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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성찰' 수업 성찰의 중요성은 듀이(Dewy)의 반성적 사고, 션(Schon)의 성찰적 실천, 아이즈너(Eisner)의 교육 비평이라는 용어로 언급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임현정의 『한 초등 교사의 자기 수업 성찰에 대한 실행 연구』(한국교원대학교 석사 논문, 2011)와 백진나의 『초등 교사의 자기 성찰을 통한 초등 과학 수업개선』(청주교육대학교 석사 논문, 2011)을 참고하라. |
(p27)
이혁규 교수의 '수업 비평', 서근원 교수의 '아이의 눈으로 수업 보기', 사토 마나부 교수의 '배움의 공동체', 좋은교사의 '수업 친구 만들기'등 여러 방향으로 수업을 보는 운동이 일어났다.
01. 수업을 보며 성찰하기
수업보기 1 비평적인 관점으로 수업 보기
"수업을 좀더 깊게 성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공학적 시선을 벗어 던지고 교사가 어떻게 연출하느냐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수업 장학, 수업 실기 대회 때 통용되는 '보여 주기' 수업에 얽매이지 말고, 예술적인 차원에서 수업을 봐야 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신념을 자신의 작품에 형상화한다. 비평가들은 비평을 통해 그것이 어떻게 구현되었고, 그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핀다. 수업도 마찬가지다. 일정한 틀로 교사의 수업을 재단할 것이 아니라 교사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수업을 연출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교육적 의미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교사 스스로도 자신의 수업을 볼 때, 자신이 의도한 배움이 무엇이고 그 배움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교육적 행위를 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렇듯 수업은 예술적인 차원에서 음미하는 것이 '비평적인 관점으로 수업 보기'이다." (p37)
"피카소의 그림을 볼 때 우리는 체크리스트를 들고 그림을 감상하지 않는다. 대신 '그림 속에 왜 이런 형태가 만들어졌는지', '왜 이런 색깔을 사용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본다. 수업도 마찬가지다. '수업을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수업 상황에서 '교사가 왜 저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교사는 어떤 생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p37)
* 수업자는 예술가이다. 자신의 신념을 수업을 통해 표현해 내야 하는 창조자이다. 그리고 수업 관찰자는 비평가여야 한다. 수업자가 만들어낸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평가는 예술가의 무의식까지 읽어 낼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수업을 비평적으로 본다는 것은 이와 같이 교사의 교육적 선택이 수업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교육 내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업 속에 교육적 목적을 가진 행위들은 무수히 많다. 발문, 자리 배치, 인쇄물 구성, 수업 디자인 등 교사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학생들을 몰입시켜 나가는지를 살펴보고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p39)
수업보기2 학생의 배움을 중심으로 수업 보기
"'비평적인 관점으로 수업보기'는 수업을 측정의 대상에서 비평의 대상, 심미의 대상으로 격상시켜준다. 비평의 눈으로 수업을 보면, 수업 속에서 일어난 여러 교육적 행위를 더 깊게 살펴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다 하지만 비평의 눈으로 수업을 본다고 해서 수업이 반드시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수업을 보고 비평하는 데만 머물 뿐 실제 수업에서의 변화까지 이끌어 내지는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수업을 볼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시선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학생들의 배움을 중심으로 한 수업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p42)
"대다수 교사들은 수십 년의 경력을 자랑하면서도, 자신의 가르침 속에서 학생들의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자신의 모습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에 대해서는 고민하지만, 학생들의 머릿속에 어떤 배움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한 적은 별로 없다."(p43)
서근원 '아이의 눈으로 수업 보기', '배움의 공동체' 수업 보기 (각주 부분)
"배움을 중심으로 수업을 보기 위해서는 교사 스스로 배움에 대한 자기만의 정의를 내려 볼 필요가 있다.ⓐ 사실 배움이라는 단어는 교사의 주관에 따라 애매모호하게 사용되곤 한다. 사람마다 배움에 대한 기준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 양상을 명확하게 규정해 놓지 않으면 '배움이 만들어졌다, 만들어지지 않았다'를 가지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사고의 수준을 가지고 배움의 양상을 판단한다. 내게 있어 배움이란, 학생들이 사고를 통해 생각이 새롭게 되어 삶이 변화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크게 다섯 가지 수준이 있는데,
지식이 학생의 머릿속에 정보로 기억되는 1)'사실적 사고' 수준이다. 여기서 배움의 수준이 조금 더 올라가면 학생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2) '추론적 사고'수준이다. 그 다음에는 학생들이 질문 던진 것을 자신의 배경지식을 총동원하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3) '비판적 사고'수준이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현재 배우고 있는 지식의 영역과 전혀 다른 영역 간에 통합이 일어나 이를 표현하게 되는 4)'창의적 사고'수준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사고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과 사회를 성찰하면서 행동의 변화를 가지려고 하는데, 이는 5) '성찰적 사고'의 수준이다.ⓑ 이렇게 학생의 배움을 사고의 수준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좀 더 명확하게 학생들에게 현재 어떤 수준의 배움이 일어났는지를 살필 수 있다." (p45~46)
(ⓐ, ⓑ)
"이처럼 수업 속에서 학생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그들의 배움 수준을 보게 되면, 수업 속 어느 지점에서 학생들의 배움이 멈춰 서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이렇듯 교사는 수업 장면을 볼 때 자신의 수업에서 어떤 수준의 배움이 만들어지는지를 관찰하면, 내 수업이 지나치게 저차원의 배움을 만들어 내고 있지는 않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혹은 협력적으로 어떤 배움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배움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교사 혹은 수업 속에서 원맨쇼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때로는 동료 교사를 초대해서, 내 수업 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학생은 없는지, 나는 이런 학생들을 잘 발견하고 수업 속 배움으로 들어오게 하는지를 살피게 해야 한다. 좋은 수업은 배움의 수준도 깊어야 하지만, 모든 학생이 수업 속 배움에 동참할 수 있는 수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 학생들, 예를 들어 떠들거나 자고 있는 학생들을 배움으로 이끌어 오는지, 그렇지 않으면 방치를 하는지를 살피게 해서, 평소 수업에 대해 교사가 어떤 열정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한다.
결국 배움을 중심으로 수업을 본다는 것은, 그 동안 수업에서 깊게 생각되지 않았던 학생의 시선을 되찾는 일이다." (p48)
수업보기 3 교사의 내면을 중심으로 수업 보기
"우리가 수업을 못하는 건 수업을 진행하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수업을 하는 교사의 내면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예상외로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수업을 잘하고 싶어도 준비한 대로 수업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교육학자 파커 J. 파머(Parker J. Palmer)는 이런 내면적 두려움 때문에 교사가 세 가지 연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수업에서 느끼는 교사의 두려움은 세 가지다. 첫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똑똑한 교사인지 보여주는 것, 둘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지식이 많은지 보여 주는 것, 셋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수업 준비를 충실히 하는지 보ㅕ주는 것, 나는 이처럼 교실에서 세 가지 연기를 해 왔는데, 그 진정한 목적은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나를 훌륭하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파커 J. 파머(Parker J. Palmer), 『가르칠 수 있는 용기』한문화, 2008)
결국 교사는 '수업 속에서 학생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학생의 눈치를 보게 되고,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모습으로 수업 속에서 연기를 하고 있었다. 수업은 학생과 고도의 심리전을 벌여야 하는 공간이다. 학생들의 마음을 잘 모아서 한 방양으로 수업을 진행하려면 교사의 내면이 견고하게 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의 작은 행동에도 신경이 쓰이고, 그것으로 인해 수업은 흔들리게 된다.
02. 수업 속 신념을 살피며 성찰하기
신념 보기1 내 수업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좋은 수업은 단순히 교사의 수업 기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업을 하는 교사가 가지고 있는 일관된 철학이 중요하다. 좋은 수업은 교사의 여러 행위들, 예를 들어 교사가 말하는 내용, 제시하는 수업 활동, 학생들에게 던지는 질문 등이 하나의 목적으로 향한다. 반면 철학이 없느 수업은, 교사가 많은 행위를 해도 각 행위들이 목적 없이 배열된 채 단절되어 있다. 좋은 수업에는 교사의 행위를 일관된 방향으로 흐르게 할 수 있는 수업 철학이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업을 처음 볼 때 '수업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수업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수업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즉 수업의 정체성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p69~70)
"수업은 외부로부터 변화되지 않는다. 수업을 하는 교사의 내면으로부터 그 변화는 시작된다. '교사는 누구인가?', '학생들은 누구인가?', '교과 지식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 수업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 여러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하나의 수업 속에서 구현된다." (p70)
"'암기 주입식' 수업의 정체성, 즉 목적은 무엇일까? 바로 '시험 대비'이다. 수업을 통해 의미 있는 성장과 변화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점수 올리기'에만 골몰하다 보니 교사들은 개념만을 지루하게 나열할 뿐이다. 이때 교사는 학생들을 열등한 존재로 보고, 어떻게 해서든 교사 주도로 가르치려고만 든다. 학생의 개성과 다양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대다수의 교사들은 자신의 수업이 이러한 정체성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교사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중략) 현실과 이상이 괴뢰된 채 늘 자신의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교직 생활을 하고 있다." (p71~72)
※ 서근원 '교사의 딜레마와 수업의미' (아시아교육연구 6권 2호, 2005) 참고.
"이런 수업은 필연적으로 '암죽식 수업'으로 흘러가고, 그렇게 되면 교사 스스로도 수업에 대한 활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수업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신이 나서 수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교사가 자기만의 수업 정체성을 가졌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학생들과 씨름하며 수업을 끌어갈 텐데, 정체성을 상실한 수업은 그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학생들에게 지식만 전달하는 수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p73)
김태현 선생님의 고백
"나는 8년 전 평촌에 있는 사립학교에 신규로 임용되었다. 신도시라 입시 열기가 대단해서, 교사 새내기 시절 수업의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교과서에 있는 개념을 잘 설명하고 문제집을 열심히 풀면서 진도를 나갔다. 수업은 늘 불만족스러웠지만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열심히만 그르쳤다. 그러다 문득 수업의 뒤를 돌아보니 마음이 더 없이 공허했다. 내가 꿈꿨던 수업은 이렇듯 차가운 정보만을 전달하는 수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교감하며 그들에게 의미를 주는 따뜻한 수업을 하고 싶었는데, 내 수업은 보통의 학원 수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수업을 조금이라도 바꿔 봐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인터넷을 통해 수업 방법과 자료를 알려 주는 사이트를 찾고 거기서 수많은 자료를 얻었다. 그리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또다시 열심히 수업을 했다. 예전보다 조금 좋아진 것도 같았으나, 수업 속에서 느끼는 공허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일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과연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그 실체가 명확하게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주는지를 성찰하지 않고 막연하게 머릿속에 그리고만 있으니, 내가 원하는 수업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조급하게 수업 자료를 모으는 대신, 내가 원하는 수업이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일 년 동안 내가 일궈 내고 싶은 배움의 지점이 무엇인지를 글로 써서 내 마음에 심었다. 그러고 나서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내가 설정한 수업의 방향과 잘 맞지 않은 활동들이 보였다. 그래서 조금씩 교과서 활동을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글을 넣기도 하면서, 교과서와는 다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남의 수업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철학이 담긴 수업을 조지금씩 해 나가니 수업 속 공허감은 서서히 사라져 갔고, 일 년이 지나서는 내가 원하는 수업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결국 내 마음속에 내 수업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내 수업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나는 어떤 수업을 하고 싶은가? 어떤 수업이 좋은 수업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배움을 만들고 싶은가? 그런데 많은 교사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면 이것을 쓸모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수업을 못하는 상황인데 이런 질문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불평만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의 수업이 해마다 개선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수업이 개선되겠는가? 많은 교사들은 이런 내적인 성찰을 하지 않은 채 교수 기술 몇 가지만을 익히려고 노력한다. 수업의 본질을 바꾸지 않은채 외형만을 바꾸려고 한다. 수업은 좋은 수업 방법과 수업 자료를 몇 가지 갖는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수업을 알려고 할 때 수업은 비로소 변할 수 있다." (p73~75)
"나는 국어 교사로서 내 수업의 정체성을 '언어를 통한 만남과 사귐'에 두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수업을 통해 우리 학생들이 '나'와 잘 만나고 '너'와 대화하고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이를 위해 간단하게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어서 내 수업의 지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늘 확인한다.
신념보기 2 수업 속에서 흔들지 않는 강한 신념은 있는가?
많은 선생님들이 학생 활동중심 수업을 하고 싶어하지만 진도와 평가의 압력으로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지 못한다. 배움중심 수업과 성적은 같이 갈 수 없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배움과 입시가 같이 갈 수 있고, 수업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배움이 있는 수업'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 (p80 참고)
"그리고 교사는 '과연 무엇이 학생들을 위한 수업인가'를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한다. 입시와 진학이 당장 필요한 것일지는 몰라도 학생들의 삶을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협동 학습을 통해 협력적 배움을 만들어 내고 학생들에게 자기 주도적인 사고를 길러 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서 협동 학습을 하는 이유와 이것이 왜 꼭 필요한지를 학생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막연한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서 개념 설명을 더 확실하고 정확히 하려고 노력했고, 협동 학습은 꼭 필요한 순간에만 활용하는 절충점을 찾았다. 나름대로 입시 수업과 균형을 맞추면서 협력적인 배움이 있는 수업을 실시한 것이다. 그 결과 나중에는 나뿐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만족해하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학기가 끝나고 수업 평가를 받을 때, 많은 학생들은 협동 학습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토의한 것이 너무 좋았고 입시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글을 적어 주었다." (p81)
신념 보기3 수업이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신념이 있는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가 학생들을 위한다고 지금껏 행해 온 이러한 수업의 장면 속에서, 많은 학생들은 좀처럼 수업에 몰입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배움으로부터 이탈하면서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곤 한다. 정보를 주입하고 외우고 풀기만 하는 수업, 수업 속에서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업, '삶'을 위한 교육과는 거리가 먼 수업은 학생들의 마음에 조금도 가 닿을 수 없다. 학교를 통해 삶을 가꾸어야 할 학생들이, '삶이 빠진' 수업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채 스스로 관계를 단절하고 삶과 분리되어 가는 것이다. '나'와 단절되고 '너'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아이들. '내가 누구인지, 타인이 누구인지' 이런 실존적 주제체 관심조차 갖지 못하고, 세상이 만들어 놓은 오직 한 길만을 강요받는 학교, 그리고 가정.
이 험난한 여정 속에서 학생들은 자기만의 성을 쌓아 놓고서 부모나 교사와 대화하지 않으려 한다.
북어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최승호의 시 「북어」를 함께 공부한다고 생각해보자. 학생들의 '점수만을 올려주는' 수업과 학생들의 '삶을 가꾸려는'수업은 그 빛깔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전자의 수업은 학생들에게 시를 한 번 읽게 하고 시 속에 있는 여러 상징적 의미를 잘 해석하는 데 에너지를 쏟을 것이다. 이때 학생들은 시에 나오는 '북어'처럼 기계적으로 밑줄 긋고 그 의미를 외우기에 바쁠 것이다.
하지만 이 시를 통해 학생들의 삶을 가꾸려는 교사라면, 이 시가 학생들에게 정서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수업을 구성할 것이다. '북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수집하고, 교사 사진이 '북어'처럼 살아온 이야기를 학생에게 말해 준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북어처럼 산 적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를 통해 학생 스스로 삶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한다. 이때 학생들은 '북어'와 같은 삶을 돌이키면서 '나'와 만나게 되고, 자신들을 '북어'로 만들게 하는 삶에 대해서 비판해 볼 수 있다. '세계'를 깊이 있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03 수업 속 관계를 살피며 성찰하기
관계보기1 수업 속에서 학생들을 일관된 철학으로 대하고 있는가?
"수업은 교과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과 인간이 만나고 사귀는 행위다. 그런데 이 속에서 관계 맺기가 잘못되면, 아무리 좋은 수업 내용과 방법이 있더라도 온전한 배움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배움이 있는 수업을 만들기 위해 구성워들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간단히 말하자면 '방임'적인 수업은 '경계'가 있는 수업으로 '통제'적인 수업은 '존중'이 있는 수업으로 변해야 한다. 즉, '경계'가 있지만 '존중'이 있는 수업을 우리는 지향해야 한다." (p105)
'3월에는 경계 세우기에 집중한다. '수업 종이 치기 전에 자리에 앉아야 한다.', '선생님이 들어 왔을 때 모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선생님과 친구가 말할 때는 들어야 한다.' 최소한의 경계를 만들기 위한 것들이다. 3월 동안은 끈기 있게 경계 세우기를 위해 위 규칙들이 왜 중요한지 설명하고 지적한다. (축구 경기도 규칙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유롭게 경기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리고 교사가 이를 강조하는 것도 수업이 가능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임을 안내한다.)
3월 한달 동안 꾹 참고 일관성 있게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규칙이 지켜지게 된다. 그리고 3월 이후부터 '경계'보다 더 '존중'하는 방향을 택하여,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어 주고 그들의 감정을 읽어주려고 노력한다.
이렇듯 '학생이 자율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것은 내가 경험적으로 신념화한 철학이다. (p107~108)
경계를 세우는 것도 교사의 이러한 교육 철학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이러한 철학이 없을 때 교사는 무작적 친절을 베풀어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다. 이 때 부터 학생과의 관계 문제는 꼬여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학생들을 훈계 할 때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내지 못하다. 단순히 교사의 힘을 과시하거나 감정적인 화로 경계를 드러내게 된다. 문제는 겉잡을 수 없게 꼬여간다. (p108)
"수업 내 관계에서 교사 스스로 자신만의 철학을 갖기 위해서는 '학생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내게 학생은 어떤 존재인지', '학생은 어떻게 하면 변할 수 있는지', '나는 학생을 어떻게 성장하게 하고 싶은지' 등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혼자의 힘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p109)
※ 교사 스스로 가르치는 일에 대한 지속적인 반성적 성찰이 있어야 한다. 교사로서의 자신을 대상화하여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수업에 있어 '학습자 중심'이라는 말은 무척 중요하게 들린다. 그러나 학습자 중심의 수업을 한다고 해서 학생들의 모든 행동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수업은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 공공의 공간이다. 모든 학생들이 각자의 욕망대로 움직이게 되면 기본질서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수업은 5분 안에 거의 판단된다. 학생들이 제 시간에 들어오지 않고 수업 준비도 잘 안 되어 있는 수업. 교사가 말을 해도 잘 듣지 않고 제각각 자기 할 말만 하는 아이들. 이런 경우, 중요한 것은 수업의 내용과 방법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수업의 경계'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다." (p114).
덕양 중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 간에 지켜야 할 규율들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p125)
관계보기4 경계를 세우기 위해 학생들을 지나치게 통제하지는 않았는가?
경계를 세운다는 것은 성질이 다른 두 영역(수업을 하기 싫어하는 학생들과 어떻게든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선생님)에 적절한 만남의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곧 수업에서의 경계는 교사와 학생의 적절한 관계의 지점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통제가 되어 버린다면, 교사가 일방적으로 학생을 교사의 지배 영역에 넣으려는 것이 된다.
경계세우기의 잘 못된 예)
“오 선생님은 이 지역세어 엄하기로 유명한 수학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허리를 구부리고 있어서는 안 되고, 눈동자는 항상 선생님을 향해 있어야 하며, 하품을 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선생님의 돌발 질문에 반드시 답을 해야 하고,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손바닥을 맞아야 했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수학 수업을 재미없어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강한 통제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수업을 하다 보니 선생님은 별것 아닌 일에 화를 내게 되고, 계속 강한 통제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학생 편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교사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서, 자신도 모르게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말까지 하게 된다고 했다.
경계 세우기가 과한 나머지 이렇게 통제의 수단으로 변질되면, 학생들은 공부를 억지로 하게 된다. 수업 속에서 학생의 개성을 전혀 발현되지 못하고, 교사의 강한 업압 아래 아이들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교사가 무서워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치고 있으되 딴 생각을 할 확률이 높다. 일명 ‘위장된 배움’을 선보이는 것이다. 대답도 교사가 정답이라고 생각할 말 이외에 스스로 생각을 담은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잘못 얘기했다가 혼이 날까 봐 두럽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이 공포의 시간이 되어 늘 긴장 속에서 수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업 시간에 강한 통제를 하는 이유는 교사가 원래부터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다. ‘학생들을 잘 잡는 교사가 유능한 교사이고, 이렇게 학생들을 잡아야 수업을 잘할 수 있다’는 통념이 우리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분히 교사의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정작 학생들은 통제적인 교사 앞에서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교사가 알려준 것만을 익히는 데 바쁠 뿐이다. 우리는 학생들이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의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 ‘배움’을 일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통제적인 수업은 이런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교사는 마음을 열고 대화하고 싶지만, 학생들이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막연한 적개심으로 교사 입맛에 맞는 대답을 형식적으로 할 뿐이다.”(김태현, 2012:133-134)
"통제적인 수업을 하다 보면 교사 스스로 그 힘에 도취될 때가 있다. 내 손짓과 몸짓에 따라 착착 움직이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내 자신이 무척 카리스마 있는 교사처럼 여겨져 자신도 모르게 일종의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사만의 착각일 뿐이다." (p139)
"수업에서 더 중요한 것은 교사의 '효율적인 통제'가 아니라 학생들의 '살아 있는 눈빛'이기 때문이다." (p139)
"통제하는 수업에서 학생들을 존중하는 수업으로 나아가려면, 교사는 일단 수업의 힘을 빼야 한다. 과도하게 높았던 음성을 조금 낮추고 굳어진 얼굴을 펴야 한다." (p139)
04 수업 속 대화를 살피며 성찰하기
대화보기1 수업 속에서 대화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있는가?
"대화하는 수업을 하기 위해서 교사는 어떤 행태로든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 (p149)
"가르침과 배움은 결코 함께 가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준비해서 열심히 가르친 수업이라 해도,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배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좋은 수업이 아닌 것이다." (p149~150)
※ '학생의 배움'을 강조하는 변화에 대해 일부에서는 '교사의 가르침'을 도외시한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리고 '배움'이 무엇인지 합의를 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두 개념의 의미를 밝혀야 한다. 이 두 개념은 독립적인 개념이 아닌 상호 연계되어 움직이는 동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가르침'이 중심이 될 것이며, 학생의 입장에서는 '배움'이 중심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교사의 '가르침'이 선행되어 학생이 '배움' 뒤 딸아 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교사 주도의 강의법의 논리 구조이다. 이 논리 구조는 주지주의적 교육관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경험주에서의 배움은 일방적이지 않다.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 속에서 결과적으로 '배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교육관을 갖고 배움에 임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수업에서 여백이 필요한 이유 (p152)
연결짓기와 끊기의 예 (p164~168)
※ 학생활동 중심의 다양한 수업 기법이 존재한다. 왜 이런 수업을 할까? 일차적인 이유는 학생들의 사고와 대화를 끌어 내기 위한 것임을 교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사또 마나부 교수는 '배움'을 '대화적 실천'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배움의 가능성은 '대화'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05 수업 속 내용을 살피며 성찰하기
내용보기1 교과서를 벗어나 수업을 재구성할 용기가 있는가? (p174~178)
내용보기2 수업 속에서 학생들이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가? (p179~)
[교육과정 재구성의 예]
"좋은 수업은 무의미한 교과 지식에 이름을 붙여 의미 있는 지식으로 바꿔 주는 수업이다.(중략) 교사는 일반인도 할 수 있는 요약 정리를 잘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교과 지식 속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학생들이 발견하게 하고, 이를 통해 학생들이 세계를 더 깊고 즐겁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해야 한다. (중략) 지금의 학생들은 자신이 수 많은 지식을 배워야 하는 이유를 상실해 버렸다. 이전의 세대들은 생존하기 위해, 가문의 영광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결국 학생들 스스로 지식 속에서 의미를 찾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교과 지식이 학생들에게 '꽃'(김춘의 '꽃')이 될 수 있는 수업을 위해, 교사는 교과 수업 속에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수업 시간에 '이야기'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흥미를 끌기 위한 농담이나 잡담을 늘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교과 지식을 전달하는 삶의 이야기를 수업 속에서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p180~181)
내용보기5 수업 속에서 삶을 성찰하고 있는가? (p204)
"남미의 빈민가 교육을 위해 힘썼던 파울로 프레이리는 참된 교육을 위해서라면 교사들은 '은행 저금식 교육'을 멈추고 학생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성찰하게 하는 '문제 해결식 교육'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프레이리의 이 멋진 말은 한국의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한국의 학생들은 '입시'라는 커다란 장벽으로 인해, 수업 속에서 삶에 대한 문제 해결력은 기르지 못하고 입시에 대한 적응력만을 기르고 있다." (p204~205)
"삶을 성찰한다는 것은 도덕 수업에만 해당하는 영역이 아니다. 모든 과목의 수업을 통해 우리는 삶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를테면 국어 시간에는 언어의 왜곡 문제를, 사회 시간에는 정의의 부재함을, 과학 시간에는 환경 파괴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수업 속에서 다양학 교과를 통해 '삶'에 대해 고민하고 토의함으로써, 교사는 학생들에게 '인간으로서 삶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행동인'를 알려 주어야 한다. 이런 성찰의 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205~206)
"다양한 세상의 이야기 가운데 학생들이 공감하는 문제를 교사가 미리 찾아서 제시하고 그것을 교과 수업과 연결시킨다면 학생들은 저절로 수업 시간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교사가 먼저 삶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만을 그대로 전달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교육자로서 먼저 이 세상을 성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지금 학생들에게 어떤 고민이 있고, 이 시대에 어떤 문제가 오고 가고 있는지를 늘 살펴야 한다. 대중 매체를 통해 나타나는 여러 시대 문제들을 재빨리 읽고 그것을 수업 속에 녹여 낼 수 있어야 한다.
또 삶의 성찰은 단순히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표현과 함께 가야 한다. 표현해내지 않으면 삶에 대한 고민만 하다가 오히려 괴로워할 수 있다. 교과 지식과 관련된 삶의 문제를 제시하고 학생들이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글쓰기, 그림, 사진 등 여러 형태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교과 지식이 자신의 삶 속에 내면화되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모든 차시에 이러한 성찰의 시간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한 단원을 마칠 때에는 의미 있는 주제, 시사 사건을 하나 선정해서, 학생들과 같이 토의하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을통해 학생든 비로소 세상과 자아에 대한 눈을 뜨게 되고, 더 많은 공부를 하려고 할 것이다.
신영복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거리이고, 도 다른 하나는 가슴에서 발과 손으로 가는 거리'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은 머리에서만 멈춰 서 있다. 성찰의 수업을 통해 교과 지식이 가슴으로, 발로, 손으로 전해질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 시작은 교사가 수업속에서 성찰의 지점을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에 달려 있다." (p209~210)
내용 보기6 수업 속에 위계가 있는가?
"좋은 수업을 위해서는 학생들의 실제적인 능력과 잠재적인 능력을 판단해 수업을 디자인해야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그저 개념 지식을 순차적으로 설명하면서 수업을 할 뿐이다. 학생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개념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것이다." (p211)