된 대한민국 순천시에 도법이라고 하는 인간, 순천이라고 하는 조그만 동네에 있는 인간이라고 사는 것하고, 온 우주의 인간으로서 한 우주의 인간으로서 여기 존재해서 산다고 하는 것하고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달라요.) 나는 우주적 인간이야, 하고 나는 순천의 한 동네 인간이야, 하고 똑같은 나이긴 한데, 어떻습니까? 우주적인 나일 때하고 순천의 조그만 동네의 나일 때하고 뭐라 그럴까? 기분이라고 할까?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기분이 같을까요? 더 쉽게 얘기해서 나는 우주 무대를 떠돌고 있는 나그네야 하고 순천 촌놈하고, 어떻습니까? 기분이? 저는 이것이 다르다고 봐요. 장일순 선생은 그걸 읽어낸 거죠. 이 좁쌀 한 알이 단순한 좁쌀 한 알이 아니다. 우주의 한 좁쌀이라는 거죠. 온 우주가 관계하고 참여해서 탄생한 또는 창조 되어진 좁쌀 한 알이 온 우주가 창조하고 관여하고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그 무게가 어떻습니까? 좁쌀 한 알의 무게가 우주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좁쌀 한 알의 가치가 우주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어쩌면 지금 여기 내가 또는 지금 여기 당신이 그런 우주적 존재의 가치를 가진 존재들이라는 거죠. 내가 만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돈이 있냐 없냐, 유식하냐 무식하냐, 잘 났냐 못 났냐, 남자냐 여자냐, 쌍놈이냐 양반이냐, 기독교냐 불교냐, 동양놈이냐 서양놈이냐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거죠. 존재 자체가 우주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우주적 무게를 가지고 있는 존재란 얘기죠. 그렇게 알고 보면 본인 인생이 어떻습니까? 네가 옆에 있는 사람과 만난다는 게 어떤 만남입니까? 우리는 우주적 존재를 만나고 있는 거예요. 우주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우주적 무게를 가지고 있는, 우주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존재를 만나고 있는 거예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동의 안 되시나요? (동의합니다.) 이 순간 대단한 만남을 하고 있는데 표현을 해보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대단한 만남을? (박수) 별로 동의 안 하는 거 같은데? 엎드려 절 받기식이야. (웃음)
삶에 대한 눈이 열리면 이런 게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그게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는 관계없는 일이죠. 나한테 도움이 되고 안 되고는 별로 관계없는 일이죠. 그냥 존재 자체가 대단한 거라는 거죠. 관계의 세계관, 이 관계의 법칙의 세계관으로 보면 이 세상에는 필요 없는 하찮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도 하찮은 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귀하고 천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똥을 더럽다고 하죠.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거름, 퇴비, 똥, 똥이 없으면 곡식이 자라고 꽃피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곡식이 열매를 못 맺으면 곡식을 먹고 자라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내 사랑하는 아들, 딸들에게. 결국 아들 딸들의 삶이 가능한 것은 똥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거름이 있기 때문에, 퇴비가 있기 때문에! 그러면 흙의 가치와 곡식의 가치와 사람의 가치는 우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어요. 똥이 사람 생명의 모체인 거예요. 퇴비가 사람의 생명을 낳고 기르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관념적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아주 사실적으로 짚고 보면 이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관념적으로는 똥을 피해야 할 것, 멀리 해야 할 것, 못 쓸 것, 더러운 것 그러나 실재적으로 확인해보면 똥이 없으면 여기에 있는 차도 과자도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수박도 사과도 밥도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밥과 사과와 차도 먹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도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사실 하나하나를 짚어보면 결국은 우리가 싫어하는 천하게 여기는 똥이, 퇴비가 흙덩어리가 곧 내 생명이 하느님인 것이죠. 내 생명이 부처이고 어버이고 이런 것이죠. 무위당 선생이 말씀하신 좁쌀 하나의 우주, 나락 한 알의 우주, 꽃 한 송이의 우주 이런 내용을 시각화해서 보면 좀 더 사실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연결시켜서 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얘기해볼까 싶네요. 이게 어려워서 자료가 같이 있으면 좋을 듯 싶은데 법성게에 대한 말을 불교에 놓고 보면, 양이 방대하다보니 하는 얘기가 많은 것처럼 보여요. 하는 얘기가 많다보니 엄두를 내기가 어려운 거예요. 사실 이것을 종합해서 단순화시켜보면 인생이란 뭐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곳이야?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 나는 누구야? 얘는 어떤 존재야? 이런 물음! 그다음에 두 번째는 어떻게 살아야 삶이 괜찮은 거야?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설명이 소위, 불교입니다. 이 물음을 불교에서는 인생화두라고 합니다. 이 화두는 사실 누구에게라도 던져진 거 아닙니까? 어쩌면 인간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두 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이 항상 모순과 혼란, 숱한 시행착오, 숱한 갈등과 대립, 파괴와 소모 이런 것들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결국 내가 누구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정말 어떻게 살아야 그 삶이 괜찮은 건지, 내가 살고 싶은 평화롭게 행복한 삶을 살려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건지. 우리가 인생화두를 놓치고 살기 때문에 이 화두를 진지하게 붙잡고 살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누구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잘 모르죠. 당연히 어떻게 살아야 괜찮은 삶인지 잘 모르죠. 잘 모르니까 당연히 그 삶이 제대로 될 턱이 없죠. 제대로 안되니까 헤매게 되고 좌충우돌하게 되는 거죠.
불교라는 것이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보이지만 사실 짚어서 보면 인생이란 뭔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그 삶이 괜찮은가? 이 물음을 인생화두라고 하는데요, 이 인생화두에 대한 해답이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라고 할 수 있고요. 인간이 알아야 할 것도 다른 것은 몰라도 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우리는 인생화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요. 다른 것 주식, 커피, 막걸리, 밥이 어디가 맛있고... 이런 것들은 하느님도 못 따라 갈 거 같아요. 이런 잡다한 지식들은 하느님을 능가한 지식들이 현대인들이에요. 정작 반드시 붙잡고 가야 할 반드시 알아야 할 나는 누구인지, 인생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그 삶이 괜찮은지, 이 물음을 던져 놓고 보면 현대인들은 대개 똑똑한데, 이 앞에서는 거의 무식하고 무능력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식하고, 자기 자신을 관리하고 다스리면서 가꾸어가는 데는 너무나 무능력한 것이 현대인들이다. 다른 능력은 하느님을 능가하는 능력들이에요. 싸우는 사기치는 욕심부리는 능력들은 대단히 놀랍죠. 그런데 정작 자신을 알고 자신의 삶을 관리하고 가꾸고 창조해가는 능력은 완전히 무식하고 무능력하다.
결국 길을 가야 할 방향과 길을 제대로 잡고 가야 하는데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있는 길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 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서쪽 방향으로 막 뛰어 가고 있으면 어찌 됩니까? 뛰어가면 효과가 있을까요? 아무리 뛰어가도 헛수고예요. 그렇잖아요.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거잖아요. 또 다른 이야기로 첫 단추를 잘못된 상태에서 다음 단추를 막 끼면 어떻습니까? 경쟁적으로 효과적으로 아주 화려하게, 아무리 끼워도 어긋나게 돼요. 현대는 그러는 거죠.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상태에서 다음 단추를 막 끼우고 있는 그런 현상인 거예요. 죽어라고 애를 쓰긴 써요. 그리고 뭔가 자꾸 이루어진 거 같긴 해, 이루어진 거 같긴 한데, 내용적으로는 결과가 어긋나버리는 거예요. 결국은 한국사회의 현실이죠. 얼마나 우리가 모순과 혼란을 겪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갈등과 대립 속에서 삶을 소모하고 파괴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렇게 삶이 황폐화되고 있는 것이 자살률 1위, 이렇게 갈등이란 손실이 연간 300조 라고 합니다. 돈 벌면 뭐해? 싸우느라고 다 소멸해버리는 건데. 이게 모두 방향과 길을 잘못 잡아가기 때문에 또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넣고 다음 단추를 끼우면서 가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된다는 거죠.
의상스님의 “법성게”는 화엄경 내용을 압축해서 만든 시입니다. 혹시 화엄경에 관심있는 분은... 제가 불교를 얘기하러 온 것이 아닌데 법성게만 제대로 알면 화엄경을 다 소화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법성게라는 것을 저는 이렇게 풀었어요. 노래 안에 그대의 삶을, 이라고 풀었어요. 이 자료집에는 넣어왔네요. 그런데 손님들한테는 안 주나 봐요. (웃음) 자기들끼리만 보고... 보니까 불량한 사람들이야. 인생이란 무엇인가? 즉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인생화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이렇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좀 앉겠습니다. (네) 여기 한 사람 있으니, 좁쌀 한 알일 수도 있고, 나락 한 알일 수도 있고, 꽃 한 송이일 수도 있고, 지금 여기에 자신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의 본래 참모습은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누어진 적도 없고,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것보다 좀 더 설명을 붙이면 나의 진면목은 과연 어떻게 생겼는가? 인생의 진면목은 무엇인가? 이런 내용인거죠. 여기 한 사람 있으니 그의 본래 참모습은 이것이 나의 진면목, 인생의 진면목이라 하는 거지. 그대의 진면목, 생명의 진면목 이런 얘기인 거죠. 그의 본래 참모습은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누어진 적이 없고 이 그림에서 나누어진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두루두루 어울려서만 존재한다 이말입니다. 관계한다는 것이죠. 시간, 공간, 마음, 물질, 내형, 외형, 인간, 자연, 온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그물코처럼 어울려서 이루어져서 존재하는 게 지금 여기 나다. 지금 여기 그대다. 이런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생이란 이렇게 생겼다. 즉, 인생이란 나는 우주적 존재이다. 이런 말입니다. 따라서 대단히 완성된 존재임을, 인간은 미완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보통은 죄 많은 인간, 죄 많은 중생 이렇게 얘기하죠.
부처님을 놓고 얘기해보면, 2600년 전에 사람들은 인간은 죄 많은 업보 중생이야, 그리고 인간은 정말 하찮은 존재야, 스스로 삶을 창조해갈 능력이 없어, 정해진 운명들 또는 하느님이 정해준 대로 또는 타고난 사주팔자대로 살아야 하는 이런 사고방식이 진리로 일반화돼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란 사람이 나타나서 “그렇지 않아 사람은 죄 많은 하찮은 존재가 아니고 사람은 자기 삶을 스스로 창조해낼 수 있는, 자기 뜻대로 자기 삶을 창조해내갈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본래 부처야”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더 쉽게 얘기하면 “나는 집안 대대로 본래 상놈이야”라고 알고 믿고 사는 게 일반화되었다면 석가모니란 사람은 “실제로 그렇지 않아. 그건 잘못 알고 그런 거야. 실제로 굳이 얘기하면 집안 대대로 너 자신이 양반 귀족이야” 이렇게 얘기한 거죠. 어떻습니까? “나는 원래 상놈이야”라고 인생을 알고 믿고 인생을 살 때하고 “나는 양반, 귀족이야”하고 알고 믿고 살 때하고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차이가 바로 이 차이입니다. 차이가 큽니까? 작습니까? 나는 종이야. 노예야. 나는 천한 놈이야. 나는 사주팔가자 사나운 놈이야. 나는 죄가 많은 놈이야. 이렇게 알고 믿고 살 때하고 나는 우주적 존재야. 나는 내 삶을 주체적으로 창조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야. 이렇게 알고 믿고 살 때하고 어떻습니까? 이것은 하늘과 땅처럼 다른 거죠. 바로 이런 거죠.
우리는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야. 모를 땐 그렇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알고 보면 뭐예요? 너와 나는... 모를 때에는 너는 너고 나는 나인 남남인 거예요. 함께할 수 없는 남남, 터놓고 함께할 수 없는 남남인거죠. 알고 나니 어때요? 남남이 아니죠? 모를 때는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 각각 남남에서, 알고 보니까 친구이기도하고 동반자이기도 하고 또는 동업자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한 거죠. 도저히 알 수 없는 “너는 너고 나는 나야!”의 남남에서 삶을 살 때하고 터놓고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고 친구이고 이웃이고 이렇게 삶을 살 때하고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달라요) 이 차이인 것이죠. 잘 몰랐을 때는 남남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우리가 이웃이고 동반자고 친구이더라 이런 얘기인 거죠. 불교에서 깨달음을 많이 얘기하는데 깨달았냐 못 깨달았냐는 이 차이입니다. 남남일 때는 함께 사는 게 가능하지 않죠? 혹 함께 산다 해도 철저하게 거래방식으로만 하죠. 계산을 맞춰 가야하는 거죠. 이만큼도 어긋나면 같이 안 되는 거예요. 철저하게 거래, 계약에 의해서만 삶이 가능한 거죠. 동반자고 친구고 이웃이면 어떻습니까? 계산이 안 맞아도 얼마든지 조절하기도하고, 관리하기도하고, 나누기도 하고 그런 삶을 살 수 있잖아요. 철저하게 거래하고 계약하고 이루어지는 삶하고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나누기도 하고 돕기도 하고 조절하기도 하고 이렇게 이루어지는 삶하고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어떤 삶이 편하겠습니까? 어떤 삶이 인간답겠습니까? 너무나 명백한 거거든! 그래서 옛날 분들도 이미 이런 우주적 삶을 산거죠. 놀라운 사실은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도 아닌데 이 표현이 일미일체다중일 하나 가운데 일체가 들어 있고 여럿 가운데 하나가 들어 있다라는 표현인데 한 먼지가 온 우주를 품어 안고 일체의 먼지도 그와 같다. 이게 좁쌀 한 알의 우주, 나락 한 알의 우주, 꽃 한 송이의 우주 다 같은 내용인 거죠. 이 시에 보면 그런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미 그때 우주적 세계관과 사고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고 다루었다는 거죠.
그 다음에 두 번째로는 아까는 공간적으로 여기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본래 참모습은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누어진 적 없고 시간적으로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항상 그 모습이며, 이 그림을 놓고 보면 나의 진면목 인생의 진면목 생명의 진면목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생겼다. 물리적으로 설명하면 우주적 관계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시간적으로 봤을 때 어떻습니까? 천 년 전에 봤을 때 이 그림이 달랐을까요? 같았을까요? 같았을 거예요. 지금도 이 모습인 거예요. 천 년 전에도 마찬가지인거죠. 과거 현재 미래 다 같다는 얘기죠. 관계의 진리로 이루어진 세계는 공간적으로 어디에서도 이 모습인거고 시간적으로도 언제고 이 모습인거죠. 이 진리를 사실적으로 잘 아는 것 이것을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거죠. 올바르게 이해하고 확신하는 것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이 앎에 대한 미동이나 동요가 없는 상태이고 확고함 그다음에 어떻게 사는 것이냐는 건데,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이 세계관으로 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자명해집니다. 첫째는 함께 사는 거죠. 나만 사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교인들끼리만, 기독교인들끼리만, 순천사람들끼리만, 이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건 인생이 뭔지 세상이 뭔지 모르면 그럴 수밖에 없는데 제대로 알고 보면 그럴 수 없다는 얘기죠. 온통 함께 사는 길 이 세상에 하나의 길이 있다면, 함께 살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나랑 친하든 안 친하든 이의가 있든 없든 반드시 함께 살도록 되어 있다는 거죠. 너 없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로서만 내가 존재한다. 네가 곧 나고 내가 곧 너다. 이것이 아까 노래,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음을, 이런 얘기죠. 뒤집으면 이제 알았네 그대가 나였음을, 그런 얘기죠. 함께 살도록 되어 있는 게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이다. 영원불변의 진리이다. 함께 산다는 게 첫 번째 진리이다.
그러면 함께 살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할 길이 있다면 우리는 어디다가 목숨을 걸죠? 나만 사는 길, 우리끼리만 사는 길, 맨날 더불어 함께 하는 길 얘기는 하는데 말은 맨날 패거리예요. 기독교인끼리 잘살아보자, 전라도 사람끼리 잘살아보자, 불교인들끼리 잘살아보자, 불교인들끼리 잘살아보자 뭐 이런 식입니다. 다 패거리예요. 한 번도 우리가 우주적 관점에서 생명의 법칙, 생명의 질서에 맞게 진정한 의미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 것에 우리가 열정을 쏟아 본적이 없습니다. 이제 20세기까지는 너는 너고 나는 나야 이렇게 살아왔다면, 21세기까지 살아보니까 그렇게 살아가지고는 해답이 안 나온다. 날고 뛰어봐야 망하는 길밖에 없다. 문명이 종말로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21세기는 달라져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했을 때 과학적으로 봐도 그렇고 종교적으로 봐도 그렇고 경험적으로 봐도 그렇고 우주적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갖고 바라보고 다뤄야 된다고 얘기하게 되는 거죠. 우리가 함께 살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당연히 열정을 바쳐야 되고 그렇게 사는 겁니다. 함께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싸워서 함께 사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겠습니까? 함께 사는 게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랬던 거죠. 하느님의 뜻은 만고불변의 진리 아닙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는 것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요. 첫 번째 함께 살아야 돼요.
두 번째 누구를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겠습니까? 자신을 위해서요! 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죠?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통해서만 나라고 하는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 인간다워지겠습니까? 원수를 원수대하듯이 대해가지고 인간다워지겠습니까? 원수를 원수처럼 대해가지고 과연 내 삶의 품격이 나아지겠습니까? 절대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원수를 사랑할 때 비로소 나는 인간다워지는 것이죠. 원수를 사랑할 때 내 삶의 품격이 향상 되는 것이죠. 원수를 사랑할 때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거죠. 원수를 사랑 할 때 우리는 비로소 편안해지고 따뜻해지고 여유로워지고 평안해지죠.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길이 없어요. 있을 거 같지만 그건 무지몽매한 망상과 같은 것입니다. 있을 거 같지만 그건 있을 거 같을 뿐입니다. 실제로는 없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이건 다 같은 맥락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정을 바쳐야 할 첫 번째는 생명의 법칙, 우주 존재의 법칙과 질서로 보게 되면 함께 사는 길인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 상대를 사랑하는 것! 누구를 위해서? 상대를 사랑하면 내가 괜찮은 인간이 되어지는 거죠. 사랑받는 상대는 어떨까요? 좋죠. 그래서 너도 좋고 나도 좋습니다. 이 생명의 진리, 생명의 법칙대로 말하고 사고하고 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말하죠. 사람들이 이렇게 하게 되면 저도 좋고 나도 좋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법칙, 생명의 진리, 우주의 관계 법칙을 무시하고 내 편한 대로 내 생각대로 내 유리한 대로 이걸 다루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한테 이로울 때 너한테 해롭고 너한테 이롭게 되면 나한테 해롭게 되어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법칙대로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이렇게 사고하고 혁명하게 되면 나한테도 좋고 너한테도 좋고 그래서 너와 내가 함께 좋아집니다. 비로소 더불어 함께 사는 게 가능해 지는 거죠. 세세하게 얘기하자면, 더 많은 얘기를 구체적으로 해야 되겠지만, 지금 그런 얘기까지 할 장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정리하자면 크게는 과학과 종교가 만나고 있다는 것. 어쩌면 과거와 현대가 만나고 있다라는 것. 그런 것들을 다 담아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생의 진면목이 뭔지 과연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자기 삶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 진 것이 생명평화 무늬다. 그래서 전 이것을 21세기에 위대한 탄생이다. 남들이 동의하건 말건 간에... (웃음) 동의 안 되세요? (박수)
끝으로 제가 민노총 한상균 위원장 때문에 24일 동안 같이 홍역을 치뤘다면 치뤘을 건데요. 결국은 그 문제를 그렇게 다루었던 것은 이 세계관과 정신에 근거한 접근 방식이 한상균 위원장과 조계사에서 24일 동안 했던 내용입니다. 아마 그런 내용까지는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우리는, 너는 너고 나는 나야라는 이원론적 세계관과 이분법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 길들여져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편이 갈립니다. 이쪽 저쪽으로. 또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 싸워야만 되는 줄 압니다. 싸워야만 해결되는 줄 압니다. 여긴 아무 힘도 없습니다. 그건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이고, 한상균 위원장도 똑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노동이란 문제를 가지고 충돌한 거잖습니까? 한쪽은 노동 개혁이라고 그러고 한쪽은 노동 개악이라고 그러고. 결국 힘과 힘이 부딪히면 약한 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한상균 위원장이 몰려서 조계사에 들어 온 거죠. 우리 사회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또는 개혁이든 수구든 거의 공통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싸워야 된다. 싸워서 해결해야 된다. 문제를 꼭 싸워야 해결되는 게 진리처럼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제가 하고 있는 화쟁위원회는 문제를 싸움의 방식이 아니라, 문제를 평화적인 방식으로 풀자.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풀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함께 가는 길을 찾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자. 이게 화쟁위원회에서 하는 일입니다.
결국 얼른 보면 조계사에서의 24일은 한상균과 박근혜 두 명의 충돌, 싸움이라고 읽히는데 저희들 입장에서는 사실, 문제를 평화적으로 다루고 평화적으로 풀고 평화적으로 더불어 함께 가는 길을 찾도록 해보자라고 하는 소수와 싸움으로 결판내자라는 어마어마한 양대 세력 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네 가지 그림이 그렸지요. 어쨌든 합법적인 집회가 되도록 한다, 평화로운 집회가 되도록 한다. 젊은이들의 희망이 될 수 있는, 노동의 기회가 되기 위한 사회적인 대화를 하도록 한다. 그리고 평화롭게 마무리 한다. 이 네 가지 그림을 가지고 접근을 했죠.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장이 12월 5일 2차 민중궐기 대회였습니다. 어쨌든 많은 우여곡절 끝에 합법적인 집회를 하게 되었고 평화집회를 성사시켰습니다.
그런데 다수가 소수를 싸움방식으로 문제를 다루고 싸움방식으로 끝을 내자 하는 게 대체적인 판인데 어떻게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열자라는 소수의 제안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일반 대중들의 공감과 지지 때문에 그래요. 양쪽은 다 싸우는데 일반 대중은 이것이 실재가 과장되었건 왜곡되었건 간에 소위, 과격시위와 과잉진압이라고 하는 악순환을 끝내자. 평화롭게 문제를 다루어 가자. 이게 대중들의 바램이에요. 평화적으로 문제들을 다루고 풀어가자고 하는 대중들의 대중적 공감, 바램이 컸기 때문에 사실은 그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거죠. 문제를 싸움방식으로 해서 끝내자라는 거대한 세력과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풀자라고 하는 소수의 생명평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이것도 싸움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싸움이면 싸움이지. 소수의 바램이 국민적 지지와 공감을 얻고 성공한 셈인 거죠. 물론 이게 전부가 아니고 앞으로도 과제는 많이 남아있지만요. 바로 생명평화무늬가 갖고 있는 그런 세계관, 사유방식, 가치의식, 삶의 방식을 갖고 구체적인 현장에 적용했던 하나의 사례가 한상균 위원장의 문제를 합법 집회, 평화 집회, 사회적인 대화, 평화적인 마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란은 많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건 그냥 하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운동을 하는 과정 속에서 축적되어진 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구요.
솔직히 끝난 다음에 일어난 반응은 좌쪽에서 한상균을 내보냈다고 막 욕을 내뱉습니다. 또 우쪽에서는 범법자를 숨기고 보호한다고 욕을 합니다. 그래서 요즘에 제가 하는 것은 양쪽으로부터 욕 얻어먹는게 제 일인데요, 저보고 애썼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애쓴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욕 얻어먹는 것을 감당해내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욕 얻어먹는 것을 감당할 뿐이지 실제로 제가 한 역할은 별로 없습니다. 얘기가 될는지 모르겠는데요, 횡설수설 제 얘기를 늘어놨던 제 얘기를 이제 정리 할까 싶습니다. 횡설수설한 얘기를 잘 들어줘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박수)
사회
말씀을 몇 차례 들었었는데, 오늘처럼 열변을 토하신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도법스님
맨날 열변 토한데... (웃음)
사회
다시 한 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박수) 스님 힘드실 텐데요, 잠깐 질문 받는 시간을 갖겠는데요. (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사이에 질문지가 들어왔는데요, 또 질문하실 분은 바구니가 도니까 질문을 해주시구요, 여기가 6시 전에는 마무리가 되어야 된다 해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요, 그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구요. 질문지 도는 사이에 스님도 잠깐 쉬시고 여러분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시간을 가질 겸해서 조은성 학생의 자작곡을 들어보겠습니다. 박수로 맞이해주세요. 처음에 상사에 산다고 했는데, 도법스님의 말씀대로라면 진실하고 먼 거 같고 우주적인 조은성 학생이 불렀다니까 제 느낌이 다른데요, 한 번 더 박수 부탁드립니다.
사회
한 분이 이렇게 적어주셨어요. 질문이 아니라 편지 같아요. 저는 스님에게 질문이 없습니다. 그냥 좋아요. 도법스님을 엄청 사랑하시는 분 같습니다. (박수로 화답하죠) (박수) 도법스님이 순천에 여러 차례 오셔서 그런지 친척이 온 거 같은 느낌을 받는 분들이 계신가 봐요. 이런 질문도 있어요. 스님, 어렸을 적에 아주 말썽 많은 개구쟁이였을 거 같은데요. 맞죠? (네, 맞습니다.) (웃음) 그러면 개구쟁이들도 스님처럼 될 수 있는 거예요?
도법스님
개구쟁이가 나처럼 되지 뭐. 개구쟁이 아니면 나처럼 안 되겠지. 목사님처럼 되겠지.(웃음)
사회
개구쟁이 가지신 분들은 굉장히 기쁘시죠? 이 분도 편지를 써 주셨네요. 요즘 많이 힘드시죠? 그래도 웃어요. 스님 사랑해요. (웃음) (박수)
도법스님
그것은 설명을 드려야겠네요. 인드라망 연수가 있었는데 얘기하는 자리에서 한 친구가 2015년은 너무 지긋지긋했다. 이제 끝나갑니다. 2016년은 제발 편했음 좋겠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 얘기를 들으니 문득 생각이 나는 게 있어서 받았어요. 나도 2015년에는 지긋지긋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2016년도 별 수 없을 거 같다. 여전히 경험적으로 보면 지긋지긋한 한 해일 가능성이 많다.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 2016년이 지긋지긋하다면 그래, 기꺼이 살자, 기꺼이 지긋지긋한 한 해를 기꺼이 살아주리라! (박수) 그렇게 정리를 해서 기꺼이 살기로 했습니다.
사회
이제 다음 질문인데요, 아까 스님이 잠깐 말씀도 하셨습니다. 스님 욕 하는 분들도 많던데 어떻게 보십니까?
도법스님
어쩌 것어요? 얻어먹어야지. 저는 추운데 어떻게 해요? 떨자. 이런 해답입니다. 추워? 떨자. 더워? 그래, 땀 흘리자. 힘들어? 그래, 고생하자. 기꺼이 고생하자, 기꺼이 떨자, 기꺼이 땀 흘리자,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덜 무겁고, 덜 병나고, 덜 힘들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심하고 기꺼이 고생 좀 하자. 마음을 먹으면 사는 게 더 홀가분해지지않을까 그래서 기꺼이 욕먹으리라. 하거 살고 있습니다. (박수)
사회
이것도 말씀을 하셨는데, 그래도 한 번 더 여쭤보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희에게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으신 책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도법스님
아까 얘기 했는데, <아인슈타인에게 묻다> 또 하나 <미움 받을 용기> 혹시 보셨어요? 그 책 한번 보시면 미움 받을려고 작정하면 세상은 괜찮게 살만한 곳이 될 수 있다. 미움 받을 용기만 있다면 세상은 아름답다. 그런 내용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읽어 보면 좋겠다 싶습니다.
사회
네. 미움 받을 용기와 아인슈타인에게 묻다. 저도 알겠습니다. 스님이 권하신 책은 그리 두껍지 않을 거 같습니다. (웃음) 도법스님, 첫사랑에 대해 정말 듣고 싶습니다. (웃음)
도법스님
그런 말이 있죠. 그런 질문을 뭐라고 하는가? 나무에 올라가서 고기를 찾는다. 이렇게 얘기하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첫사랑은 나한테 없어요. 없는데 자꾸 얘기 하라고 하면 그건 억지잖아요. 억지 부리면 서로 힘드니까요, 서로 억지 부리지 않도록 합시다. (웃음)
사회
네, 스님의 첫사랑 얘기를 들려 주세요. 이걸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나 봐요. 없으시답니다. (소설을 써주세요.) (하고 싶은 첫사랑 이런 거라도..)(웃음)
도법스님
결국은 내 인생의 열정을 바쳐서 집요하게 골몰 하는 게 사랑이라면 당연히 없을 턱이 없죠. 어떤 인간이 없겠습니까? 당연히 있죠. 저는 우연한 기회에 열아홉 스무 살 어머니의 위독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중대한 문제가 사무치게 강렬하게 와 닿았어요. 충격적으로, 그야말로 온 세상이 캄캄할 정도로. 온 세상이 무너진다 할 정도로. 내 인생이 천길 나락으로 떨어진다 싶을 정도로 충격적으로 왔습니다. 당연히 그러니까 인생은 당연히 참으로 허무한 존재구나. 아무리 살아야 할 가치도 의미도 없는 날고뛰고 살아봐야 7,80이면 끝나버리는 허무한 인간, 존재로구나. 그래서 허무병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래서 당연히 도대체 인생이란 뭐야? 왜 태어난 거야? 살아야 할 이유는 뭐야? 이 물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고, 그 물음을 붙잡고 청춘을 다 보낸 셈이죠. 굳이 사랑이야기를 하자면 그게 내 사랑 얘기다. 이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사회
네, 고맙습니다. (웃음) 모든 것은 변한다고 하는데, 하늘은 왜 세상을 변화하도록 만들었나요? 궁금합니다.
도법스님
그건 하느님한테 물어봐야지. 나도 모르겠어요. (웃음) 다만, 아까 내 설명 속에 빠진 게 하나 있는데 그걸 설명하는 게 나을 듯싶네요. 어쨌든 인간이란 존재는 본인 의도한대로 삶이 만들어내는 존재예요. 내가 도법이란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나름 그렇게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내가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고, 온 세상이 그렇게 평가하고 믿는다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도둑질하면 뭐가 되요? 도둑놈일 뿐인 거예요. 내가 행위 하는 대로 바로 내 삶은 창조 되는 거예요. 거짓말하면 거짓말 인생이 되는 것이고, 욕하면 욕설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고, 평화롭게 하면 평화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고, 자유롭게 하면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주체하는 대로 행위 하는 대로 그 삶이 창조되고 이루어지는 존재다. 그러니까 세상이 변하든지 말든지 나에게 주어진 공간, 시간, 존재를 스스로에게도 좋고 모두에게도 좋을 수 있도록 잘 쓰고 잘 활용하면 그 삶이 충분히 괜찮은 삶이 되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변화되도록 되어 있냐? 왜 변화되도록 되어 있냐? 그런 것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살면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질문을 하신 분에게 도움이 되셨을 거 같습니다.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나도 사람인지라 누가 추켜 세워주면 어깨가 으쓱해지곤 하는데, 그런 마음을 지그시 눌러 주는 것이 조 한 알이라며 일속자 조 한 알이라고 하셨다지요? 스님께서 지역 분리가 날카롭게 분리 되어있는 이쪽저쪽에서 욕을 많이 들으시는 것 같아요. 그럴 때 스님의 마음을 다스리는 화두는 무엇인가요? 질문하나 있구요, 또 하나의 질문은...
도법스님
기니까 난 기억이 잘 안 돼. 전 지극하게 투철하게 삶을 살지 못해요. 대충대충, 그래, 욕도 얻어 먹는 게 인생이지 뭐, 실수도 하는 게 인생이지 뭐, 그렇게 어지간한 것은 냅둬 그러고 삽니다. 그래서 특별한 묘책이 있지 않고요, 다만 누가 나를 욕하는데 일단 같이 반응을 하면 스스로가 남루해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대가 나를 욕하니까 나도 상대를 욕한다. 상대가 나를 속이니까 나도 속인다. 서로가 남루해진다는 생각이 하나 있고요, 두 번째 일단 편하지가 않죠. 전 일단 내 스스로가 편해질 수 있도록, 내 스스로가 남루해지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난하고 욕을 해도 아는 척 모르는 척하고 맘이 좀 상해도 아닌 척하고 그렇게 삽니다. 그렇게 하니까 나쁘지 않고 괜찮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
또 하나 질문은, 진실이란 무엇인가요?
도법스님
실제 불교가 무얼 가르치고 있는가? 가르치는 말은 많지만 내용은 단순해요. 삶은 지식으로 안 된다. 지식으로 아는 삶은 계속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지고 계속 어려워 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삶은 아주 실재적이기 때문에 아주 사실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라는 게 불교 사회관이죠. 예를 들어서 불은 뜨거운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아무리 말을 해도 불은 뜨거운 거야, 라는 말 가지고는 그 생각 가지고는 실오라기 하나도 태울 수 없습니다. 불은 뜨거운 거야, 라고 아무리 주장하고 소리를 질러도 글로 써서 모은다 하더라도 실오라기 하나도 태울 수 없어요. 이건 관념적인 거죠. 실제로 불은 어떻습니까? 실재로 불은 아무리 적은 불씨라 하더라도 탈 수 있는 조건이 있으면 다 태웁니다. 그렇죠? 삶은 실재적이어야 한다는 거죠. 실제로 경험적으로 터득한 것은 지혜라고 하죠. 질문이 뭐였죠? (진실이란 무언가요?)
진실... 사실과 진실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실재가 진실이고 실제 사실을 떠나서는 진실을 얘기할 수 없어요. 사실의 내용이 진실인거죠. 그래서 사실과 진실이 진짜 진실이라고 얘기 할 수 있을 거 같고 불교에서는 실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실상사 할 때 실상, 실상이란 말에는 사실이란 의미와 진실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실재가 곧 진실이다. 불교는 삶의 문제는 실재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림을 놓고 보면 우리 생각은 각각 따로이지 않습니까? 너는 너고 나는 나고 해는 해고 다 따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재적으로는 확인해 보니까 해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루어진 거죠. 눈에 보이는 사실은 해와 나는 남남인데 실제로 진실은 해와 나는 남남이 아닌 거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실과 진실을 포함시킨 말을 불교에서는 실상이라는 말로 하고 있고 이미 굳이 진실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마다 다를 거 같은데, 제가 생각 할 적에는 실상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두 개의 모습,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실제 내용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죠. 진실과 사실은 함께 있는 것이기도 하고 통틀어서 진실이라는 말로 해도 괜찮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진실이란 말은 쓰는 사람마다 다를 거 같아요.
사회
옆에서 이제 마무리 할 시간이라고 하네요. (도법스님, 얼른 마무리합시다.) 이거 하나는 진짜 질문해야 하는데요. 간단한 거라서 그냥 질문만 읽어 드릴게요. 질문하신 분이 아쉬워할 거 같아서요. 요즘 살기가 참 빡빡하다고 합니다. 그냥 버티고 참고 살아가야하는 게 맞는지요? 버티고 참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해주셨는데요. 아마 앞서 말씀해주신 거에서 어느 정도 유추해서 나름 결과를 끌어내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그 뒤에 질문을 보면요, 스님 뵙게 되어서 반갑고 고맙습니다. 서화전의 제목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 지는 저 들꽃처럼”이 마치 시의 한 구절처럼 느껴졌어요. 스님이 그 다음 구절을 이어보신다면 어떠실까요? (웃음)
도법스님
아무도 피었다 지는 저 들꽃처럼... 진짜 아무도 모를까요? 저건 우주적 사건입니다. 어찌 아무도 모르겠습니까?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과거가 알고 미래가 알고 현재가 아는데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모른다고 하는 것은 관념일 뿐입니다. 온 우주가 다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그냥 숨겨져 있어 모른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실재는 비밀은 없습니다. 가급적이면 비밀은 두고 살지 않는 게 하늘에 홀가분하니까요. 좀 홀가분하게 사세요. (웃음)
사회
답이 되십니까? 이제 마무리를 할게요. 잠깐 안내를 하자면 지금 전시회를 맞이하여 전시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도법스님처럼 어른을 모시고 말씀을 들었고요, 또 이 시대의 스승이신 관옥 이현주 선생님을 모시고 오는 18일 월요일 저녁 7시에 이곳에서 이야기마당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녹취 후 기록, 소리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